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師父’ 김원기 국회의장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功과 過 모두 고려해야”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08-25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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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운동 하고 개혁 부르짖는 사람들, 자기반성 필요
    • 2006년 개헌 가능성 발언, 국회가 정치의 중심 돼야 한다는 뜻
    • 언론개혁, 언론계가 자율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
    • 역지사지, 기브 앤드 테이크, 신뢰가 정치협상술의 요체
    • 노 대통령, 중요한 문제에서 나와 입장 달리한 적 한번도 없다
    • 김홍일 공천 부탁 안 들어줘 DJ와 멀어져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師父’ 김원기 국회의장
    김원기(金元基·67) 국회의장은 최근 공·사석에서 “대통령 권력 또는 제1당의 총재가 임명하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보기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여당 국회의원의 공천은 물론 총선 후 국회의장 선출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은 국회의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몫의 부의장과 상임위원장, 사무총장(장관급), 의장비서실장(차관급)까지 사실상 임명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심지어 부의장실 비서까지 청와대가 명단을 내려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국회가 ‘통법부(通法府)’라는 놀림을 받던 시대의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7월17일 제헌절에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해 4부 요인들과 만찬을 들며 대화를 나눴다. 대통령이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 김 의장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날 만찬은 노 대통령과 김 의장의 관계, 김 의장이 여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준 행사였다.

    국회의사당 의장실에서 김 의장을 2시간 반 동안 인터뷰했다. 당초 오후 3시 반부터 시작할 예정이던 인터뷰가 20분이나 지연됐다. 김 의장이 답변자료를 검토하는 동안 김기만 공보수석이 부지런히 의장 방을 드나들었다. 보좌관에게 ‘왜 이렇게 늦어지느냐’고 묻자 웃으며 ‘지둘러’라고 대답했다. 호남 사투리로 ‘기다려’라는 뜻의 ‘지둘러’는 김 의장의 닉네임이다.

    “17대 국회, 의회정치 시대 열 것”



    -제헌절 의장 공관의 만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노 대통령이 식사 전에 기자들에게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한 뜻에 대해 잠깐 말씀하시더라고요. 첫째, 의회를 존중하고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의장 공관을 방문했다더군요. 둘째, 김원기 국회의장에 대한 개인적 신뢰와 존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요. 제헌절에 4부 요인들이 의장 공관에서 만찬을 한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17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회가 정치의 중심에 서는 의회정치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기대해도 됩니다.”

    -공·사석에서 여당이 제1당을 차지한 국회구조에서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데요.

    “불과 1, 2년 사이에 정치구조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개원사에서 ‘제2의 제헌국회’란 표현을 감히 썼습니다.

    첫째, 17대 국회를 만든 4월15일 총선거가 역대 어느 선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투명했습니다. 관권 개입이 일절 없었습니다. 선진국에 비교해 조금도 손색없는 선거였습니다.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먼 나라의 꿈 같은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4·15 총선에서 이뤄졌어요. 얼마 전 농협중앙회장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과거엔 농협회장선거도 돈 선거였어요. 교육감선거마저 돈 선거였으니까. 그런데 국회의원선거가 깨끗해지니까 농협회장선거도 깨끗해졌어요. 자연스럽게 변화가 온 거죠.

    과거 여당에 공천심사위원회가 구성되고 갑론을박하는 과정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최종적으로 공천권을 장악한 것은 대통령 아니었습니까. 이번 총선에서는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공천과정에서 전국구건 지역구건 단 한 명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어요. 행사할 수 없게 시스템이 갖춰졌어요.

