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제껏 살아온 삶의 변화무쌍함도 그렇고, 겉으로 드러나는 다층적인 이미지도 그렇고, 내면에 잠겨 있는 복잡다단한 심리도 그렇다.
- 최고의 영화들을 찍으며 최고의 여인과 결혼했고, 이제는 국회의원이라는 지위에 오른 인물. 그러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가슴속에 한 줄기 바람을 지니고 있는 듯한 남자, 바로 신성일이다.
‘강신성일 의원실’ 벽에는 조각 같은 얼굴을 한 자신의 젊은 날 흑백사진과 엄앵란씨의 나무 부조가 붙어 있다. 부조와 사진, 즉 입체와 평면이라는 그 묘한 대조를 느끼며, 대뜸 헤어진 옛 애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그는 선선히 이야기에 응해주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허심탄회하게 껄껄 웃고 있는 이 사람이, 젊은 시절 강렬한 하이에나의 눈빛에 나르시스를 연상시키던 그 젊은이였단 말인가.
고백하자면 필자는 어릴 때부터 숱한 영화를 봐왔지만 한번도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워낙 많이 보아온 배우인 까닭에 스크린에서 ‘영접’의 느낌을 받을 수 없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막상 ‘인간 신성일’을 직접 만나보니,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삶의 스산한 구석을 여전히 감내하고 있거나 세속적 욕망과 결벽증적 도덕률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발현되는 어떤 느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바람’이다”라고 평한 그 ‘바람’을 필자 역시 가슴에서부터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솔직하게 자신의 연애담이며 과거 행적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랑했던 감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들떴고, 함께 공연한 여배우 이야기를 할 때는 여전히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렇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 같은 신성일은 요즘 보기 드문 호탕한 남자, 남자다운 남자였다.
‘비어 있음’의 미학
흔히 해보는 상상. ‘만일 제임스 딘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성일은 그 상상을 한국 영화계라는 틀 안에서 보여주는 ‘자그만 역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영화계를 이끌어간 시대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다. 그렇기에 그의 변신은 한국 영화의 변신이었고 그의 진부함은 한국 영화의 진부함이 되었다.
1960년대 한국 영화에 신성으로 떠오른 청춘 스타 신성일. 귀공자의 이미지를 가졌음에도 그는 남궁원이나 신영균 같은 배우와 달리 깡패나 위폐범, 자동차 세차공, 가난한 고학생 등 사회 주변부 인물을 맡았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배우였다. 출세욕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절망과 희망을 함께 연기했을 때 그는 대중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어쩌면 본인의 젊은 시절 어떤 부분을 그대로 투영했을 것 같은 이러한 이미지는 6·25 직후라는 시대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떠오르는 신흥 자본주의 계급에 대한 묘한 반감과 그 대열에 끼이고 싶다는 이중적인 열망을 신성일과 대중이 함께 나눠 가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만추’와 ‘안개’ 같은 1960년대 대표작을 거쳐 1970년대 신성일은 점차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문예 영화와 멜로 배우로 안착했다. ‘결혼교실’(1970) ‘춘향전’(1971)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왕십리’(1976) ‘산불’(1977) ‘야행’(1977) 등 코미디에서부터 전쟁영화까지 많은 영화를 찍었지만, 이 시기 신성일은 뭐니뭐니 해도 ‘별들의 고향’과 ‘겨울 여자’라는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세운 두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별들의 고향’에서 신성일은 여대생에서 호스티스로 전락한 여주인공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다소 개방적인 중년 사내로 나온다. 이 역시 반항적인 그의 이미지에서 어딘가 허한 구석이 있는 자유분방함, 그러면서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함을 뒤섞은 그의 스타 아이콘이 대중들에게 여전히 통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연기자 신성일’로 자리잡은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길소뜸’(1985)과 ‘달빛 사냥꾼’(1986)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더욱더 물오른 연기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신성일은 막노동꾼이나 쇠락한 형사 역할을 통해 ‘나르시스의 얼굴’이라는 예전의 신화적 카리스마에 기대기보다 세상살이에 피로한 기색이 짙은 페이소스를 자신의 배역에 첨가하였다. ‘위기의 여자’나 ‘레테의 연가’ 같은 멜로물에서는 여전히 성적 매력이 있는 중년의 사내로 등장했지만 이 역시 황량하고 스산한 페이소스가 깃들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정 그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꽉 차 있음’이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승부한 배우였다. 그것이 가난이든 순정이든 세파에 시달린 피로든 간에, 역설적으로 그 허함은 그를 늘 한국 영화의 중심에 서 있게 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성에게는 모성 본능을, 남성에게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그가 가진 ‘귀티’ 덕분에 비관의 늪으로 빠지지 않는 신비한 이미지이기도 했다. 근래에 등장한 정우성을 제외하고는, 배우가 가진 ‘허(虛)함의 미학’에 있어서 필자는 신성일이라는 이름 외에 더 이상 아는 이가 없다.
‘돈을 벌어야 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한 스포츠신문에 80회 가량 연재하신 수기가 있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인생역정을 죽 따라가다 보니 참 다채로운 경력이다 싶더군요. 배우에, 감독에, 제작자, 국회의원선거 떨어지고 나서는 식당주인도 하셨고….
