- 인사청문회 때 병역면제, 제과점 운영, 아들 재산형성과정 질문에 마음 아파
- 血稅 낭비 파악 위해 부처별 리스트 만들 것
- 부작위처분 감사·국민감사청구제 활성화할 것
- 민간기업 같은 경영형태 갖추는 데 공기업 감사 초점 맞출 것
- 공적자금 관련해 문제 있으면 나도 기꺼이 감사받겠다
- DJ정부가 무엇을 실패했는지 기억나는 게 없다
감사원장 접견실에는 박문수의 마패를 비롯, 암행어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조선시대 왕의 특명으로 지방관의 잘잘못을 가리고 민정을 살피던 암행어사제에서 감사제도의 연원을 찾는 모양이다.
전윤철(田允喆·64) 신임 감사원장과 인터뷰 일정을 놓고 여러 차례 전화협상을 한 끝에 취임식날인 11월10일 오후 6시로 잡았다. 그는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시간에 인터뷰를 하기보다는 정신이 맑은 이른 아침에 만나 이야기하자고 고집했으나 ‘신동아’의 마감일자가 임박해 인터뷰를 마냥 미룰 수 없었다.
전윤철 감사원장은 이날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취임식을 가졌다. 인터뷰 예정시각보다 20분 가량 일찍 도착했더니, 전원장은 집무실에서 업무보고를 받고 있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시달리고 인준안이 통과된 뒤 쉬지 않고 업무보고를 받은 탓인지 눈자위가 피곤해 보였다.
“9개월 가량 쉴 때는 맥이 풀린 기분이었는데 바빠지니까 조금 힘드네요.”
감사원장 자리 바로 뒷면에는 ‘청권입국(淸權立國)’이란 글씨가 걸려 있었다. ‘권력을 맑게 하여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인사청문회 필요하나 사생활은 보호돼야
전원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내고 물러난 뒤 9개월 동안 외국여행과 대학강의로 소일했다. 윤성식 고려대 교수가 국회의 감사원장 인준투표를 통과하지 못하는 바람에 전원장은 ‘공직 마감 후 인생’에서 행정부 서열 3위의 관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전원장은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투표참석 의원 222명 가운데 176명의 찬성표를 얻었다.
-감사원장 후보를 두 번씩이나 부결시키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소야대 국회에서 찬성표가 꽤 나온 편입니다. 득표운동을 열심히 하셨나 본데요.
“내가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을 많이 압니다. 기획예산처 장관 하면서 추경까지 포함해 5번 예산을 편성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국회에서 기획예산처 장관의 질의답변 시간이 가장 깁니다.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 외에는 거의 모든 국회의원을 압니다. 그분들이 나의 개성까지 파악하고 있어요. 국회에서 무난히 통과시켜줘 마음이 흡족합니다.”
-지역구 예산 문제로 기획예산처 장관에게 신세진 의원들이 많았겠지요. 그 덕을 좀 본 건가요.
“국회 재적의원 272명의 지역구 예산을 전부 돌봐드릴 수는 없지요. 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국무총리 감사원장 등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여러 차례 지켜보면서 거의 수도자 수준의 덕목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본인은 물론 처자식의 재산과 사생활이 샅샅이 공개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내가 일생 여러 차례 시험을 치렀지만 청문회는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의 청문회 역사가 일천한 편입니다. 능력 검증은 철저히 해야겠지만 사생활 보호 측면은 고려해줬으면 좋겠다고 국회에서 얘기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개인의 신상 문제는 비공개로 합니다. 우리의 인사청문회도 제도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가장 아픈 질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병역을 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 나라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체검사를 네 번 받았습니다. 병역을 면제받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한 번에 정리됐겠지요. 법제처에서 공직생활 시작하면서 최종 면제 처분을 받았습니다. 고시공부하다 폐결핵에 걸려 그렇게 된 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괴로웠습니다.
두 번째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내 제과점 운영과 관련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수산청장을 그만두고 나서 집사람이 계약한 것인데 공정거래위원장에 부임하면서 재산등록을 했어요. 의원들이 현대그룹에 압력을 넣어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고 물어 괴로웠습니다. 정상적으로 전세금 내고 계약했거든요.”
조금 실례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토를 달아야겠다. 계약금을 낸다고 해서 아무나 현대백화점 내 제과점을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원장은 1994년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을 하다 공정거래위 부위원장을 잠깐 거쳐 수산청장으로 발령받았다. 본래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을 마치면 경제부처의 차관으로 승진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전원장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수산청장 발령을 받고 공직마감 준비를 하라는 신호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취임 후 인사차 수산청 기자실에 들렀을 때 기자들이 “수산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는 “내가 낚시를 좋아하고 수영을 잘 해서 그런 모양입니다”라고 받았다. 뼈 있는 답변이었다.
