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호

“품질은 인격이자 자존심” 휴대폰 15만 대가 불타고 삼성이 변했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미스터 애니콜’ 이기태 전 부회장의 회고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09-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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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품질 위해 500억 원어치 휴대폰 불태운 삼성

    • 휴대폰 화형식 통해 “품질 불량은 용납 안 돼” 각인

    • “매출이나 수익보다 큰 그림 그려라” 주문

    • ‘사람 욕심쟁이’ 이건희…“인재는 삼고초려해서라도 모셔라”

    • 모토로라 꺾고도 “방심 안 돼, 세상은 디지털로 바뀐다”

    • 1등 기업 비결은 ‘제품 융합’…스티브 잡스보다 MP3 빨랐다

    • “담배, 끊어볼 가치 있어”…가족에겐 엄하고 사장에겐 너그러워

    • “여성, 지방대생 많이 뽑아라”…국민 기업 삼성의 애국법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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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삼성전자 공장 운동장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휴대폰들이 던져지고 있었다. 운동장 한 켠엔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운동장 한복판에는 15만 대의 휴대폰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직원 2000여 명의 표정은 비장했다. 망치를 손에 쥔 직원 10여 명이 휴대폰을 박살 냈고, 불을 붙였다. 총 500억 원어치의 휴대폰이 잿더미로 변하자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진행된 이 충격적인 ‘퍼포먼스’는 전 세계 기업 경영사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품질 위해 500억 원어치 휴대폰 불태운 삼성

    제품 결함이나 안전문제에 따른 리콜은 대부분의 경우 파쇄, 재활용, 또는 안전한 방식으로 폐기되지만 임직원이 함께 태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류나 잡화를 파는 일부 명품 브랜드 중에서 브랜드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재고관리 비용을 줄이기 위해 팔리지 않는 제품을 태워버리는 경우는 있지만 품질을 높이기 위해 했던 휴대폰 화형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회장은 생전에 휴대폰 화형식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가운데 ‘박가의 가죽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였다. 그는 가죽신을 만드는 김가와 박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김가와 박가라는 가죽신 만드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가는 부자인 반면 박가는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가난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가는 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대량으로 만들어서 싸게 팔아 많은 수입을 올렸고, 박가는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온 정성을 쏟느라 내다 팔 물건이 적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소량을 만들다 보니 자연히 값도 비쌌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을 사또가 이 두 사람에게 나랏님께 진상할 가죽신을 한 켤레씩 지어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랏님은 당연히 박가의 가죽신을 높이 평가했고, 해마다 여러 켤레를 만들어 보내라는 추가 주문까지 했던 것이다. 나랏님 가죽신을 만드는 박가의 소문은 금세 온 나라에 퍼져 한양은 물론 전국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박가는 여러 명의 제자까지 두게 됐고, 당연히 큰 부자가 됐다. 그러나 박가의 명성에 밀린 김가는 점점 쪼그라들어 예전의 박가 형편만도 못한 신세가 됐다.

    이 짧은 이야기에는 묵직한 교훈이 있다. 첫째, 품질은 배신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싸고 많이’가 통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진짜 실력과 완성도가 시장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회는 예고 없이 온다. 왕의 주문이 없었다면 박가도 여전히 궁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 순간을 ‘기회가 왔다고 가정’하고 품질을 갈고닦았다. 셋째,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박가는 단순히 신을 만든 게 아니라 ‘왕이 신는 신발’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는 곧 시장지배력으로 이어졌다.

    “품질 불량은 용납 안 돼” 각인

    이건희 회장은 이 짧은 사례를 통해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른다. 품질은 반드시 기회를 알아본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걸면 결국 승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휴대폰 화형식을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삼성전자 공장 운동장에서 열린 ‘휴대폰 화형식’에서 임직원이 휴대폰, 팩시밀리 등을 태우고 있다. 위는 휴대폰을 망치로 부수는 장면. 동아DB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삼성전자 공장 운동장에서 열린 ‘휴대폰 화형식’에서 임직원이 휴대폰, 팩시밀리 등을 태우고 있다. 위는 휴대폰을 망치로 부수는 장면. 동아DB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물건 만들기에 바빴다. 삼성 역시 그때는 무슨 물건이든 만들기만 하면 무섭게 팔려나가서 설탕이나 옷감 같은 품목은 선금을 받고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그때는 불량품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좀 하자가 있어도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고성장 시대가 저성장 시대로 바뀌고 시장개방으로 세계적인 무한 경쟁의 시대가 열리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생산자 위주의 시장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고객의 요구가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생산자는 이를 수용해야 생존이 가능한 소비자 위주의 시장이 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황 불감증을 고치지 못하고, 안주 사고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신경영의 모토를 ‘질 경영’으로 정한 것은, 이처럼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서였다. 