    17대 원(院) 구성에서는 대통령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의원 합의하에 국회의장이 탄생했습니다. 내 권한에 속하는 사무총장 이하 국회직을 임명할 때 단 한 명도 청와대 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야당도 같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적인 흐름이 형성된 겁니다. 야당 몫인 상임위원장도 당 총재가 임명하지 않고 의원총회에서 경선을 통해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불과 1,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통령 권력이나 당권을 가진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경선 또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모든 결정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1, 2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정치에서 상상할 수 없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일부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자랑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여야간 대화의 정치가 실종된 느낌입니다. 야당 대표가 ‘유신독재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공격받고 있죠. 야당은 여당에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벌써부터 대선 전초전을 보는 것 같아요.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자영업이 무너져내리고 있어요. 일자리가 없어 대졸 ‘백수’가 넘쳐납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여야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정치가 과거사에 매달리니까 국민이 피곤해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대단히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특히 서민경제가 어렵습니다. 내수가 일어나지 않고 투자의욕이 상실돼 있습니다. 수출을 비롯 거시지표는 대체로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피부로 느끼는 경제지수는 우울할 정도입니다. 이런 마당에 지난 일을 붙들고 지나치게 소모적인 정쟁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빨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여야가 힘을 합치는 일에 국정의 무게를 둬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한다든지, 거기에 지나친 평가를 하는 데 마땅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 이런 병리현상이 생깁니까. 민주화운동을 하고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봐요. 얼마나 실망했으면 국민의 심리가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민주화세력에 낙담한 국민이 독재를 그리워하는 거죠. 역사가 옳지 못하다고 규정지은 시대로 역류하려는 현상이 생기는 것은 민주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그만큼 국민한테 잘못했기 때문이죠.”

    정치는 직업이자 취미생활

    김 의장은 ‘군사독재 시절’에 관해 말하면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길 꺼렸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박 전 대통령의 인기도가 올라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 의장은 “당적을 떠나 여당과 야당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국회의장이 야당 대표와 직결되는 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이러한 현상이 오게 된 데 대해 집권세력이 남을 나무라기 전에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2006년 개헌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더군요. 이 시점에서 개헌 이야기를 꺼낸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개헌의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국회가 개헌 논의를 포함해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과거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국회에서 이뤄진 적이 없어요. 대통령 권력이나 당권을 장악한 카리스마적인 당 총재가 밖에서 결정을 내리면 국회에선 형식적 논의만 이뤄졌죠. 그래서 국회를 ‘통법부’라고 한 거죠. 17대 국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국회의 장으로 모여 여기서 충돌할 것은 충돌하고 소용돌이칠 것은 소용돌이쳐야죠.

    그래야 국정이 안정됩니다. 국회에서 법으로 통과된 것도 국회가 통과시켰다고 생각지 않고 청와대에서 시켰다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청와대로 집중되는 겁니다. 나는 시민단체가 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민단체 때문에 국회가 형식적인 절차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개헌 문제도 국회 안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봐요.

    이원집정제, 분권형 대통령제, 내각책임제, 대통령중심제 같은 논의를 국회에서 해야죠. 그리고 지금처럼 정치권이 사생결단하는 선거여서는 안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지금 이대로 가서는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같습니다.

    선거용으로 써먹지 말고 국회에서 여야가 함께 논의를 해야죠. 개헌처럼 중요한 문제는 어느 당이 수로 밀어붙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각계 여론을 듣고 전문적인 의견을 수렴하고, 여야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해관계를 절충하고, 바뀐 시대상황에 맞는 제도를 연구하고 찾아내는 장이 국회 안에 마련돼야 합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다른 문제가 있으니까 2006년쯤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장은 정계에 입문하기 전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18년 동안 했다. 마지막 직책은 조사부장. 동아일보 퇴직 사우들에 따르면 기자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김 의장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솔직하게 “기자로서는 재미를 못 봤죠. 나는 정치에 더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에 자신이 넘친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치는 김 의장의 직업이자 취미생활이라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師父’ 김원기 국회의장

    인터뷰중인 김원기 국회의장.

    김 의장은 성장기에 집안 어른 두 분이 선거에 출마해 일찌감치 선거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아버지는 전북 정읍시 감곡면에서 민선 면장을 지냈고 집안 어른인 김택술씨는 2선 국회의원이다. 김 의장 본인도 전주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전라북도 학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의장에 뽑혔다. 고교 시절에 벌써 치열한 선거를 두 번이나 치러본 것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에 유학을 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직장을 잡은 것이 동아일보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의 꿈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시절 언론계에는 정계(政界)로 가는 징검다리로 기자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79년 언론계를 떠나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할 때도 동아일보라는 배경이 큰 힘이 됐다고 자서전 ‘믿음의 정치학’에서 회상하고 있다.

    언론계 출신 정치원로로서 김 의장은 열린우리당에서 논의되는 언론개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청와대, 열린우리당과 언론의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저 신문과의 관계가 불편합니다. 권력이 주도하는 언론개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권력과 언론의 적절한 긴장관계는 필요하지만 대립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까요.

