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판·검사는 외로워야 하고, 변호사는 떳떳해야죠 ”

  • 황호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7-04-10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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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특종 1보 확인해준 ‘이진강 검사’
    • 박군 사건 밝혀낸 단서는 고문 경찰관 성경책
    • 사법연수원 1000명 시대…“기업 정착 변호사 잘나가요”
    • “로스쿨 시행되면 대학은 입시학원 될 것”
    • 준비 덜 된 공판중심주의…“너희들 혼자 하냐” 말 나와
    • “수갑 채우시죠”…5공 비리 전경환씨 수사 비화
    • 검찰총장 동창 염보현 전 서울시장 구속 작전
    • 5년 투병 남편 보살피며 세 아이 입시 치른 ‘영웅’ 아내여…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변협회관 건물은 위용을 자랑하는 법원과 검찰 청사에 비해 규모가 작고 외관이 초라하다. 변협회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심당(心堂) 이병린(李丙璘) 변호사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 변호사는 제13대(1964~65년), 17대(1968~69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유신 독재 시대에 민주 회복을 위해 싸운 인권변호사의 원조(元祖).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제정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수시로 긴급조치를 발동해 철권통치를 했다. 1974년 이 변호사는 윤형중 신부, 함석헌씨, 강원용 목사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를 발족하고 대표위원을 맡았다.

    유신치하에서 검찰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사법부의 법관들은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양심범들에게 ‘정찰제 판결’을 내려 감옥으로 보냈다. 이 변호사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 회복과 인권 옹호를 위한 활동을 치열하게 펼치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옥고를 치렀다. 변호사들이 변협회관 로비에 이 변호사의 흉상을 세운 것은 변협이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라 인권옹호기관임을 말하려는 뜻일 게다.

    변호사는 법원, 검찰과 함께 사법의 한 바퀴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최근 법원, 검찰, 변호사회의 세 바퀴가 유례없이 삐걱거리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공판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법원 우월주의에 입각한 발언이 쏟아지면서 법원과 검찰, 변협과 법원의 대립이 날카로워졌다.

    이진강(李鎭江·64)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검찰이 친정이다. 법무부와 대검에서 주요 보직을 오가며 왕성하게 일하던 이 검사는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을 잃고 고통 속에 검찰을 떠났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으로 병마(病魔)를 이겨내고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거쳐 지난 2월 대한변협 회장에 취임했다.



    격동의 역사가 휘몰아치던 1986~88년 이진강 부장검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과장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재수사와 5공(共) 비리 수사의 실무 주역이었다. 올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 20주기가 된다.

    젊은 변호사 표심(票心) 잡다

    대한변협 회원으로 개업 중인 변호사는 현재 8066명. 휴업 변호사까지 합하면 1만명이 넘는다. 대한변협회장의 선출은 2단계로 치러진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5230명 회원의 직접 투표를 통해 대한변협회장 선거에 나갈 후보를 선출한다. 대한변협회장 선거는 대의원 간접선거 방식이다. 서울변호사회가 대한변협 전체 회원의 3분의 2를 차지하므로 사실상 서울변호사회에서 추천받으면 그대로 대한변협회장에 당선된다.

    근년 들어 보수와 진보가 변협회장을 교대했다. 1999년에는 ‘민변 1.5 세대’로 불리는 김창국 변호사가 당선됐고, 2001년에는 보수 성향의 정재헌 변호사가 회장을 맡았다. 2003년 박재승 회장은 진보로 분류됐고, 2005년 천기흥 회장은 보수다. 이 회장은 보수나 진보로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가르자면 보수 쪽에 가깝다.

    “기자들도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진보냐 보수냐 따지는 것보다는 누가 변호사 대표로서 적임자냐가 중요합니다.”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진강 변협회장은 ‘보수’라는 이미지에도 젊은 변호사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다.

    ▼ 하여튼 그런 분류법에도 의미가 없지는 않아요. 법조의 주류는 아무래도 보수 쪽일 텐데 진보 쪽에서 회장을 맡아 그쪽 컬러로 나가니까 보수들이 각성해 거푸 천기흥, 이진강 회장을 당선시켰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어떠어떠한 사람한테 맡겨놓았더니 변호사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변호사 단체 수장으로서의 역할이 뭔지,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다른 생각을 하더라는 거죠. 정치권력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쪽에 영합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회원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본 거죠. 선거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의사가 결집됐죠. 법조계에서는 보수적 성향이 주류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법조인들은 사회의 흐름을 안정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요. 개혁도 좋고 바꾸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서서히 이뤄져야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팍 뒤엎는 식은 주류 법조인들에게 별로 호감을 주지 않습니다.”

    ▼ 지난해 12월1일 시작해 2월말까지 지속된 선거를 치르면서 변호사들을 맨투맨으로 만났다지요.

    “선거운동을 시작할 때 주변에서 젊은 사람들의 표심(票心)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좌우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변호사회 5230여 명 회원을 일일이 찾아갔습니다. 구로구 독산동 디지털 단지와 여의도 금융기관에 있는 인하우스((In-House·社內) 변호사들까지 사무실로 찾아가 얘기를 나눴어요.”