    질 경영을 하려면 어떤 극적인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삼성에서 사실상의 질 경영이 시작된 것은 1979년 내가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도 1995년 삼성전자가 판매한 무선전화기 가운데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즉시 시중에 내보낸 15만 대 전부를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거나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회수한 제품 모두를 공장 전체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소각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손실이 무려 150억 원에 달했다. 또 다섯 가지 모델 중에 네 가지는 아예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신제품을 개발했다. 당시로서는 손해가 막대했지만 나는 질을 추구하는 쪽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그때까지 4위에 머물러 있던 시장점유율을 3년 만에 수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질을 추구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손해가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 양까지 늘리면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양의 시대는 가고 질의 시대가 정착되고 있는 마당에 이제는 정말 양적 고정관념과 불량 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화형식 퍼포먼스는 품질 문제에 대한 경영진의 강력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모든 소비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태웠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강력한 사례였다. 단순히 제품을 폐기하는 것을 넘어선, 경영철학과 리더십이 결합된 행위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제품이 불태워지는 광경을 본 종업원들의 머릿속에는 “품질 불량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각인됐고, 이는 단순한 내부 지시나 교육보다 훨씬 큰 파급력을 가졌다.

    “우리가 만든 제품이 이 정도로 형편없었구나”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문제가 심각했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모바일 브랜드 갤럭시는 2009년 ‘GT-i7500’ 이후 꾸준히 향상된 제품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 홈페이지

    삼성전자의 모바일 브랜드 갤럭시는 2009년 ‘GT-i7500’ 이후 꾸준히 향상된 제품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 홈페이지

    해외서 명품 휴대폰·부의 상징으로 도약

    삼성 휴대폰 신화를 말할 때 ‘애니콜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이어 벤처 붐이 일었고, 많은 이들이 엘도라도를 꿈꾸며 눈앞의 이익을 좇아 발길을 옮기던 1999년부터 2001년. 삼성에서도 휴대폰 관련 일부 인력이 떠나기도 했지만, 무선사업부 소속 휴대폰 주역들은 끝까지 남아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달려 밤을 새웠고, 그들은 결국 ‘애니콜 신화’를 이루어내며 현재 갤럭시 신화의 발판을 다졌다.

    2006년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동아일보와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이다. 동아DB

    2006년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동아일보와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이다. 동아DB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을 지낸 이기태 전 부회장은 ‘미스터 애니콜’로 불리며 애니콜 신화를 이끈 주역이다.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992년 휴대폰과 인연을 맺은 이 사장이 진두지휘한 10여 년 동안 삼성 휴대폰의 시장규모는 100배 이상 커졌다.

    또 유럽 시장에서 ‘명품 휴대폰’, 중국에서 ‘부의 상징’, 러시아에서 ‘국민 브랜드’로 선정되는 등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하도록 만들었다.

    화형식 당시 무선사업부 이사였던 그는 그 현장에 있었다. 기자는 최근 삼성 사내보와 했던 그의 미공개 인터뷰 자료를 입수해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입사 초기 이야기로 시작했다.

    “1973년 ROTC 9기로 임관하고 입사할 회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고, 군에서도 육군 통신학교에서 무선 교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자회사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당시 삼성전자는 금성사(현 LG전자)에 이어 두 번째 수준이었지만, 제대 시점에 삼성전자에서 ROTC 출신 장교를 모집한다는 공문이 나와 그것을 보고 입사를 결정했습니다. 또 그때는 이병철 회장님이 한국 최고 부자셨으니, ‘부자가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도 있었고요.”

    그가 입사한 회사는 필자가 지난호에 소개한 초기 합작사 ‘삼성산요전기’였다.

    “당시엔 삼성전자보다 삼성산요전기가 인력이나 규모 면에서 훨씬 더 컸습니다. 처음 배치받은 곳은 라디오를 만드는 ‘라디오과’였습니다. 제품별로 ‘흑백 TV과’ ‘컬러 TV과’ ‘스피커과’ ‘트랜지스터과’ 등으로 나뉘어 있었죠.”

    한편 라디오과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있었고,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생산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음향설계실의 ‘기보’라는 분을 개발실로 데려와 함께 일했습니다. 설계를 맡고 있던 그분은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즉시 고쳐주는 일을 했는데, 참 많이 배웠습니다. 다른 일본 엔지니어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출근하면 ‘야루조(やるぞ·해보자)’ ‘잇쇼켄메이(いっしょうけんめい·최선을 다해)’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장비들을 정말 소중하게 다뤘고, 계측기나 비싼 장비들을 함부로 다루는 일이 없었죠. 정리정돈도 꼼꼼해서 나중에 ‘물건이 어디 갔는지’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건희 회장께서도 늘 ‘일본 기술자들에게 배워라’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반일 감정 같은 건 없었나요.

    “그런 분위기도 없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배워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막상 같이 일하다 보면 경쟁자보다는 동료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이건희 회장이 1987년에 취임했을 때는 무슨 일을 맡고 있었나요.