“식당주인은 마누라가 했지. 나는 허드렛일 하는 종업원이었어요. 사실 그것도 얼마 못하고 쫓겨났어요. 소란 피우는 주정뱅이들을 몇 번 두드려 팼더니 마누라가 장사 안 된다고 쫓아내더라고요.” (웃음)
-삶을 회고할 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렇게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온 신성일이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이 많아지면 꼭 상의하는 사람이 대전에 있어요. 어제도 이분하고 산에 올랐는데, 문득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으로는 신이 나를 지켜봤다면 ‘참 별난 놈이다’ 이렇게 말할 것도 같고요. 내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요. 아버지 얼굴도 모르니까. 공부도 굉장히 잘하셨고 일제시대 때 은행에서 좋은 자리에 계셨다고 하는데 폐결핵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사진을 보면 모습이 아주 깔끔하시죠. 결핵이었으니 나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랑 격리되어 지냈고 그나마 돌도 지나기 전에 돌아가셨죠. 그때만 해도 폐결핵은 불치병이었으니까. 근 60년 전 아닙니까.
어머니는 대구 경북여고를 나오고 사회활동도 많이 하신 인텔리였어요. 특히 자식교육에 굉장히 엄격하신 분이었죠. 나한테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말아라’고 늘 강조하셨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모범생이었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큰 편이어서 확 눈에 띄었던가 봐요. 스스로 강한 프라이드를 갖고 청소년기를 보냈죠.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세가 확 기울었어요. 어머니가 들었던 계가 깨져서 집도 쫓겨나고 나도 일을 해야 했거든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공부를 못했어요. 서울대에 시험 봤다가 떨어졌죠. 그리고 나서는 청계천에서 호떡장사를 했어요. 당시 청계천은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때가 1956년 무렵인가. 아무튼 요즘 젊은 이들은 상상도 못할 상황이었죠.
그때 우리 집 주위에는 막걸리 파는 집, 지짐 부쳐 파는 집 등 이북에서 내려온 분이 많았어요. 그분들이 ‘저 집 아들은 얼굴도 훤하고 잘생긴 게 호떡집 아들 같지 않다’고 수근대곤 하셨지요. 그래서 ‘아, 내가 호떡장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다른 일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 전에도 영화는 많이 봤어요. 어머니 손잡고 극장에 많이 갔죠. 50년대에는 프랑스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는데,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 같은 영화는 확 뇌리에 박혔죠. 그게 하나의 뿌리가 됐을 거예요. 호떡장사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속 다른 삶을 꿈꿀 무렵, 어린 시절 봤던 영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던 거죠. 그 덕분에 영화에 몸을 던지게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곤 해요.”
-동년배의 다른 배우들과는 사뭇 다르네요. 다른 분들은 대부분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어느날 길거리나 학교에서 픽업됐다’고 하시던데요.
“그때만 해도 영화를 좋아했을 뿐 직접 영화판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은 못했죠. 우선 국산영화는 봐도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 무렵 한 친구가 가수가 되어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걸 보니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때 처음으로 배우가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배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고민 하다가 중부경찰서 근처에 있던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찾아갔죠.
그때 그 학원이 참 대단했어요. 김수용, 유현목, 김기영 감독을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소득이었어요. 수업에 들어갔더니 양광남씨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수업’을 갖다 주더라고요. 그 책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고전 중에 고전이죠. 늘상 끼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은 책장이 누렇게 변해버렸죠.
거기서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나니 학원에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래도 오기가 있어서 엑스트라로 시작하지는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어요. 촬영장에 가보면 조감독이 잠깐 엑스트라 좀 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앉아 있다가 카메라 돌아가기 전에 슬쩍 사라지곤 했어요. 엑스트라로 비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때도 내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참 당돌했죠.”
-당시 엄앵란씨는 대선배였죠? (엄앵란은 신성일보다 1년 연상이며, 당시 학사배우 1호로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요, 나는 감히 말도 못 붙였죠.”
-이후 배우 공개모집을 통해 신필름에 들어가셨더군요. 자료를 보니 신필름 시절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하셨던데요.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공식적인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찍으셨고요.
“학원에서 이론은 배웠는데, 막상 신필름에 들어가니 이건 완전히 노동판이에요. 월급을 5만원씩 받았는데 사무실 청소부터 잔심부름까지 모두 내 몫이었죠.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한국에서 제일 잘사는 동네에서 살아야겠다’ 싶어 가회동에 하숙을 얻어 한 달에 2만5000원씩 주고 살았죠. 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죠.”
‘아낌없이 주련다’의 대성공
언론에 알려진 신성일의 데뷔작은 신상옥 감독의 1960년작 ‘로맨스 빠빠’다. 그러나 정작 신성일씨 본인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를 본격적인 데뷔작으로 꼽는다. 신필름을 이끌고 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와 약간의 트러블이 있어 신필름을 떠나 극동흥업으로 옮긴 다음에 찍은 작품이었다.
“트러블이라는 말은 안 맞아요. 그분들은 하늘 같은 분들이었고 나는 바닥에 있었으니까. 그분들 입장에서는 그저 찻잔 속의 태풍이었죠, 나한테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아낌없이 주련다’는 공부를 많이 하고 찍은 영화예요. 호현찬씨가 ‘동아일보’ 기자로 계실 때 영화 기획이나 자문을 많이 하셨거든요. 친구인 한운사씨가 쓴 라디오 드라마가 굉장히 히트하니까 이걸 영화로 만들자고 생각하신 거죠. 연상의 여인과 젊은이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였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호현찬씨는 ‘이 영화는 연하의 남자를 누가 맡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랬는데 내가 발탁된 거죠.