    “언론과 권력이 대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론계 스스로 규제하고 개혁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요.

    언론은 정부권력에 못지않은 영향력과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반 기업하고는 다릅니다. 시대에 맞게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신문시장의 공정거래 질서 확립도 신문사 자율에 맡겼지만 잘된 적이 별로 없어요. 언론계도 스스로 그 점에 대해 반성해야 해요. 권력의 규제가 있기 전에 언론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스스로 변화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언론계의 변화는 언론에 맡겨야지 밖에서 나서서는 안 됩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말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권력의지만으로 언론개혁을 강행해 성공할 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아요. 지금 열린우리당에서 하는 건 내가 알기로는 당장 어떻게 하겠다기보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과정입니다. 급격하게 당장 어떤 것을 마련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라고 봐요.

    실질적으로 국민을 이끌고 나가는 면에서 우리나라처럼 언론의 영향력이 큰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권한에 걸맞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17대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창당과 탄핵 바람으로 초선의원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지금까지 초선 비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여소야대로 구성된 13대 국회(55.9%)였다. 1992년 14대 39.1%, 1996년 15대 46.2%, 2000년 16대 40.7%였다. 17대 국회는 초선이 63%로 국회의원 299명 중 187명이 초선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지금까지 구경하지 못한 ‘변종’이 대거 출현한 것이다.

    17대 국회에서 최다선(6선) 원로인 그에게 초선의원들에 대한 당부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젊은 의원이나 초선의원이 늘어난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초선 의원뿐 아니라 모든 의원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정치를 좀더 긴 호흡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인기나 여론의 진폭에 매달리지 말고 모름지기 자기 축적과 내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힘쓰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튀는 의원이 많긴 하지요. 자기의 독특한 개성이나 소신을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조직에 참여한 이상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조직의 결정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러나 ‘당이 결정하면 나는 따른다’는 식으로 당명(黨命)이 절대적이던 시대는 지나갔죠. 개별적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당이 다 규제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법안통과 또는 정책결정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당 대 당으로 맞설 게 아니라 자유투표, 소신투표의 폭이 더 넓어져야지요.

    그러나 당 총재나 당권을 장악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참여해 토론과정을 거쳐 결정된 사안에 대해선 자기 의견과 다소 다를지라도 거기에 따라야 정치가 안정을 찾을 수 있지요. 실컷 논의해 결정해놓고 자기 혼자 튀어버리면 여야간에 협상도 안 됩니다. 젊은 정치인들이 균형감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민주노동당은 의원이 10명인데 이라크 파병 반대 단식을 일사불란하게 하더군요. 한나라당 의원들은 갑론을박하다가도 박근혜 대표가 결정하면 따릅니다. 튀는 의원은 열린우리당에 가장 많은 것같아요.

    “한나라당과 비교하긴 그렇고…. 민주노동당의 경우 색깔이 단색이에요. 열린우리당은 진폭이 넓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지요. 열린우리당이 다양함 속에서도 중요한 국사를 결정할 때 엇박자가 나오는 걸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지난 국회에서 통과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친일진상규명법)이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김희선 의원 등이 이번 정기국회에 개정안을 낸다고 합니다. 60~100년이 지나 역사의 평가에 맡길 일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견해도 있어요.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시각도 있고….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김희선 의원 등이 민주당 때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이승만 정권 때 당장의 정치적 필요와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정체성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국가의 근본이 흐트러진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고두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고 여러 가지 문제를 수십년 후까지 연장시키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처벌하지 않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규명을 하자는 데 동의해요.

    그러나 사람이 한 일을 선과 악으로 딱 가를 수는 없습니다. 공(功)과 과(過)를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공이 많은 사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작은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실수를 지나치게 과장해 그 사람의 공까지 다 무시하는 선까지 가선 안 된다고 봅니다. 균형 있게 해야죠.”

    -노 대통령이 목포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현재 따로 있지만 개혁노선을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한 이후 민주당과의 합당론이 불거졌는데요. 합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정치에는 항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합당(合黨)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가능성이야 다 있는 거죠. 이 당 저 당으로부터 내가 욕 얻어먹을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모든 정당에 유동성이 있어요.”

    “정대철, 자기희생 컸다”

    -이상수 의원은 출소했지만 정대철 김영일씨 등 16대 국회의 거물들이 의왕교도소에 있는데요. 면회를 자주 간다고 들었습니다.

