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죠스’ ‘E.T.’ ‘인디애나 존스’ ‘쥬라기 공원’으로 매번 자신이 세운 흥행기록을 스스로 깨뜨린 이 시대 최고의 영화감독. 그는 블록버스터 제작에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할 뿐 아니라,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듯 인간의 눈물과 땀, 고뇌를 담아내는 데도 독보적이다.
● 1946년12월18일 신시내티에서 태어남
● 1963년140분 분량의 독립영화 ‘파이어라이트’ 제작, 상영
● 1965년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문학과 입학
● 1974년첫 번째 극장영화 ‘슈가랜드 익스프레스’ 감독
● 1975년영화 ‘죠스’ 개봉. 이해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
● 1981년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1편 ‘레이더스’ 감독
● 1982년공상과학영화 ‘E.T.’ 감독. 유엔 평화메달 수상
● 1984년‘인디애나 존스 2: 사원의 저주’ 감독
● 1985년에이미 어빙과 결혼
● 1989년‘인디애나 존스 3: 최후의 십자군’ 감독
● 1991년두 번째 부인 케이트 컵쇼와 결혼
● 1993년‘쥬라기 공원’ 감독. 1990년대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 ‘쉰들러 리스트’ 감독, 이 영화로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작품상 수상
● 1997년‘쥬라기 공원 2: 잃어버린 세계’ 감독
● 1998년‘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독.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수상
● 2001년스탠리 큐브릭 감독 미완성작 ‘A.I.’ 감독,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 서훈
● 2002년‘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감독
● 2005년‘뮌헨’ 감독
● 2008년‘인디애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감독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미는 영화감상과 비디오 게임이다. 아내인 영화배우 케이트 컵쇼(인디애나 존스 2편 여주인공)와 함께 입양아 둘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처지지만, 영화촬영이 없는 주말이면 동네 영화관에 가서 개봉 영화를 본다. 그의 ‘스케줄’은 여름이 되면 더 바빠진다. 여름방학 시즌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기 때문이다.
‘라이프’매거진 선정 ‘우리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 ‘프리미어’지 선정 ‘영화사상 가장 강력한 인물’, 스티븐 스필버그. 그의 삶이 부러운 것은 그가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한 남자라서거나, 영화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 자산가(그는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순위 287위다)라서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직업인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감독으로, 제작자로 365일 영화만 생각하는 삶을 40년 이상 살아온 그의 취미가 ‘영화감상’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음악가들은 평소에 음악을 잘 듣지 않고, 요리사들은 집에 오면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음악가들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거나, 요리사들이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직업의 세계가 주는 부담과 긴장감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려는 반사적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예외다. 열세 살의 나이로 첫 번째 영화 ‘라스트 건파이트(The Last Gunfight)’를 찍은 이래, 큰 코에 선량해 보이는 눈을 가진 이 털북숭이 남자는 여전히 영화에 열광하는 열세 살 소년의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자 불가능이 없는 세계이며 변치 않는 꿈이고 광대한 우주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 스필버그의 분신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진정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일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더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하물며 스필버그처럼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등극한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의 샘
아마 중년층 이상의 영화팬들은 스필버그가 영화계에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했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를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준 첫 번째 영화는 ‘죠스’(1975)다.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식인상어가 등장하는 이 공포영화를 찍을 당시, 스필버그는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이었다. ‘죠스’는 전세계적으로 4억7000만달러의 흥행기록을 세우며 천재감독 스필버그의 등장을 알렸다.
스필버그를 세계적 인물로 만든 두 번째 영화는 1982년 개봉한 ‘E.T.’다. 지구에 불시착한 난쟁이 외계인과 소년 엘리엇의 순수한 우정을 다룬 이 공상과학영화는 사실상 스필버그의 자전적 스토리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스필버그는 부모의 이혼 때문에 상처 받은 소년이었으며, 스스로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으로 여긴 엉뚱한 아이였다. 이 영화를 통해 스필버그는 상업적인 성공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감독으로 부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E.T.’는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아카데미상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당시 주인공인 E.T. 역할을 가면을 쓴 난쟁이 배우가 맡았다는 이야기는 격세지감이다. 요즘 같으면 당연히 컴퓨터그래픽(CG)으로 E.T.의 모습을 합성해냈을 것이다.