원래 유현목 감독은 감히 신인을 쓸 생각은 못하고 최무룡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대요. 그런데 호현찬씨가 펄펄 뛰더라는 거지. 연하의 남자와 연상의 여자가 사랑하는 스토리인데 최무룡과 이민자는 안 맞다 이거야. 그런데 신인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호현찬씨가 신필름에서 전화 심부름 하고 있던 내 생각이 났나 봐요. 부르길래 달려나가 시나리오를 봤더니 ‘아이고, 이게 바로 내 작품이다’ 싶더라고요. 이 영화 한 편이면 내 앞길이 탁 트일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어요.
신필름에 가서 ‘나 나가겠소’ 했더니 담당간부가 대뜸 ‘임마, 전속이 가긴 어딜 가’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금고를 열어 계약서를 보니까 3년 계약이 이미 끝난 상황이었죠. 그때 남궁원씨는 재계약을 해주고 나는 별 볼일 없다고 재계약을 안 했었거든요. 이 간부가 화가 잔뜩 나서는 빰을 때리더라고요. 배신했다는 거죠.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면서 신필름을 나왔죠.”
-그 무렵에는 앤터니 퍼킨스를 보면서 연기공부를 열심히 하셨다고요.
“‘아낌없이 주련다’와 비슷한 외국 영화가 있었어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영화였죠. 잉그릿 버그만하고 앤터니 퍼킨스가 공연했는데 이것도 연상의 여인과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에요. 앤터니 퍼킨스가 섬세한 연기를 잘하잖아요. 저걸 보고 배워야겠다 싶어 눈빛 하나, 동작 하나를 다 메모했어요. 나 나름대로 콘티도 짰고요. 그걸 완벽하게 머릿속에 넣어가지고 처음 현장엘 가서 촬영을 했더니 유현목 감독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열심히 준비했으니 당연히 효과가 있었던 거죠.
그후 러시(rush·편집되기 전의 필름을 가리키는 영화용어) 시사회를 하는데 나는 떨려서 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제작자랑 감독이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들어오더라고요. 사장이 날 찾길래 들어갔더니 “기막히게 잘했다”며 보너스로 10만원을 주더군요. 용기 백배했죠.”
로맨스, 로맨스, 로맨스
-이 영화에서 이민자씨의 역할은 전쟁 미망인이었죠. 무대는 부산이었고요. 6·25가 끝난 직후였으니 전쟁 이후의 삶을 그린 영화들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회고하신 걸 보니 이민자씨 때문에 가슴이 많이 설레었다고 하셨던데요.
“부산 다대포에서 영화를 찍는데 이민자씨가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부리부리한 눈에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종아리도 예뻤고…. 우리 집사람이 이민자씨 동생으로 출연했는데 집사람은 종아리가 굵잖아요(웃음). 그때는 이민자씨가 김진규씨하고 이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혼자된 여인이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고나 할까. 흔히 나보고 ‘항상 여자를 그리워하는 얼굴’이라던데, 그때 이민자씨 눈이야말로 ‘남자를 그리워하는 눈’이었어요. 지금도 그 영화를 보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요.
그때 나는 실제로 어느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 막 해도 되나? 결혼하기 전이니까 뭐. 어쨌든 그 여인이 나중에 큰 재벌의 부인이 됐어요. 내가 어느 잡지사에서 주는 연기상을 받으러 갔더니 글쎄 그 부인이 시상을 하러 걸어 나오는 거예요. 나에게 상을 주려고 일부러 자기가 나온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무대 위에서 ‘내가 아주 큰 집에 들어갔어요’ 그러더라고요. 아주 대단한 여인이었지….”
①유현목 감독의 1962년작 ‘아낌없이 주련다’ ②이만희 감독의 1966년작 ‘만추’ ③이장호 감독의 1974년작 ‘별들의 고향’ ④신승수 감독의 1986년작 ‘달빛 사냥꾼’(자료제공·한국영상자료원)
“그건 이민자씨가 아니고 최지희씨였죠. 최지희씨도 은근히 날 좋아했어요. 나하고 결혼하자고도 했었지.”
-정말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럼, 최지희씨가 날 노렸지.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집사람과 서로 담판을 지었다던데. 농담 비슷하게 ‘나도 프로포즈할 건데 너 어떻게 할래’ 그랬다는 거예요.”
-최지희씨가 그때 처녀였어요?
“그럼요. 다들 처녀였죠. 목에 키스마크가 있어서 놀림을 당했던 건 돌아가신 강대진 감독의 ‘새엄마’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어요. 엄앵란씨가 새엄마로 나왔고 최지희씨가 내 동생 역할이었죠. 영화를 찍다 말고 앞에 말한 그 연상의 여인에게 점심을 얻어먹으러 갔죠. 그날이 내 생일이었거든. 그러니까 이 여성이 생일상을 차려준 거지. 그렇지만 뭐 밥이 문젠가? 그러다가 그만 키스마크가 생겨버렸다고.
그것도 모르고 저녁무렵에 촬영현장으로 돌아갔어요. 내가 집 대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제치면 엄앵란씨와 최지희씨가 후닥닥 뛰어나와 문을 여는 장면이었죠. 그런데 문을 탁 여니까 두 사람이 내 얼굴을 보더니 킥킥 웃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예요. 당연히 NG가 났지. 다시 했는데 또 웃음을 터뜨려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거울을 가져다 봤더니 여기 키스마크가…. 그래서 들켰지 뭐.
이것도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집사람은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을 했대요. ‘총각한테 저렇게 진한 키스마크를 낼 정도라면 상대가 처녀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 많은 유부녀겠지. 저 사내를 내가 구제해줘야겠구나….’ 그렇게 된 거예요.
