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떡살 목조각장 김규석

  •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2014-09-19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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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갖 제의와 잔치에 등장하는 떡은 복을 구하고 액을 막으려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다. 그 떡에 부귀영화와 건강, 출세,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로 찍은 떡살은 신에게 드리는 기도문과 같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떡은 신을 위한 음식이다. 일상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떡은 기쁘고 특별한 날이나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마련한다. 아이의 백일상에는 깨끗한 백설기가 올라가며,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가게 되면 액막이 구실을 하는 팥 시루떡을 돌린다. 제사상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떡이다. 물론 고사상에도 떡이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떡은 술만큼이나 영성이 강한 음식이다. 혼백을 불러오는 술이 일상을 초월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한다면, 떡은 신을 달래고 신에게 인간의 소망을 부탁하려 바치는 선물과도 같다. 그래서 떡은 매우 인간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사람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떡살 제작 전통을 유일하게 잇는 김규석(金奎奭·55)은 30년 동안 우리 문양의 풍부한 상징성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장인이다.

    “떡에 찍는 문양을 그저 떡을 예쁘게 꾸미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떡살 문양 하나하나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생일과 혼례, 제사상에 오르는 떡에 찍는 떡살 문양이 다 다릅니다. 아무거나 찍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고물도 묻히지 않고 다른 부재료를 장식으로 올리지도 않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절편을 장식하는 것은 다만 요철로 남는 떡살 문양뿐이다. 그 밋밋한 떡에 살이 찍히면 떡은 메시지를 담은 신성한 음식이 된다. 그래서 옛말에 ‘당장 먹을 떡이라도 살 박아 먹으랬다’는 말이 있다. 살이 박힘으로써 그 떡은 신의 축복을 받는 음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상은 떡을 올리는 경우에 따라 적절한 문양을 골라 썼다. 예를 들어 백일상에 오르는 떡에는 물결무늬와 파초문을 많이 찍는다. 물은 동양에서 생명의 기원으로 꼽고, 파초는 생명력과 부를 상징한다. 또한 물결무늬는 ‘물결 조(潮)’가 조정(朝廷)의 조(朝)와 음이 같아서 나중에 조정에 나가는 출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떡 한 조각에 담은 의미가 정말로 크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여러 가지 크기와 모양의 떡살과 다식판. 문양 조각 면의 나무와 떡살 몸체 나무가 다른 경우도 종종 있다. 문양뿐 아니라 떡살 전체 형태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게 많다.

    백일떡이 이 정도니 혼례나 관례, 제사와 장례 등에 쓰는 떡살 문양의 종류와 의미는 어마어마하다. 다산, 다남(多男), 경사, 부귀영화, 장수, 극락왕생, 청렴, 고매, 회복, 부부금실, 액막이, 영원불멸, 기쁨…. 인간의 모든 염원을 다 담은 듯하다. 그래서 그 작은 떡 한 조각에 하늘의 해와 달을 넣고 물결도 새겨 넣고, 토끼와 십장생, 나비와 벌, 국화와 연꽃, 당초와 격자문, 그리고 아예 부귀(富貴) 같은 글자를 노골적으로 박거나 기하학적 문양까지 찍었다. 기하학적 문양은 우주의 신비나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나타낸다는 설이 있다.



    부귀영화와 장수는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는 바지만, 떡살문은 시대상도 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태극 문양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고 미국 문화가 들어온 뒤 만든 것에는 영어로 새긴 것도 있다고 한다. 근세에 쓰던 떡살에는 어느 가난한 집에서 만든 것인지 학교와 자동차를 새긴 것도 있다. 교육을 받아 더 나은 삶을 보장받고 싶고, 자동차를 탈 만큼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렷다.