이후 절친한 동료 조지 루카스와 함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를 연이어 성공시킨 스필버그는 1993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공상과학영화를 들고 나왔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이 그것이다. 화석 속에 보존된 공룡의 DNA를 통해 현대에 공룡을 탄생시키고, 그 공룡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아수라장이 되는 공룡 테마파크를 그린 ‘쥬라기 공원’에 전세계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열광했다. 벨로시랩터, 티라노사우루스 등 공룡의 모습을 실제처럼 정밀하게 재현해낸 ‘쥬라기 공원’으로 스필버그는 9억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리며 영화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위의 영화들을 보면 스필버그가 참으로 천재적인 감독임을 금방 실감할 수 있다. ‘죠스’나 ‘E.T’, 또 ‘인디애나 존스’와 ‘쥬라기 공원’ 등은 한 사람의 감독이 일생 동안 한 번 제작할까 말까 하는 대작들이다. 이 모든 영화를 스필버그 한 사람이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의 총 수입은 127억달러에 달한다(‘엠파이어’지 추산). 가히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미다스의 손이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그는 1990년대 들어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작품성 높은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연달아 거머쥠으로써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콤플렉스까지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분모가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이 외계인이든, 공룡이든, 또 고고학자든 간에 이 영화들은 분명 기발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스필버그 이전에는 동물 중에서도 물고기, 그것도 큰 입을 벌리고 사람을 꿀꺽 삼켜대는 식인상어가 영화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흉포한 외계인이 아니라, 식물 채집을 하는 착한 외계인은 더더욱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선다. 툭하면 채찍을 휘둘러대고 여자 꼬이는 데도 선수인 고고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스필버그는 레오나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을 통해 자신이 인간미 물씬 풍기는 영화를 찍는 데도 재능있는 감독임을 입증했다.
그 자신의 성채에 ‘네버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원한 피터팬으로 살고자 했던 마이클 잭슨은 ‘E.T.’를 40번 이상 본 스필버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비록 마이클 잭슨은 불행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만, 또 다른 피터팬, 예순셋이 된 할아버지 피터팬 스필버그는 ‘꿈의 공장(드림웍스)’을 짓고 오늘도 부지런히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열세 살의 영화감독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3편을 보면, 도입부에 보이스카우트 대원인 어린 인디애나 존스가 나온다.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년은 스필버그의 영화 속에 가끔 등장하는 그의 분신이다. 어린 시절 스필버그는 보이스카우트 대원이었다. 그가 첫 번째 영화인 ‘라스트 건파이트’를 찍은 것 역시 보이스카우트 활동의 일환이었다. 대원들의 활동 중 하나로 사진촬영이 있었는데, 하필 그의 집에 있는 카메라가 망가졌던 것이다. 스필버그는 사진 대신 아버지의 무비카메라로 짧은 영화를 찍어왔고, 이 활동을 인정받아 우수대원 배지를 받았다. 열세 살이던 1959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은 스필버그에게 그리 즐거운 기억을 남기진 못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고, 학교 친구들은 큰 코에 고수머리 등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이 뚜렷한 스필버그를 따돌렸다. 설상가상으로 책을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이 있어서 학교 성적도 엉망이었다. 고등학교 평균 성적은 C에 불과했다. 훗날 그 자신이 ‘지옥 같은 고교 생활’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런 스필버그에게 영화촬영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열여섯 살에 독립영화 ‘파이어라이트(Firelight)’를 촬영해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로 그는 아버지에게 빌린 투자금액 400달러를 갚고도 100달러 정도의 수익을 남겼다고 한다.