생각해보면 그 무렵에 참 로맨스가 많았어요. ‘아낌없이 주련다’ 시사회를 단성사 시사실에서 열었는데 호현찬씨가 각계각층의 영화 마니아를 한 100명쯤 초대했죠. 쟁쟁한 저명인사들이었어요. 그때 소설가 정연희씨도 그 자리에 왔어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는데 너무너무 예쁘시더라고요. 목소리도 은쟁반에 구슬 굴러가듯 똑똑 떨어지고. 그렇게 첫 인사를 나눴어요.
촬영이 워낙 바쁠 때니까 딴 생각 할 틈도 없이 현장에 다니는데, 하루는 대한극장 앞에서 촬영을 하다 비를 만났어요. 촬영이 안 되잖아요. 극장에서 ‘남태평양’을 상영하고 있길래 ‘이거나 봐야겠다’ 싶어 들어가 앉았죠. 그 영화가 워낙 길어서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었거든요. 웬 여인이 다가와서 ‘미스터 신이 여기 무슨 일이야?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왜 혼자 극장에 왔어?’ 하고 아는 체를 하더라고요. 보니까 정연희씨였어요. 자기는 원래 혼자 극장에 잘 다닌다는 거예요. 그렇게 다시 만났죠.
영화가 끝나고 나니 자기는 선배가 여는 한복전시회에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나도 그날 촬영 펑크내고 따라 나섰어요. 저녁도 같이 먹고. 그때부터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죠.”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연애하신 거예요?
“내가 굉장히 좋아했어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유행가도 있잖아요. 비오는 날 오후 3시에는 대체로 촬영이 펑크가 나요. 그래서 약속을 했지. 비오는 날 오후 3시면 지금은 없어진 조그만 다방에서 만나기로. 그때부터 한동안은 비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오후 3시에 그 다방에 가보면 거기 정연희씨가 와 있었거든. 가면 항상 내가 출연한 영화평이나 국문학 강의를 해주곤 했어요. 내 연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도 해주고. 한마디로 좋은 친구를 얻은 거죠.
정연희씨하고 우리 어머니도 참 가까웠어요. 어머니도 글을 쓰시곤 했으니까, 두 사람이 전화만 하면 그렇게 깔깔거리며 잘 통했다고. 그러면 뭐 하나, 정연희씨는 이미 소설가 홍성유 선생하고 결혼한 유부녀였는 걸. 어머니는 사실 내가 정연희씨 같은 스타일의 여자와 결혼했으면 하셨나 봐요. 실은 우리 집사람은 어머니하고는 잘 안 맞았지.”
-신성일씨하고 혼담이 오간 일본계 여배우도 있었잖아요.
“공미도리라는 친구였어요. 그 사람도 어머니가 참 좋아했죠. 일본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어머니하고 일본말도 잘 통하고. 또 어른은 좀 깍듯이 잘 모시겠어요? 그러니 우리 어머니가 참 귀여워하셨죠.
그런데 나는 막상 엄앵란하고 연애가 급진전돼서 결혼식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약혼을 발표한 날 정연희씨가 술을 한잔 하고는 울면서 우리 어머니께 전화를 했대요. ‘나 오늘 이혼했어요’ 그러더라는 거죠. 소설 같은 이야기죠? 나는 정연희씨를 지금도 흠모하고 있어요. 젊은 배우에게 지적인 영감을 준 여인이었죠. 아까 말한 연상의 여인은 처음 여자를 가르쳐준 사람이고.”
-여자들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나쁜 뜻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여성성에 대한 호감이 강한 분들이 있잖아요.
“여자가 참 예쁘잖아요. 나는 내 나이 또래의 누군가가 ‘여자가 예쁘다’고 그러면 ‘아직까지 당신이 건강하다는 뜻’이라고 얘기해줘요. 여자가 예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남자가 왜 존재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건 남자라고 할 수도 없는 거지.
우리 어릴 때는 괜찮게 사는 집엔 으레 식모가 있었어요. 다른 집에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데,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집에 온 식모 누나들도 친누나처럼 아꼈어요. 그건 내 천성이에요. 내 엑기스라고도 할 수 있죠.”
-1963년에 작가 박경리씨와 신성일씨가 같이 인터뷰한 기사를 봤어요. 벌써 40년 전인데 읽어보니 참 감회가 새롭더군요. 말하자면 떠오르는 신인배우와 전도유망한 여류작가의 만남인 거잖아요. 박경리씨가 ‘지금까지 몇 작품 하셨냐’고 물어보니 신성일씨가 ‘열두 작품 했다’고 대답하셨던데, 그때는 아마 앞으로 560편을 더 찍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하셨겠죠?
“그게 아마 ‘여원’에 실렸을 거예요, 당시 최고의 여성지였죠. 그 무렵 박경리씨는 ‘김약국의 딸들’로 유명해졌어요. 나중에 그 소설이 영화화될 때 나도 출연했죠. 작가 중에서도 아주 고고한 여인이지. 마주앉자마자 나한테 하는 첫마디가 ‘귀공자같이 생긴 사람이 머리가 비면 안 되니 책을 많이 읽어라’는 따끔한 충고였어요. 영혼이 있는 배우가 돼야 된다, 내면이 담긴 연기를 해라, 그런 얘기였죠.”