    “자주 갑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다 만나지만 아무래도 자주 만난 사람은 정대철 이상수씨죠. 사실 노무현 대통령 탄생을 위해 같이 손잡고 노력하던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야당의 서청원 김영일씨도 만났어요.”

    -정대철 의원이 요즘 수감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면서요.

    “그래요.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뭣하지만 사실 정대철씨가 선거과정에서 나하고 같이한 일이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압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우리가 정대철 선대위원장을 중심으로 이전 대통령선거에 비해, 또 이회창 후보 진영에 비해 깨끗한 선거를 치렀습니다.

    대통령후보를 위한 당 후원회를 열어 한나라당은 100억원을 걷었어요. 그 며칠 후에 치른 소위 집권 여당의 후원회 모금액은 개인의 후원회 모금보다도 많지 않은 3억원 정도에 그쳤습니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의 실상이에요.

    정대철씨도 내가 아는 한 사재(私財)를 많이 썼어요. 처음에 컴퓨터니 뭐니 장만할 때 (대금을) 선대위원장이 전부 냈습니다. 자기희생이 컸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복통이 터질 노릇일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그 사람이 모금한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니고 정치관행대로 회계처리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법의 잣대에 저촉될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범법을 한 건 아닙니다. 정대철씨는 억울한 생각이 들 테죠. 모든 것은 재판을 통해 가려져야죠. 어느 시점에선 과거를 털고 새 출발 해야 합니다.”

    김 의장은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고 나는 국회의장, 이해찬은 국무총리가 됐는데 정대철과 이상수는 국회의원 출마도 못하고 감옥에 있다”며 “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비서진이 전했다. 김 의장은 이상수 전 의원 면회 때 “오갈 데 없는 차용호 보좌관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차씨를 비서관으로 채용했다.

    김 의장은 정무수석에 사촌동생인 김생기씨를 임명해 몇몇 신문에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다. 김생기 수석은 김 의장을 25년 동안 보좌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이기택 의원 보좌관을 할 때부터 김 의장의 보좌관을 한 사람이다. 김 수석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김 의장은 다소 격앙된 말투로 답했다.

    “나는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정치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개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습니까. 취재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김생기를 내가 비서실장 시키려고 했어요. 누구도 (그를) 비서실장 시키는 데 시비 걸 수 없다고 봅니다. 내가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같이했어요. 모든 것을 상의해가면서 정치를 함께해온 일급 참모예요. 친인척과 상관 없어요. 선거도 김생기 중심으로 치렀고 내가 중요 당직을 수행할 때 김생기가 모든 대외관계를 챙겼습니다. 김생기 밑에 있던 사람 중에 국회의원 된 사람 많아요. 김원기의 큰 정치를 위해 자기희생을 한 사람입니다. 내가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용을 아는 다른 기자들은 하나도 그걸 쓰지 않았어요. 몰라서 안 쓴 것이 아니고 말이 안 되는 얘기기 때문에 안 쓴 겁니다.”

    배석한 김기만 공보수석이 보충설명을 했다.

    “정치부 기자 5년 이상 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런데 내가 브리핑하는 자리엔 없던 초년 여기자가 기사를 덜컥 썼어요. 김생기 수석은 1947년생으로 만57세입니다. 1995년 통합민주당의 사무부총장을 했고 통추 기조실장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정무특보도 했어요. 경력을 놓고 보면 사실 비서실장 시켜도 손색이 없어요. 친인척이란 이유 때문에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장은 다시 “내가 비서실장 시키려고 하니까 본인이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화제를 잠시 기분 좋은 쪽으로 돌렸다.

    “정치에선 믿음이 가장 중요”

    김원기라는 이름 석자를 들으면서 13대 국회 원내총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지만 세 야당이 연합하면 과반수를 넘기는 황금분할의 구조였다. 민정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이었다. 그는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원내총무로 김윤환(민정당) 최형우(통일민주당)씨와 협상을 벌여 유신 때 없어진 국정감사를 부활시켰다. 또 5공비리 조사특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를 가동시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서 하산시켜 증언대에 세웠다.