특수효과의 제왕
영화는 현실에서 움츠려 있는 소년 스필버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10대 감독 시절, 스필버그는 적은 예산으로 공상과학영화나 전쟁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나름의 특수효과들을 개발해냈다. 화약연기가 자욱한 전쟁 장면을 찍기 위해 모래구덩이 속에 밀가루를 넣어두고 배우들-스필버그의 가족이나 친구-이 구덩이를 밟아 밀가루가 날리게 하는 식이었다. 이때 이미 스필버그는 영화촬영에서 특수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었고, 훗날 영화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단계부터 각 장면에 적절한 특수효과들을 고안하게끔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필버그가 10대 시절 고안해낸 몇몇 특수효과가 나중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영화인 ‘파이어라이트’의 전투 장면을 찍을 때 실제 차 대신 장난감 자동차와 기차를 사용한 방법은 훗날 ‘인디애나 존스 2: 사원의 저주’에서 그대로 등장한다. ‘인디애나 존스 2’에 등장하는 협궤열차의 추격신은 실물이 아니라 섬세하게 만든 미니어처 기차와 궤도, 그리고 주인공들을 닮은 인형들을 등장시켜 찍은 것이다.
고교를 졸업한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LA캠퍼스(UCLA)와 남캘리포니아대(USC)의 영화학과에 지망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에 입학한 그는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숨어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이나 직원인 척하며 스튜디오 안을 어슬렁댔다. 심지어 비어 있는 사무실 하나를 찾아내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런 엉뚱한 행동 끝에 스필버그는 일주일 내내 일하며 월급은 한 푼도 안 받는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대학 진학은 자연히 흐지부지되었다. 입학한 지 35년이 지난 2002년에야 스필버그는 대학을 졸업한다. 그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렸던 USC는 1994년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1969년 유니버설 소속 감독으로 TV 시리즈 ‘나이트 갤러리’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으면서, 스필버그는 감독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몇 가지의 TV 영화와 감독 데뷔작인 SF영화 ‘슈가랜드 익스프레스’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둔 스필버그는 1975년, 자신의 출세작인 공포영화 ‘죠스’의 촬영에 들어간다. 피터 벤츨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20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상어 모형이 두 번이나 바닷속에 가라앉고 제작 기간과 예산이 두 배 이상 초과되는 악전고투 끝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스필버그는 ‘죠스’에 대해 “영화감독으로서 처음 겪은 혹독한 시련”이었다고 여러 번 회고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카데미상 세 개 부문(편집, 음향, 음악)을 수상하며 수많은 ‘죠스마니아’를 낳았고 1975년 최고의 흥행작품으로 등극했다. ‘타임’지는 ‘죠스’에 대해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스필버그는 2005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죠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0년의 감독 생활에서 저는 늘 행운아였습니다. 그 행운을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 ‘죠스’라고 생각합니다.”
‘죠스’의 흥행 성공으로 스필버그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할리우드의 유망주가 된 그에게 많은 시나리오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죠스2’를 비롯해 ‘킹콩’ ‘슈퍼맨’ 등 흥행이 보장된 시나리오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가 바라는 건 ‘뻔한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었다. 스필버그가 선택한 차기작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공상과학영화인 ‘미지와의 조우’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극본까지 쓴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영화사에 남기기에 충분한 걸작 ‘E.T.’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큰 눈에 1m가 될까 말까 한 땅딸막한 몸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넓적한 얼굴, 총 대신 식물표본을 든 선량한 외계인 E.T.는 스필버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정체이자 스필버그의 분신 같은 존재다. 1982년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관객이 가장 의외로 받아들였던 것은 외계인이 ‘나쁜 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까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로스웰 사건에서 드러난 외계인 시체처럼 무언가 음험하고 위험한 존재, 또는 지구를 정복하러 온 무서운 괴물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착하고 연약한 식물학자 E.T.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외계인과 지구인이 서로 공생해야 한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펼쳐 보였다.