1964년, 아주 의미 있던 한해
그렇게 신성일은 전성기라 할 1964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해는 그가 두말할 것 없는 청춘스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해였다. 당시 그가 맡은 역들을 살펴보면 대개가 반항적인 이미지에 야심만만한 캐릭터였다. 신성일이 청춘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꿈이 좌절된 당시 젊은이들의 허무한 감성을 대변하는 역을 맡아 그것을 잘 소화해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그는 일종의 아이콘이었던 것이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김기덕 감독의 1964년작 ‘맨발의 청춘’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보여준 십자가 뒤의 키스신이나 가죽의상 등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맨발의 청춘’이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끈 까닭이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이 영화가 본인의 영화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어떤 걸까요?
“‘아낌없이 주련다’를 찍고 난 다음에 청춘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때 일본에서는 이미 청춘영화가 석권하고 있었거든요. 한양영화사에서 엄앵란씨하고 나를 부르길래 갔더니 일본 작품 시나리오를 하나 주면서 꼭 같이 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건 한양영화사가 잘 만들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 둘이 극동영화사에 가서 오히려 이 영화를 만드시라고 제안을 했지. 일본에 전화해서 시나리오도 받아오고.
정작 그 일본 영화는 보지도 못했어요. 스틸 사진 몇 장만 갖고 작가 서윤성씨에게 각색을 맡겼죠. 촬영은 딱 18일 했어요. 나하고 서작가하고 조감독이던 고영남씨 셋이서 영화를 만들다시피 했어요. 김기덕 감독은 전체적으로 흐름만 잡아줬죠. 거기에 양념을 뿌려준 게 트위스트 김이었고요. 그때 대한민국에서 청바지를 처음 입은 게 바로 우리였어요.”
-그래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뒤 1970년대 들어와서 청년문화, 청바지문화가 생겼죠. 그 영화에는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자잘한 볼거리가 굉장히 많았어요. 구두에 묻은 먼지를 바지 뒷단으로 닦아내는 장면이라든지, 흰 양말에 짧은 바지를 입은 옷차림이라든지. 알랭 들롱이 ‘태양은 가득히’에서 입던 그런 스타일로 컨셉트를 잡았죠. 그러니 관객들 보기에 내가 입은 옷은 다 신기했던 거예요. 흰 가죽에 까만 털 달린 점퍼 같은 건 평범한 젊은이들이 절대로 구해 입을 수가 없는 옷이었거든요. 엄앵란씨도 마찬가지였고요. 영화의상은 모두 이름 있는 패션디자이너가 맞춰준 거였어요. 그때 처음 스타시스템이란 게 만들어진 거죠.
영화 줄거리도 마찬가지예요. ‘맨발의 청춘’의 분위기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이랑 비슷해요. 바닥 출신인 주인공이 힘겹게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결국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그게 참 재미있는 스토리거든요.”
-신성일씨 말투도 한때 유행했잖아요. ‘이리 와, 영희’ 하는 식의 말투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신성일씨의 매력이 단순히 잘생겼다는 데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귀공자처럼 잘생긴 얼굴만 갖고는 영화판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영화평론가 이효인씨는 신성일씨에 관한 평을 쓰면서 ‘바람’이라고 하더군요. 바람과 귀공자, 그 두 가지 이미지가 합쳐져서 가능했다고요. 잘생기기는 했지만 허하고, 반항적이기는 하지만 또 달콤한 면도 있는….
“멜로영화에선 옆 얼굴이 중요해요. 가만 보면 멜로영화의 절정은 남녀가 마주보는 신이거든요. 그럴 때 카메라가 잡는 것은 옆얼굴이죠. 그 옆얼굴에서 러브신의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그러니 나처럼 코가 날카로운 사람이 유리하죠. 납작한 코로는 아무리 해봐야 그 느낌이 안 나오죠.”
볼 수 없는 명작 ‘만추’
1966년 신성일은 ‘오발탄’과 함께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곤 하는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만추’에 출연한다. 이만희 감독은 범죄스릴러와 전쟁영화, 사회적 리얼리즘을 담은 영화를 만들었던 1960년대의 명장. 이만희 감독 영화세계의 특징은 어떤 영화를 만들던 간에 인간에 대한 관심,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적 시선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의 전쟁영화는 당대의 반공영화와 달리 전쟁이라는 ‘상황’과 그 속에서 병들어간 ‘인간’의 행동을 담고 있으며, ‘시장’(1965) ‘물레방아’(1966) ‘만추’(1966) ‘귀로’(1967) ‘태양 닮은 소녀’(1974) ‘삼포 가는 길’(1975) 등에서는 가난한 서민이나 주변부 인물들에 대한 짙은 연민의 페이소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만추’는 며칠간의 휴가를 받은 모범 여죄수가 열차 속에서 경찰에 쫓기고 있는 청년과 만나 짧고도 절박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여기서 이만희 감독은 늦가을이라는 계절적 비유를 통해 삶의 냉엄함과 사회에 쫓기는 인간의 깊은 고독감을 격조 높고 절제된 서정적인 연출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만추’는 이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영화다. 남아 있는 필름이 없어서다. 신성일씨는 “혹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필름창고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김위원장이 이 기사를 보고 혹시 보내주지 않을까”하고 웃어보였다.
“‘만추’ 얘기만 나오면 나도 가슴이 설레요. 처음 시나리오를 보는데 아주 간단하면서도 멋있더라고요. 그 작품이 김지헌씨의 최고 걸작이잖아요. 우리나라 시나리오 중에서 유일하게 해외에 수출된 시나리오죠.