    “음향설계실장을 거쳐 비디오(VCR) 생산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VCR은 삼성전자의 ‘꽃’ 같은 제품이었죠. 호암 이병철 회장님은 반도체와 함께 VCR, 영상녹화재생기(VTR) 등 비디오 제품군을 전략 품목으로 키우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품에 비하면 품질이 많이 부족했죠. VCR은 부품 수만 1000개가 넘는데, 우리는 일본 제품보다 부품 수가 30%나 더 많았는데 화질과 음질은 형편없었어요.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생산도 자주 지연됐고요. 정말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호암 회장님은 새벽부터 현장에 나오실 정도로 챙기셨는데, 이건희 회장님이 취임하신 뒤로는 조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한 단계 더 잘해보자’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눈앞 매출이 중요한 게 아냐…큰 그림 그려라

    3년 뒤, 무선사업부로 옮기면서 휴대폰 사업 외길을 걷게 되지요. 우선 삼성 휴대폰의 역사는 1995년 3월의 ‘불량품 화형식’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입니다. 당시 경북 구미 삼성 휴대폰 공장은 원래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것이었습니다. 오리진(origin)이 삼성이 아니었던 탓에 교육도 부족했고, 원가나 품질 개념도 희박한 상황이었죠. 일반 전화기, 팩시밀리, 무선전화기 등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불량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어요. 그래서 회장님 지시로, 불량 제품을 직원들 앞에서 직접 태우게 된 겁니다. ‘불량을 만든 사람이 책임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각오를 다지게 하기 위한 상징적 조치였죠.”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버리기도, 팔기도, 수리하기도 어려웠던 골칫덩이 제품들을 전면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화형식 사진을 회사 곳곳에 게시해 전 직원이 경각심을 갖게 했죠.”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이건희 회장의 ‘대인(大人)’적 면모를 실감했다고도 했다.

    “‘왜 그렇게 불량을 많이 냈느냐’고 질책만 하셨다면 화형식 이후에도 뒤처리에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겁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그런 데 연연하지 않으셨어요. 화형식 자체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보신 거죠.

    정말 크신 분이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의 큰 실수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으셨지만, 작은 실수에는 철저히 지적하셨습니다. 큰일은 당신이 감당하시되 작은 일은 직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철학이었죠.

    열심히 하다가 사고가 생기면 ‘빨리 잘 수습해’라고만 하셨지, ‘누가 그랬어? 처벌해’ 같은 말씀은 절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일했던 다른 사장들로부터도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매출이나 수익보다 ‘큰 그림을 그려라’는 주문을 많이 했다고요.

    “제가 ‘이번 달 매출이 얼마고, 이익은 얼마다’라고 보고드렸다면, 아마 ‘그래, 너 잘났다’고 하셨을 겁니다(웃음). 회장님은 ‘한두 달 수익 더 내라고 했느냐. 더 멀리 보고 기술과 사람에 투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분이죠. 보고할 때에도 매출은 ‘대략 이 정도입니다’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주된 내용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어떤 인재를 영입했느냐’였습니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업에서 1만 명이 5000억 원 이익을 내고, 3만 명이 300억 원을 벌면 대부분은 전자를 택하겠죠. 하지만 회장님은 ‘그 사업이 미래 먹거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판단하셨습니다. 당장 수익이 안 나더라도 사업 역량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려주셨어요. 그건 관용도, 베풂도 아닌 ‘그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욕심이 많았다죠.

    “기술 경영이라고 할 때 결국 기술도 사람이죠. 회장님은 유능한 기술자가 있다는 정보를 들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면접을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 판단되면 즉시 영입하라는 거죠.

    그렇게 데려온 사람들이 러시아, 이스라엘, 미국 실리콘밸리 출신 청년들이었고, 나중엔 중국·인도·베트남 출신 소프트웨어 인력도 많이 채용했습니다. 중국에선 아예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죠. 주거지 제공은 물론 기사 딸린 차와 자녀 외국인학교 진학, 고액 연봉까지 지원해 줬습니다. 

    회장님은 말 그대로 ‘사람 욕심쟁이’셨죠. 한 사람도 놓치지 않겠다는 철학이 있었고, ‘좋은 인재는 삼고초려해서라도 모셔라’는 게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때에도 무선사업부는 인력을 줄이지 않았다고요.

    “당시 많은 사업부가 구조조정을 했지만, 정보통신 부문은 비교적 조정 폭이 작았습니다. 오히려 회장님 지시에 따라 투자를 더 많이 했죠. 여기저기 남아도는 인력을 소프트웨어와 디자인 부문에서 흡수했어요. 디자인 인력은 예술 전공자들, 소프트웨어 인력은 개발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재배치했죠. 당장의 손익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조직의 역량을 채워가는 과정’에 집중한 겁니다.”

    1994년 삼성전자는 휴대폰 브랜드 ‘애니콜’을 출시했다. 삼성전자 홈페이지

    1994년 삼성전자는 휴대폰 브랜드 ‘애니콜’을 출시했다. 삼성전자 홈페이지

    화형식 이후, 삼성전자는 51.5%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모토로라를 제치고 1위에 올랐습니다.

    “단순히 제품을 잘만드는 차원을 넘어 직원 모두가 스스로 품질에 책임지는 자세를 조직 전체가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애니콜’이야기를 해볼까요. ‘애니콜’이란 브랜드는 어떻게 나온건가요.

