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추모객들.
지난해 2월25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귀향 환영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48분간 이어진 귀향 소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이후 마을에서 친환경농법인 봉하 오리쌀 재배, 인근 하천인 화포천 정화 활동, 장군차 묘목 심기, 봉화산 산림 정비 등 여러 가지 농촌사업을 벌이며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11월부터 본격화된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친형 노건평씨,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건호, 딸 정연씨 등 가족에게로 확대되면서 그의 귀향은 ‘귀양’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자연인으로 해방감을 맛본 시간은 9개월 남짓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4월7일 자신의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에 사과문을 발표한 뒤 모든 언론은 봉하마을 사저를 주목했다. 4월30일 검찰에 소환될 때까지 많게는 100여 명의 취재진이 마을에 몰려들면서 그는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2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렌즈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측근들은 이 기간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했다고 했다. 그에게 ‘잔인한 달’이었던 4월 이후 봉하마을 사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23일 새벽. 노 전 대통령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 노 전 대통령은 별일이 없으면 오후 11시 이후에는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오전 5시에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하거나 간단한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청와대에 있을 때와 비슷한 일과 패턴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 모두가 잠들 시각인 오전 1시2분, 이어 1시20분에 진영 대창초등학교 동창인 서성대씨 휴대전화로 두 차례 연락을 했다. 현재 서씨는 진영읍내에서 부동산 중계소를 운영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로 돌아온 뒤 서씨와 두 차례 만났지만 새벽에 전화통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이름으로 부재중 전화 2통
“아침에 일어났더니 ‘노무현’ 이름으로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왔더라고요. 전화번호는 ○○○-1400번이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전에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어 ‘노무현’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해놓았어요. 그래서 오전에 사무실에서 해당번호로 전화했더니 전화기에서는 없는 번호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전직 대통령 사저 전화번호여서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보안번호였던 것 같아요. 어쨌든 ‘친구가 새벽에 왜 전화했지’라고 생각하며 무심결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친구가 죽었다는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충격이었지요.”
서씨는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하기 전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씨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시절에 몇 차례 도움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서거 며칠 전 또 다른 이상 징후가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측근에게 봉하마을 사저 뒤뜰의 풀을 뽑고 사저 벽에 걸려 있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액자를 떼라는 지시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설한 웹 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서 꾸준히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뜻을 이룬다는 뜻의 고사성어 ‘우공이산’과 성씨인 ‘노’를 합쳐 ‘노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저 컴퓨터 바탕화면에 남긴 유서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다’고 썼다. 이는 건강 때문에 자신이 개설한 비공개 연구 카페에서 활동하지 못해 괴로웠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귀향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에서 관료로 활동한 학자, 측근들과 함께 연구카페를 개설해 진보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이곳에서 그는 수시로 진보주의, 민주주의, 정치적 협상 등 다양한 주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서거 8일 전인 5월15일 이후로는 연구카페에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았다.
글쓰기와 책읽기는 그에게 생활의 중요한 낙이자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이었지만 측근과 가족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 4월 이후에는 이마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비서진에 따르면 4월 이후 이 카페에 노 전 대통령이 글을 올린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거친 상황이 다가오면서 노 대통령은 마음이 번잡한 탓에 집중력이 떨어져 독서와 글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도 “당시(4월 중순 이후) 노 전 대통령 특유의 농담이 사라졌고 부산 사투리의 억양마저 없어진 듯 대통령의 말투는 나지막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