시나리오는 장면과 장면의 배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만추’는 감독의 연출력과 상상력에 탁 맡겨버리는 그런 시나리오예요. 읽어보면 아주 단출하죠. 예를 들면 ‘한 사나이 위조지폐범으로 쫓긴다’ ‘어느 여인 기차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있다. 뒷모습이 스산하다’ 이런 식이에요.
문정숙씨가 맡은 여주인공은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갔다가 모범수로 사흘 동안 휴가를 받은 시한부 수인이거든. 원래 쫓기는 두 사람은 불이 붙게 돼있잖아요? 그럼 어디서 사랑을 나누느냐, 그게 열차 화물칸이거든. 정말이지 기 막히죠. 아마 지금 다시 만들어도 대단할 거예요. 그때는 러브신에서 상체밖에 보여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짜릿한 분위기가 나왔어요. 그게 바로 연출력이죠.
그때 이만희 감독하고 문정숙씨가 연애를 하고 있었어요. 이감독이 문정숙씨만 보면 죽고 못살 때니까 카메라도 예쁘게 찍을 수밖에 없어요. 필름에서 그 열기가 뚝뚝 묻어났다고. 문정숙씨 연기도 그때가 절정이었죠.”
문정숙은 ‘만추’로 그 해 거의 모든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진짜 감독과 X감독
“이만희 감독은 나보고 신짱이라고 불렀어요. 동생을 부를 때 쓰는 일본말 애칭이죠. 나는 이감독을 짱구형이라고 불렀죠. 이만희 감독과는 ‘만추’ 전에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어요. 문희씨의 데뷔작인 ‘흑맥’도 같이했고 ‘군번 없는 용사’라는 작품도 있었죠.
‘흑맥’은 6·25 직후 서울역 주변에 남아 있던 똘마니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였죠. 흑맥이 썩은 보리라는 뜻이잖아요. 쓸모가 없어 버려진 인간 군상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죠. 내가 뒷골목 왕초 역할이었고, 그 와중에 뛰어든 깨끗한 장미 한 송이 같은 여인이 문희였지. 문희를 캐스팅한 것이 참 성공적이었어요.
나도 그 작품이 이만희 감독하고의 첫 인연이었는데 마음이 잘 맞았어요. 촬영현장에서 그 흔한 고함소리 한번 안 났으니까. ‘레디 고’ 하고 연기를 지켜보다가 불만스러우면 ‘컷’ 해놓고는 조용히 나한테 온다고. 내 어깨를 탁 짚으면서 ‘신짱, 이럴 때는 이런 감정 아니야?’ 하고 귀에다 살짝 얘기하곤 했죠. 그 양반 멋쟁이였어요. 굉장히 사랑스럽죠.
‘만추’ 이후에는 함께 치고 받는 액션물을 많이 했는데, 액션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꼭 자기가 먼저 시범연기를 해요. ‘신짱, 봐봐. 여기로 넘어지면 돌멩이가 있으니까 조심해’ 하고 일러주죠. 그런 감독한테 애정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솔직히 자기가 뽑아놓은 배우한테 고함이나 지르는 감독은 X감독이에요. 예전에 신상옥 감독 말씀이 ‘배우는 다 나름대로 자기 몫을 갖고 있다. 다섯 개도 있고 여섯 개도 있다. 감독은 다섯 개를 갖고 있는 배우를 아홉 개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셨지요. 그게 진짜 감독이에요.
하길종 감독도 이만희 감독만큼이나 사랑스러웠어요. 자기 동생보다 나하고 더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그 감독들이 모두 오래 못 살았어요. 너무 가난했거든. 배가 고파서 죽은 거예요. 한편으론 자기 내면에 갖고 있던 생각이나 사상을 마음껏 분출할 수 없어 겪은 고생이 컸어요. 그게 항상 가슴에 쌓이고, 현실의 벽은 두텁고, 사회나 정치는 보면 볼수록 답답하고. 행정 관리들은 반공만 부르짖고 새마을운동만 부르짖던 시절이니 맞을 리가 있겠어요.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 젊은 감독들은 참 행복한 겁니다. 정말 부러워요.
가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이만희 감독이 마지막 작품도 나랑 같이했으면 조금 더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프랑스에 갔다 와서 보니까 이 양반이 완전히 몸이 고장났더라고요. 돈은 없는데 만날 술만 퍼먹고 돌아다니니 버틸 수가 있겠어요. 그 무렵 이감독이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드느라고 인제에 가 있었어요. 내가 쫓아가서 뱀탕 끓여 먹이고 송이버섯하고 불고기 만들어 먹이고 그랬어. ‘짱구형, 앞으로 영화에 집착하지 말고 몸 건강해요.’ 내가 다짐하듯이 그랬다고.
몸만 추스르면 같이 ‘삼포 가는 길’ 찍자고 결심을 한 상태였는데…. 내가 이감독 돌보느라고 스케줄이 밀려서 시간이 안 맞았어요. 황석영씨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어서 참 시나리오가 좋았는데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못내 아쉬웠죠.”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선우휘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이만희 감독이 기록성과 예술성을 갖춘 당대 최고의 전쟁영화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임했던 작품이었다. 이미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YMS 504의 수병’(1963) ‘7인의 여포로’(1965) ‘군번 없는 용사’(1966) ‘창공에 산다’(1968) 등을 통해 전쟁영화의 일가를 이루었던 그는 이 영화 제작에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1억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한 어린이의 눈을 통해 6·25의 비극과 전쟁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려던 감독의 의도는 당국의 개작지시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영화는 국책영화의 한계를 드러내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다.
