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배우 김윤진이 출연한 ‘로스트’와 ‘석호필’(주인공 스코필드의 한국식 발음)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프리즌 브레이크’. 두 드라마는 한국계 미국인 모니카 메이서씨가 작가로 참여했다. 메이서씨는 미국 방송계의 ‘하인스 워드’다. 워드가 3년 연속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NFL) 올스타에 선정됐듯, 그는 2005년 ‘로스트’로 에미상, 골든 글로브상, 미국작가조합이 주는 최우수작가상을 휩쓸었다. 백인 남성 위주의 드라마 작가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그의 한국 방문은 여러모로 뜻 깊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메이서씨는 딸, 어머니와 함께 모국을 찾았다. 모녀 3대가 함께 한 한국행에 대해 그는 “드디어 어머니와 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배우인 흑인 남편 사이에서 낳은 10개월 된 딸의 이름은 딜란 순 마리 메이서(Dylan Soon-Marie Macer). 이름 가운데의 ‘순’자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고향에 온 기분이에요. 미국에서도 정초면 가족이 모여 떡국을 먹었는데, 드디어 한국에서 먹을 수 있게 됐네요. 63빌딩부터 강남역, 압구정까지 안 가본 곳이 없지만 역시 사극 속 배경으로 많이 등장한 경복궁이 최고예요. 실제로 보니 굉장히 섬세하고 예술적인 혼이 담겨 있어요. 그곳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는 한국 드라마가 살짝 부러워지기도 하고요.”
그는 주한미군 재정담당 장교로 한국에 왔던 아버지와 이화여대 학생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0년대 초 결혼한 부모는 결혼 후 1년여 만에 도미해 그를 낳았다.
“두 분은 서로 영어와 한국말을 가르쳐 주다 만나셨대요. 그래서 둘만의 비밀 얘기를 할 때마다 한국말로 하시던 기억이 나요. 언니는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알지만 저는 대학 때 교회에서 배운 몇 마디가 전부예요. 앞으로 3년 안에 대화하고 글을 쓸 정도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월남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며 “한국의 아픈 현대사에 대해 잘 안다”고도 말했다.
“작가의 나이는 비밀”
메이서씨는 미국의 한인 지도자 단체인 ‘넷칼(Net-KAL)’의 1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계 미식축구선수 하인스 워드를 ‘마이 히어로(My hero)’라고 표현한 그는 한국계 혼혈인들의 현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한국계 혼혈인들이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강한 민족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혼혈이 차별받는 현실은 슬프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취재부터 스토리 구성, 집필까지 담당한 드라마는 ‘로스트’ 시즌 1의 에피소드 7, 8편과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1의 에피소드 7편, 시즌 2의 에피소드 6, 11편 등이다.
물론 처음부터 정식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뉴욕 배사 칼리지에서 아프리카학을 전공한 뒤 1995년부터 2년간 뉴욕 크로스로드 극장, 조지 스트리트 플레이하우스, 샌디에이고 올드 글로브 시어터, 조지프 팹 퍼블릭 시어터 등 주로 연극 무대에서 감독 및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7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 독립영화사 ‘파크데이’의 공동 제작자와 월트디즈니 TV 만화영화부 기획담당 이사를 거친다. 드라마작가로 입문한 것은 2002년. 드라마 제작사인 폭스사에서 운영하는 ‘라이팅 프로그램(Writing Program)’의 수강생으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미국 드라마 ‘24’ ‘로스트’ ‘프리즌 브레이크’에 참여해 2005년 최우수작가상을 받은 미국 방송계의 ‘하인스 워드’ 모니카 메이서씨.
메이서씨는 미국 드라마 첫 진출작인 ‘24’에서 보조작가(assistant writer)로 참여한 이래 ‘로스트’에서 정식 작가(staff writer)로,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스토리 에디터(story editor) 겸 프로듀서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미국의 작가 시스템은 보조작가를 시작으로 정식 작가, 스토리 에디터, 이그제큐티브 에디터(executive editor) 등의 단계로 나뉜다. 이 단계에 따라 수당 또한 철저히 차등 지급된다.
“미국 드라마작가 그룹은 마치 군대 같아요. 군대 조직의 계급체계처럼 일사불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치밀한 대본이 나올 수 없거든요.”
2004년부터 정식 작가로 참여했으니 경력이 그리 긴 편은 아니다. 외모도 앳되어 보이는 그에게 나이를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인터뷰 내내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던 그는 나이에서만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미국 작가는 자기 나이를 정확히 밝히지 않아요. 시청자가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않길 원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10대 청춘물을 쓰고 싶은데 작가 나이가 마흔 살이라는 게 밝혀지면 시청자는 ‘작가가 너무 고루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또 20대 작가가 40대 중년의 이야기를 쓴다면 ‘인생 경험도 짧으면서 어떻게 쓰냐’고 하겠죠. 뭐, 결국 어려도 문제고 나이가 많아도 문제니 밝히지 않는 거예요(웃음).”