    사법연수원생은 27기(1998년 수료)까지 300명 선을 유지하다 28기부터 500명선이 됐고, 그 후 매년 100명씩 불어나 33기(2004년 수료)부터 1000명 선이 됐다.

    “판검사로 임용되는 인원을 제외하고 한 해에 600~700명씩 변호사가 나오고 있어요. 숫자가 많으니 젊은 사람들이 선거를 사실상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있지요. 임동진 변호사가 이른바 민변과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젊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죠. 저는 연세가 지긋한 변호사들한테는 지지를 받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보수꼴통’이라고 인식할 우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들의 생각이 뭔지, 젊은 변호사들은 변협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대화를 나눴죠. 그냥 표만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의견을 들었어요. 대화하면서 젊은이들의 표심을 잡았습니다.”

    기업에서 인정받는 젊은 변호사들

    ▼ 젊은 변호사들의 공통된 희망은 무엇이었나요.

    “일자리 얻기가 여의치 않고 사무실 개업도 어려우니까 살길을 찾아달라는 호소가 쏟아져 나오리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나이 든 세대가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 진출해 성공적으로 정착했더군요. 그들에게서 패기와 희망 같은 것을 느꼈어요.

    특히 금융기관과 기업의 인하우스 변호사들은 판검사로 임용 안 되고 대형 로펌에도 취직이 안 돼 그쪽으로 간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죠. 그래서 설움도 당하고 위축돼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죠. 하지만 2∼3년 사이에 정착이 됐더군요. 처음에는 과장·부장급들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밀어내려 한다’는 의식으로 경원시해 융화가 잘 안 됐다고 해요. 그런데 CEO를 비롯한 경영 간부들이 변호사들 데리고 일해보니까(변호사들이) 잘하거든요. 그래서 요새는 법률 업무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영 업무에 관해서도 CEO들이 변호사의 의견을 듣는답니다. 모 재벌기업 회장은 올해 변호사를 많이 뽑아서 법무실에만 배치하지 말고 경영팀에도 보내라고 했대요. 법조인들이 사회 각계로 뻗어나가면 법에 의한 지배가 확립될 수 있지요. 계약이 정확해지고 투명한 사회가 되는 거죠.”

    ▼ 요새는 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고 나와도 단독 개업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로펌에 들어가려 한다더군요. 아무래도 연수원을 갓 졸업한 젊은이가 사회적 네트워크 없이 허허벌판에서 개업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겠지요.

    “연수원 갓 나온 변호사들 중에 단독으로 개업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대부분 선배 변호사 밑으로 들어가거나 3∼5명씩 그룹을 지어 선배 변호사를 모시고 사무실을 차려 경비를 절약하죠. 미국, 일본에서도 로펌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죽어라고 고생하며 배우죠. 지금 새로 나오는 법조인들도 그런 각오를 해야 해요. 새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단독으로 차리고 무불통달(無不通達)로 의뢰인을 받다보면 자칫 변호사업계 전체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겠어요.

    제가 선거 공약에서 젊은 변호사들 위해 변호사협회에 ‘Young Lawyer’s Division(청년변호사위원회)’를 만든다고 했어요. 일정한 연령 또는 일정한 경력 미만의 변호사들로 청년변호사위원회를 구성해 교육을 하고 경륜이 풍부한 원로 변호사와 1대 1로 멘토링(mentoring)을 해주려고 합니다.”

    ‘나 홀로 변호사’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진강 변협회장은 고(故) 박종철군 사건을 언론에 처음으로 확인해준 검사였다.

    ▼ 변호사 수가 늘어나면 변호사 사무실 문턱이 낮아지고 서민도 큰 부담 없이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죠.

    “실제로 선임료가 낮아졌지요. 금액은 사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젊은 변호사들 중에는 자기네 수준에 맞춰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하는 변호사가 많아요. 내가 젊은 변호사들한테 ‘연수원에서 금방 나온 처지에 대법관이나 검찰 고위간부 출신 변호사 수준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서비스의 질과 수준에 따라서 선임료를 받아야죠.”

    그는 지금도 사무장과 운전기사 없이 자가운전을 하며 사무실에 여직원 한 사람만 두고 있다. 그래서 ‘나 홀로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국은 변호사 수가 워낙 많기도 하지만, 변호사는 역대 대통령과 상원의원, 하원의원, 주지사, 주의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직업이다. 한국에서도 변호사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이 나왔고 국회의원, 시도지사,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의원에 변호사들의 진출이 활발하다. 2002년 대선은 노무현 변호사와 이회창 변호사 간 대결이었으니 정상명 검찰총장이 “(이번 대선에는) 대선 주자 중에 변호사가 없다”고 아쉬워할 만하다.

    “법조인들이 국회는 물론이고 행정기관에 활발하게 진출해 일을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변협이 국가의 인재풀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인적 자원을 배양해 국가 곳곳에서 쓰일 수 있도록 공급했으면 해요.”