문득 드는 생각. 신성일이 ‘삼포 가는 길’의 주연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의 영화인생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백일섭이 이 영화에서 내뿜었던 그 떠돌이 야바위꾼의 냄새는 살아나지 못했으리라.
이민자의 입술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연기에 조금 변화가 생겼습니다. 관능적인 플레이보이 아니면 여자를 사랑하지만 버릴 수밖에 없는 유부남, 약간 권위적인 사내 역할을 많이 연기했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을 꼽자면 역시 ‘별들의 고향’이겠죠.
“‘별들의 고향’도 있고, ‘겨울여자’도 있죠…. ‘별들의 고향’ 여주인공 이름이 경아인데 우리 큰딸 이름이랑 같아요. 원작자인 (최)인호가 우리 딸 이름이 예쁘다고 가져다 쓴 거거든. 그런데 영화가 히트하고 나니까 술집 아가씨들 이름이 죄다 경아가 된 거예요. 우리 딸이 자기는 이름을 바꿔야겠다며 불평을 하더라고.” (웃음)
-이때 한국영화는 한마디로 암흑기였죠. 예전 같은 생명력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고요. 어떻게 그 시기를 넘기셨어요?
“침체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어요. 정치와 영화는 굉장히 연관이 많아요. 정치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 마침 그 무렵이 텔레비전이 부상하던 때여서 영화는 뒷전에 밀렸어요. 그래서 결국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죠, 내가 한번 바꿔보겠다고. 1년 동안 네 작품을 만들었어요.”
-직접 해보니까 어떠셨어요.
“감독을 하고 나서 비로소 영화를 알게 됐죠. 배우는 딱 자기 역할만큼만 생각하죠. 하지만 감독은 달라요. 영화 전체를 생각해야 하니까. 나도 예전에 한꺼번에 여덟 작품까지 출연해봤지만, 영화나 감독 따라 연기수준이 다 달라져요. 삼류감독과 찍는 영화에서는 절대 A급 연기를 하지 않아요. 그러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거든. 연기자가 보는 영화는 그런 한계가 있어요.”
1964년 10월 신성일과 엄앵란의 약혼식은 당시 장안의 최고 화제였다.
“그래요? 나는 오히려 ‘레테의 연가’를 참 좋아했는데. ‘위기의 여자’도 참 잘했다 싶고. ‘위기의 여자’ 여주인공이었던 김영희씨가 참 예뻤어요. ‘땅콩껍질 속의 연가’라는 작품은 임예진하고 함께 찍었는데, 피부가 유리알 같은게 참 예뻤죠. 임예진은 아역부터 같이 연기를 해서 딸처럼 생각했던 친군데 이 작품에서 성인 데뷔를 했죠.
그 영화에는 일화가 있어요. 임예진 어머니가 매니저처럼 늘 옆에 있으니 노출신을 찍을 수가 있어야죠. 용평에서 촬영을 했는데, 내가 제작진 한 사람에게 조용히 그랬죠. ‘예진이 엄마한테 가서 황태 사준다고 데리고 나가라.’ 작전이 성공해서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틈에 얼른 노출신을 찍었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함께 연기했던 118명의 여자 중 가장 매력적인 여자는 누구였어요? 부인 빼고요.
“참 많아요. 다 예쁜 배우들이니까…. 여배우란 참 특이해요.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혀서 수백 명 사람들 속에 섞어놔도 단번에 눈에 띄거든요.
(거듭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문희씨는 눈이 참 좋거든요, 몸매는 그렇게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정윤희씨 는 다 갖추어져 있지. 빈틈이 없었어요. 윤정희씨는 내숭이 매력적이었죠. 남정임 같은 케이스는 그 경쟁심, 여자다운 시샘이 참 귀여웠어요. 그것도 여자로서는 대단한 매력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볼 때 남자를 가장 육감적으로 끌어들이는 스타일로는 역시 이민자씨만한 배우가 없어요. 그 눈을 들여다보면 내 몸이 다 빨려들어갈 정도로 매력적이었어요. 입술도 그랬고. 흡사 외국배우 실바나 망가노 같은, 항상 남자의 입술을 기다리는 그런 입술이었죠. 이민자씨만큼 강한 매력을 가진 배우는 없지 않나 싶어요.”
-이건 모든 배우들에게 드리는 공통 질문인데요, 스스로 자신을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세요?
“자기한테 충실했던 배우죠.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그랬기에 톱스타가 빠지기 쉬운 술이나 도박, 여자에 그렇게 몸을 던지지 못했어요. 대신 누가 됐든 상대방한테는 굉장히 관대하게 보이려고 애썼죠.”
-영화계에서는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관리를 열심히 했죠. 자존심을 내세우려면 자기를 관리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차라리 어머니가 나가주세요”
-신성일씨 얘기를 하면서 엄앵란씨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두 분이 함께 살아오시면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은 해로를 하셨단 말입니다. 성격이 안 맞아서 결혼 6개월 만에 헤어진다고 별거도 하셨다면서요. 특히 왕년의 명배우였던 장모님 노신재씨가 노발대발하셨다죠.
“내년이 결혼 40주년인데, 참 사연이 많았어요. 고부간의 갈등도 굉장히 심했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장모님하고도 사이가 안 좋았어요. 스타일이 전혀 달랐으니까. 또 어머니는 차분하고 가정교육 잘 받은 여성을 좋아하셨는데, 엄앵란씨는 소녀가장으로 자랐잖아요. 생활력이 강한 열정적인 여인이란 말이에요. 근데 나는 그걸 몰랐어요. 진짜로 몰랐어요.