1996년 그가 수산청장을 그만두자 부인이 현대백화점 내 제과점을 계약했다. 공직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생계 방편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발탁됐다. 첫 부활이자 후반기 관운의 변곡점(變曲點)이었다.
“공정거래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재산등록을 했는데 제과점을 계속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누라에게 계약해지하자고 했더니 인테리어 하느라고 몇 억원을 들였다며 투자자금이나 회수한 뒤에 그만두겠다고 하더군요.
세 번째 아픈 질문은 아들의 재산형성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증여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져 정말 곤혹스러웠습니다.”
삼성전자 과장인 아들(34)의 방배동 아파트(40평형)는 8억원을 호가한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4억원을 대출받았고 아들의 8년치 연봉이 성과급을 빼고도 2억9000만원”이라며 재산증여 의혹을 부인했다.
-며느리가 ‘한라산’소주(제주도) 대표 딸이라서 처가의 도움을 받았겠다는 생각도 들던데요.
“내가 대통령비서실장 할 때 아들 결혼날짜가 잡혔습니다. 기관장을 여러 군데에서 하다 보니 내 비서관을 지낸 사람이 감사원 빼고도 24명이에요. 비서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일부 신문에 보도까지 되는 바람에 결혼식 장소를 네 번이나 옮겼습니다. 나는 축의금을 안 받았지만 우리 아이는 직장에서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MBA 과정을 밟으려 미국유학을 갔습니다. 처가에서 딸에게 가구 사라고 지참금을 준 것도 있나 봐요. 난 잘 모르는데….”
잦은 부처이동과 지역차별로 한직 전전
1966년 행정고시 합격 후 전원장의 관료 경력을 들여다보면 초년운이 박복(薄福)했던 데 비해 만년(晩年)운은 대통했다. 그는 고시에 합격한 뒤 과장으로 승진하는 데 8년9개월이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4∼5년 만에 승진할 때였다. 한두 해도 아니고 거의 두 배의 기간을 채우고 승진을 한 것이다. 한번은 12명의 승진대상자 중 서열 4위였는데 여기저기서 인사청탁이 들어와 순번이 40번으로 밀렸다. 국장이 될 때까지 화려한 보직을 맡은 적도 없다. 왜 이렇게 오래 물을 먹고 한직을 전전했을까.
“고시에 합격하고 교통부 부산해운국 사무관으로 발령낸다고 해서 안 가겠다고 버텼어요. 총무처 직원이 명령을 거부하면 합격을 취소시키겠다고 해서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합격을 취소시키느냐’고 한판 붙었어요. 결국 법제처 서무계장으로 발령나더군요. 국장이 앉는 의자가 부서지면 고쳐주고 운전사들이 기름 달라고 아우성치면 해결하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법제처장이 서일교씨입니다. 이 분이 서울대 법대에서 소송법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서무계장 맡은 지 15일만에 처장실에 들어가 ‘이런 일 하려고 고등고시 합격한 거 아닙니다’ 했더니 서처장이 책상을 쾅 치며 ‘여기가 서울법대 교수실인 줄 아느냐’고 크게 꾸짖더군요. 그러고 나서 어여삐 여겼는지 1주일 만에 법제관실로 발령을 내줘 열심히 법안 심의를 했습니다.
내가 법안심의 잘한다고 소문이 나 농림부의 농촌문제 법안 만드는 것을 거들어주게 됐습니다. 농림부 농정차관보 김용환씨(한나라당 의원)가 국회 농림위원회에서 의원들이 질의하면 내게 답변을 시키더군요. 국회가 태평로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이 무렵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이 나를 잘 봤던지 경제기획원으로 불러 공정거래법을 만들게 됐습니다. 부처를 옮긴 것도 승진이 늦어진 이유죠. 두 번째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는 여기서 잠시 승진이 늦어진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운을 뗐다.
“지역차별도 받았고…. 이런 것 등등이 이유가 돼 8년9개월이 걸린 거죠. 과장을 국장으로 승진시킬 때는 1, 2순위를 정해 총무처(현 행정자치부)에 보내게 돼 있습니다. 2순위가 다음번에는 자동적으로 1순위가 돼서 올라가는 거죠. 그런데 내가 자꾸만 2순위로 밀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사업을 하면 이런 모욕은 당하지 않을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그만둘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전남 해남 출생으로 초등학교 때 목포로 전학을 가 유달초등학교와 목포2중학교를 나왔다. 한화갑 의원(민주당)과 목포2중 동창이다.
