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의 실제 모델 애나 윈투어. 영화가 보여주듯 그녀는 세계적인 패션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세계패션업계를 긴장시키는 인물이다. 그녀의 성공 뒤에는 갖가지 혹평과 추문이 따르지만, 변변치 않은 학벌로 여러 잡지사를 전전한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 ‘보그’ 편집장이었다. 목표를 성취하고 20년 넘게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삶은 지독한 프로페셔널리즘의 발현이 분명하다.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과 테니스 경기를 관람 중인 애나 윈투어.
그녀는 죽기 한 달 전 10월17일 미국 뉴욕 패션쇼 현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특별한 감성을 가진 날 받아준 유일한 곳이 패션계였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자신의 미니홈피에는 우울한 감정이 많이 담겨 있다. 제목이 아예 ‘나를 찌르고 싶다(I like to fork myself)’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산 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하지만 스무 살 시퍼런 청춘이, 그것도 매혹적인 여인이 남 보기에 그토록 화려한 무대에서 쓸쓸함을 느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문외한들에게 패션쇼나 패션업(業)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말라비틀어진 모델들이 시체에나 맞을 법한 옷을 입고’ 무대를 걷는 모습은 현혹적이긴 하지만 저속해 보인다. 그러나 패션업계란 옷을 만들고 스타를 만들고 일자리를 만드는 자본주의의 엄연한 산업이다. 우리에겐 아직 패션업계의 스타가 그 업계를 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정도이지만 미국엔 연예인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도 있다. 다름 아닌 패션 잡지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보그’를 21년째 이끌고 있는 애나 윈투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애나의 삶에는 ‘패션 잡지 편집장’이라는 외피를 쓰고 성취를 위해 달려온 한 일하는 여자의 고뇌와 치열함이 담겨 있다.
‘엘르’‘바자’‘W’‘인스타일’‘마리끌레르’ 등 세계적으로 수많은 패션전문 잡지가 있지만 그중에 최고라는 평을 듣는 보그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미드(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가 애지중지하는 잡지다. 편집장 애나 윈투어(66)는 패션 디자이너와 패션업체의 생사여탈권을 쥔 막강한 여제(女帝)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강 여제(女帝)
미국에서 2006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라는 소설이 나왔을 때, 보그는 물론 이 잡지를 발행하는 콘데 나스트 출판사의 모든 잡지가 이 소설과 관련해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저자가 애나 윈투어의 개인비서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썼으며, ‘악마’와 다름없는 캐릭터로 그린 소설 속 ‘런 웨이’ 편집장 미란다가 실제 보그 편집장과 흡사한 점이 많다는 뒷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소설 속 미란다는 최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로 온몸을 감싸고 다니며 우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부하직원 등 다른 사람들을 정신적, 때론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고전적인 ‘악마 같은’ 보스로 그려진다.
보그(VOGUE)는 1892년 뉴욕 상류층을 대상으로 창간된 패션 잡지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 등 13개국에서 발간된다. 지난 2세기 동안 많은 세계적인 사진작가와 스타일리스트를 탄생시킨 이 잡지에 대해 ‘뉴욕타임스’ 출판전문가 캐롤린 웨버는 “마치 볼테르 시대 신의 이상과 같은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까지 치켜세웠다. 보그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중시하는 다른 패션지에 비해 보수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존심과 스타일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웨딩드레스 디자인의 여왕’이 된 베라 왕을 발굴해 주목 받게 한 것도 보그이며, 마크 제이콥스(루이비통 수석 디자이너) 역시 편집장 애나 윈투어가 주목하면서 명성을 떨친다.