당연히 집사람은 살림을 모르죠. 지금도 부엌일은 내가 더 잘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랑 맞는 게 별로 없어요. 자는 시간도 다르고 일어나는 시간도 다르고 기호도 각각이고. 그러니 처음에는 당연히 삐걱거렸죠.
그러다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머니랑 집사람 사이에 엄청나게 갈등이 불거졌을 때였는데, 내가 어머니께 그랬어요. ‘이 사람이 나 보고 시집왔지 어머니 보고 온 거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어머니가 다른 집으로 좀 나가주세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집사람 뺨을 때렸습니다. 내가 마마보이 같았으면 아마 집사람은 일찌감치 이혼하고 갔을 거예요. 강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앞에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아내를 집안에 앉히고 어머니껜 다른 집을 사드렸어요. 그때 일이 컸을 거예요. 그거 하나로 지금까지 온 겁니다.
집사람이랑 내가 의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게 오히려 밸런스가 맞는다고들 해요. 우리 두 사람이 공유하는 부분은 미미하죠. 지금까지 한 집안에서 사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때도 있어요. 이혼하려고 했다면 수십 번도 더 했겠죠.
한편으로는 오기도 있었어요. 결혼할 무렵에는 ‘둘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하는 소리가 귀에 자주 들려왔죠.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도 끝까지 잘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것 역시 모든 배우들에게 똑같이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요.
“역시 이만희 감독의 ‘만추’죠. 그리고 김수용 감독의 ‘안개’. 찍으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작품은 ‘맨발의 청춘’이었고요. ‘만추’는 감독이 뛰어났고 내 연기에도 만족해요.”
-당시 영화를 찍으면서 ‘이 작품은 훗날에도 평가를 받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물론입니다. ‘맨발의 청춘’도 그랬고, ‘만추’도 찍으면서 ‘이거 걸작 되겠구나’하고 느꼈죠. ‘안개’는 김수용 감독의 재치가 돋보였어요. 김승옥 작가가 쓴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환데, ‘컷백(cut back·둘 이상의 다른 장면을 연속적으로 엇바꾸어 편집하는 영화기법)’을 제일 먼저 사용한 한국 영화였어요. 현장에서도 김수용 감독이 굉장히 자신있게 찍었어요. 그러니까 회상신도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fade in, fade out·화면이 점차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영화기법) 혹은 오버랩(overlap·앞 장면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데 겹쳐서 다음 장면을 서서히 나오게 하여 점차 다음 장면이 되게 하는 기법)을 안 쓰니까, 연기도 다른 영화와는 달리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어져야 했어요. 그게 바로 컷백이었죠. 정훈희씨가 부른 주제가 ‘안개’도 당시로서는 모던하고 새로운 노래였고.”
-참, 이건 여담인데요, 옛 이야기를 찾다 보니 결혼 후 볼링장에서 처음 만나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김여인이라고 하는. 그 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다시 만난 적 있으세요?
“죽었어요,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그분은 결혼하셨나요?
“안 했지, 나 때문에. 김여인의 경우 단순한 외도는 아니었어요.”
-(잠시 침묵)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신성일씨도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마워요. 김여인의 사랑은, 깊이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신성일씨는 국회의원이 되는데 8년이 걸렸죠. 한때는 빈털터리로 호떡 장사도 하셨고요. ‘한물 갔다’는 말을 듣고도 1980년대에는 여봐란 듯 좋은 영화를 많이 찍으셨어요. 그 의지나 끈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대구에서 시험을 쳐서 명문고에 들어갔지만 집안이 어려워 대학에 떨어졌죠. 물러나기 싫었어요. 스스로에게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뭐 할거냐’고 되묻곤 했죠.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방 하나 없던 시절에도 열심히 살았어요. 그 시절부터 나에게는 프라이드가 있었어요. 운동 잘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늘 긍지를 품고 있었죠. 그게 바로 나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정신과 수련 시절, 아주 솔직한 환자를 인터뷰하고 나면 그 삶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신성일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그가 스크린에서 내보인 ‘허함’의 뒷면에는 인간 신성일의 야망과 오기가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자신의 삶에서 세 부분을 술회하며 자주 오기라는 말을 썼다.
부고, 그리고 우동 한 그릇
그러나 필자의 눈으로 본 그의 오기는 바로 ‘최고’를 향한 의지였다. 월급을 타자마자 최고 부자 동네인 가회동에 가서 하숙을 구했다든지, 재수까지 해가며 서울대에만 시험을 쳤다든지, 8년에 걸친 시도 끝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든지. 이런 일들은 최고라는 이름을 위해 그가 달려온 전력질주가 어떤 것이었는지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수많은 여성을 두고 엄앵란씨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시 최고의 스타 여배우가 아니었던가.
모든 질문에 강물처럼 유려하게 답하던 그는, 열렬히 연애했다는 김여인의 소식을 묻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그때 우리는 막 시킨 우동 한 그릇을 손에 들고 우물우물 면발을 삼키고 있었다. 아마도 인생이란 그런 것이리라. 한때는 죽고 못살던 애인의 부고를 이야기하면서 우동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창밖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영화 ‘만추’의 한 장면처럼 나뭇잎이 국회의사당의 잿빛 아스팔트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파란 하늘은 가을의 심장 속으로 자꾸자꾸 걸어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