E.T. 스필버그의 분신
‘타임’지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애리조나에 살던 어린 시절, 컴퓨터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한밤에 자신을 흔들어 깨우던 기억을 회고했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차에 태우고 한밤에 사막으로 달려갔습니다. 전 아버지가 무얼 하려는지 몰라 좀 무서웠죠. 어느 지점에 가자 아버지가 차를 세우시더군요. 넓은 벌판에서 사람들이 온몸에 담요를 둘둘 감은 채로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성우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아버지와 저 역시 나란히 담요 위에 누워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았습니다. 장관이었지요. 그 순간, 우주에 우리 아닌 또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의 친구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T.’는 지금껏 스필버그가 감독한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화 속에서 E.T.가 소년 엘리엇과 손가락을 맞부딪치는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떠올리게 하는,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또 엘리엇과 E.T.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피터팬이 관객을 달나라 너머의 네버랜드로 인도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훗날 영화사 ‘드림웍스’를 설립한 스필버그는 이 장면을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영화들의 오프닝 시그널로 사용했다.
‘E.T.’는 당시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 여사를 위해 백악관에서 특별 상영되었으며 유엔은 이 영화를 제작한 공로로 스필버그에게 유엔 평화 메달을 수여했다. 영국 시사회에 참석한 다이애나비는 영화를 보던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롤링 스톤’지의 평론가 마이클 스트라고는 ‘E.T.’에 대해 “스필버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놀라운 특수효과가 아니라 그의 마음 깊숙이에 숨어 있는 따스함이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선풍적인 흥행 열기에도 ‘E.T.’는 1982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는 데 실패했다. 아홉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E.T.’는 네 개 부문-음향, 음악, 특수효과, 시각효과-의 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감독상이나 작품상을 받지 못한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감성적이고 순수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전개가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동을 남발하는 과도한 휴머니즘 영화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기 위해 스필버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상업영화의 귀재
사람들은 흔히 스필버그를 ‘흥행영화의 귀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죠스’와 ‘E.T.’에 이어 내놓은 작품들, 전편의 흥행성과를 능가하는 ‘인디애나 존스’나 ‘쥬라기 공원’의 흥행성적을 보면 ‘스필버그=최고의 흥행감독’이라는 공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필버그가 단순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흥미진진한 모험영화를 만드는 데만 출중한 감독인 것은 아니다. ‘E.T’를 논외로 한다 해도 스필버그는 흑인 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컬러 퍼플’(198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무대로 한 ‘태양의 제국’(1987)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를 적잖게 감독했다. 그가 워낙 대단한 블록버스터를 양산해낸 탓에 이런 작품들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스필버그가 영화를 지나치게 빨리 찍는다는 점도 그를 상업영화 감독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다. 그는 한 해에 두 편의 영화를 찍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그는 ‘쥬라기 공원’과 ‘쉰들러 리스트’라는 두 편의 대작을 1993년 한 해 동안 완성했다. 2002년에도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함께 감독했다. 그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캐슬린 케네디는 이런 작업 속도에 대해 “열세 살 때부터 영화를 감독해서 그런지, 스필버그는 그 누구보다 영화촬영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다. 그 때문에 작업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출연한 톰 행크스 역시 “영화에 관한 지식에서 스필버그는 가히 백과사전 수준”이라고 말했다.
1981년 작인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1편 ‘레이더스’는 스필버그의 영화 중 작품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로 손꼽힌다. 가죽채찍을 든 학자 겸 탐험가 인디애나 존스 박사를 처음 등장시킨 이 영화는 제작된 지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험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1981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더스’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이유로 작품성이 평가절하된 경우다.
조지 루카스가 제작을 맡고 스필버그가 감독한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는 ‘시리즈물은 감독하지 않는다’는 스필버그의 평소 지론과 달리 4편까지 제작되었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 중 2편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담고 있다”는 혹평을 들었으나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현재의 아내 케이트 컵쇼를 만났다. ‘인디애나 존스 2’에서 툭하면 소리를 지르다 존스 박사에게 핀잔을 듣는 여주인공 윌리 스콧이 케이트 컵쇼다.