    -정치협상을 잘하는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영수회담을 할 때도 사전에 총무들이 각본을 합의했습니다.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것이 합의된 게 청문회 제도입니다. 광주사태라 해서 불온시하던 것을 명칭부터 바꿔 광주민주화특위를 만들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보낼 때도 협상을 통해서 했습니다. 집권 여당의 실세였던 정호용 이원조씨 가슴에서 의원 배지 떼고 정계 은퇴시키는 것도 여야 합의로 했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못한 것 가지고도 합의가 안 되지만, 그때는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것들을 여야 합의로 이뤄냈습니다.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의정사에서 여야간 대화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화 파트너를 잘 만났습니다.

    정치적인 절충과 합의 도출은 말싸움에 이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내 입장에서만 논리를 펴지 말고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입장을 바꿔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요. 내가 얻은 만큼 그쪽도 얻는 것이 있어야 당에 가서 설득을 할 수 있죠. 얻는 것도 있지만 줄 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뢰가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의 정치학’이란 책을 냈는데, 정치에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어요. 당내에서도 마찬가지고 당과 당의 대화에서도 신뢰가 중요해요. 노선이 다른 정치집단간 대화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는데 믿지 못할 때는 쉬운 것도 풀 수가 없어요. 믿음은 평소 서로 쌓아가야 해요.”

    김원기 협상술의 요체는 세 가지인 셈이다. 첫째, 상대방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라. 둘째,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셋째, 상호 신뢰다. 김 의장은 이 셋 중에서 신뢰를 으뜸으로 친다.

    “김윤환 총무와 문서로 합의한 적이 있습니다. 정호용 문제 등 여러 안건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문서였는데 서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나중에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전개되면서 그 약속이 일부 이행되고 일부 이행이 안 된 채 파국이 왔습니다. 평민당 내에서 그 문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김대중 총재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민정당을 대표해 김윤환, 평민당을 대표해 김원기 양자가 합의한 문서니까.

    공안정국에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문서를 공개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어요. 그러나 핍박을 받더라도 한번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키기로 했지요. 당하면서도 약속은 지켰어요. 한번 약속한 것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철학입니다. 사이가 좋았을 때 알게 된 비밀과 약점을 사이가 나빠졌다고 해서 악용할 사람인가 여부로 사귈 사람이냐, 사귀지 못할 사람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민정당 사람들은 내가 악용하지 않기 때문에 터놓고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내가 그쪽 내용에 대해 잘 알게 되고 판단할 수 있었어요.”

    김 의장은 1991년 북한에 갔을 때 전금철(당시 조평통 부위원장)씨가 “김원기 선생은 협상의 명수라면서요”라고 물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1990년대 초 노 대통령과 가까워져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로 불리고 대통령 정치고문도 했는데요. 노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건 언제입니까.

    “1990년대 초 통합민주당 때 나는 평민당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고 노 대통령은 꼬마민주당 계였죠. 둘 다 최고위원으로서 공천심사를 하며 자주 논의했죠. 계보가 달랐는데 나중에 상호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계보나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전체에 지장을 주는 일을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해 자기 이익을 버려야 할 때는 선뜻 잘 버리더라고요. 보통 구태정치에 익숙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다른 계보 사람의 경쟁력이 나아보여도 고개를 푹 숙이고 계보 이익을 지키는데, 노 대통령은 객관적으로 자기가 민 사람에게서 하자가 발견되면 선선히 버리고 이쪽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도 내가 비록 평민당을 대표하는 입장이지만 계보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이 더 합리적이고 더 옳은 것을 제시할 경우 수용해주자 내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을 겁니다. 중요한 문제에서 한번도 나하고 입장을 달리한 적이 없어요. 뿌리가 다른 데도…. 노 대통령은 엄밀히 말하면 이기택 계였죠.”

    김 의장과 DJ의 질긴 인연은 1980년 5·18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사흘 전인 15일 열린 정읍 동학제에서 시작됐다. 초선의원 김원기는 동학제 추진위원회가 DJ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DJ가 온다는 소문이 퍼져 정읍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군부는 초청장을 들고온 DJ의 참석을 막을 수 없었다. 김 의원은 자신의 연설 차례가 오자 “여러분은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듣기 위해 여기 모였을 것입니다”라며 마이크를 DJ에게 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사흘 뒤 세상이 바뀌면서 도지사와 군수가 이 일로 옷을 벗었고 70 노인이던 동학제 추진위원장은 옥살이를 했다. 이날 행사로 김 의원은 DJ와 가까워졌다.

