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금까지 정부 관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와서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사람이 김부위원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들로부터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 어교수의 발언은 개혁성향이 강하고 분배를 중시하는 교수와 재야 인사들이 대거 인수위원으로 발탁된 상황을 빗댄 표현이었다. 주류 무대에서 활동해온 학계 인사와 경제관료들이 대부분 인수위에서 배제된 마당에 김부위원장은 어교수가 믿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시점이었다.
김부위원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와 공식적으로 인연을 맺은 후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에 외로이 떠 있는 섬’에 비유했다. 그의 주변에는 개혁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포진했고, 노당선자로부터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공무원”이라고 극찬을 받은 김 부총리는 풍랑 속에 갇힌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은 신세였다.
‘월권’ 시비에 한동안 침묵
당시 김부위원장은 국무조정실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사무실도 두 개였다. 처음에 그는 인수위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경제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기자들 앞에 나와 입을 열기도 했다.
새 정부의 재벌개혁 강도에 대한 우려가 높던 1월8일, 김부위원장은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별관 기자실로 내려와 “재벌개혁은 자율적·점진적·장기적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따를 것”이며 “인위적이지 않고 시장친화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진행한다는 것이 노 당선자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초에 김대환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가 언급한 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에 대해서도 “(구조본은) 형태가 다양하고 법률적으로 제재할 방법도 없다”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의 말에 노대통령의 힘이 실려 있어서인지 개혁 성향의 인수위원들은 이날 아무런 이견도 내놓지 않았다.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인수위 사무실을 방문한 1월21일에도 김부위원장이 나섰다. 기자실에 들러 무디스의 방문 결과를 직접 설명한 것. 당시 무디스와의 면담에는 이정우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현 청와대 정책실장)와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일부 인수위원들은 “무디스와 인수위원들의 면담이었는데도 김부위원장이 무디스측과의 대화를 주도했고, 일부 대목에서는 인수위원들의 발언을 중간에서 끊기까지 했다” “김부위원장은 다른 인수위원들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얘기를 많이 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부위원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한 것에 대해서도 ‘월권’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인수위원들이 작심하고 김부위원장에게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1월23일 한경 밀레니엄 포럼이 끝난 직후였다. 인수위원들은 이날 김부위원장이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도입 등으로 기업의 투명경영이 정착되고 나면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을 문제 삼았다.
정태인 인수위원은 “집단소송제가 도입된다고 해서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없애겠다는 것은 인수위 방침과는 다르다” “인수위 경제분과에서 그같은 방안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으며, 김부위원장은 월권행위를 했다”고 격하게 비판했다. 그후 김부위원장이 “진의가 와전됐다”고 해명하고 이정우 경제1분과 간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겉으로는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으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부위원장은 이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무조정실장으로서 고건 부총리후보자의 국회 청문회 준비를 돕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인수위 사무실에 나와서도 더 이상 기자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제 ‘끝장’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