    ▼ 로스쿨 관련법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입니다. 변호사회는 로스쿨에 반대하고 있는데요. 대학들이 심사에 대비하느라 건물 신축, 교수 채용등 꽤 투자해놓은 상태입니다. 현재 사법시험 합격자를 1000명씩 배출하는 마당에 로스쿨에 반대하는 것은 직역(職域) 이기주의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조인 양성제도와 법학교육에 중대 변화를 가져올 제도가 잘못 만들어지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합니다. 대한변협은 로스쿨이 우리 실정에 안 맞고 자칫 법학 교육에 엄청난 파행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전임 집행부가 사법개혁위원회 때부터 로스쿨에 반대했어요. 그러자 사법개혁위윈회 후속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변협을 논의에 참여시키지 않고 정부안을 만들었습니다. 대한볍협도 반대만 한다는 비난을 받기 싫어 정부안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죠. 제가 협회장이 된 후 전임 집행부가 추진한 내용을 검토해봤습니다. 국회 법사위원들도 걱정하고 있죠. 중요한 법안이 정파 간 빅딜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바라는 개혁입법이라면 그쪽으로 가야겠지만, 문제가 많고 부작용이 예상된다면 재검토해야 합니다.”

    ▼ 대한변협은 로스쿨법이 제정되더라도 입학정원에 관심이 높을 텐데요. 로스쿨 입학정원은 교육부의 소관이 되겠지만 변협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종전 집행부가 1200명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정했습니다. 제가 그 의견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총원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로스쿨을 새로 만들면서도 법과대학은 그대로 둡니다. 로스쿨을 두는 대학만 학부를 없애고 로스쿨을 안 두는 대학은 법과대학을 그냥 둘 수 있어요. 로스쿨이 설치되지 않은 대학은 법학부를 포함해 인문계가 전멸할 수밖에 없어요. 로스쿨은 법과대학 출신을 3분의 2, 비(非)법학부 출신을 3분의 1 뽑게 돼 있습니다. 인문계뿐 아니라 이공계도 전부 로스쿨 시험 준비를 할 겁니다. 대학이 로스쿨 입시준비학원이 되는 거지요. 부산과학고 재학 때부터 각종 과학경시대회 금상을 휩쓸고 포항공대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한 여학생이 최근 서울대 의대로 편입하지 않았습니까. 로스쿨도 대학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 수 있죠.”

    변호사에게 부여된 로비스트 자격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 변리사들이 특허소송에서 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지금 산자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법무사들은 소액사건을 대리하게 해달라는 법안을 청원하고 있고, 법무부에서는 로비스트법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모두 변호사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일이라 반대하겠군요(웃음).

    “물론 반대합니다. 우리가 반대하면 언론 쪽에서 직역 이기주의라고 금밥통, 은밥통 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국민에게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시루떡을 찔 때 쌀가루와 팥고물로 켜를 안치고 밑에서 불을 때는데, 처음부터 꾸준하게 일정한 온도로 불을 때 한번에 익혀야 합니다. 불이 중간에 꺼지면 떡이 설죠. 선 떡은 다시 불을 아무리 강하게 때도 안 익어요.

    마찬가지로 법률 공부도 처음부터 기초를 잘 닦아 중단 없이 해야 합니다. 기초가 단단하고 도덕성을 갖춘 사람한테서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받아야죠. 법률 서비스는 한번 잘못 제공되면 의뢰인한테 엄청난 손실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소한 단독 사건이라도 자격 없는 사람한테 맡겨서는 안 돼요.”

    다소 비판적인 질문이 이어지자 그는 숨을 고르려는 듯 부속실에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 법무부가 추진하는 로비스트법은 왜 반대합니까.

    “변호사 아닌 사람이 공무원이 취급하는 사건에 관해 청탁을 하고 금품을 받으면 법률 위반입니다. 원칙적으로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이죠. 그런데 변호사들을 무력화하고 자격 없는 사람한테 로비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 법질서가 무너지죠.”

    모든 법률은 소관 상임위를 통과한 뒤 국회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다. 법사위 소속 16명 의원 중 변호사가 아닌 사람은 조순형·노회찬·이용희·김동철·선병렬 의원 5명. 변호사 의원들은 변호사의 이해가 관련된 법안을 심의할 때는 당적을 초월해 의기투합한다. 필자가 “변호사한테 불리한 법률은 법사위에서 절대 통과가 안 될 테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이 회장은 웃었다.

    그는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6년 5월부터 노태우 정부 초기인 1988년 8월까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과장을 했다. 중앙수사부 1과장은 지금으로 치면 수사기획관과 공보관을 겸한 자리여서 업무가 과중했다.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재수사와 5공 비리 수사를 하면서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역사의 물줄기 바꾼 성경책

    1987년 1월 경찰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1차 수사 때 고문에 가담한 경관을 5명에서 2명으로 축소 조작해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지검은 이를 모르고 그대로 기소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해 5월 김승훈 신부가 “고문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한 이후 검찰이 고문 관련자 3명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민심이 요동쳤다. 장세동 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 장관, 김성기 법무부 장관, 서동권 검찰총장이 경질됐다. 새로 취임한 이종남 검찰총장은 수사 주체를 서울지검에서 총장 직속의 중앙수사부로 바꿨다. 김성기 장관은 퇴임하면서 기자실에 들러 “수사 주체를 바꾼다고 새로운 게 드러나겠습니까”라며 회의적 견해를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김차웅 차장의 특종기사로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 치안감 등 경찰간부들이 축소조작에 관련됐다는 사실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이종남 총장이 조한경 경위의 변호사를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조 경위와 그의 형, 그리고 변호사를 조사실에서 만나게 했죠. 대화하는 도중에 성경책 이야기가 나왔어요. 1월에 구속된 조한경 경위는 여차하면 언제든지 폭로할 기세로 구치소에서 성경의 여백에 경찰의 은폐조작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두었어요. 그 성경을 구치소에서 찾아내 바로 압수했지요. 성경의 메모를 단서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감을 구속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경찰이 직접 은폐에 관련되지 않고 박군 유족들을 관리한 사람을 검찰에 들여보낸 거예요.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끌려온 경찰을 풀어주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박원택 경감을 찾아내 구속했어요. 이때 검찰이 풀어준 사람이 나중에 이한영(김정일 전처 성혜림의 조카) 피살 사건 때 텔레비전을 보니까 분당경찰서장이 됐더군요.”