-한화갑 의원과는 자주 만납니까.
“친구니까 자주 만나지요. 그런데 왜 목포중이 아니라 목포2중에 들어갔느냐고 안 물어요?”
-성적이 안 좋았으니 그랬겠지요.
전윤철 신임 감사원장과 인터뷰하고 있는 황호택 논설위원.
한의원이 대대장을 한 건 몸집이 컸기 때문이고 자신은 그보다 위인 학생회장을 했다고 하니 한의원이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
-감사원장 후보로 임명되기 전에 민주당의 영입대상에 오르내리더군요. 민주당 누구로부터 교섭을 받았습니까. 전원장은 열린우리당 코드라기보다 민주당 코드라고 생각되는데….
“코드 문제가 아닙니다. 올 2월말 국민의 정부 임기 만료와 함께 물러나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대학강의를 하는 동안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람들을 가끔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양쪽에서 모두 제의했습니다. 저도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의 장에서 소신을 펴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국정운영 경험, 경제마인드 높이 산 듯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등의 재정 및 행정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영마인드를 지닌 사람이 감사원장이 돼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예산의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 감사의 본령 아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예산전문가가 감사원장이 된 데 대해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성과를 내는 기업은 살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죽지 않습니까. 정부를 운영하는 데도 경제적 효과와 효율을 고려해야 합니다. 행정수요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인선배경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국정운영 경험이 있고 경제마인드를 가졌다는 게 발탁의 주된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참여정부는 정부혁신위원회(위원장 김병준)와 감사원을 통해 정부를 개혁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윤성식 고려대 교수가 감사원은 사후적발 처벌형 감사에서 정책감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철학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심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윤교수가 낙마하면서 노대통령의 구상이 미끄러졌다.
그후 감사원장 후보로 물망에 오른 인사로는 전원장 외에도 홍성우 조준희 이용훈 변호사 등 법조인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분당에 따른 호남 민심 잡기 경쟁이 전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임명장을 받을 때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원 개혁에 관한 특별한 당부의 말이 있었습니까.
“감사원 기능은 헌법과 감사원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국가의 세입세출 결산을 감사하고 행정기관과 공무원의 직무를 감찰해 행정운영을 개선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행정의 일관성 효율성도 포함됩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집단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고 행정조직도 배후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 정부에서도 그걸 많이 느꼈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정의 어젠더를 설정해 정책에 반영해야 합니다. 부처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에 휩쓸리면 국정운용이 순조롭지 않게 됩니다. 정부정책 입안에서부터 부처간 갈등을 해소하고 효과적으로 정책이 집행되도록 하는 데 이르기까지 감사원의 역할이 큽니다.
국민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으면서 위기관리 차원에서 하드웨어를 구축했습니다. 그때 추진했던 개혁과제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을 때도 개혁을 부르짖었고 기획예산처 장관 때는 공공부문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개혁은 고독한 작업이고 심한 반발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을 이루었다고 해도 자만에 빠지면 과거 사례가 되풀이됩니다. 개혁을 꾸준히 진행해야 합니다.
국민의 정부에서 공공부문 개혁의 주무부처인 기획예산처 장관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감사원의 틀 안에서 정부 개혁을 체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독려하겠습니다. 혈세 낭비에 관해 부처별 리스트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취임사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감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감사원은 지금까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면허·등록·허가처분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감사를 주로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형편을 보면 국민이 수많은 청원을 정부 각 부처에 냅니다. 그런데 부작위(不作爲) 처분에 대해서는 감사한 적이 없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부작위 처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영업활동에 제약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작위 처분에 대해서 감사원이 주기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감사원에 호소하는 국민감사청구제도도 활성화하려고 합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감사라는 말 속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국회법이 올 2월 개정돼 국회가 감사원에 감사청구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세 야당의 뜻이 맞으면 감사청구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KBS,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2개 기관과 남북협력사업, 다목적 헬기사업, 인천 선갑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사업에 대해 특별감사를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국회에서 청구한 감사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감사에 성역은 없습니다. 국회에서 감사청구를 할 때는 아마도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쟁의 일환으로 감사청구를 하면 안 되겠지요. 어떤 목적으로 감사청구를 하든 감사 방향은 국민의 뜻에 맞출 겁니다.”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 공공부문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감사원에서는 공기업 감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나갈 생각입니까.