    “화형식이 있기 1년 전인 1994년에 ‘애니콜’ 브랜드가 처음 출시됐습니다. 당시 휴대폰 시장은 모토로라의 ‘스타택(StarTAC)’이 거의 석권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브랜드네임부터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내 공모를 했고, 5000건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초기엔 ‘애니텔’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는데 특허청에서 ‘일반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상표 등록이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애니콜(Anycall)’로 결정하게 된 겁니다. 누가 제안했는지는 지금도 몰라요(웃음).”

    모토로라를 제치고 국내 1위를 달성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

    “당시 모토로라는 국내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993년 무선사업부를 맡으면서 바로 비교 시험에 들어갔죠. 산과 들은 물론, 골프장처럼 오피니언 리더가 많이 찾는 장소에서도 테스트해 봤는데 우리 제품 통화 성공률이 모토로라 절반도 안 됐어요. 통화 중 끊기는 건 흔한 일이었고, 한번 연결됐다가도 다음에 걸면 안 걸리는 경우가 너무 많았죠.”

    모토로라 꺾고도 “방심 안 돼, 세상은 디지털로 바뀐다”

    어떻게 했습니까.  

    “모토로라 제품을 펼쳐놓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안테나 같은 데에 전파 흡수율이 좋아야 되는데 우리 제품은 그냥 은도금을 했다면 모토로라는 전부 금도금을 해서 절대 외부 간섭을 받지 않게 했더군요. 또 특수 부품을 많이 썼다든지 하는 차이가 보이더라고요. 그런 점들을 참고해 재설계해서 제품을 출시했죠. 

    그걸 가지고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불속에서도 막 뛰어나오는 광고를 만들어 국내시장에 돌진한 거죠. 드디어 1996년 초에 모토로라보다 더 높은 시장점유율을 갖게 됩니다.”

    이건희 회장이 칭찬을 하셨나요. 

    “칭찬 잘 안 하세요. 오히려 새로운 주문을 하셨죠.”

    뭐였나요.

    “아날로그 시장에서 모토로라 이겼다고 안심하거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제 세상은 디지털로 바뀐다, 디지털에서도 꼭 1등을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품을 007 가방에 넣고 직접 들고 다니며 프레젠이테이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바이어들에게는 가격대별로, 기술별로, 디자인별로 가방 속에 담아서 보여줬죠. ‘앞으로 나올 신제품’이라며 개발 과정도 설명했고, ‘디자인을 어떻게 했고, 이런 이런 기능들을 탑재했다, 출시는 언제다’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죠. 회장님 앞에서는 주로 앞으로 나올 신제품, 미래에 대한 준비를 말씀드렸죠.”

    휴대폰 팔러 다니면서 별명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애니콜’이란 별명은 가방 안에 여러 개의 휴대폰 모델을 들고 해외에 다니면서 바이어들에게 홍보해 붙은 별명이지요.

    “휴대폰 판매라는 게 사실은 일반 소비자한테 직접 파는 것이라기보다 사업자한테 파는 거죠. 그 사업자가 소비자한테 파는 거고요. 그러니까 우선 사업자 즉 세계적 통신사 맘에 들어야죠. 

    그 사람들 입장에선 얼마나 많은 제품을 취급하겠어요. 그래서 가격별로, 디자인별로, 기술별로 차별화된 제품을 모두 다 가지고 다닌 겁니다. 호응이 좋았어요. 후발 기업이 어떻게 이렇게 잘하냐, 이런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애니콜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트럭이 밟고 지나가는데도  깨지지 않는 영상을 촬영해서 보여주기도 하니까 놀라는 거죠. 모토로라는 같은 실험을 하면 귀퉁이나 뚜껑이 깨졌어요. 바이어들을 직접 용인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모시고 프레젠테이션도 했습니다. 그때는 뭐 밤잠 안 자고 일해도 재미있을 때 아닙니까. 삼성 제품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것 자체가 큰 보람이었죠.”

    이건희 회장이 늘 강조했던 양보다 질로 승부를 낸 거네요.

    “그렇죠. 저도 항상 양보다 질이다, 제값 받기를 해야 된다 생각했죠. 그래서 룰을 어기는 바이어하고는 상대를 안 했습니다. ‘안 파는 것도 마케팅이다’ 대놓고 얘길 했어요. 그것도 회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인정해 줘서 그렇게 된 겁니다. 매출이 조금 줄어도 뭐라고 하지 않으시고 늘어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신 덕분에 ‘어떻게 하면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내는 제품을 만들어 5년, 10년, 15년을 내다보고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하게 되는 거죠. 다 회장님이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2000년 세계 최초로 카메라를 내장한 삼성전자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휴대폰 ‘SCH-V200’. 삼성전자 홈페이지

    2000년 세계 최초로 카메라를 내장한 삼성전자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휴대폰 ‘SCH-V200’. 삼성전자 홈페이지

    제값 받기를 위한 고가 제품 전략은 무엇이었나요.