1988년부터 미국판 보그 편집장을 맡고 있는 애나는 차갑고 까칠하며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별명이 ‘핵폭탄 겨울(Nuclear Winter)’이다. 그러나 그녀가 패션쇼장 뒷무대인 백 스테이지라도 방문하면 그 쇼장은 ‘난리’가 난다고 한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패션쇼를 시작도 하지 않으며, 잘 웃지 않는 그녀가 쇼가 끝난 뒤 박수를 치면 성공을 보장받았다고 할 정도다. 그녀의 입김으로 런던-밀라노-파리-뉴욕 순으로 진행되던 컬렉션 일정표가 뉴욕-런던-밀라노-파리 순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전설 중 하나다. 덕분에 “뉴욕 패션은 파리를 따라간다”는 오명을 벗었다.
애나 윈투어는 수십 년 동안 똑같은 머리 스타일에 어두운 패션쇼장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기인적 풍모에 샤넬, 프라다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명품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거수일투족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고액연봉(20억원)에 업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기까지는 새로운 유행과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독자의 관심사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천부적인 능력과 ‘일에 목숨을 걸겠다’는 투지가 바탕이 되었다.
대학은 필요 없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오른쪽)는 애나 윈투어를 모델로 했다.
애나는 이들 부부의 셋째딸이다. 그러나 애나가 태어나고 18개월 뒤 큰오빠 제럴드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장밋빛이던 집안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어가는 데도 일에 빠져 연락이 안 됐던 남편에게 평생 증오심을 갖고 살았다. 그 일 이후 자녀를 둘 더 낳았지만 부부 사이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이혼한다.
애나의 어린 시절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신경질적인 어머니, 일을 핑계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늘 음울했다. 아버지는 딸 애나를 유난히 예뻐했다. 항상 최고를 추구하면서 목표 지향적이고 야망이 크고 창조적인 성향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성격도 비슷했다. 아버지 찰스 역시 단호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차가운 찰스’라 불렸다.
애나의 청소년 시절은 모범적이지 못했다. 그리스 선박 왕 오나시스의 딸 같은 부잣집 딸들이 다니던 고급 중고등학교인 퀸스 칼리지에 입학하지만, 애나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그곳을 싫어했다. 특히 긴소매 흰 셔츠에 스커트, 줄무늬 넥타이와 카디건으로 구성된 교복을 가장 싫어했다. 애나는 학교에서 ‘왕따’나 다름없었다.
부모는 딸이 학교생활이 끔찍하다고 하자 1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여학교 노스런던 칼리지에이트 스쿨로 전학시킨다. 하지만 애나는 “교복이 허섭스레기 같고 똑같은 색”이라며 투덜댔다. 벨트로 교복치마 허리선을 올리거나 허리 단을 접어 입고 다니다 선생님들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몸매관리에 관심이 많아 평소엔 최소량의 음식만 먹고 아주 가끔 특별한 때에만 과식을 하는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다고 동급생들은 전한다.
애나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학문적인 접근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좋아했고 이런 자신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보다 일찍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직업 전선으로 나가는 게 옳다고 여겼다. 남이 뭐라 하건 상관없었다. 이런 강한 고집이야말로 그녀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강화시킨 원동력으로 보인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하퍼스 앤 퀸’이라는 잡지에 어시스턴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 인맥의 도움을 받아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화보 촬영지를 잘 찾아내 빠른 시간 안에 명성을 쌓는다. 그녀가 선택한 사진은 항상 감각이 넘치고 세련됐다는 평을 들었다.
여자보다 남자가 좋다
애나는 10대 중반부터 ‘연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남자들은 젊었든 늙었든 애나의 예쁜 얼굴, 상아색 피부,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세련된 단발, 짧은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다리에 매혹됐다. 언론계 유력인사의 딸이라는 점이 신비감을 더했다. 많은 남자가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 경쟁했다.