‘루카스 제작-스필버그 감독-해리슨 포드 주연-존 윌리엄스 음악’이라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가 만들어낸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는 3편이 탄생한 지 19년만인 2008년 ‘인디애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되살아났다. 영화의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나 감독 스필버그는 모두 예순이 넘은 노장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이 든 존스 박사는 여전히 터프하고 멋졌으며, 스필버그의 발랄하고도 기발한 상상력 역시 관객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네 편에서 모두 존스 박사로 출연한 해리슨 포드는 “스크린 속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멋지게 표현하는 데는 스필버그를 따라갈 감독이 없다”고 평했는데, 이는 관객의 처지에서 보아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영웅이 아닌 인간의 영화
‘인디애나 존스’가 재미와 스타일을 겸비한 영화라면, ‘쉰들러 리스트’는 한결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경우는 스필버그의 ‘아카데미 콤플렉스’뿐 아니라 스필버그 자신이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본연의 콤플렉스를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깊다. ‘쉰들러 리스트’의 성공 후, 스필버그는 학창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죠스’로 인정받기 전까지 크고 작은 차별대우에 여러 번 맞닥뜨렸다고 털어놓았다.
“아이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코피가 터진 적도 많았습니다. 코가 좀 작아지면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밤마다 코에 테이프를 붙이고 잠들곤 했죠.”
‘쉰들러 리스트’의 원작은 1982년 부커상을 수상한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시절, 스필버그를 처음 발굴했던 시드 샤인버그는 이 소설의 ‘뉴욕타임스’ 리뷰를 스필버그에게 보냈다. 영화화를 검토해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이 제의를 단번에 거절했다. 유명한 감독으로 인정받은 상황에서 굳이 유대인이라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환기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유대인 감독이 제작한다면 반유대주의 감정을 부추길 위험도 있었다. ‘쉰들러의 방주’는 스필버그를 거쳐 마틴 스콜세지, 로만 폴란스키, 시드니 폴락 등 여러 유력한 감독을 거쳤으나 그 누구도 선뜻 이 작품을 승낙하지 않았다. 결국 소설이 출간된 지 10년이 다 되어서야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감독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에서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를 스필버그는 흑백 필름으로 제작했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영화의 소재가 실화인 만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찍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스필버그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모든 대사를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처리하고 영어 자막을 삽입하는 방법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리암 니슨, 랄프 파인즈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열연한 이 영화는 1993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을 포함한 7개 부문 상을 수상했고, 2007년 미국 영화협회가 뽑은 ‘역대 최고의 미국영화 100선’에서 8번째 영화에 선정되었다. 영국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도 작품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스필버그는 작품성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평론가 존 그로스는 ‘뉴욕타임스’에 실은 영화평에서 “솔직히 디즈니 만화영화와 스필버그풍의 모험영화가 뒤섞인 작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그런 생각은 나의 편견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쉰들러 리스트’는 인간 본연의 도덕성과 감성이 훌륭하게 결합된 걸작이다”라고 호평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 개봉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이 영화에서 얻은 수익 전액을 기부했다.
‘쉰들러 리스트’를 기점으로 스필버그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미스타드’,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를 주제로 한 ‘뮌헨’, 가벼운 코미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쥬라기 공원’풍의 모험영화에서 조금 변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묘한 방법으로 경찰을 따돌리는 지능범의 이야기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나 음울한 미래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모두 180도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동화 같은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의 눈물과 땀, 그리고 고뇌가 담겨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점점 더 평범해지고 있고, 그의 영화는 영웅이 아닌 인간의 일상을 다룬다.