    “모토로라나 노키아나 나중에 애플과도 다른 삼성만의 전략, 다름 아닌 융복합 즉 컨버전스 상상력이었죠. 예를 들어 휴대폰에 카메라를 장착한 것을 넘어 화소 수를 굉장히 높였습니다. 15만 화소가 대세일 때 300만~800만 화소를 던졌으니까요. 휴대폰에 DMB를 못 넣을 때 그런 걸 만들어서 집어넣고, MP3도 집어넣었고요. 내비게이션도 우리가 제일 먼저 집어넣은 겁니다. MP3 넣은 건 이탈리아에 세계 최초로 보내줬어요. 그런 걸 만들어서 제품을 차별화한 거죠. 그런 고가전략으로 제값 받기를 해서 중저가 제품들과는 현격하게 다른 제품 로드맵을 만들어서 갔습니다.”

    1999년 세계 최초로 MP3플레이어 기능을 갖춘 휴대폰인 삼성전자 ‘SPH-M2500’. 삼성전자 홈페이지

    1999년 세계 최초로 MP3플레이어 기능을 갖춘 휴대폰인 삼성전자 ‘SPH-M2500’. 삼성전자 홈페이지

    중저가 로드맵도 있었나요.

    “저가 로드맵은 따로 없었어요.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우리가 고객에게 직접 파는 게 없고 사업자를 통해서 파는 건데 사업자가 신규 시스템을 도입한다든지 혹은 사업자 사정에 의해서 저가 제품을 필요로 하면 사정에 맞춰줍니다. 또 인도 같이 미래 시장을 열어야 될 곳엔 시스템을 팔면서 저가 모델도 만들어줬어요. 그렇게 그네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거고요. 

    값싸게 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어떤 바이어에게는 100원에 팔고, 어떤 바이어에게는 50원에 팔면 100원에 산 사람이 컴플레인 안 하겠어요? 우리 시스템을 사가라, 그러면 한정적으로 몇 대까지는 이 가격에 줄 수 있다고 협상했죠. 그래야 똑같은 제품 안에서 가격의 컨플릭트(conflict·충돌)가 안 생기죠. 물론 실행하는 사람들은 우리였지만 기본 생각은 역시 회장님의 질 중심 경영에서 나온 겁니다.”

    스티브 잡스보다 MP3 빨랐다

    2003년 11월 13일 저녁 서울 신라호텔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제품으로 나온 휴대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동아DB

    2003년 11월 13일 저녁 서울 신라호텔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제품으로 나온 휴대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동아DB

    1등을 한 결정적 비결은 뭐였을까요.

    “회장님 철학이 기술 중심 경영이잖아요. 우리가 휴대폰 분야에선 후발 기업이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기존 제품을 가지고 경쟁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죠. 남들은 이미 100m, 200m 저만치 앞서가고 있으니 우리는 아예 다른 트랙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바로 제품 융합입니다. 휴대폰에 카메라도 넣고, TV도 넣고, 캠코더까지 집어넣은 거죠. 그런 제품은 세계 최초였어요. 덕분에 2001년쯤 삼성 휴대폰이 한국 전자제품 중 처음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통합 컨버전스가 가장 뛰어난 제품으로 말이죠.

    기능도 많고, 디자인과 품질도 좋고, 가격경쟁력까지 갖췄으니 ‘월드 베스트’로 간 겁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MP3도 MP3 디바이스가 나오기 전에 우리가 제일 먼저 휴대폰에 넣었어요. 스티브 잡스보다 우리가 훨씬 빨랐습니다.”

    그의 말대로, 삼성전자가 2000년에 출시한 휴대폰 ‘SCH-M210’은 CD 음질에 가까운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통화 기능과 음악 감상을 통합한 최초의 휴대폰이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을 선보이기 1년 반 전 일이었다. 기술적 의미에서 ‘원조’는 분명 삼성에 있었다.

    ‘이건희 폰’으로 불리던 삼성전자 ‘SGH-T100’. 삼성전자 홈페이지

    ‘이건희 폰’으로 불리던 삼성전자 ‘SGH-T100’. 삼성전자 홈페이지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삼성은 ‘최초’였지만, 시장을 지배한 건 애플이었다. 저장 용량과 사용성의 한계, 그리고 음악 구매·관리·재생을 하나로 묶은 아이튠스(iTunes) 같은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애플은 기술이 아니라 경험과 라이프스타일을 팔았던 것이다.

    기술의 원조는 삼성, 시장의 주인은 애플. MP3 휴대폰은 기술만으로는 시장을 지배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다. 최초가 아니라 ‘시장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신제품이 나오면 이건희 회장의 반응은 어땠나요.

    “항상 긍정적이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꼼꼼하게 만져보셨어요.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 굉장한 칭찬이었죠. 어떤 때는 시장에서 직접 돈을 주고 제품을 구입해서 써보시기도 했고, 문제가 있으면 다른 채널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직접 불러 이야기하지는 않았나요.