“참여정부에서 공기업 개혁과 관련해 추가적으로 개혁방안을 내놓은 건 없습니다. 국민의정부 때 내놓은 개혁방향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민영화 일정이 잡혀 있는 공기업에 대해서는 조속히 민영화가 이뤄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감사하겠습니다. 공기업이 민간기업에 비해 개혁 속도가 늦기 때문에 민간기업과 같은 경영형태를 갖추도록 하는 데 감사의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어쨌거나 현 정부가 정권을 잡는 데 노동조합의 지지가 일정 부분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지요. 그래서 공기업 민영화가 국민의 정부 때보다 후퇴하리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정부 안에서 얘기를 해봐야겠죠. 공기업 민영화에 관해서는 두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헐값 매각으로 인한 국고 유출이고, 둘째는 노조의 반발입니다. 국제입찰에 부쳐 해외매각을 할 경우 기술, 외국자본, 선진 경영기법의 도입과 같은 장점이 많거든요. 선진국들 그리고 중국에서는 공기업 민영화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만 늦추면 국민경제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근로자들은 공기업 민영화로 인해 해고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끼겠지만 공기업의 비능률을 제거하면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목포 영암의 한라조선이 경영부실로 2000명을 해고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이 위탁경영을 해 정상화되면서 해고했던 인력을 모두 복직시키고 나아가 사람을 더 뽑고 있습니다. 공기업이 민영화를 통해 효율이 높아지고 사업영역이 확장되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장의 해고불안 때문에 공기업 민영화를 늦추면 거기서 생기는 비효율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합니다.”
“검찰·국정원도 제대로 감사할 것”
-감사를 하다 보면 DJ정부 때 관여했던 업무를 감사하는 자기감사의 모순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경제부총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법언이 있습니다. 감사원이 구체적 처분을 감사할 때 관련된 사람을 배제하는 제척사유가 법규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부처의 장관으로 면허를 해줬는데 내가 감사원장으로 온 다음에 감사대상이 된 경우에는 제척사유에 해당돼 감사위원회에 들어가 의견발표를 하면 안 되죠. 내가 역임한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예산처 장관, 경제부총리는 구체적 처분을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척사유에 해당하면 수용할 것이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겠습니다. 부하직원과 관련된 사안이 생겨도 가차없이 처분을 받겠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도 나왔지만 내가 부총리로 있을 때 집행된 공적자금이 156조원입니다. 그 돈으로 666조원 이상의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가져왔어요. GDP 성장으로 인해 세수가 135조원 증대됐습니다. 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않았으면 한국경제가 지난 5년 동안 매년 마이너스 2% 성장률을 기록했을 것이라 추산했습니다. 이런 총론적 평가를 안 해줘도 좋습니다. 그것과 관련해 내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기꺼이 감사당할 것이고 책임질 용의가 있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 성역 없는 감사를 약속했습니다. 감사원이 검찰 국정원 등 소위 권력기관에 대한 감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청문회에서 약속했고 국립묘지에 가서 호국영령들에게도 성역 없는 감사를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국정원이든 검찰이든 회계에 관한 한 감사원 감사를 받도록 헌법에 명문화돼 있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국정원이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극비사항임을 입증하면 감사할 수 없다고 법에 규정돼 있어요. 그것이 아닌 한 감사할 겁니다.
검찰의 경우에는 기소독점주의와 기소편의주의라는 검찰 고유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떤 사항도 감사할 것입니다.”
전원장은 여기까지 말하고 “저녁이 되니까 힘이 빠진다”고 했다. 그러나 국회의 질의답변에 익숙하기 때문인지 요점을 간추려 요령 있게 답변해 인터뷰 진행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기획예산처 장관에 임명된 2000년 8월 모 신문에 난 프로필 기사를 그에게 읽어주었다.
‘업무추진력이 뛰어나며 대쪽 같은 성격으로 별명은 ‘전핏대’. 원칙을 유달리 강조하지만 조직장악능력과 친화력도 갖췄다는 평. 1980년대 초 공정거래법 입안과정부터 참여해 우리나라 공정거래제도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본인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국장을 포함해 12년 동안 예산업무를 맡아 기획예산처가 친정이나 다름없다고 강조.’
신문의 프로필은 주례사 비슷하게 칭찬 일색이지만 ‘전핏대’란 별명이 눈길을 끈다.
-별명이 왜 ‘전핏대’입니까.
배석했던 오정희 공보관과 하복래 비서실장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세하게 얘기해주시죠.
“감사원에 유신사무관이 많은데 이 얘기를 어떻게 하나.”
유신사무관이란 10월 유신 이후 정부 각 부처에 육군사관학교 출신 대위를 예편시켜 공무원으로 들여보낸 제도. 감사원에도 과장급 이상 유신사무관이 13명이나 된다.