애나는 항상 남자들과 어울렸지 여자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일을 할 때에도 이런 성향이 그대로 나타났는데, 애나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고 ‘덜’ 깐깐하게 굴었다. 애나는 남자의 외모보다 머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로 글 쓰는 사람과 기자에게 끌렸다. 그리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좋아했다.(자랄 때 아버지의 부재라는 심리적 결핍과 남자를 발판 삼아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헤픈 여자는 아니었다. 속마음이나 감정을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의 첫사랑 상대는 자유기고가 존 브래드 쇼였다. 애나보다 무려 열두 살 연상에 부유한 영국 여자와 1년도 채 안 되는 결혼생활을 끝내고 막 이혼한 한량이었다. 두주불사에 담배도 하루에 세 갑 이상 피우는 체인 스모커였다. 도박도 즐겼다. 그러나 위트와 언변, 잘생긴 외모로 여자들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래드 쇼는 애나에게 ‘인맥’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다. 애나는 보그에 입성하기 전 다섯 곳의 잡지사를 전전하는데, 그때마다 브래드 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그는 애나와 헤어진 이후에도 변함없는 서포터 역할을 한다.
애나는 ‘하퍼스 앤 퀸’ 입사 4년 만에 부편집장으로 고속 승진한다. 그러다 편집장 자리가 비자 자신의 인맥과 아버지 인맥까지 총동원해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드러내 보이지만, 결국 실패한다. 20대 중반으로 나이가 너무 어리고 글 쓰는 능력도 검증받지 못한데다 차갑고 불친절한 태도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편집장으로 다른 사람이 왔으나 애나는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다 결국 1975년 3월 해고된다.
애나는 언젠가는 보그의 편집장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뉴욕으로 떠난다. 당시 뉴욕 경제는 거의 파산 상태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유행에 앞서고 개방적인 도시였다. 애나는 맨해튼에서 브래드 쇼와 위태위태한 동거를 시작하고 일자리를 알아본다. 그리고 연봉 1만2000달러에 ‘하퍼스 바자’ 부에디터로 취직한다. ‘하퍼스 바자’는 1867년에 창간된 미국 최초의 패션잡지로 그래픽 개념을 도입했다. 만 레이 같은 세계적 사진작가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애나가 입사했을 때는 진부하고 보수적인 스타일 때문에 광고주와 독자들이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퍼스 바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미국인 동료들과 상사들은 애나의 차가운 기질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야심을 싫어했고 도발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발상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다. 엄청난 열정과 대단한 자제력, 뛰어난 안목, 패션과 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인정해주긴 했지만 사진이나 모델 채용 등 건건마다 자기가 옳다며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는 그녀를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애나는 9개월 만에 해고된다.
돈보다 커리어
애나는 예기치 않게 너무나 빨리 해고된데 충격을 받아 7개월 동안 일을 찾지 않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다 브래드 쇼의 도움으로 1976년 말 27세의 나이로 이번에는 잡지 ‘비바’의 패션에디터가 된다. 이 잡지는 ‘플레이보이’의 경쟁지였던 ‘펜트하우스’의 에디터가 만든 잡지였는데 ‘근사한 파티를 여는 법, 실크 스타킹 신는 법’등의 기사에 ‘성적 환상을 가지고 완벽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법’등의 기사를 실어 가족들은 그녀가 포르노 잡지에 취직했다고 생각했다. 애나 역시 나중에 성공한 뒤에는 ‘비바’에서 일한 시기를 애써 무시하고 이력서에도 기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든 애나는 2년 동안 억척스럽게 일한다. 욱하는 성격이나 심술, 상대방 감정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고집은 여전했지만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그녀를 모두 무서워했다. 책 ‘워너비 윈투어’에 인용된 동료의 말이다.
“애나가 워낙 일을 잘했다. 정말로 재능이 뛰어났다. …지루함도 굉장히 잘 느꼈는데 일단 촬영준비가 되고 그것이 마음에 들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 존재가 된 듯 침묵하는 것이다. 애나의 침묵은 마치 ‘당신이 날 지루하게 해서 더 이상 관심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너무 직선적이었고 빈말이라도 칭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영국인 특유의 어투로 ‘난 동의하지 않아, 이건 내 방식대로 해야 해, 이건 쓰레기야, 이건 형편없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1978년 애나와 브래드 쇼의 관계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연애관계가 끝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동거생활도 삐거덕거렸다. ‘얼음 공주’ 애나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때다.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애나에 ‘비바’ 동료들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고소해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바’까지 어려워졌다. 결국 1978년 11월 중순, 1월호 제작을 끝으로 폐간된다. 애나는 다시 실직자 신세가 된다. 괜찮은 잡지사마다 문을 두드렸지만 면접 기회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걸려든 게 전문직 여성을 타깃으로 한 신생 패션잡지 ‘새비(savvy)’의 패션에디터였다. 부수입이나 수당은 지급되지 않고 봉급도 매우 적은 파트타임 자리였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출퇴근이 자유롭고 자신의 추진력과 야망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녀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일이었다.