    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영원불멸부터 자동차까지, 인간의 원초적인 소망부터 아주 세속적인 욕망까지 함축적으로 담아낸 떡살 문양은 그 염원의 종류만큼 다양하다. ‘귀신 듣는데 떡 소리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신이 떡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신들에게 그만큼 많은 소망을 빌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많은 소원을 크지 않은 떡 조각에 담아내려니 표현이 함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떡살 문양은 같은 문양이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고 여러 문양이 함께 복합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같은 국화문이라 해도 배경에 물결이 들어갈 수도 있고, 햇살이나 사선, 곤충, 기하학적 문양을 넣을 수도 있어 비슷한 듯하면서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변용된 문양들을 보노라면 기호와 상징의 바다에 빠진 기분이 든다.

    “문양은 글씨가 나오기 전의 언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떡살뿐 아니라 옷이나 기와, 도자기, 단청 등에 들어가는 모든 전통 문양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떡에 찍는 떡살 문양은 신에게 드리는 기원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그래서일까. 떡살 재료로 엄나무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엄나무는 귀신을 쫓는 나무라는 속설이 있다. 그런 믿음 말고 실제로 떡살에 적합한 나무의 조건은 뭘까.

    “먹는 음식에 찍는 것이므로 우선 냄새가 나지 않는 나무여야 합니다. 그리고 물기(진)가 없어야 하고요. 숨구멍이 조밀한 조직의 나무면 좋지요. 소나무처럼 섬유질이 많은 나무는 그 섬유질이 먼저 닳으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나무는 감나무, 먹감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회양목 등이다. 다 단단해 잘 닳지 않는 나무다. 그중에서도 8할이 감나무다.

    “어느 집에나 감나무 한두 그루는 심을 정도로 구하기가 쉬운 재료여서 감나무 떡살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요. 다식판은 잘사는 집에서만 썼지만 떡살은 서민도 다 썼기 때문에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떡살로 쓰는 나무 중 금기하는 나무가 있으니 바로 사당이나 성황당에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이 비는 나무와 벼락 맞은 나무다. 사람들이 빌었다는 것은 그 나무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는 뜻이니 그런 나무를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벽조목(霹棗木)’이라 불리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으로 만들 만큼 재수 좋은 나무가 아니던가.

    “벼락 맞은 나무는 부적 구실을 하지만, 집에 떨어질 벼락을 대신 받은 것이라 부정 탔다고 보기에 떡살 재료로는 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재액을 받아낸 것이므로 액땜하는 역할은 할지 몰라도 한편으론 ‘깨끗하지 못하다(不淨)’고 본 것이다. 신에게 올릴 떡에 찍는 떡살을 만들 나무는 인간의 마음이든 자연의 재해든 하나도 손이 안 간 깨끗한 나무여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쯤 되면 떡살은 단순한 부엌세간 조리용구가 아니라 오히려 제기(祭器)에 가까운 게 아닌가.

    스승 찾아 함평에서 경기도까지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봉황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김규석의 목조각 작품. 향나무를 상감해 깎아낸 것으로 매우 독특하다.

    먹을 것이 흔해지고, 신령스러움이 미신으로 치부되는 오늘날 떡 한 조각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먹는 사람은 차치하고 떡 만드는 이도 의미를 알고 떡에 살을 박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김규석 장인은 맞지 않게 찍힌 떡살 문양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혼례 때는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나 복을 의미하는 박쥐, 기쁨을 배로 한다는 쌍희(囍)자 문양을 쓰고, 생일상이나 회갑상에는 장수를 뜻하는 국수나 거북, 십장생 등을 주로 찍습니다. 또 장례나 제사에 올릴 떡에는 윤회사상을 담은 수레바퀴 문양을 넣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문양이 엉뚱한 곳에 들어가면 이상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떡살 전문 목조각장으로 무형문화재가 된 그이지만 사실 그도 예전엔 떡살에 문외한이었다. 처음 목조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떡살이 그의 삶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김규석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목조각장 이주철 선생 문하에 들어가면서 목조각 인생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골프 치는 나체여인상을 조각한 유명 조각가 이수영 선생의 아들로, 호랑이를 처음 목조각으로 만들었을 만큼 솜씨가 뛰어난 분입니다.”