    DJ와의 질긴 인연

    -통산 전적이 8전6승2패인데 1985년 신민당 돌풍을 몰고온 2·12 총선에서 첫 낙선의 고배를 들었습니다. 왜 민한당에 남아있었습니까.

    “사실 묻혀진 이야기인데 DJ가 신민당에 대해 그렇게 동조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민한당은 표면상 유치송씨가 총재였지만 선거대책위원장 조윤형씨와 정대철 김원기 셋이 내용적으로 민한당을 장악했지요. DJ는 민한당에 대해 우호적이었어요. 신민당은 YS당이라는 인식이 있었죠. DJ가 귀국한 뒤 조윤형 정대철씨와 나 셋이 동교동에 갔더니, DJ가 ‘김상현씨가 내 대리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내 말 듣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지금도 공개할 수 없는 얘기가 있지요. 그때는 김상현씨가 신민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민한당에 공천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읍에서는 누구를 공천하는 것이 선거에 도움이 되겠냐고 묻기도 했어요. 선거가 끝나면 동교동계는 동교동계대로 양쪽에서 합치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신민당으로 간 사람 상당수가 처음엔 민한당에 공천신청을 했습니다.”

    원내총무를 하며 DJ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김 의장은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 따라가지 않아 두 번째 패배를 맛본다. 그가 DJ와 멀어진 데는 장남 김홍일씨의 공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일이 계기가 됐다.

    “14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 DJ와 이희호 여사가 김홍일씨를 공천해달라고 간곡하게 말하더군요. 나도 가능하면 김홍일씨를 공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합야당이라는 명분을 갖기 위해 꼬마민주당과 평민당이 5 대 5 지분으로 합쳐 통합민주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경상도에서 출마할 사람들이 ‘김대중 하나만 가지고 경상도에서 싸워도 당선 희망이 없는데 거기에 홍일이까지 업고 뛰라고 하면 우리보고 자살하라는 것과 똑같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통합한 걸 깨고 우리가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거였지요. 이해할 만하잖아요.

    김홍일씨를 공천하면 대통령선거에서 DJ가 100만표는 손해볼 것이라는 이야기를 동교동 사람들도 했어요. 아무리 김대중 총재가 부탁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논리로 내가 잘랐어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했죠.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DJ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했는데 권노갑 의원이 같은 공천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다 보고할 것이라 생각하고 소홀히 했던 겁니다. DJ는 그렇게 간곡하게 얘기했는데 안 들어주고 1년이 지나도록 일언반구 없는 데 대해 섭섭함이 있었을 겁니다.”

    김홍일 의원은 결국 14대에서 공천을 못 받고 15대에서 권노갑씨 지역구(목포)를 물려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3김 중에 둘은 대통령이 되고 JP는 9선에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지냈습니다. 이에 비해 고향 선배인 소석(이철승)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지요. 꼭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석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측면이 있죠. 독재 치하에서는 거기에 선명하고 날카롭게 맞서는 것이 정치 활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데 소석은 다소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데서 힘이 반감됐다고 할 수 있겠죠.”

    -중견 정치인이니 대권 꿈을 가져봤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정치부 기자들이 ‘언론인 출신 중에서도 대통령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면 김 의장 얼굴이 빨개졌다던데요.

    “대권의 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수석 최고위원도 했고 DJ가 정계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내가 당권에 도전할 준비를 했으니까요. 우리는 완전히 지역주의 3김정치로 희생된 세대입니다. 독재정권과 대립각을 세워 형성된 카리스마, 소위 민주화의 중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중심이 오래 지속되다보니까 우리 세대는 거기에 묻혔어요.”

    “대권 꿈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

    -3김의 덕을 봤지만 피해자라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군요.

    “3김의 피해자죠. 통추 대표를 할 때 대통령선거에 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야 하는데 국회의원선거에서 패했죠. 지난번 대통령후보 경선 때는 김대중 대통령을 겪고 나서 민심의 동향으로 볼때 호남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을 이어 대통령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어요. 대통령을 한나라 쪽에 주지 않으려면 노무현을 후보로 내세워야 본선에서 한번 싸워볼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정치인한테는 정치자금이 필요악인데요. 8차례나 선거에 출마하면서 돈과 관련해 사고를 한 번도 안 냈고 추문도 없는 거 같습니다.