애나는 다시 일에 파묻혔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신생잡지로서는 대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콩코드를 타고 8000달러가 드는 왕복여행을 자기 돈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비는 중간 정차 역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과정이 최종 목적지 보그로 가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이전에 일했던 잡지사 세 곳에서 모두 그랬듯 항상 어느 순간이 되면 동료들과의 불화와 독창적인 사진 선택으로 문젯거리가 되었다. 새비에서는 전문직 여성들의 수수한 옷을 소개하려는 편집장에 맞서 전위적인 패션을 소개해야 한다며 불화를 빚었다. 결국 9개월 만인 1981년 초에 또다시 해고되고, 앤디워홀이 창간한 개성이 뚜렷한 월간지 ‘인터뷰’에 지원하지만 워홀로부터 “(애나가 선택한 사진들은) 쓰레기 같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의 현재만 보지만, 애나의 이런 과거사를 듣다보면 역시 성공이란 공짜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뉴욕’에서의 성장
영화 속 미란다처럼 애나 윈투어는 실제로 일거수일투족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뉴욕’은 기자의 주관적 취재를 특징으로 한 보도 양식의 변혁으로 (뉴욕이라는) 특정 도시에 한정된 독자에게만 읽히는 최초의 ‘시티 매거진’이었다. 최고 수준의 보도와 글을 자랑했으나 애나가 입사할 당시에는 창간 무렵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누렸던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뉴욕에서 일했던 동료의 말(‘워너비 윈투어’에서 재인용)이다.
“애나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공격적이었고 상대보다 한발 앞서 그 사람을 압도했다. 좋은 친구를 만드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상대를 통제하고 지시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타인의 호감을 받는 일보다 우선순위였고 더 중요한 일이었다. (일에 관한) 모든 사소한 것이 중요했고 모든 측면이 체계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에 대한) 목표는 뚜렷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나는 서른다섯 살에 결혼을 하는데 남편은 마흔여덟 살의 정신과 의사였다. 명성이 자자한 제네바 국제학교를 다녔고 런던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외과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왕립의학회 회원이었다. 이미 서른 살에 1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고 아들 둘을 낳은 뒤 이혼한 처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요하네스버그에 본사가 있고 런던에 지사를 둔 기업의 회장이었다. 엄청난 재벌이었다.
남편은 정신과 의사인데다 지식인으로 애나를 정서적으로 돌볼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애나 역시 세련되고 매력적이어서 남자의 자존심과 과시욕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뉴욕타임스’에 난 짤막한 결혼기사에서 애나는 자신의 성(姓)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1983년 애나는 뉴욕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었다. 편집차장으로 승진했고 세련된 패션과 유행하는 인테리어부터 근사한 홈 파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지면을 실음으로써 뉴스와 정보 중심이던 주간지에 스타일을 추구하는 잡지라는 명성을 입혀가고 있었다.
