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기도가 왜 그리 길어? 찌개 다 식을라” |유영구

  • 글: 유영구 학교법인 명지학원 이사장

    입력2003-11-28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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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세속적인 부(富)를 유산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마음의 선물인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내 육신의 삶이 자연인으로서의 내 것이라 하면 내 정신의 삶은 바로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목자(牧者)이고 길이며, 거울이다.
    “기도가  왜 그리 길어? 찌개 다  식을라” |유영구

    유상근 전 명지대 총장(가운데)이 통일원 장관으로 재직중이던 1976년 유영구 이사장(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은 유 이사장의 동생 병진씨.

    나의 아버지 유상근(兪尙根) 전 명지대 총장은 일찍이 공직에 종사한 뒤 육영사업에 뛰어들어 ‘명지학원’을 설립했으나 총장 재임중 병을 얻어 1992년 타계했다. 이때 아버지의 나이 70세.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지학원 이사장이 됐다. 고령화 시대인 오늘날 70세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나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타계로 그분의 뒤를 잇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사장직에 취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10년, 그럭저럭 학원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나는 수시로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다. 그야말로 ‘준비 안 된’ 이사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아버지의 못난 아들’

    이렇게 가족사적인 사연을 장황하게 쓰는 것은 오십고개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아직도 아버지 삶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심에서다. 쉬운 말로 나는 아버지 덕을 무척 본 사람이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있게 한 부모님을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이로 꼽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한 인간이 성년이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모님의 양육을 제대로 못 받는 불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다행히 나는 운명의 도움으로 과분한 부모님의 양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어른이 된 뒤에도 한평생 아버지가 이룩한 육영사업을 뒤따라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버지의 못난 아들’일 뿐이다. 앞으로라도 ‘잘난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와 운명,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막중한 빚을 제대로 갚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가장은 나름대로 크고 작은 삶을 이끌어간다. 처음에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공동체 기능을 떠맡아 ‘나’와 ‘우리’뿐만 아니라 ‘남’까지 떠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아버지 역시 육영사업을 하다 보니 정말로 많은 ‘남’을 내 자식처럼 떠맡게 됐다.



    사람이 하는 일이 사회성을 띠게 될 때 창업(創業)이라고 한다. 창업에는 그 규모와 내실에 따라 크고 작은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 크게는 나라와 기업, 작게는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창업이란 삶의 진지한 표출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이룩한 위대한 창조의 드라마가 자칫 성공 신화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처럼 창업자 역시 당대에 몰락하거나 또는 크게 병드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이룩한 신화에 자만하지 않고 뒷사람을 위해 작지만 탄탄한 육영사업을 남겨놓고 가셨다. 나의 소명은 이 귀한 ‘육영’이란 나무를 물 주고 거름 주어서 더욱 크고 튼튼한 나무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으로 나뉜다. 창업이 매우 어려운 일임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수성 또한 이에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변화의 속도가 비교적 더딘 시절에는 넘겨받은 금화를 그대로 지키기만 해도 수성이 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금화를 더 큰 것으로 불려야만 한다. 현대적 의미의 ‘수성’은 고전적 ‘수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배만 남겨주었을 뿐 항해술은 가르쳐주지 않아

    아버지는 나에게 배와 해도(海圖)를 남겨주셨지만 배를 모는 항해술은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명지’라는 작은 배를 내 자신의 책임과 기술로 항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을 일컬어 ‘사무사(思無邪=참된 마음)’라고 했다. 아버지의 한평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무릇 사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가정을 포함한 인간 세상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의 표현방법도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과 표현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이를테면 총론과 각론을 갖춘 사랑, 그리고 나와 남을 함께 아우른 열린 사랑이었다.

    1986년 1월21일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셨다. 이때까지 우리 집안은 중국 작가 라오서(老舍)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4대가 함께 사는 이른바 ‘사세동당(四世同堂)’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증손주 겸 손주). 4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런데 이 다복한 ‘사세동당’에 문제가 생겼다. 맏며느리인 집사람이 줄줄이 딸만 낳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의술의 발달로 태아를 식별하는 방법이 있다지만, 당시는 오직 하느님만 아실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온 집안이 출산을 맞이할 때마다 마음만 설레다가 낙담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 때마다 정작 당사자인 집사람은 얼마나 민망하고 괴로웠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민망해하는 맏며느리에게 “아가! 수고했다. 걱정 마라.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냐. 건강하게 잘 키우면 되지”라며 위로해주셨다.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던 집사람도 처음에는 아버님의 위로 말씀을 반신반의했으나 당신의 말씀이 워낙 자상하고 인자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다행스럽게도 막내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제서야 아버지께서는 “사실은…”하시며 과거의 심경을 털어놓으셨다.