    박종철군 사건 1보는 ‘중앙일보’ 법조담당 신성호 기자(현 수석 논설위원)의 작품으로 언론사에 빛나는 특종이다. 1987년 1월15일 당시 석간신문이던 중앙일보는 1판을 찍다가 윤전기를 세우고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2단 기사를 집어넣고 1.5판을 찍었다. 그러나 박군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기사는 동아일보의 특종이었다. 동아일보는 박군 사건을 고비마다 대대적으로 보도해 6월 항쟁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하튼 박군 사건 1보가 없었더라면 시국의 물줄기를 바꾼 이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아무도 짐작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신 기자에게 1보를 확인해준 사람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朴군 부친의 전화 한 통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2007년 1월 대한변협회장 후보로 선출된 이진강 변호사와 하창우 서울지방 변호사 회장(왼쪽).

    “중앙일보의 특종을 제가 확인해줬지요. 의도적으로 흘린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 대검에서는 아침마다 서동권 검찰총장, 정해창 대검차장, 한영석 중앙수사부장, 최상엽 공안부장 등 ‘빅4’가 모여 회의를 하고 중수부 1과장인 저와 임휘윤 공안1과장이 보고를 했어요. 아침 9시에 우리가 보고를 하고 있는데 공안부 쪽에서 쪽지가 들어왔어요. 쪽지를 받은 임 과장이 ‘서울대 학생 한 명이 경찰에서 조사받다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했죠. 보고를 마치고 내 방에 돌아와 있는데 신 기자가 찾아와 ‘오늘 보고 중에 서울대생 한 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없었습니까’라고 물어요. 미리 알고 확인하러 온 거죠. 검찰총장실 회의 끝난 뒤였으니까 오전 10시 넘었을 거예요. 그래서 신 기자에게 ‘공안 1과장이 쪽지를 받아 보고를 하더라’고 말해줬죠.”

    이로써 1보를 확인해준 사람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신 기자는 박군의 죽음을 어떤 루트를 통해 알게 됐을까. 필자는 박군 고문치사 10주기를 전후해 박군의 부친 박정기씨를 만난 적이 있다. 박씨는 아들이 죽었을 때 부산 청학양수장 직원이었다. 필자는 박종철군 사건으로 한국기자상을 두 차례(1987, 88년) 받았다. 박군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은 기자로서 아들을 잃은 분을 위로하고 싶은 생각에서 박씨에게 만찬을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박씨는 이런 얘기를 했다.

    “경찰이 종철이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해서 부랴부랴 상경했는데, 사무실에 가둬놓고 전화도 못 걸게 했죠. 경찰은 정확한 진상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향과 영정 사진을 준비하는 것으로 봐 종철이가 경찰에서 조사받다 죽은 것 같았습니다. 친척 중에 중앙일보 부국장이 있었어요.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공중전화로 중앙일보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진강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박군 1보를 확인해준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 신 기자가 그렇다고 얘기해주길래 알게 됐죠. 수사 발표를 마친 후 함세웅, 김승훈 신부에게 전화를 드렸어요. ‘검찰이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미흡한 점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라고 했지요. 두 신부가 ‘그런 대로 잘됐습니다. 만족합니다’라고 해서 고마웠어요.

    수사 끝나고 발표할 때 방송사고가 났어요. 생방송을 못하게 하니까 방송사들이 발표 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현관 앞에 있는 중계차에 전달해 방송했어요. 실제 상황보다 2, 3분 늦지만 생방송처럼 되는 것이죠. 그런데 발표 중간에 테이프를 운반하는 사람이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방송이 끊기는 사고가 났습니다. 방송사고가 나자 뭔가 다시 조작을 한다고 생각한 시청자들이 대검에 항의전화를 엄청나게 걸었어요.”

    1987년 중수부 드림팀

    ▼ 박종철군 1주기 때 동아일보가 안상수 변호사의 증언과 황적준 박사의 일기를 입수해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축소 조작에 관여한 사실을 밝혀냈죠.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씨만 구속하고 치안본부장은 불지 않아 그때 처리를 못했죠. 1년 후 황적준씨 일기가 나와 강씨도 직무유기로 구속했죠.”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론에 밀려 5공 비리 청산이 시작됐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비리 수사를 시작했다.

    “나는 1과장으로 총괄 지휘를 하고 주임검사는 이명재 3과장이었지요.”