    “예. 잘못한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꾸짖진 않았어요. 간접적으로 표현하셨죠. 그러니까 직원들 입장에서는 ‘가슴속에 잔잔한 파도’가 이는 거예요. 아, 더 잘해야겠다. 자, 우리 다 같이 잘해보자, 그런 자발성이 생기는 거죠.”

    “이건 이렇게 고쳐봐” “저건 이렇게 해봐” 같은 아이디어도 직접 냈을 것 같은데요.

    “디자인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를 많이 주셨어요. 손에 쥐었을 때 먼저 손의 감각이 편해야 한다고 하셨죠. 한마디로 ‘손맛’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초기에는 버튼이 굉장히 작았거든요. Send(통화)와 End(종료) 키도 너무 작아서 불편했는데, ‘두 단어는 크게 만들고 위로 올려봐라’ 하는 제안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2003년쯤 ‘1등이 되기 위해 어떤 전략으로 나갈 것이냐’에 대한 보고회가 있었는데, 각기 다른 디자인의 시제품 30개를 쭉 펼쳐놨더니 그중 두 개를 고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두 제품의 장점을 합쳐봐.’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바로 T100입니다. 일명 ‘조가비 폰’이라고 불렸죠. 얇으면서도 액정이 큰, ‘이건희 폰’으로 불리는 모델이에요. 아마 1000만 대 가까이 팔렸을 겁니다. 회장님도 굉장히 만족하신 제품이었습니다.”

    첼시에서 밀라노까지, 브랜드 연출자 이건희

    이번에는 마케팅 이야기를 해볼까요. 전 세계 유명 공항마다 손에 쥔 휴대폰 모형을 전시한 것이 삼성 휴대폰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죠.

    “구체적으로 ‘공항에 이걸 해라’는 지시는 없으셨지만, ‘빠른 시간 내에 삼성 휴대폰을 세계인에게 각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화두를 회장님께서 던지셨어요.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인천, 파리, 베를린, 남미 등 허브 공항 다섯 곳에 ‘내 손안에 큰 세상’이라는 카피와 함께 삼성 휴대폰 모형을 세운 거죠. 한국민 자존심을 세웠고, 브랜드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갔어요. 

    2008년인가 관련 데이터를 보니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가치가 약 43억~44억 달러에 이르더군요.”

    영국 축구팀 첼시 구단도 후원했죠.

    “네. 여러 구단을 찾아보던 중 첼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단주는 러시아 재벌이었고, 선수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구성돼 있었어요. 또 팀워크로 움직이는 조직이었고요. 이게 삼성하고 비슷하잖아요. 삼성은 학벌 차별 같은 게 없었고, 조직력을 기반으로 1등 전략을 짜나갔습니다. 팀 컬러도 우리와 같은 파란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첼시가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했죠.

    2006년 3월 22일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오른쪽)이 첼시 구단을 방문해 구단주 로만 아브로모비치에게 명품 휴대폰 ‘세린(Serene)’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DB

    2006년 3월 22일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오른쪽)이 첼시 구단을 방문해 구단주 로만 아브로모비치에게 명품 휴대폰 ‘세린(Serene)’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DB

    원래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려 했는데 지멘스와 3년 계약이 남아 있었고, 첼시는 마침 아랍에미리트 항공과 한 계약도 끝나는 시점이었죠.

    첼시 홈구장은 런던이잖아요. 주말이면 엄마, 아빠가 아이 손잡고 구장을 찾죠. 선수들이 파란 유니폼에 ‘SAMSUNG MOBILE’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는 걸 보면, 그날 구장은 정말 삼성의 물결이 되는 겁니다.

    그 마케팅 하나로 삼성 휴대폰은 영국에서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했고, 유럽 전역에서 삼성 브랜드가 최고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유니폼을 파는 가게에선 속옷, 모자, 러닝셔츠까지 모두 ‘SAMSUNG’이니 얼마나 뿌듯했겠어요. 처음엔 다들 삼성을 일본 회사냐고 물었어요.”

    밀라노로 사장단 데려가 디자인 감각 깨우쳐

    스포츠 마케팅의 정점은 역시 올림픽 마케팅이었죠.

    “그것도 전적으로 회장님이 주도하신 겁니다. 당시 무선사업부가 어느 정도 수익을 내던 시점이었고요.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부터 홍보관을 운영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는 ‘WOW 프로젝트(Wireless Olympic Works)’를 시작했습니다.

    삼성 휴대폰을 모든 선수에게 나눠줘서, 경기 일정이나 출전 정보 등을 휴대폰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거죠. 

    이후 토리노·시드니까지 이어졌는데, 단순한 홍보관 운영이 아니라 진짜 ‘통신 시스템’이었어요. 올림픽이 끝나면 선수들이 휴대폰을 갖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잖아요. 자연스럽게 삼성 휴대폰이 홍보되는 거죠. 이 모든 프로젝트는 회장님이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셨던 겁니다.”

    휴대폰은 음향 기술과 디자인도 핵심인데, 특별히 회장께서 영감을 준 부분이 있습니까.