2005년 막 환갑을 맞은 스필버그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에게 묻습니다. 왜 ‘E.T.’나 ‘레이더스’ 같은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느냐고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기회는 많지요. 예를 들면 ‘해리 포터’ 시리즈와 ‘스파이더맨’의 감독 제의 같은 것들 말이죠. 저는 두 작품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 영화들은 아이의 순수함이 담긴 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을 예전에 이미 해봤으니까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어린 시절의 열정이 가득 차는 날이 오면, 다시금 이런 영화들로 되돌아갈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같은 해 개봉된 ‘우주전쟁’은 어둠과 고통으로 가득한 화면과 사악한 외계인이 등장해, ‘스필버그판 공상과학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스필버그는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된 걸까? 나이 든 피터팬은 이제 네버랜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할아버지가 된 피터팬, 땡땡과 손잡다
1994년 영화사 ‘드림웍스’를 설립한 이후 스필버그는 대부분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기보다는 제작하고 있다. ‘트랜스포머 2’를 제작해 올여름 극장가를 강타하기도 한 스필버그의 향후 스케줄은 2011년까지 꽉 짜여 있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들 중에는 2011년 링컨 탄생 200주년을 맞아 개봉하는 영화 ‘링컨’(리암 니슨이 주인공 링컨 역할을 맡았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땡땡’ 시리즈 3부작이다. 2011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후반 작업에 들어간 ‘땡땡 1: 유니콘 호의 모험’은 벨기에의 만화가 에르제가 그린 탐정만화 ‘땡땡’ 중 ‘유니콘 호의 모험’ ‘황금 집게를 가진 게’ ‘레드 라캄의 보물’ 세 편을 합쳐 만든 작품이다. 스필버그는 1981년경, 막 개봉된 ‘레이더스’의 신문평을 읽다 우연히 땡땡의 삽화를 보게 되었다. 의협심에 불타는 기자로 기삿거리를 찾다가 모험의 세계에 빠져드는 땡땡에게 매료된 스필버그는 “이 이야기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라며 흥분했고 직접 벨기에로 가 원작자의 유족에게서 ‘땡땡’의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땡땡’의 시나리오 작업을 의뢰했지만 시나리오는 스필버그의 마음에 들게끔 나오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20년 가까이 표류하던 ‘땡땡’ 이야기는 땡땡의 또 다른 팬인 피터 잭슨(‘반지의 제왕’ 감독)과 스필버그가 만나며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두 사람은 시리즈의 1편인 ‘땡땡의 모험: 유니콘 호의 비밀’은 스필버그가, 2편은 피터 잭슨이, 그리고 3편은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 함께 감독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땡땡’은 스필버그가 처음 감독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소니와 파라마운트가 합작하는 이 영화는 실사가 아니라 3D 모션 캡처 그래픽 기법으로 제작된다. 주인공인 땡땡 역의 성우로는 제이미 벨이, 그리고 악당 해적인 레드 라캄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캐스팅된 상태다.
스필버그의 분신 존스 박사는 환갑이 넘었으니 ‘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을 끝으로 모험 일선에서 은퇴(?)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스필버그 자신 역시 예순세의 적지 않은 나이다. 이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감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은퇴 대신 새로운 캐릭터를 발굴하는 길을 택했다. ‘어린이 버전 인디애나 존스’라는 스필버그 자신의 평가처럼, ‘땡땡’은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어떤 작품보다도 더 철저하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중에 피터팬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후크’(1991)가 있다. 영화에서 피터팬 역할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는 중년이 다 되어 네버랜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더스틴 호프만, 줄리아 로버츠, 로빈 윌리엄스라는 호화 캐스팅에도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여타 블록버스터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나이 든 피터팬이 새삼스럽게 네버랜드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그리 신선하지 않다. 스필버그 역시 ‘엠파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 ‘후크’의 실패를 인정했다.
“나는 ‘후크’를 어른들을 위한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피터팬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장면 이후부터 ‘후크’는 영 유치한 영화가 되어버렸지요.”
어른이 된 피터팬에게는 네버랜드가 아닌 새로운 세계, ‘현실’이라는 세계가 더 어울리지 않는가. 동화 속 네버랜드에 비하면 현실은 항상 똑같고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가끔씩 예측불허의 모험이 펼쳐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타임’지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아이의 열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는 날이 오면, 다시금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찍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 젊고 새로운 주인공 땡땡과 함께 또 다른 모험의 여정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가 떠날 모험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확실한 것은 그 모험의 세계가 분명 관객에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을 안겨주리란 사실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피터팬은 영원한 피터팬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