    그때 중수부 라인은 드림팀이었다. 1과장 이진강, 2과장 강신옥(전 대법관), 3과장 이명재(전 검찰총장), 4과장 이종찬(전 서울고검장). 4명 중에서 선임인 그만 검사장을 못하고 검찰을 떠났다. 격동의 세월에 하중(荷重)이 무거운 사건을 연속으로 감당하다 건강을 잃은 탓이다.

    “이종찬 팀에서 전경환씨의 동서 황흥식씨를 맡았죠. 황씨 집을 압수수색을 했는데 허탕을 치고 나오다가 화가 난 수사관이 지하실에서 공사하고 남은 횟가루 포대를 발로 찼어요. 푸석하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 뭐가 걸렸어요. 횟가루 속에 비밀장부를 숨겨놓은 것이죠. 전경환씨 자금을 관리한 장부가 몽땅 나와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재야법조 ‘뚝심 리더’ 이진강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진강 회장에게 필자의 신간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를 전했다.

    5공 비리의 마무리 사건이라고 할 만한 염보현 전 서울시장 수사는 강신욱 과장 팀에서 했어요. 5공 비리 수사를 원만하게 마무리하자면 염씨를 구속해야 하는데 이종남 총장과 고려대 동창이고 가까웠죠. 강 과장이 증거를 찾아내면 제가 총장한테 승낙을 받아주기로 짰죠. 강 과장이 건설회사 한양의 배종열 회장을 불러 밤새 수사를 해 염 전시장에게 1억몇천만원 준 것을 찾아냈죠. 그 다음날 저와 둘이서 총장한테 들어가 보고를 했죠. 총장인들 어떻게 하겠어요.

    김경회 중앙수사부장이 부산지검장으로 발령 나면서 형사부장이던 강원일씨가 중수부장 직무대리를 했습니다. 그분이 ‘이종남 총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전경환씨 쪽 영향을 받아서 수사를 안 하려고 뺀다’고 오해하는 바람에 어려운 국면이 있었죠. 이 총장이 수사를 안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간 여유를 갖고 충분히 검토해 완벽하게 구색을 갖춰 국민 마음에 쏙 드는 수사결과를 발표하려고 했던 거지요.”

    “사무실에서 쓰러질 것이지…”

    “전경환씨를 구속하던 날 이 총장이 나보고 검찰청을 나설 때 수갑을 채우지 말고 교도소에서 구속을 집행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요. 요새는 수갑 안 채우지만 그 시절에는 구속 집행할 때 수갑을 채웠어요. 제가 반대했죠. ‘텔레비전으로 생방송이 나가는데 국민이 보고 싶은 것은 전경환씨가 수갑 찬 모습입니다. 그 사람 체면 봐주다가 일 잘하고서 욕을 곱빼기로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조금 서운하게 생각하더라도 여기서 수갑을 채워 데리고 가야 합니다’라고.

    이 총장은 주임검사를 불러 같은 의견이냐고 물었어요. 이명재 과장도 제 의견과 같았죠. 이 총장은 참모 말을 잘 듣는 것이 장점입니다. 두 과장의 의견이 같자 ‘좋다. 채우자’라고 하더군요. 생방송이 시작되자 카메라 앵글이 수갑에 맞춰지더라고요. 이 총장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전화를 걸어 ‘카메라가 수갑만 비추는구먼. 이 과장이 조언을 잘해줘 고마워’라고 말했어요. 대학 선후배 간이니까 터놓고 말씀하셨겠지만.”

    한 달반을 강행군해 전경환·염보현씨를 구속하자 과로한 탓인지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먼저 커피 잔을 들 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승강기에 올라타서 출발하는 순간 심장이 둥둥 뛰는 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퇴근길에 차를 멈추고 신호대기를 하고 있을 때는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큰 수사를 마치고 조금 여유가 생겨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를 시작했다. 첫 홀에서 3타 만에 공을 그린에 올려놓고 퍼트하려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이 몰려왔다. 간신히 투 퍼트를 마무리하고 다음 홀로 이동하려다가 가슴이 너무 아파 근처 의자에 걸터앉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 진단 결과 심장에서 부정맥 증상, 뇌에서 혈관기형이 발견됐다. 중수부 1과장으로 2년 반의 격무를 마친 데 대한 보상 성격의 인사를 앞두고 그런 사고가 생겨 심적 불안이 컸다. 이종남 총장은 “그 친구, 그렇게 일을 열심히 했으면 사무실에서 쓰러질 것이지 하필이면 흉하게 골프장에서 쓰러지나”라며 걱정을 했다. 그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누가 쓰러질 때 시간과 장소를 가려서 쓰러지나. 그나마 사람이 많은 곳에서 쓰러져 목숨을 구했으니 감사할 뿐이지”라고 생각했다. 그해 9월 서울 동부지청 차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전임이 김태정씨(전 검찰총장)로 그에게는 섭섭지 않은 인사였다.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고분고분 잘 먹었다. 그런데 새벽 4시만 되면 심장이 떨리고 식은땀이 나 속옷이 흠뻑 젖었다. 병원에서 관상동맥조영 촬영을 하다가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약 중에 의존성이 심한 약이 있었는데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약을 끊기 위해 3년 동안 피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부지원에서 조직폭력이 연루된 법정증인 살해사건이 터졌다. 대통령까지 관심을 표시해 거의 한 달 동안 밤늦게까지 검사들을 독려했다. 검찰이 압박해 들어가자 범인이 자수했다. 법정증인 살해범은 나중에 사형이 확정됐고 김영삼 정부에서 집행됐다. 자수한 범인이 사형집행된 것에 대해 그는 지금도 개운치 않은 심정이다.