이런 애나의 편집 방침은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대 미국 도시에 젊은 전문가와 여피족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결과물이다. 소득이 많고 세련된 취향을 추구하며 신용카드를 즐겨 쓰는 자유분방한 소비자들(딩크족이 대표적)은 옷과 가사용품, 가구를 쇼핑하며 정신없이 소비했다. 애나는 무엇을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 정보를 원하는 그들의 욕구를 정확히 짚었다. 잡지에 대한 수요가 늘자 부티크, 음식점, 가구점 등 새로운 광고주들이 몰렸고 애나의 명성도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보그’로
마침내 ‘보그’오너가 애나를 주목한다. 그리고 1983년 봄 그녀를 영입한다. 애나가 협상을 할 때 중점을 둔 것은 돈이 아니라 직함이었다.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에디터’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며 ‘뉴욕’연봉의 두 배인 초봉 12만5000달러, 의상 비용 등 제반 비용, 자동차와 운전기사까지 제공받는 특혜로 스카우트된다. 방 두 칸짜리 사무실을 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졌다. 일약 패션업계의 스타로 떠오른 애나의 일과 행동, 행사장 옷차림, 함께 점심 먹은 사람, 함께 다니는 남자 등 모든 것이 뉴스와 가십 기사의 소재가 되었다.
보그에서의 초기 정착은 쉽지 않았다. 높은 연봉에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지만 자유가 없었기에 금수갑을 찬 것 같았다. 애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의 존재를 원하도록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싸워야 했다. 직원들은 자존심 강한 애나가 사무실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어떤 땐 밤이나 낮이나 쓰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애나는 결혼 7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하지만 애를 낳기 직전까지 회사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임부복 대신 짧고 몸에 딱 붙는 샤넬 스커트의 뒷부분을 살짝 열어 배에 맞도록 하고, 사무실에서 늘 정장재킷을 입어 몸의 미묘한 변화를 감추었다. 신발도 계속 앞이 뾰족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임신 중인 1985년 9월18일 애나는 영국판 보그 신임 편집장이 된다. 일단 뉴욕에서 출산을 하고 영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녀는 서른일곱에 컬렉션 일정에 맞춰 유도분만으로 아들을 낳았다.(이어 딸을 하나 더 낳는다) 그리고 약속대로 아버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름을 찰스라고 지었다.
영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서양을 오가야 하는 결혼생활은 끔찍했다.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마음 한구석에선 ‘내가 미쳤어. 아들을 돌보며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이제 일을 그만둬야 하나라고 생각할 즈음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1985년 8월 프랑스 패션잡지 ‘엘르’ 미국 판이 나오면서 보그를 위협한다. 경영진은 조용한 공황상태에 빠진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편집장이 오너와 불화를 겪고 1988년 6월 해고되면서 애나가 그 자리를 잇게 된 것이다. 90년 역사의 잡지에 다섯 번째 편집장 자리, 게다가 꿈에도 그리던 자리 아닌가.
미디어들은 “완전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잡지를 이끌었던, 막강했지만 허점을 보인 편집장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단시간에 출세 한 미모의 여성이 올랐다. 음모론과 배후 조종론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고 떠들어댔다. 심지어 애나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한 덕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애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보그 개혁에 착수한다. 고참직원들을 해고하고, 좋은 기삿거리를 찾도록 직원들 간에 경쟁을 부추기는 한편 복장규정까지 만들어 자신이 생각하는 패션잡지 형태로 보그를 바꾸었다. 그녀는 직원을 훈련시킨다기보다 그냥 물속에 집어 던지는 사람이었다. 직원들은 그저 가라앉거나 수영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수영을 잘하면 애나와 잘 지내는 거고 못하면 자리가 없어지는 거였다.
신(神)이자 악마이자 우상
편집장으로 지낸 첫해는 패션계에 극심한 불황이 닥친 시기였다. 젊은 감각을 시도했지만 판매부수가 당장 급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나가 편집장을 맡은 지 10년 만인 1998년 보그는 창간 이후 최고 수익을 올렸다.