    “장손인 네게 계속 여아(女兒)만 있으니 본인이 얼마나 송구스럽고 괴로울까 해서 그 마음을 달래려고 그런 말을 했었지. 너나 너의 댁이 내가 하도 연기를 잘해서 곧이들은 모양이구나? 사실은 얼마나 손자를 고대했는데…. 이제 득손(得孫)을 했으니 내 속마음을 공개해도 되겠지?”

    만일 우리 부부가 계속 딸만 낳았더라면 아버지의 속마음은 영원히 묻혀버렸으리라. 이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큰딸아이는 출가해 엄마가 됐고 둘째는 대학원을 나와 UN 직원으로 캐나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셋째는 미대를 나와 제 갈 길을 걷고 있고, 바로 그 막내아들 녀석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자수성가와 입지전적 스토리

    아버지는 충청남도 부여의 기계유씨(杞溪兪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기계유씨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사회변동으로 몰락한 사대부 집안으로, 부칠 논밭도 제대로 없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역경 속에서 운명의 요행이 아니라 자면(自勉)으로 하나하나 인생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갔다. 공부도 그렇게 했고 사업도 그러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일컬어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했다. 그 삶의 의지와 뜻은 독실한 신앙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스승은 바로 당신의 어머니(필자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그 어려운 살림에 집안을 꾸려나가면서도 수십 리나 떨어진 교회를 새벽별을 보며 오가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배워왔고 그러다 보니 경건하고 독실한 신앙 역시 할머니를 닮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신앙은 경직된 원리주의가 아니라 생활화된 현실적 신앙이었다. 겉치레 형식과 답답한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일상생활과 호흡을 같이하는, 친근감을 가진 신앙생활이었다.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데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보통사람들은 높이 평가는 하되 가까이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친화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참된 신앙과 참사랑의 산물일 것이다.

    큰고모(아버지의 누이동생)는 기도할 때 늘 시간을 길게 끄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를 앞두고 고모의 기도 차례가 되자 아버지가 갑자기 “얘야! 기도 좀 짧게 해라, 찌개 다 식을라”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그래서 온 식구가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비록 작은 에피소드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는 아버지의 신앙생활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신앙생활

    교회의 장로 소임을 맡았던 아버지는 예배시간에 맨 앞줄에 앉아 가끔씩 깜박깜박 조실 때가 있었다. 아마도 학교 일과 교회 일이 겹쳐 피곤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보기 좋지 않다’며 아버지에게 서운한 소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번번이 웃으면서 “목사님의 유려한 설교를 들으며 잠깐 깜박하니 이게 바로 천국이더라”며 받아넘기시곤 했다.

    참으로 그리운 추억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까이하고 쉽게 생활에 옮길 수 있도록 평생토록 애썼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인지 ‘제1회 민족복음화 선교대상’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룩한 평생사업인 명지학원(명지대학교, 관동대학교 등)의 교육이념 역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참교육이다. 나는 아버지가 남겨놓으신 일을 뒤따르면서 아버지의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을 본받아 비록 작더라도 뭔가 나만의 것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세속적인 부(富)를 유산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마음의 선물인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나는 이 신앙이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무한대로 가꾸고 키워갈 것이다. 내 육신의 삶이 자연인으로서의 내 것이라 하면 내 정신의 삶은 바로 아버지를 배우고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아버지는 나의 목자(牧者)이고 길이며, 거울이다.

    물론, 앞으로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일은 적지 않다. 아버지의 시대와 우리 시대는 사회적 여건이나 환경이 매우 다르다. 옛 분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묵수(墨守)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몫이지만 그 사랑과 슬기는 옛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이룩한 ‘태조(太祖)’ 같은 인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어받은 후계자 ‘태종(太宗)’ 같은 인물도 있다. 태조만 있고 태종이 없으면 역사의 맥은 끊기고 만다. 이것은 봉건 왕조만의 논리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보편적 논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풍요로워진 환경 덕분에 물질적으로는 거의 고생하지 않는 것 같다. 부모님이 주는 용돈도 적지 않고 또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옛날은 너나없이 모두가 어려워 학생들은 용돈이 정말 궁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30여 년 전은 절대빈곤의 시대였으므로 동서남북을 통틀어 돈 나올 데라곤 한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용돈이 필요할 때면 책을 사야 한다며 부모님을 속이고 돈을 받아내는 비상수단을 생각해내곤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 세대라면 누구라도 그런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용돈 타내기 작전이 실패한 사연

    그래서 자식들은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나름대로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꾸미는 한편, 부모님은 없는 살림살이에 진짜로 필요한 책인지 아닌지 자식의 간계를 간파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이러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부모자식간 거래는 지금 생각하면 참 유머러스하면서도 구수한 일화이기도 하다.