    “디자인부터 말하자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매년 4월 열리는 가구 디자인 전시회에 사장들을 데리고 가셨어요. 직접 현장에서 ‘이 색깔을 봐라, 이 곡선을 봐라, 저 컬러와 이 컬러를 비교해 봐라’ 하면서 디자인 감각을 깨우치게 하셨죠.

    이런 경험을 통해 경영진은 제품 디자인뿐 아니라, 사업 전체를 디자인처럼 보게 됐습니다. 상품기획, 개발, 품질관리, 제조, 구매, AS, 광고까지 모든 것을 종합예술로 보게 하신 거죠. 내부 사용자 인터페이스(UI), 애플리케이션, 글씨체, 밝기, 외곽 디자인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디자인 인력도 대폭 늘렸습니다.”

    음향 기술에 대한 강조도 있었나요.

    “네, 특히 TV나 휴대폰의 음질에 집착하셨어요. ‘아주 클레리파이어(clarifier)하게, 청명하게 들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음질이 좋은 덴마크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과 협업하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오디오 칩 기술을 받고, 우리는 MP3 기술을 제공하는 식으로 협력했죠.

    회장께서 ‘삼성은 고급 브랜드, 프리미엄 브랜드로 가야 한다’며 세계 일류와 협력하라고 늘 강조하셔서 제가 루이비통, 페라리 등과 협업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2004년 이건희 회장이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던 그리스 아테네의 삼성홍보관을 방문한 모습. 맨 왼쪽이 이기태 당시 사장, 오른쪽은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 아테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04년 이건희 회장이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던 그리스 아테네의 삼성홍보관을 방문한 모습. 맨 왼쪽이 이기태 당시 사장, 오른쪽은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 아테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 회장이 색깔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해 유행할 컬러를 찾아라, 그건 자동차에 있다’ 이렇게 지시하셨어요. 벤츠 색깔을 연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일모직 플라스틱 기술, 삼성화학의 페인트 기술을 조합해서 수많은 컬러 칩을 만들었죠. ‘몇 번과 몇 번을 섞으면 어떤 색이 나온다’는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표준화된 칼라 칩 덕분에 중소 제조업체에 외주를 줄 때도 ‘다크 그레이는 이렇게, 밀키 화이트는 이렇게’ 명확한 지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 컬러 칩은 휴대폰 색상에 바로 적용돼, 실제로 ‘차콜’ ‘밀키’ ‘다크 그레이’ 등의 색상이 제품에 쓰이게 됐죠.”

    “담배, 끊어볼 가치가 있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회장님 말씀은 당장은 엄청나게 이해하기 어려워요.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쓰시는 언어가 매우 어렵고, 사전에도 없는 말도 많습니다. 일상에서 쓰는 용어도 아니고요. 잘했다고 하셔도, 정말 잘했다는 의미인지, 잘했지만 더 잘하라는 뜻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회의를 하면 회장님이 가끔 질문하세요. 그런데 제가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솔직한 사람이거든요.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하고 말씀드리면 회장님이 끄덕끄덕 하십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맨 왼쪽)이 2023년 11월 24일(현지 시간) 파리 브롱냐르궁에서 열린 국경일 리셉션에 앞서 참석자들과 대화하며 휴대폰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DB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맨 왼쪽)이 2023년 11월 24일(현지 시간) 파리 브롱냐르궁에서 열린 국경일 리셉션에 앞서 참석자들과 대화하며 휴대폰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DB

    밀라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고 회의가 끝나 나왔는데, 맏따님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님이 제게 오시더니 ‘사장님은 어떻게 회장님 앞에서 모른다는 답이 그렇게 금방 나오세요? 저희가 그렇게 하면 죽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 입장에선 회장님 앞에서 괜히 아는 척하고 엉터리로 답했다가 더 혼날 수 있고, 또 회장님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실 테니 모르는 것은 ‘모르겠습니다. 좀 더 연구해서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정상이지 않나요?’ 그렇게 말씀드렸죠.

    그날 이부진 사장님 이야기를 듣고 내심 놀랐습니다. ‘와, 가족들에게는 굉장히 엄하시구나. 거기에 비하면 우리 같은 사장들에게는 훨씬 너그러우시구나.’ 새삼 회장님의 인간미가 느껴졌달까요. 만약 ‘모르겠습니다’ 했을 때 ‘그것도 모르냐’며 구박하셨다면 저는 굉장히 우울했을 겁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또 하나의 일화를 전했다.

    “어느 날, 집사람과 저녁에 한강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회장께서 전화하셔서 ‘이 사장, 뭐 해’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집사람이 몸이 좀 안 좋아서 한강 산보 중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나도 요즘 약간 그런 기운이 있어’ 하시며 공감해 주셨어요. 그러시더니 ‘이 사장, 담배 피우지’라고 묻는 겁니다. 그때 저는 하루에 몇 갑씩 피울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거든요. 그래서 ‘예’라고 답했더니, 회장님이 ‘담배는 끊어볼 가치가 있어’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시는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끊었는데, 너도 끊어’ 대신 ‘끊어볼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끊어라’ 직접 말씀하셨다면 제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질책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다른 분 같았으면 나중에 ‘담배 끊었어’ 하고 물으셨을 텐데, 회장님은 이후 한 번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담배를 끊은 건 그로부터 2년 후였습니다.”