    법정증인 살해사건 수사를 마치고 심장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감이 엄습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뒤 의존성 약을 끊는 일에 착수했다. 사흘 밤 사흘 낮을 뜬눈으로 지새다 의식불명이 돼 119 구급차에 실려 갔다. 아내는 “앞으로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 테니 살아만 나세요”라며 울부짖었다. 퇴원해 쉬고 있을 때 법무부 장관이 서울고검으로 발령할 테니 쉬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고검은 전망이 불투명한 자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동기생과 후배들이 좋은 자리에 발령돼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면서 아픈 경황에도 패배의식이 몰려왔다.

    검사는 외롭고 고독해야

    검사장으로 승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2년 반을 서울고검에서 보내고 성남지청장 발령을 받았다.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됐으나 검사장 승진과는 점점 멀어졌다. 운이 없으려고 그랬는지, 옳게 일을 한다고 민주산악회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을 원칙대로 엄중하게 처리했다. 이 사건 처리도 승진에 장애가 됐다.

    ▼ 검찰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출세가 인생의 모든 것은 아니겠지요. 인생은 검찰 아닌 곳에서도 승화시킬 수 있죠.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하고 이렇게 변협회장을 하는 것도 검찰에서 아쉽게 접은 꿈을 다시 이루는 의미가 있는 건가요.

    “그렇지요. 지금도 검찰 후배들이 나를 아쉽게 생각하죠.”

    ▼ 변호사의 수사 참여권은 인권보호 차원에 충분히 보장되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정착되지 않았죠. 수사 단계의 변호사 참여권은 제가 서울변호사회장 할 때부터 주장했어요. 동기생인 김상수 서울고검장이 어떤 자리에서 ‘자기는 뭐, 검사 안 해봤나. 입장 바뀌니까 금방 달라지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검사의 수사단계에서 변호인 참여를 보장해주면 수사도 신속하게 잘 될 수 있고 무리한 수사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죠. 검사가 변호사를 수사의 방해꾼으로 여기지 말고 실체의 진실을 발견하는 공동의 협력자라고 생각하면서 수사하면 거북할 이유가 없는 거죠. 자기네가 인심 쓰는 것처럼 하면 안 돼요.”

    ▼ 검사가 변호사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했을 때 불응하면 의뢰인(피의자)한테 불리해질까봐 검사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지요.

    “나는 변호사를 하면서 두어 번 풀로 입회해봤어요. 검사가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피의자가 답변하기 곤란한 대목에서는 나와 의논해 답변했죠. 밤이 늦어지면 ‘다음날 하자’고 요청해 다음날 데리고 나가 수사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변호사들이 그렇게 참여하려면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사건 내용도 제대로 파악해야 되잖아요.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으면 안 되죠. 그러자면 의뢰인과의 관계가 재정립돼야 합니다. 의뢰인들도 참여 요청을 하면 그만큼 보수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변호사들도 타임 차지(time-charge)를 해야 합니다. 미국 변호사들은 타임워치를 눌러놓고 의뢰인을 만납니다. 공판 중심주의로 가서 법정에서 공방을 벌이게 되면 그만큼 시간이 길어지죠. 국내 로펌에도 일 맡기면 변호사들이 몇 시간 걸리고 얼마 썼다고 타임 시트를 씁니다. 일반 개업 변호사도 보수체계를 바꿔야 합니다.”

    ▼ 검찰이 얼마 전에 새 윤리강령을 만들었습니다. 변호사와 식사, 골프, 사행성 오락, 여행 같은 사적 접촉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검찰의 대선배로서 이런 규정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는지요.

    “법조인에게는 이런 강령보다도 마음가짐과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고한 고재호 대법관이 ‘법조반백년(法曹半百年)’이라는 회고록을 남겼습니다. 그 책 서문에 ‘법관은 공정, 검사는 권한의 자제, 변호사는 사회봉사가 기본 덕목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법조삼륜이 되기 바란다’는 당부가 있어요.

    수사방법은 피의자 ‘수준’에 맞게

    제가 검찰에 있을 때는 ‘검사는 권한을 자제해야 한다’는 원로 법조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야 법조인이 돼 검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처지가 되니까 이 말이야말로 검찰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강령에서 얘기한 골프 접대, 향응성 식사 같은 것도 멀리하며 지내야지요. 그러자면 판사와 검사는 외롭고 고독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검사 할 때 만날 사람, 안 만날 사람 구분했어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조심하며 가리는 거죠. 밥 산다고 해서 아무 자리나 가면 말썽이 생깁니다. 검사 품성교육이 중요하다고 봐요.”

    ▼ 제이유 사건을 계기로 검찰총장이 피의자의 신분이나 나이를 고려해 반말 수사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검찰 조사받고 나와서 자살한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아직도 언어폭력이 남아 있는 건가요.

