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는 “참고로 읽어 보라”며 ‘상고 이유서’라는 두툼한 자료를 내밀었다. 지난 3월 대법원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걸 읽어봐야만 이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어요. 대한생명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 정권에서 내가 왜 어떻게 당했는지.”
신동아그룹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현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경. 서울지검 특수1부는 회장인 최씨가 거액의 외화를 빼돌렸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착수했다. 그 무렵 신동아그룹 계열사인 신아원 사장 김종은씨가 최씨를 협박하다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검찰 수사는 활기를 띠었고 최씨는 재산국외도피 혐의로 두 차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최씨의 혐의에 대한 판단을 미뤘다. 대한생명이 미국 보험회사 메트라이프(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와 투자협상 중인 것을 감안해 본격 수사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IMF 사태로 외자유치가 절실한 때였다.
최씨가 구속된 것은 이듬해인 1999년 2월. 재산국외도피와 사기, 업무상배임 등으로 기소됐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곧바로 대한생명에 대한 특별검사에 착수했다. 특검 결과 대한생명의 부실액이 2조6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의 ‘관리명령’에 따라 대한생명에 관리인이 파견됐다. 그 와중에 검찰은 최씨를 불법대출에 따른 배임, 횡령 혐의로 추가기소했다. 그해 5∼6월 금감위는 대한생명을 공개 매각하려 했으나 3차례의 유찰로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대한생명은 금감위 결정에 따라 국영보험사가 되는 수순을 밟았다. 그해 9월 금감위는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자본감소 명령을 내렸다. 대한생명의 주식은 전부 소각당했다. 21개 계열사 대부분도 매각처분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11월 예금보험공사는 대한생명에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경영진이 교체된 신동아그룹은 해체됐다.
“완전히 초법적으로 이뤄진 거예요. 그 배후에는 정치자금 문제가 있고 옷로비사건도 관련돼 있어요. 나를 구속하기 위해 언론과 시민단체를 동원해 외화를 밀반출했느니 해외에 별장을 사놓았느니 비행기를 사놓았느니 하면서 매도했어요. 총수를 구속한 지 한달 만에 국가가 강제로 기업을 점령한 건 대한민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에요.
가장 큰 이유는 1997년 대선 때 DJ에게 대선자금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건의 대전제입니다. 내가 30여 년 동안 사업하면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한 게 그때예요. 그걸 안 줬기 때문에 이 정권이 출범한 후 30대 기업 중 대표적으로 얻어맞은 거예요. 대략 알겠지만 그때 대선자금 제대로 안 줘 괘씸죄로 걸린 기업이 신동아그룹과 모 항공사, K그룹, D증권이에요. 호남의 대표적 기업인 K그룹과 D증권은 나중에 잘 타협해 살아났지만, 나와 모 항공사 회장은 구속돼 혼이 났죠.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대선자금을 주지 않아 당했다는 최씨의 주장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정권이 바뀐 직후 - 아마도 1998년 봄일 거예요 - 어느날 친하게 지내는 모 그룹 회장을 만났는데 ‘대선자금 지원한 기업인 명단에 최회장 이름이 없다’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안 줬다는 얘기는 안 하고 ‘명단이 하나둘이겠냐, 다른 게 또 있겠지’ 했어요. 그 정도로 기업들 사이에서 대선자금과 관련한 얘기가 많이 돌았어요.”
-역대 정권 때는 내셨지요?
“예. YS한테도 줬죠.”
-보통 단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청와대에서 30대 재벌을 초대하면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요. 액수가 자리를 정합니다. 가장 많이 낸 사람이 대통령 바로 옆에 앉습니다. 가장 조금 낸 사람이 맨 끄트머리에 앉아요. 일화를 얘기하죠. 하루는 청와대 만찬에 들어갔는데 풍산금속 유회장이 끝자리에 앉은 저를 보고 ‘최회장도 열 개짜리구먼’ 해요. ‘열 개짜리가 뭐냐’고 묻자 ‘10억이란 얘기야’ 하면서 웃더라고요. 최하가 10억원대였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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