    “나는 배후가 있는 정치자금은 철저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가령 무슨 부탁이나 조건이 있는 돈은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돈에 여유가 있어본 적이 없고 항상 허덕이지만 선거 치르고 필요할 때는 누군가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돈 없어서 할일 못 한 적은 없습니다. 나를 도와준 것은 대개 친척과 친구들입니다. 그런 인간관계에 의해서 도움을 받고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한번도 여유 있는 정치를 해본 적 없고 그저 빠듯하게 지냈지요.

    DJ도 내가 총무를 하는 동안 모든 정치를 나하고 상의했지만 절대 돈 심부름은 안 시켰어요. 돈 심부름은 다른 사람이 했지요. 그 양반이 저 놈은 시켜봐야 별로 하려고 하지도 않고 실적을 못 올린다는 것을 파악한 거지요.”

    “우리 세대는 3김 정치의 피해자”

    정치인 중에는 사람을 기억하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치에 성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김 의장이다. 조어(造語)를 하자면 김 의장은 ‘인맹(人盲)’ ‘인치(人痴)’에 가깝다. 그가 원내총무 시절 출입기자들과 골프를 쳤을 때 일화다. 김 총무는 두 팀 중 앞팀에서 플레이를 했다. 두 팀이 목욕탕에서 섞였을 때 뒤팀 기자 한 사람을 만나자 김 총무가 인사를 했다.

    “아, 오랜만이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게 아니라 우리도 언제 골프 한번 같이 합시다.”

    이 일화를 들려주자 김 의장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당했던 언론인이 말한 것이니 틀림없는 실화다.

    “내게 그런 점이 있어요. 인정해요.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 그런 건 아닙니다. 사람 이름을 외우는 노력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에요.”

    사람의 이름을 천재적으로 기억하는 정치인으로 김상현 전 의원과 이수성 전 총리가 꼽힌다. 두 사람은 공히 ‘형님’ 2만명, ‘동생’ 3만명을 두고 있다는 속설이 있다. 김상현 전 의원 경우는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에 그 사람의 특징과 경력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외운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그날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명함을 수십 장 꺼내놓고 읽는다. 이런 노력을 통해 한번 만난 사람의 이름과 특징을 정확하게 기억해 그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김 전의원 이야기가 이어지자 김 의장은 “그건 장점입니다”라고 말했다.

    -‘지둘러’라는 닉네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요.

    “기자들이 가십기사에서 쓰기 시작했어요. 내가 민한당 대변인을 할 때 발표를 잘 안 했어요. 아마 기자들이 갑갑했을 겁니다. 그때 민한당에는 독재권력이 작용한 결정이 많았습니다. 밖으로 진상이 알려지면 실망스런 내용이 있었어요. 참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언론인이던 김진배(전 의원)씨가 공천 달라고 찾아왔길래 국민이 진상을 알고나면 야당 찍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내가 말릴 정도였어요. 기자들은 대변인에게 자꾸 설명을 요구하는데 진상을 공개할 수도 없고 설명을 해줄 수도 없었죠. 그래서 ‘아, 이 사람들아, 지둘러 지둘러’ 하면서 자꾸 미뤘지요. 내막을 다 말할 수도 없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둘러’가 된 거죠.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할 때 스스로 ‘우보(牛步)’라는 호를 지었어요. 뚜벅뚜벅 믿음직스럽게 걷는 자세로 인생을 살자는 뜻이죠. 그런 심리가 내재했던 거죠.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어를 했어요. 독일어 격언에 ‘여유있게 서둘러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을 좋아했습니다.”

    소걸음으로 신중하게 걸으며 실수하지 않고 정치인으로서 대성했지만 소걸음으로 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특종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보(牛步)’와 ‘지둘러’

    김 의장은 골프 외에 다른 운동을 안 한다. 연습장에 가면 두 시간씩 땀을 흘리며 공을 친다. 10년 전쯤 골프연습장에서 5번 아이언으로만 1시간 동안 공을 치는 김 의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특이한 연습법이다.

    -공식 기록에 드라이버 길이가 220이라고 돼 있던데 단위가 미터입니까, 야드입니까.

    “아, 그게 야드면 거리가 난다고 볼 수 있간디.”

    220m는 약 241야드다. 나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장타다. 핸디캡은 10. 이 정도 핸디캡을 유지하자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 김 의장은 골프 연습장에서 두 시간 동안 네댓 바구니 공을 치는 것으로 체력보강을 하고 대중탕에서 냉온탕을 오가며 스트레스를 푼다.