    “검사들이 수사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피의자의 수준에 맞춰야지요. 어떤 때는 반말하고 야단을 쳐야 하는 당사자가 있을 거예요. 어린 학생이 피의자라면 ‘그랬습니까’ ‘저랬습니까’ 하기보다는 엄하게 훈계하며 ‘이놈 혼낸다’고 해야 하잖아요. 아주 파렴치한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따끔하게 야단을 쳐 마음을 돌려먹게 만들고 잘못된 것을 승복하게끔 해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물론 강압수사는 안 되겠지만.”

    ▼ 제이유 사건 수사에서 검사가 변호사 선임과 관련해 피의자한테 ‘변호사는 반드시 판사와 동창생을 선임하라’ ‘돈을 갖다 바르고 탬버린을 흔들어라(룸살롱 접대)’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러한 관행이 아직도 법조계에 남아 있습니까.

    “비정상적이지요.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내가 서울변호사회장할 때도 그런 걸 바꾸고 싶어서 캠페인을 했죠. 변호사들에게 사건 소개해주고 돈 받아먹는 브로커들 때문에 법조 이미지가 흐려져요. 수사와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니까 실력 있고 성실한 사람을 임명하는 쪽으로 의뢰인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변협과 지방회가 함께 브로커 없애기 운동을 벌이려고 합니다.”

    ▼ 올해가 대통령선거의 해인데요. 대선 때는 여야 후보들이 서로 고발해 사건을 검찰로 가지고 오잖아요. 1997년 대선 때는 한나라당이 DJ 비자금 사건을 고발했지만 김영삼 대통령과 김태정 검찰총장이 DJ 편을 들어줘 수사를 유보했지요.

    2002년 대선 때는 김대업의 소위 ‘병풍(兵風)’ 사건이 있었죠. 여당의원 몇이 배후에 어른거린 사건이죠. 그때는 검찰이 선거 전에 김대업을 구속해 이회창씨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찌됐거나 이번 대선에서도 여야가 선거를 치르다 서로 고발해 사건을 검찰로 몰고 오면 검찰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제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대통령선거에서 어떤 걸 사건화해 검찰 수사를 이용하려고 들면 안 되죠.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져야 하잖아요.”

    ▼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광주지법 훈시에서 ‘법조삼륜’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라고 했죠. 사법의 중추기관은 법원이고 검찰과 변호사는 보조기관이라는 말도 했죠.

    “선거운동 기간에 유인물에도 법조계의 중심은 대한변협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썼어요. 법원이 독단적으로 사법을 운영할 수 없어요. 형사소송은 검사와 변호사, 당사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공방을 하는 운동경기죠. 법원은 레퍼리이고 국민이 관중입니다. 대법원장,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모두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대한변협은 유일한 재야단체입니다. 경륜으로 따져도 오랫동안 법원, 검찰에 몸담았던 분들이 변협 회원입니다. 대통령이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재야법조의 수장을 만나 의견을 들었어요. 독재 치하에서 법원과 검찰은 침묵했지만 이병린 변호사는 꼿꼿하게 투쟁했지 않았습니까.”

    ▼ 대법원장이 한 말 중에 법관이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재판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로서 법정에 출입하면서 법관이 권위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까.

    “권위적이라고 것과 권위는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권위적이라는 것은 군림하고 딱딱하고 억누른다는 의미죠. 권위 자체는 품위 있고 존중받을 자세지요. 변호사, 검사들이 법정에 드나들 때 꼭 법관한테 예의를 차려요. 앉아 있다가 법관이 들어오면 일어서서 인사를 합니다. 그런 예의는 법관의 권위에 머리 숙여주는 것이 아니라 법관의 최고 덕목인 공정한 재판을 해달라고 하는 의사 표시입니다. 재판은 결론도 공정해야 하지만 진행 과정도 공정해야지요.”

    법조계 중심은 변협

    ▼ 이용훈 대법원장이 “변호사들이 법정에 내는 자료는 상대방을 속이려는 문서인데 그것을 믿고 재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지요. 변호사들 만나보면 그 발언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하더군요. 자기도 변호사 하면서 돈 많이 벌어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어느 변호사든지 그 얘기를 듣고서 화가 안 나는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얘기지요. 그런데 그 진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우리가 해명을 못 들었어요. 대법원장의 진의를 들을 기회가 없이 공방만 있었습니다. 대한변협이 대법원장 퇴진을 요구하자 잠깐 유감의 뜻을 표했고, 그것을 사과 수용으로 받자 서울변호사회에서 미흡하다고 반격했지요. 관훈토론회에서 유감 표명을 한다고 했는데 토론회가 취소됐지요.”

    이 회장은 ‘신동아’ 인터뷰 다음날(3월6일) 이 대법원장을 예방해 변호사회와 대법원의 껄끄러운 관계를 정리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내부 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과되지 않은 말이 있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이 회장은 다음날에는 김성호 법무부 장관, 정상명 검찰총장을 찾아 법조삼륜이 각자 임무를 다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변협회장으로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이 대법원장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공판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일부 오해가 있어요. 공판중심주의는 법관이 법정에서 뭐든지 알아서 다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재판 절차가 공판정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맞는 얘기지만 법관이 다 알아서 해주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는 아니에요. 형사사건의 경우 검사와 피고인, 변호인이 대등한 처지에서 충분히 공방을 하고 레퍼리인 법관이 재판을 이끌어가면서 최종적으로 판정을 해주는 것이 공판중심주의예요.