    나도 때로는 이 방법을 썼다. 타낼 수 있는 돈의 액수를 올리려면 결국 값비싼 책, 그 중에서도 사전류와 같은 책 목록을 만들어 구입의 당위성을 중언부언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이런 작전은 잘 먹혀들었다. 아버지가 다른 부모님들처럼 알고도 모르는 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날 이 작전 역시 용도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내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책을 수십 권 사다가 내 방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아버지로부터 요란한 질책보다도 더 매서운 소리 없는 채찍으로 사랑의 매를 맞은 셈이었다.

    또 겨울이면 생각나는 일도 있다. 아버지의 이웃사랑에 얽힌 일화이다. 당시 살던 약수동 집(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는 다른 집으로 옮기시고 이 집은 나에게 물려주셨다) 앞은 지금도 그렇지만 번잡한 시장바닥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는 방범초소가 하나 있었다. 시장거리 한 모퉁이에 엉거주춤 서 있는 판잣집 초소는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러웠다. 더구나 겨울철의 약수동은 더더욱 썰렁했다.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며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를 노래하는 사이에 어느덧 불청객 겨울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당시 겨울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면 길모퉁이의 초라한 방범초소에서는 매일같이 실낱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마음에도 그 초소 안을 떠올리며 ‘얼마나 춥고 답답할까’싶었지만 이내 지나쳐버리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와 달랐다. 아버지는 겨울만 오면 그 방범초소를 더욱 자주 드나드셨다. 초소 안의 난로에 연탄을 때는 탓에 비좁은 공간의 공기가 탁하지는 않은지, 또는 난로 과열로 무슨 사고라도 나지는 않을지 살피며 그야말로 방범 아저씨를 보살피는 방범 아저씨 노릇을 하셨다. 때로는 따끈한 차를 끓여서 그곳까지 손수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의 이런 뜻을 헤아리지 못한 우리 형제들은 보기에도 번거롭고 민망해서 아버지께 “그러지 마시고 돈을 좀 보내면 어떨까요” 하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별도로 돈을 주는 것도 좋지만 가욋돈이 생기면 술이나 담배처럼 몸에 안 좋은 것을 하게 되거든.”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아버지는 술, 담배를 삿된 것으로 보셨던 것이다. 그땐 아버지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이제는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의 생활은 근검으로 일관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근검이니 청빈이니 하는 말들은 현실성도 없고 매력도 없는 덕목으로만 생각될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육영사업에 종사하면서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례행사인 환갑과 희수(稀壽)를 그대로 넘겼다. 아무리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환갑잔치를 치르는 터여서, 우리들이 그냥 넘길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는 절약정신이 몸에 밴 탓도 있지만, 나이 든 것을 돈을 써가면서까지 세상에 공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노추(老醜)를 거부한 만년 청년사상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할 만큼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왕왕 비인간적이라는 평판을 듣기도 한다.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크롬웰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아버지는 크롬웰을 닮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도와 교육사업을 한 당숙 한 분이 있었다. 어느해 그분도 환갑의 나이가 됐다. 백씨(伯氏)가 환갑을 차리지 않았기에 자신도 그냥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과 고락을 같이해온 계씨(季氏)의 환갑잔치를 성의껏 마련해줬다. 당숙의 환갑잔치는 대성황이었다. 그분의 인품과 덕망을 진정으로 축하하는 손님들로 붐볐고 귀한 화갑논문집 증정행사도 가졌다. 이렇게 아버지의 자기관리는 멋이 있었다.

    부자라는 끈끈한 육친관계와 함께 아버지의 삶의 궤적은 나에게는 삶의 거울, 문자 그대로 보감(寶鑑)이다. 그것을 조목조목 밝히는 것은 오히려 구차한 노릇일 것이다.

    자식이 어버이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어버이가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공인인 경우, 자식들의 찬사는 때로 듣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고 역겨울 수도 있다.



    그래서 슬기로운 옛사람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자식들이 쓰지 않고 가까웠던 이나 지체가 훌륭한 분에게 부탁했다. 고인의 일생을 그린 행장(行狀)이 그렇고 빗돌에 새기는 비명(碑銘) 역시 그렇다. 이것은 자식이 그리는 어버이상(像)이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도덕률 때문이리라. 이러한 율법은 시대가 변한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뜻있는 이가 냉철한 사안(史眼)과 객관성을 가지고 아버지의 삶을 평전(評傳)으로 엮어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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