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정가 논객들은 8·8재보선을 정치권이 대혼란에 빠진 복잡한 현정국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착잡한 심경으로 8·8재보궐선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1990년대 초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던 민중당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재야가 모두 모여 전민련을 구성했다. 이부영 김근태 이재오씨 등이 한자리에 모여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후 전민련은 민중당 창당세력과 잔류세력으로 분열된다.
장기표씨는 누가 뭐래도 민중당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민중당뿐만 아니라 한국 재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가진 상징성만큼이나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적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는 고집스럽게 독자세력화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정치권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민중당에서 장기표씨의 역할은 정책위의장, 그러니까 민중당의 창당이념과 정강정책은 그의 손을 거쳐 조율되고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우재씨는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민중당 상임대표를 맡아 당의 얼굴로 활약했던 인물. 민중당을 이끌었던 두 거물, 장기표씨와 이우재씨가 여야로 나뉘어 출마했다는 현실은 곧 과거 민중당 주체들의 치열했던 고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들이 한 곳에 정치적 호적을 파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 모습은 민중당의 탄생 때부터 드러났던 문제점의 연장으로 비쳤다.
8·8재보선 전까지 민중당 출신 국회의원은 세 사람이었다. 한나라당의 이재오(李在五), 김문수(金文洙), 안영근(安泳根) 의원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이우재 의원이 이번 재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이력서에 민중당 경력을 적은 현역 의원은 4명으로 늘어났다. 가히 ‘민중계’라 부를 만한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8·8재보궐선거는 정치권에 잊혀졌던 민중당 출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서울지역 최대 경합 선거구에 각각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간판주자로 출마한 것부터가 이들의 녹슬지 않은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 장기표씨는 끝내 낙선했고 그의 낙선은 민중당 출신들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