    이주철 선생은 호랑이를 비롯해 소를 끌고 밭을 가는 모습 등 한국적 풍속을 묘사한 조각에 뛰어나 흔히 ‘풍속조각가’로 불렸다. 이런 조각은 외국인에게 기념품으로 많이 팔려 이 선생이 운영한 ‘국제공예’는 한때 직원이 100명에 달할 만큼 잘됐는데, 1970년대 들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저는 국제공예가 망한 다음 제자로 들어갔지요. 그래도 조각 실력이 뛰어난 선생님 밑에서 목조각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조각칼로 파낸 거친 배경에 향나무를 상감한 꽃, 그리고 아래위로 만(卍)자문이 이어지는 장식까지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한 작품.

    함평에서 경기도까지, 대체 어떤 인연으로 스승을 찾아갔느냐고 물으니, “우리나라에서 조각 솜씨 제일 좋은 분을 찾다보니 이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글쎄, 왜 조각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스승을 찾았던 걸까. 혹 조각 솜씨가 좋았다는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먹고살려고’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소질 따라 생계를 구하게 마련인데, 그는 끝까지 자신은 “솜씨가 없다”고 겸손해한다. 아무리 봐도 그의 대답은 빈말인 것 같다. 손작업을 즐길 만큼의 솜씨 없이는 떡살을 되살리는 일에 그토록 매달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솜씨보다 더한 자산이 있긴 하다. 바로 집념과 노력이다.

    이연채 선생과의 만남

    군대를 다녀오고 난 뒤 1985년 그는 전남 광주에 ‘규석목조각연구소’를 열었다. 스승에게서 독립한 것이지만, 그는 지금도 스승을 모신다. 그의 집에 스승을 1년간 모시고 산 적도 있고, 지금도 자주 서울을 오간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한 분의 스승이 있었으니, 그를 떡살의 세계로 인도한 고(故) 이연채 선생이다. 남도의례음식 장인으로 광주 무형문화재인 이연채 선생을 김규석이 처음 만났을 때, 이 선생은 문화재도 아니었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예전 가난한 양반 아낙네들이 자기 집에서 하는 안침술집처럼 아는 사람에게만 음식을 대접해 파는 처지였다.

    “선생님은 음식 솜씨는 물론이고 동동주 등 술 담그는 솜씨도 뛰어나셨죠. 선생님은 떡살도 직접 만드셨는데, 선생님 댁을 드나들면서 나무를 자르고 깎아드리고 하면서 점점 떡살에 빠져든 겁니다.”

    이연채 선생은 모친이 광주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최부잣집 딸인 만큼 먹고살기 힘들어 전통을 유지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전통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선생 자신 수피아여고 1회 졸업생으로서 우리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도와주는 젊은 김규석에게 ‘이 일을 해보라’ ‘이것은 꼭 이어가야 할 전통이다’라며 자꾸 꾀었다.

    “그때만 해도 조각에 욕심이 있어서 떡살을 할 생각은 없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원체 강하게 권유하시는 데다 그 누군가는 해야겠기에, 더구나 자료 모아놓은 것까지 제게 주시니 안 하려고 해야 안 할 수가 없게 됐지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든, 아니면 우연인지 필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떡살을 떠안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당시 떡살은 수집가나 재야 연구자는 더러 있었어도 만드는 사람의 맥은 끊어질 지경에 이르른 때였다.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경북 예천의 유명한 떡살 집안의 김한량(실명인지 별명인지 분명치 않다. 실제로 한량이었다고 한다) 씨가 뛰어난 떡살을 만들어냈는데, 그가 6·25 때 실종되면서 예천 떡살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김규석이 이연채 선생과 함께 떡살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던 시기, 처음에는 무척 답답했다고 한다.