    그런 의미에서 공판중심주의는 진작 했어야 하고 꼭 해야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변호사 처지에서는 공판중심주의를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변호사들이 바라는 바예요. 이를 위해선 법관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야 합니다. 사건에 대해 완전심리를 해줘야 되잖아요. 재판부가 담당하는 사건수를 크게 줄여야 합니다.

    양조장 집 아들

    검사도 예전에는 자백을 받아 서류로 만들어 던져놓고 관성적으로 했죠. 그런데 공판중심주의가 되면 자료를 전부 수집해놓고 시기에 맞춰 내야지요. 변호사와 똑같습니다. 공판정 구조도 변호사와 피고인이 함께 앉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게 바꿔야지요.

    법원, 검찰, 변호사가 다 공판중심주의를 바라지만 여건이 미비해 서로 아옹다옹하는 거예요. 법원은 공판중심주의를 하면 국민의 사법 신뢰도가 높아질 것 같으니까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확 던졌는데 검찰이나 변호사나 준비가 안 돼 있으니 ‘너희들 혼자 하냐’고 나오는 거예요.”

    포천 일동 막걸리는 전국에서 으뜸가는 맛을 지닌 막걸리로 지명도가 높다. 이 회장의 부친은 포천군 일동면 화대리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화대리는 필로스 컨트리클럽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 그의 장형이 어머니(95)를 모시고 지금도 양조장을 경영한다.

    광복 직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버젓한 기업이 별로 없어 양조장 주인들이 그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유지였다. 이 회장은 서울 집에서 태어나 장충초등학교를 나왔다. 정몽준, 박근혜 의원이 초등학교 후배다. 중학교 때 일동에서 2학년까지 다니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휘문고교를 졸업했다.

    그는 고려대 법대에 진학해 2학년 초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 4학년 때 사법시험 5회에 합격했다. 5회 합격자는 모두 16명. 지금 1000명을 뽑는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동기생으로는 이원성(전 국회의원), 유지담(전 대법관), 김영일(전 헌법재판관)씨 등이 있다.

    부인(나길자)은 고려대 법학과 62학번 동기생. 62학번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키 150cm에 몸무게 45kg의 가냘픈 여학생에게 홀딱 반해 대학 1학년 때 프러포즈했고 8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2남 1녀를 뒀다. 자식농사가 부러움을 살 만큼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공이라고 했다. 아내는 병으로 5년 동안 비틀거리는 남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하면서 대학입시를 앞둔 연년생 삼남매에게 정성을 쏟았다. 장남 문한은 법무부 인권국 검사, 딸 세인은 부산대 법대 교수, 둘째아들 명한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과장으로 근무한다.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한 시기가 바로 그가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였다. 그 시절 아내는 남편과 함께 전국 사찰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순천 송광사, 남원 실상사, 예산 수덕사, 공주 동학사 갑사, 설악산 백담사,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부처님의 공덕이었던지 그는 의존성 약을 끊는 데 성공하고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평생 가르침 준 책 ‘생명의 실상’

    ▼ 후배 변호사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새로 나온 변호사들이나 판사 검사를 하다가 나온 분들한테도 꼭 국선변호를 해보라고 권하지요. 사선 변호의 경우 당사자들이 선임료를 주기 때문에 구치소에 면회를 가면 ‘빨리 석방시켜달라’고 부담을 주지요. 심지어 ‘무슨 묘수가 없냐’고 묻거나 ‘다른 변호사가 맡은 사람들은 빨리 나가는데 어떻게 일을 하길래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나가지 못하느냐’며 압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국선변호를 맡아 구치소에 갈 때는 떳떳하지요. 성심성의껏 변론을 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면 그들은 사건 전모를 털어놓고 변호인에게 운명을 맡겨버립니다. 가족들이 나중에 알고 찾아와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경우도 있어요. 국선변호인을 해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변호사로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바둑은 4급. 골프 핸디는 18. 만년 보기 플레이어지만 공에 ‘노터치’ 하는 것을 긍지로 삼는다. 신장(176cm)이 커서 드라이버는 꽤 장타를 날린다.

    평생 가르침을 준 책을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자 그는 일본의 다니구치 마사히루(谷口雅春)가 쓴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들었다. 40권짜리 책자다. ‘질병은 본래 없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자연치유 능력이 있으므로 약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 그는 이 책을 읽고 응급처치용으로 바지 시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니트로글리세린’을 영영 버렸다. 이후 치열한 노력으로 의존성 약을 끊을 수 있었다.

    “변협 회장이 돼서 검찰에서 출입기자로 인연이 닿았던 황 위원을 만나 이런 기회를 갖게 돼 감회가 깊습니다. 협회장의 소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언론이 우리 변호사들에 대해 좋은 면을 국민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아쉽게도 좀 잘못하는 일부 변호사들의 나쁜 면이 너무 부각돼 야단을 많이 맞죠. 바라건대 좀 밝은 면을 많이 알려주면 변호사들이 더 힘을 내 좋은 쪽으로 일을 많이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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