여기서 공보관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답변을 말렸다.
-전원장이 유신사무관에 반대하며 핏대를 세웠다는 것은 묵은 신문철을 뒤져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부총리 주재로 간부회의를 할 때 공무원 부정부패를 단속할 24시간 감시체제를 만들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서 자고 나와 직원들과 하루종일 부대끼는데 어떻게 24시간 행동을 같이하며 감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 못하겠다고 핏대를 올렸지요.
그 다음에 육사 정원을 줄여야 한다고 얘기할 때도 핏대가 섰어요. 많이 뽑아놓고는 유신사무관으로 내보내는 건 적재적소 인력배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요. 맥빠진 일을 한 직원을 혼내줄 때도 핏대가 서요. 그래서 ‘핏대’ 소리를 들었는데 ‘동아일보’ 천광암 논설위원이 출입기자로 있을 때 한문으로 번역해 혈죽(血竹)이라 하더군요. 피 혈, 대 죽. 하하하….”
인터뷰에 자리를 함께한 천위원은 전원장의 목포 유달초등학교 후배다.
-감사원장은 행정부 서열로 따지면 3위죠. 대통령과 국무총리 다음 자리가 감사원장입니다. 행정부의 어른이 돼서도 핏대를 올리겠습니까.
“그게 다 옛날 소장파 시절 얘기인데….”(웃음)
“골프하겠다”, DJ에게 네 번 확인
-공자님 말씀만 적어놓으면 독자들이 지루해 책장을 덮습니다. 재밌는 얘기도 물어보겠습니다. 골프를 좋아한다면서요.
“좋아하는데….”
공보관이 또 이 대목에서 “감사원장이 골프 좋아한다면 국민과 공무원들에게 잘못 비쳐질 수 있다”며 답변을 제지했다. 공보관의 브레이크 페달을 이대로 놓아두면 귀한 시간에 모범답안이나 듣는 인터뷰가 될 판이다. 필자는 공보관이 배석한 인터뷰를 여러 번 진행해봤지만 모시는 분의 답변을 제지하는 공보관은 처음이었다. 물론 설화(舌禍)를 방지하려는 충정이겠지만. 전원장이 골프 좋아한다는 것도 다 신문에 난 이야기다.
필자는 “이러면 인터뷰 못합니다. 대통령비서실장 경제부총리 장관을 지낸 분이 어련히 알아서 답변할 텐데 자꾸 끼어들면 인터뷰를 망칩니다”고 말했다. 공보관에게는 다소 항의조로 들렸을 수도 있다. 이후로는 간섭하지 않았다. 필자는 나중에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나 쉬는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은 골프를 쳤겠군요.
“두 번씩은 쳤죠. 공무원들이 대개 국장 승진하고 나서 골프 치지 않습니까. 나는 국장 승진 후에도 3년 동안 골프를 안 쳤어요. 대신 등산을 했습니다. 일요일마다 직원들과 함께 광덕산 백운산 인수봉 청계산 덕망봉 명지산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등산이 힘들어져 골프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핸디캡과 드라이버 길이는 얼마나 됩니까.
“핸디캡은 전성기에 싱글을 기록했고 드라이버는 한 250야드 나갑니다.”
전원장 연령대로는 대단한 장타다.
-대통령비서실장 할 때도 DJ를 졸라 골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김대통령은 골프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모시는 비서실장들도 골프를 안 했지요. 박지원 실장은 원래 골프를 안 하구요. 김대통령에게 네 차례 말씀 드리고 골프를 쳤습니다. 처음에 ‘운동 좀 하겠습니다’ 했더니 김대통령이 ‘운동 해야지’ 그러더군요. 대통령이 운동이 골프를 의미하는 걸 아는지 확신이 안 서 두 번째로 ‘운동 좀 하겠습니다. 골프 말입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간단하게 ‘해야지’라고 하더군요. 세 번째로 ‘골프 좀 하겠습니다’ 했더니 ‘하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더군요. 네 번째로 ‘골프 나가겠습니다’ 했더니 ‘이 사람아, 하라고 했잖아’라며 조금 역정을 냈습니다.”(웃음)
-그게 네 번이나 확인할 일이었습니까.
“대통령이 확실하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변명 같지만 일요일 오전에 골프 하고 오후 2시 반에는 관저로 들어가 전 주에 하려다가 못한 일과 다음주에 할 일을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가량 농도 짙게 보고드렸습니다.”
-골프는 자기 돈 내고 하고 업무시간에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래도 감사원장이 골프 좋아한다고 하면 공무원들이 너도나도 골프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니 알아서 정리해줘요.”