    “떡살에 관한 연구나 정리된 자료가 별로 없어 기술을 전수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체계적으로 정리할 겸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의 김길성 씨가 재야 연구자로서 떡살을 많이 모으는 정도였고, 일본에서 우리 떡살에 관한 책이 나와 있을 뿐이었다. 김규석은 떡살에 관한 제대로 된 책을 멋지게 펴낼 결심을 하고 자료를 모으는 한편, 우리 민화나 각종 문양집을 죄다 섭렵하며 이론 공부도 해나갔다. 그리고 떡살 문양을 하나씩 새로이 파나가면서 탁본도 하며 책을 만들기 위한 긴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17년간 일주일에 하나씩 만들어

    책을 준비하는 기간은 그에게 수련기이기도 했다. 일주일에 하나씩 작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서 새벽 두세 시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다. 마치 선승이 수련하듯 그렇게 작업한 지 17년, 1000여 점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판매한 작품까지 합하면 6000점은 만든 것 같다고 한다. 작은 작업대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열 몇 시간씩 새기고 파는 그 작업에 무슨 재미가 있어서 그렇게 몰두할 수 있었을까.

    “그저 노동하듯 했습니다. 보람요? 누가 알아주느냐고요? 안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누가 시켜 한 일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요. 아예 어렵게 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 놀라운 것은, 작품으로 만든 1000여 점 가운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전통 문양을 기본으로 하되, 모두 자신의 의도를 살린 창작품이다. 그렇게 만든 작품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으니 바로 2005년에 나온 ‘소중한 우리 떡살’과 이듬해 나온 탁본집 ‘아름다운 떡살무늬’다. 이 두 권은 만드는 데만 3년이 걸렸을 만큼 방대한 자료를 분류해 담았으며 영문도 병기했다. 이 책을 보면 우리 문양이 이토록 다양하며 화려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편집하는 데만 3년이 걸린 이 책 두 권에 들어갈 떡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김규석은 17년간 쉬지 않고 작업했다.

    “기와나 담장, 단청, 옷, 장신구, 책표지(능화판), 시전지(편지지) 등에도 문양을 쓰지만 떡살처럼 문양 종류가 많은 것은 없지요. 우리 문양의 보고라고 할 떡살만 연구해도 우리 민족이 무엇을 염원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문양이 완성되고 가장 화려하게 꽃핀 시기를 고려시대로 본다. 고려의 문양만큼 세련되고 아름다운 게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떡살은 남아 있는 게 없지만, 조선시대에 그대로 이어져 발전했다. 현재 남아 있는 떡살은 오래된 것이 200년 전후 것인데, 좋은 떡살은 300만~40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남아 있는 떡살이 귀해서 더 비쌌는데, 북한 것이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값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떡살에도 지방색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는 유림이 많아서인지 옛 전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한 투박하고 단순한 모양인 데 반해 곡물이 풍부했던 전라도 떡살은 세련되고 얄팍하게 예쁘다.

    “경기도와 서울에는 떡살보다 다식판이 많습니다. 차를 즐길 만큼 여유 있는 집안이 많았다는 뜻이지요.”

    다식과 약과에도 떡살과 마찬가지로 문양을 새기지만, 떡살에 비해 문양이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다고 한다. 다식과 약과는 과자류로 선택해서 먹는 것이지만, 제례가 필수였던 전통사회에서 떡은 필수였다. 그래서 떡살은 전국 어느 집에도 꼭 있어야 해서 문양이 그만큼 발전하게 됐다. 또 산간지방 떡살에는 토끼나 노루, 야생화 문양이 많이 보이고, 해안지방 떡살에는 게나 물고기, 새우 문양 등이 보인다. 그만큼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것도 떡살문의 매력이다.