그러더니 “대략 30대 중반”이라고 살짝 귀띔했다.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주인공 스코필드가 탈출하기 위해 칫솔로 감방의 변기를 뚫는 아이디어를 드라마에 넣으려고 작가들이 서로 로비까지 벌이는 거 아세요?”
미국 드라마의 대본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묻자 그가 대뜸 이렇게 되물었다. 그가 들려준 ‘프리즌 브레이크’ 제작 뒷얘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다. ‘프리즌 브레이크’ 작가 7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의를 ‘치른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는 작가 7∼10명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지며, 매회 에피소드는 수차례 회의와 상호 경쟁 및 합의를 통해 결정된다.
하루 종일 모여서 하는 일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 화장실 변기를 칫솔로 뚫어 주인공이 탈옥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이를 다른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경쟁에 붙인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생각이 더 그럴듯하고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식사 시간, 쉬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기를 쓰고 동료작가들을 설득한다. 결국 최종 투표를 통해 다수의 선택을 받은 아이디어가 드라마에 반영된다.
에피소드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주. 일주일에 걸쳐 공동회의를 하고, 아웃라인 작업과 집필을 한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이야기만이 시청자의 공감을 살 수 있다.
‘24’에서 메이서씨는 보조작가였다. 40대 1의 경쟁을 뚫고 보조작가로 선발된 그가 한 일은 일종의 조사 업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작가를 보조하는 임무가 아니었다. 드라마의 설정이 얼마나 현실성 있고 개연성 있는지를 따져보는 중요한 일이었다.
메이서씨가 작가로 참여한 미국 드라마 ‘로스트’(왼쪽)와 ‘프리즌 브레이크’(오른쪽)의 한 장면. 두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인 캐릭터에는 메이서씨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다.
“‘로스트’에는 한국인 커플 둘과 흑인 세 명이 등장해요. 그런데 작가들이 백인 남자가 대부분이어서 한국인과 흑인의 문화나 생각을 잘 모르죠. 그럴 때마다 흑인과 한국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저한테 물어봐요. LA 한인타운의 흑인 폭동은 어떤 사건이냐, 서울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냐…. 그러면 저나 어머니의 생각을 토대로 의견을 제시하죠. 그래서 소수인종을 그리는 대목에는 제 목소리가 들어가 있어요.”
드라마 곳곳에 ‘한국 흔적’
그는 드라마 곳곳에 한국계 작가의 흔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2에서 부통령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는 ‘빌 킴’이라는 캐릭터다. 원래 ‘빌 킴’은 ‘월터 천’이라는 중국인으로 설정된 배역. 하지만 그는 제작 도중 ‘월터 천’을 한국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비록 모함을 꾸미는 악역이긴 해도 부통령의 최측근이 될 정도면 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포럼에서 미디어에 나오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위상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든 아시아계가 미디어에 나와야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TV를 보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고 역할모델로 삼을 수도 있고, 자신감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종교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미국 작가 그룹에서 그는 드문 크리스천. 드라마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묘사할 때도 그의 의견이 반영됐다.
“‘로스트’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승객들이 섬에 남겨지는 장면을 구상할 때 작가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요. 내가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떤 심정일까, 그리고 무엇을 할까 등에 대해서. 그러면 저는 종교를 갖든 그렇지 않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해요. 종교가 없는 작가들은 제 이야기를 존중해주고요.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스코필드가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그는 배우 김윤진과 얽힌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혹시 김윤진이 맡은 고전적인 동양여자 ‘선’의 캐릭터가 메이서씨의 어머니를 바탕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물어 봤다. 그는 “원래 없던 캐릭터가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웃었다.
“급조된 캐릭터라 서양인에게 정형화한 동양여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됐죠. 그래서 마음에 안 든 부분도 있고…. ‘선’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기를 바랐죠. 시즌을 거듭할수록 말도 하게 되고 조금씩 변해가게 돼 다행이에요.”
‘로스트’ 촬영 중에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김윤진과는 e메일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 실제로 그는 “김윤진을 염두에 둔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커피프린스 1호점’ 팬
그는 한국 드라마 팬이기도 하다. 최근 로스앤젤레스의 한국방송 전문 케이블TV에서 본 드라마 중 ‘커피프린스 1호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의 캐릭터는 감정이 풍부해 울거나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오면 설거지하다가도 멈추고 볼 정도예요. 반면 미국 드라마는 캐릭터를 둘러싼 사건들이 워낙 강해요. 차가 폭발하거나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인물보다는 사건 중심이죠.”
그의 방한은 국내 드라마 제작사 ‘플랜비’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플랜비’는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국계 미국인의 성공담을 담은 ‘자이언트’를 제작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 작품의 스토리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그는 한국 작가와 공동작가 계약을 앞두고 있다. 그는 “한국 드라마를 써보고 싶다는 꿈이 이뤄져 기쁘다”며 “‘자이언트’에는 척박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나 자신의 이야기도 담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