당시 김대통령도 전윤철 비서실장이 주말에는 골프를 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주말 오후와 일요일 오전에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골프 안 하는 박지원 특보가 대기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골프 나간 전실장을 부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실제로 전윤철 비서실장 77일은 박지원 특보가 비서실장이 되기 위한 과도기적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지원 전 실장 면회는 다녀왔습니까.
“내가 비서실장 할 때 특보였고 후임 비서실장인데 당연히 가야죠.”
그는 “못 가게 말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면회를 어떻게 안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DJ 전화 받고 쇠줄에 걸려 넘어지다
-대통령비서실장 이하 11명 수석비서관과 특보 중에 5명이 광주전남, 1명이 전북이더군요. 대통령비서실 인사만 놓고 보면 호남정권도 아니고 전남정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청와대가 왜 그렇게 됐느냐 하는 것은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고…. 대통령비서실장도 내가 예측 못했던 자리입니다. 비서실장이 돼서 들어가 보니 그 팀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선 탕평인사도 해야겠지만 청와대에서는 가깝게 아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2002년 2월 발전노조 파업이 일어났지만 대체인력을 투입해 전력생산이 중단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노조가 유례 없이 무릎을 꿇고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심초사하는 스타일이라지요. 김대통령은 노조와 적당히 타협하길 바랐는데 전실장이 공기업 민영화에 후퇴하면 안 된다며 밀어붙였다고 들었습니다.
“비서실장에 취임하자마자 발전노조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하며 공기업 구조조정을 했기 때문에 원칙대로 대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두 달 만에 해결됐어요.
이것은 재미있는 얘기인데, 국무회의에서 몇 차례 장관들의 발언을 비판했더니 대통령이 비서실장은 절대 국무회의에서 발언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하루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도대체 명동성당은 신성불가침 지역입니까. 발전노조 파업을 주동하는 인물 열댓 명이 명동성당에서 휴대전화로 파업을 지도했습니다.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문화관광부 장관한테 천주교 대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관련부처인 산업자원부 노동부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국무회의에서 40분 가량 발언했습니다.
그날 저녁 비서실장 공관에서 가까운 삼청공원에서 아내와 둘이 산책을 했습니다. 비서실장 하자면 스트레스가 얼마나 쌓이겠습니까. 산책으로 푸는 거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산책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대통령이 ‘빨리 해결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삼청공원 입구에 차량이 못 들어오게 막는 쇠줄이 있습니다. 대통령 전화를 받고 나서 정신이 멍해 우산 받고 아내와 걷다가 쇠줄을 못 보고 그만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때 안경 깨지고 인중이 찢어져 병원에서 꿰맸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대통령 모시러 갔더니 ‘자네 술 먹고 넘어졌나’ 하고 물으시더군요. 이런 것까지는 안 썼으면 좋겠는데…. 한참 만에 상처가 나았습니다.”
-파업 전에 한국전력에서 5000명이 일했는데 공병대를 투입해 2300명이 시설을 돌려 전력생산에 차질이 없었습니다. 공기업에 그만한 거품이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거품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파업은 진행됐지만 전기는 꺼지지 않았거든요.”
“참여정부 정책 일관성 없다” 비판도
그는 DJ의 밀명을 받고 고건 시장을 세 차례 찾아가 서울시장 선거에 재출마해달라는 부탁을 했던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고시장의 의지가 워낙 강해 실패했다고 했다. 고시장은 내심을 공표한 적이 있지만 서울시장보다는 대권 쪽에 관심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아마 DJ가 서울시장 재출마 대신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출마를 권유했더라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DJ정부의 경제정책 중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 한 가지씩만 예로 들어보지요.
“DJ정부는 IMF 외환위기와 함께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 초기에는 IMF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최단기간 내에 IMF사태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건 무디스,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피치 같은 평가기관이 인정하고 있지요. 아마 세계 경제사에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1월3일 국회 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선서하고 있는 당시 전윤철 감사원장 후보.
DJ정부가 실패한 게 무엇인지 지금으로서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초기에 구조개혁과 관련해 성과가 안 나와 몇 번 왔다갔다한 적은 있어요.”