    -열린우리당의 차기 주자로 김근태 정동영 장관이 언론에 오르내리는데요. 그들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 어떻게 전망합니까.

    “글쎄요. 후배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구체적인 평을 하기는 어려워요. 차기 대선까지는 3년이 넘게 남았단 말이에요. 앞으로 제도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죠. 변수가 많아요.”

    김 의장의 저서에는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어린 시절 망태를 짊어지고 개똥을 주어오던 이야기가 나온다. 화학비료가 모자라던 시절이라 개똥을 주어 두엄을 썩히는 데 썼다. 정읍시 감곡면은 노령산맥과 호남평야가 만나는 고장이다. 감곡면의 쌀 생산량이 전북 진안군 전체보다 많았다. 그러나 김 의장이 태어난 마을은 들녘이 아니라 산 쪽에 있었다. 한 면에 대학생이 한둘이던 시절에 김 의장 5남매는 모두 아버지가 보내주는 ‘향토장학금’으로 서울에서 하숙하며 대학을 마쳤다. 아버지 김환국(88) 옹은 지금도 아들을 대신해 지역구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정정하다.

    김 의장은 36세에 만혼(晩婚)을 했다. 김선홍 전 기아자동차 회장이 그의 동서다. 김 의장은 “그 양반 요즘 소시민으로 지낸다”고 김 전 회장의 근황을 전했다.

    김 의장에게 “바쁘실 텐데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뷰중 가장 긴 답변이 나왔다. 너무 길어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면 이렇다.

    DJ가 국민회의 만들 때 가장 큰 고민

    “내가 정치적으로 가장 고민한 때는 DJ가 국민회의를 만들 때였죠. 전북에서도 DJ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이 정읍이에요. 선거를 치러보면 목포하고 똑같이 나왔어요. 나는 DJ 복귀를 찬성했지만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출마하라고 권유했습니다. DJ가 출마하면 정대철 김상현이 포기할 판이고 이기택과 붙어 7대3으로 이길 수 있다고 했죠. 그러나 DJ는 이기택씨가 깽판을 놓을 것이라 주장했어요.

    민주당이 지자제 선거에서 압승을 했습니다. 서울시에서 조순 시장을 당선시켰고 충북에서도 자민련을 이겼어요. 지역주의를 극복한 민주당을 이유 없이 버리고 당을 만들면 호남 사람들은 따라가겠지만 쓸 만한 사람들은 안 따라간다고 했죠. 나중에 보니 내 판단이 맞지 않았어요.

    내가 그렇게 본 건 그때 민주당 의원 중에서 90%가 당이 쪼개지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죠. 민주당 의원들이 나보고 나서서 분당(分黨)을 막으라고 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를 앞세워놓고 전부 항복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노무현 김정길씨는 DJ를 선택하면 부산에서 떨어질 줄 알면서도 야권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우리와 손잡았던 것 아니에요. 호남에서도 중진의원 한 명 정도는 노무현 김정길씨처럼 원칙을 지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호남지역 정서에는 맞지 않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내가 수석 최고위원이고 오른팔 역할을 했는데, 민주당을 깨고 새로운 당을 만들면서 나하고 일언반구 사전 상의 없이 결정한 뒤에 무조건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가족회의를 했어요. 김대중 총재를 안 따라가면 내가 국회의원 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따라가기도 어렵게 돼 있는데 국회의원 한번 안할 각오하고 소신대로 할 생각이라 했더니 가족 전원이 찬성했어요. 아버지도 사내자식이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했어요.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선 가능성이 없어요.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내가 DJ와 당을 달리했을 때 그래도 김원기를 찍겠다는 사람은 30%도 안 됐어요. 전국구로 나오라거나 서울로 지역구를 바꾸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것이 100% 확실하지만 호남에 가서 십자가를 짊으로써 지역주의에 쏠리는 민심에 반성의 계기를 만들자고 맘먹고 출마했던 것입니다.”

    -노 대통령의 현재 국정수행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객관적인 입장에 있지 않아 점수를 줄 시험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우니까 채점을 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 의장을 3년 넘게 보좌했다는 송주하 보좌관은 “지금까지 한 언론 인터뷰 중 가장 긴 인터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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