영국 ‘가디언’지는 그녀를 이렇게 치하했다. ‘애나는 단순한 고수익 전문가가 아니다. 오늘날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새로운 인재를 지원하고 업계가 최신유행에 항상 민감하도록 만드는 패션계의 대모다. 혹은 세계시장에서 단독으로 1600억달러의 가치를 창출한 영화 ‘대부’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애나의 세상: 보그 편집장, 화려한 업계에서 세인의 마음을 사로잡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애나는 지난 10년 동안 신으로 섬겨진 동시에 악마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간에 그녀가 보그를 패션계의 성서라 불릴 정도의 압도적인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그 과정에서 우상 같은 존재가 됐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애나는 자제력이 강하고 강인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여자다. 고기를 워낙 좋아해 동물보호운동가들로부터 표적이 된 유명한 일화도 있다. 운동가들이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애나의 접시에 죽은 미국 너구리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것을 태연하게 옆으로 밀치고 잘게 썬 쇠고기를 계속 먹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생활은 쉽지 않았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삐걱거리면서 편집장을 맡은 지 11년째가 되는 1999년은 그녀의 생애 중 가장 끔찍한 해가 된다. 추문도 따라다녔다. 1997년 링컨센터에서 열린 뉴욕시티발레단 공연에서 플레이보이로 알려진 유부남 사업가 브라이언과 연애를 하면서 불륜 소문에 휩싸인 것이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새벽 맨해튼 고급 아파트를 나서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그 소문이 삽시간에 언론계에 퍼졌다. 마침내 남편까지 알아버렸다. 애나의 불륜 스캔들은 신문 가십란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해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마저 세상을 뜬다.
결국 애나는 이혼을 단행한다. 두 아이를 둔 이혼녀가 되었지만 그녀의 당당한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매일 새벽 5시45분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고 전문 미용사에게 머리손질을 맡긴 뒤 완벽한 스타일로 출근하는 일상은 지금도 똑같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한 올의 흐트러짐 없는 그녀만의 자기관리는 명성이 올라갈수록 신비감이 덧칠됐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혹평이나 비난의 대부분은 “성격이 더럽고 자기 맘대로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학벌로 처음부터 좋은 조직에 들어가 그 속에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고졸 학력의 어시스턴트로 출발해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해고와 실직을 반복해 이룬 그녀의 성취는 철저하게 일로 승부를 내야 한다는 차가운 프로페셔널리즘이다.
지루하기보다 노엽다
‘식스티 미니츠’에 출연한 애나 윈투어
‘식스티 미니츠’와의 인터뷰 대목이다.
▼ 심술궂은 여자라는 평가가 있다.
그렇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게 나를 완벽주의자로 만든다면 (나는) 심술궂은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 당신과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던데….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이다. 아주 많은 사람이 내 밑에서 15년, 20년씩 일해왔다. 내가 그렇게 골 때리는 여자라면 아직까지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조히스트들이겠지.
▼ 골 때리는 여자라기보다 차갑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여기는 직장이다. 근무 시간이 있으면 퇴근 시간도 있다. 우리는 잡지에 대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존경과 우정으로 모였으며, 만일 내가 차갑고 거칠다고 느껴진다면 내가 최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완벽한 모습이 인생의 목표인가?
내게 있어 외출할 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침에 옷장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직업을 갖겠는가.
▼ (낮이나 밤이나)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는?
매우 유용하다. 패션쇼가 지겨워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고, 반대로 즐기고 있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선글라스는) 나의 방어막 같은 것이다.
▼ 당신 아버지도 부하 기자들이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신문을 만들어냈다.
▼ 무엇이 당신을 지겹게 하는가?
평범함이다. 디자인이 게으르고 다른 사람의 영감을 차용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나를 지겹게 하기보다는 노엽게 한다.
▼ 곧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손을 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 저 사무실 어딘가에서 젊은 인재가 당신 자리를 조용히 넘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두 명이 아니겠지.
▼ 그때가 오면 조용히 나갈 것인가?
물론, 아주 조용히 나갈 것이다.
● 워너비 윈투어(김은경 옮김·웅진윙스)
미국 유명인사들에 대한 평전을 전문으로 쓰는 제리 오펜하이머가 쓴 애나 윈투어 평전이다. 애나의 학창시절 친구들은 물론, 옛 애인, 직장동료들의 증언을 토대로 애나의 삶을 꼼꼼하게 재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