-DJ정부에서 빅딜이 실패했다고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구조개혁을 위해 금융구조조정, 부채비율 축소, 상호지급보증 폐지 등 여러 정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빅딜이 들어 있었어요. 재경부 국감에서 빅딜에 대해 묻길래 적절하지 못한 정책이었다고 시인한 적이 있습니다. 실은 내가 빅딜에 반대했습니다. 구조조정 수단이긴 하지만 빅딜은 국가 챔피언을 만든다는 것이거든요. 전자부문에서 하나, 기계부문에서 하나, 이런 식으로 하자는 정책이죠. 그러나 경쟁 없는 사회는 탄력을 잃고 탄력 없는 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두 세 개 기업이 경쟁해야지 어떻게 네이션 챔피언을 만드느냐고 두 차례 반대발언을 한 적이 있어요.”
-지난 9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2월28일에 그만두고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아들이 미국에서 MBA코스를 밟고 있어 미국에도 갔습니다. 돌아와서 목포 초당대학에 출강하다 9월부터 제주대에 나갔습니다.”
-제주대에서 강의하면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까.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 교체기에는 대개 사회 각 부문의 목소리가 커지잖아요. 사스, 물류파업, 북핵문제를 둘러싼 이념갈등 등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서 참여정부가 탄생한 배경과 관련된 혼란이 있었습니다. 최근 많은 부분이 복원됐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시책에 일부 혼란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말한 것이죠.”
“폐쇄적 문화가 감사원에 깔려 있다”
-사는 데가 어디죠.
“서초구 방배동입니다.”
-참여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벼르는데요. 어떻게 전망합니까.
“부동산값은 잡아야 합니다. 이는 서민 대중의 박탈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잡아야지요. 우리에겐 부동산이 소유권 개념이지만 외국에서는 이용권 개념입니다. 유독 한국·일본만 소유개념이 강합니다. 부분적으로 문제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엄격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공급능력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토가 횡축(橫軸)은 짧고 종축(縱軸)은 길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울이 중간에 있다 보니 수도권 비대화 현상이 과거 개발연대부터 불가피하게 빚어졌습니다. 여기에 교육 문화 정치의 모든 중심이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IT산업 같은 경우는 수도권이 아니면 힘듭니다. 공급능력을 확충시키고 지방균형발전을 이루어 수도권 인구가 자연스럽게 분산되지 않는 한 수도권의 부동산 투기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방의 발전을 유도하고 수도권의 주택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공급과 수요 측면의 정책을 함께 구사해야 합니다.”
-감사원의 수장으로서 인사와 관련해 한마디 해주시지요. 어떤 원칙에 따라 인사를 할 건지….
“감사원 인사에 대해서는 오늘 부임한 사람이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직무감찰 위주의 감사에서 정책감사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감사원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직원들이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가 감사원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원의 조직문화를 좀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바꾸려 합니다. 감사원 직원들의 반성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런 방향에 맞춰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행정이 복잡다기화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도 영입해야겠지요. 직원들의 이야기도 듣고 나도 직원들에게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다는 주문을 하려고 합니다. 감사원 직원들은 우수하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할 것으로 봅니다.”
1963년 심계원이라는 이름으로 감사원이 생긴 이래 감사원장에는 군 출신과 법조인들이 임명됐다. 초대 이원엽 심계원장은 육군 대령을 하다 원장이 됐다. 그 뒤로 한신 이주일 이석제 황영시씨가 군 출신이다. 정희택 김영준 이회창 이시윤 한승헌 이종남씨는 법조인이고 이한기씨는 법대 교수 출신이다. 7대 신두영씨가 유일한 관료 출신이다. 경제관료 출신으로는 전원장이 처음이다. 전원장은 “군인 출신 감사원장의 유산인지 감사원 직원들의 태도가 약간 경직돼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고등학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군밤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목포2중을 다니다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했어요. 목포고등학교에 가서 다시 시험을 봤는데 수석합격했습니다. 목포고 교장선생님이 우리 집까지 와서 장학금을 주겠으니 목포고로 진학하라고 하는 걸 어머니가 막았습니다. 서울 올라가 고생하라고 하셔서 서울고에 진학했지요.
학비가 모자라 10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전후까지 명동에서 군밤을 팔았습니다. 석 달 하면 그것도 꽤 돈이 됩니다. 군밤 팔러가면서 서울고 교복 입고 모자 쓰고 성경책 끼고 명동성당 언덕길을 올라가다 어떤 신사에게 가짜 학생으로 몰렸어요. 안 믿더라구요. 그래서 명찰을 뜯어주며 학교에 확인해보라고 했지요. 그 인연으로 그 신사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대학 들어갈 때까지 있었습니다.”
어려운 청소년들한테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다.
-국회에서 며느리 성적표를 내놓으라고 했죠. 가족끼리 의논을 했을 법한데요.