    회장께서 새벽 전화도 많이 했다고요.

    “1996년에 휴대폰을 미국에 처음 수출했을 때, 새벽에 전화하셔서 ‘진짜 잘했다. 축하한다’고 해주셨어요.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 있나요.

    “회의 시간에 메모한 걸 그대로 읊는다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냥 눈을 감고 주무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세요. 그러면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죠. 어느 순간 말을 멈추면, 회장님이 눈을 딱 뜨시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십니다. 

    2000년 6월 14일 이기태 당시 사장(왼쪽)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하얏트 호텔에서 차세대 휴대폰 단말기 공동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 조인식을 마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동아DB

    2000년 6월 14일 이기태 당시 사장(왼쪽)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하얏트 호텔에서 차세대 휴대폰 단말기 공동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 조인식을 마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동아DB

    그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신호입니다.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지적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런 반응을 겪고 나면 상당히 우울해지죠.

    그럴 때는 웃으며 ‘회장님, 앞으로는 더 잘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이런 판단이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바로 풀리셨어요.”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나라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2000년 초였나, 한국이 3세대 이동통신 표준(CDMA·부호분할다중접속)을 동기식으로 갈지, 비동기식으로 갈지를 두고 논란이 컸어요. 저희는 동기식이 낫다고 설명드렸는데, 회장님께서 ‘비동기식으로 가겠네’ 하시는 거예요. 이상하다, 다들 동기식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6개월 후에 공표된 걸 보니 비동기식으로 결정된 거죠. 어떻게 그런 판단을 내리셨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일화는 2000년대 초 한국이 차세대 이동통신 표준을 선택하던, ‘국가급 기술·산업의 갈림길’을 회상한 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전 세계가 2세대(GSM·CDMA)에서 3세대(3G)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3G에서는 동기식(Synchronous, CDMA2000 계열)과 비동기식(Asynchronous, W-CDMA)이 경쟁하고 있었다.

    동기식은 기지국과 단말(휴대폰)이 같은 시계에 맞춰 동시에 데이터를 주고받기 때문에 간섭이 적고, 품질과 속도, 안정성이 뛰어났다. 한국(SK텔레콤·삼성)과 미국(퀄컴) 진영이 주도했다.

    비동기식은 기지국과 단말이 독립된 시계를 사용해 네트워크가 더 유연하고, 유럽식 2G에서 3G로 넘어가기 쉬운 장점이 있었다. 일본(NTT 도코모), 유럽(노키아·에릭슨 등)이 주도했다.

    이 표준의 선택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닌 수출, 로열티, 산업 생태계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었고, 정부·통신사·제조사·연구기관들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한국은 3G 초기엔 동기식으로 상용화를 시작했지만, 세계 표준은 회장님의 예언대로 결국 비동기식으로 굳어졌다. 국내 기업들은 결국 동기식과 비동기식을 병행하는 절충안을 택했고, 이로 인해 기업 입장에서는 두 배의 개발 부담이 생겼다.”

    “여성, 지방대생 많이 뽑아라”

    CDMA 에피소드는 반도체 칩 개발에서 스택(Stack)과 트렌치(Trench)를 놓고 위로 쌓을지, 아래로 팔지 고민했던 시기와 비슷하네요. 갑자기 바꾸느라 고생했나요.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양쪽으로 다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회장님이 말씀하셨을 때 바로 움직였다면 더 빨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참, 애국심 이야기를 하시니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뭔가요.

    삼성전자가 1996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CDMA 휴대폰 ‘SCH-100’. 삼성전자 홈페이지

    삼성전자가 1996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CDMA 휴대폰 ‘SCH-100’. 삼성전자 홈페이지

    “제가 어느 날 지방 대학의 우수한 졸업생들을 많이 채용하겠다고 보고했더니, ‘지역이나 전공에 얽매이지 말고 뽑아라’ ‘여성 인력도 30% 이상 채용하라’ ‘소프트웨어 인력 많이 뽑아라’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게 진짜 애국심 아닌가요? 광주 지역과 수원 공장을 연결하는 클러스터도 기획한 적이 있는데, 삼성은 정말 지역감정이 없었습니다.

    회장님은 삼성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기부도 많이 하고, 직원들한테도 잘해 주시려고 했죠. 그러면서 기술 경영을 통해 세계를 선도하는 회사를 만들고자 하셨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건희 회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선구자’죠. 선구자. 영어로는 ‘비저너리 파이어어니어(visionary pioneer)’라고 할까요. 열정도 엄청나셨고, 날카로운 촉과 사업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신 분이었어요. 파이어니어(pioneer)? 이노베이터(innovator)? 글로벌 리더(Global leader)? 뭐라 해도 결국 ‘선구자’라는 단어가 어울립니다.

    잠도 안 주무시고 공부하실 정도로 열정과 집요함, 직관력도 있으셨고요.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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