    상서로운 학 같은 새, 불로장생한다는 사슴과 거북, 출세와 여유로운 삶을 상징하는 잉어, 길조를 뜻하는 까치와 매미,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벌,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포도와 석류, 그리고 대나무순, 복과 벽사(?邪)를 뜻하는 박쥐 등 거의 모든 동식물이 떡살문에 두루 쓰였다. 우주를 나타내는 태극과 무한대로 뻗어나감을 상징하는 만(卍)자, 천지개벽을 뜻하는 벼락(뇌문·雷文)도 우리 민족이 즐겨 쓰던 문양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12지신이나 사신(청룡, 백호, 현무, 주작)은 문양으로 쓰지 않았다. 아마도 12지신과 사신은 그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에게 바치는 떡에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떡살문은 미래 디자인의 원천

    그가 만드는 떡살은 일일이 손으로 다듬은 것이라 당연히 값이 꽤 나가는데,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이나 나무가 많이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떡살을 대량으로 만들어와 타격이 크다고 한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도안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중국 사람이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만든 것에는 우리 미감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요. 그런데 그런 제품이 인터넷에서 2만~3만 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꼭 외국에서 들어오는 떡살이 아니어도 떡살의 수요는 현대사회에서 크게 늘 것 같지 않다. 예전에는 관혼상제는 물론이고 차례, 철철이 드는 명일(名日)까지 떡을 해야 할 날이 많았다. 그래서 떡살에 누구네 집 떡살인지 적혀 있을 만큼 집집마다 몇 종류의 떡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명절도 간소하게 지내고 집에서 직접 떡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으니 떡살의 미래는 어찌될까.

    “1980년대 우리 차와 떡이 잠시 유행했을 때 떡살이 잘나갔는데, 갈수록 수요가 적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떡살문은 디자인의 보고로 앞으로 산업 분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의식주가 변했다지만 장식이 들어가지 않는 분야는 없다. 천장과 벽, 타일, 창살, 옷감, 담벼락, 유리, 기업의 로고나 편지지, 책표지까지 문양이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세련된 외국 문양을 선호해서 그대로 쓰고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 문양을 활용하는 디자인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희망의 불씨를 직접 일군 사람은 바로 김규석 그 자신이다. 그가 떡살을 직접 파고 책으로 정리해내기 전까지 문화계에서도 떡살을 소중한 문화재로 대접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피나는 노력 덕택에 2000년 그는 기능전승자로 지정받았고, 2007년에는 목공예 부문 명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드디어 전남도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문화재에 떡살 분야가 없으므로 목조각 부문에서 떡살 전문으로 올랐다. 그러나 떡살이 우리가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는 인식 자체도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니, 그가 받은 ‘타이틀’은 모두 그가 직접 이룬 것이다.

    “그동안 목조각 분야는 불상 위주였습니다. 떡살 전문은 저 하나뿐이니 문화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양은 빗살무늬 토기 이래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미의식을 담고 있고, 시대에 따라 변형을 거듭해왔습니다. 이 시대에도 새로운 걸 창조해 고려시대 수준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규석은 우리 떡살 문양은 웬만큼 정리했다고 보고 이제 그만의 작품을 해나간다. 회화적인 묘사와 도안적인 문양을 결합해 창조한 새로운 작품과 느티나무에 향나무를 상감해 넣은 목조각 작품을 만드는데, 그 결실은 지금 준비 중인 ‘김규석 목공예 작품집’과 ‘김규석 문양집’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1996년 광주 가까운 담양에 자신의 호를 딴 목산공예관을 짓고 한창 작업 중인 그에게는 든든한 후계자도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직접 그림과 조각을 가르친 딸과 아들이 모두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회화와 조소를 전공한다. “아직 어떤 길을 갈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30년간 홀로 작업해온 그의 떡살 인생이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신을 위한 음식에 예술을 입히다

    목산공예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과 함께. 떡살이 전문이지만 목조각장으로서 다양한 조각 작품도 만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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