“‘동아일보’ 사설 보고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동아일보’ 11월4일자 ‘며느리 성적이 왜 필요한가’라는 사설 이야기다. 이 사설은 ‘생활기록부에는 성적뿐만 아니라 성격 질병 등 공개하고 싶지 않은 개인정보가 수십 가지 담겨 있다’면서 국회가 감사원장의 자질 검증과 아무 관련 없는 며느리의 성적표와 생활기록부까지 요구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비판했다.
“아내의 학창시절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해서 냈습니다. 딸은 성적표가 화려합니다. 인문계 전체수석을 했으니까요. 지금 프랑스에 유학중입니다. 내가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한다니까 아내가 거부반응을 보였어요. 아마 성적이 별로 안 좋았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나하고 아내는 냈지요. 딸하고 며느리하고 아들 것은 안 냈습니다.”
-며느리 성적은 어땠습니까.
“안 봤어요.”(웃음)
-오랜 공직생활 동안 언론인들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DJ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도 지켜봤을 테고…. 그게 비서실장 때입니까.
“기획예산처 장관 할 때입니다.”
-언론과 정부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을 하기 전에 나와 ‘동아일보’의 인연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김지미 최무룡 간통사건이 벌어졌어요. 석간 ‘동아일보’가 그 사건을 사회면 톱기사로 다루었습니다. 민족지를 자부하는 신문이 흥밋거리 기사를 톱으로 썼길래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독자투고란에 글을 보냈더니 실어주더군요.
두 번째는 ‘동아일보’ 사설을 열심히 읽어 행정고시 공부하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동아일보’ 사설에 명문이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사무관 할 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났습니다. 동아방송의 호소를 듣고 사무관 봉급의 50%를 냈습니다.”
-공무원 신분이라 그게 알려졌으면 직위가 위험했을 텐데요.
“신문은 국민과 호흡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 시절 암흑기에 정치기사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으니까 경제 쪽이 신문에서 엄청나게 맞았어요. 잘한 것도 비판하고 잘못한 것은 더욱 비판하고…. 우리 신문이 어떤 의미에서는 칭찬에 인색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언론을 보면 국익과 관련한 사안이 발생하면 전부 정부 편을 들어요. 정부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확실히 비판해야겠지요. 그런데 잘한 것이 있을 때는 칭찬도 좀 해주라 이겁니다. 정부도 칭찬받으면 더 잘할 것 아닙니까.
IMF 외환위기 이후 1999년 경제성장률이 10.5%입니다. 그 성과에 대해 한 마디 칭찬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모 신문사 논설실장을 만나 도대체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다음날 칼럼으로 썼더군요. 정부와 언론이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돼서는 안 됩니다. 상호보완적인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 말 틀렸으면 널리 이해해주시고….”
전원장은 대통령비서실장이던 2002년 4월 예고 없이 청와대 기자실에 찾아와 이회창씨가 ‘김대중 정권은 좌파정권’이라고 말한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전실장은 “관료로서 37년간 생활했고 정부정책의 종합조정기능을 담당해온 사람으로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며 “정치권의 이념논쟁은 정보화시대에 맞지 않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논쟁”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얼마전 한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보수적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는데요. 노무현 정부의 좌표를 놓고서도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지구상에 이제 극좌 극우는 없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나서 세계의 정치사조는 탈이데올로기화입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없어진 상황에서 좌파정권 운운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좌파정부와 동거하는 겁니까, 정책 파트너를 하는 겁니까. 논리의 모순이 생기지요.”
-평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합니까.
“토요일 일요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산에 가거나 골프를 칩니다. 밤 12시 넘어 들어가도 아내와 둘이서 30분 가량 아파트 뒤에서 뜁니다. 걷다 뛰다 해요. 아침에는 1시간 정도 우면산을 돕니다.”
-하루 1시간30분이면 운동을 많이 하는군요. 그런데 담배는 하루에 몇 갑이나 피웁니까.
“하루에 한 갑쯤 피웁니다. 오늘은 인터뷰를 하다 보니 더 피우게 되네요.”
그는 사진기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을 찍지 못하게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저녁 자리로 이어졌다. 서울대 법대 다닐 때 의대로 전과할 기회가 있었으나 모친이 반대해 뜻을 못 이뤘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어머니는 “고름이나 짜라고 서울로 대학 보낸 것 아니다”며 한사코 반대했다고 한다. 모친이 어린 시절 전원장의 진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데도 장학금 주는 목포고를 마다하고 서울로 보내고, 의대로 전과도 못하게 하고….
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핏대’라는 별명은 아주 작은 한 단면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당한 대우에 핏대 올리지 않고 오랜 세월 인내하며 기다린 노력이 없었다면 전윤철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