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박지원·권노갑 현대비자금사건 최후의 미스터리

“박지원한테 안 줬는데 검찰이 자꾸 그쪽으로 몰아서…”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4-11-23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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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의 입구와 출구에 도사린 이익치·김영완의 ‘치고 빠지기’
    • 정몽헌·이익치·김영완 진술은 모순투성이
    • 이익치 회사와 김영완 회사의 비밀계약
    박지원·권노갑 현대비자금사건 최후의 미스터리
    2003년 8월4일 아침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현대그룹 계동사옥 1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다. 검찰(대검 중수부)에 세 번째로 불려가 조사를 받은 지 이틀 만의 일이었다.

    정 회장은 죽기 전 메가톤급 진술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정경유착비리의 전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핵심실세 박지원, 권노갑씨에게 각각 150억원, 200억원을 건넸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박지원씨가 2000년 4월 정 회장에게 150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는 2003년 6월 대북송금 특검조사과정에 불거진 것이다. 권노갑씨의 수뢰혐의는 원래 두 가지였다. 정 회장은 검찰조사에서 2000년 1월과 3월경 권씨에게 각각 3000만달러와 200억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그중 200억원 부분에 대해서만 기소했다.

    정 회장 진술에 따르면, 박씨에게 건넨 돈은 현대건설에서, 권씨에게 전달한 돈은 현대상선에서 빼낸 일종의 비자금이었다. 박씨가 돈을 요구한 명목은 남북정상회담 준비자금이었고, 권씨는 총선자금 명목으로 받았다. 반면 정 회장이 두 사람에게 돈을 준 목적은 카지노 허가 청탁이었다.

    의혹투성이이던 이 사건은 정 회장이 자살한 지 1년 3개월여가 흐른 지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1월12일 대법원(2부·주심 유지담 대법관)이 박씨의 수뢰혐의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기 때문이다.



    박지원씨가 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10월8일 대법원 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의 권노갑씨 수뢰사건 상고심 선고 직후 조심스레 제기됐다. 재판부가 비록 권씨의 유죄를 확정했으나 이 사건의 핵심증인이라 할 만한 김영완씨의 자술서에 대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해외도피중인 김씨는 지난해 8월과 12월 두 차례 검찰에 자술서를 보내왔다).

    실제로 박지원 사건을 뒤집은 대법원 2부는 판결문에서 이 점에 대해 언급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이 사건의 핵심증인인 이익치씨의 진술도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그렇다면 권노갑씨도 재심의 희망을 가질 만하다. 권노갑 사건에서도 이씨의 증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씨의 자술서와 이씨의 진술은 정몽헌 회장이 남긴 진술서와 더불어 박지원·권노갑 사건의 세 축이었다. 대법원 판결로 그중 두 축이 무너진 것이다. 남아 있는 한 축인 정몽헌 회장의 진술서는 당사자의 사망으로 증거로서 한계가 있다. 결국 사건의 주요 얼개가 완전히 엉클어진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단서는 정몽헌 이익치 김영완 세 사람 진술의 모순점이다. 또 하나의 실마리는 핵심증인인 이익치, 김영완 두 사람의 특별한 친분관계다.

    박지원 사건에서는 이익치씨가, 권노갑 사건에서는 김영완씨가 돈 전달자 노릇을 했다. 이씨는 권씨 사건에서는 4단계에 걸친 돈 전달과정에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반면 김씨는 박지원 사건에서 환전소 구실을 했다.

    권씨의 3000만달러 수수의혹도 두 사람을 빼고는 말이 안 된다. 이씨가 정 회장에게 건네준 김씨의 해외계좌로 3000만달러가 입금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지원·권노갑 사건의 입구와 출구에는 이씨와 김씨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이 발자국들을 좇다 보면 검찰수사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이유가 드러난다.

    검찰은 정몽헌 이익치 김영완 세 사람의 진술이 큰 틀에서 일치한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1· 2심 재판부(권노갑 사건의 경우 상고심까지)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진술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서도 엇갈릴 정도로 상호 모순점이 많다.

    먼저 박지원 사건부터 보자. 정몽헌 회장의 진술에 따르면 김영완씨의 역할이 매우 돋보인다. 김씨가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박지원(당시 문광부 장관)씨의 부탁이라며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필요하니 150억원을 무기명 CD(양도성 예금증서)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현대건설 김재수 부사장을 시켜 돈을 마련한 다음, 이익치(당시 현대증권 회장)씨를 통해 박씨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영완씨는 자술서에서 정 회장을 찾아가 ‘박지원 장관이 어려운데 좀 도와달라’고 말한 사실은 있지만 150억원이나 CD 얘기를 꺼낸 적은 없다고 밝혔다. 또 ‘정 회장이 150억원을 박지원씨에게 직접 건넨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익치씨를 통해 전달했다는 사실은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주장했다.

    일반인의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정 회장은 150억원이라는 거액을 제3자를 통해 건네고도 당사자인 박지원씨에게 수령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김영완이 박 장관의 심부름이라며 돈을 요구했지만, 150억원을 무기명 CD로 만들어 박 장관에게 직접 전해주라고 해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2003년 8월2일 최후(2차) 진술)

    엇갈리는 부분은 또 있다. 정 회장은 검찰조사에서 2000년 8월 하순에서 9월 초순경 호텔에서 만난 김씨에게 ‘박 장관이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더라’는 말을 듣고 박 장관이 돈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김씨는 자술서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정 회장의 진술대로라면 CD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박씨에게 CD를 건넸다는 이익치씨와 박씨에게서 CD를 넘겨받았다는 김영완씨뿐인 셈이다. 이씨와 김씨가 묘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노갑 사건에서도 세 사람의 진술은 자주 충돌한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총선 지원금이라는 200억원은 김충식(현대상선 사장)-전동수(현대디지털엔터테인먼트 사장)-김영완의 운전기사 또는 직원-김영완 4단계를 거쳐 권노갑씨에게 전달됐다. 한 번에 40억~50억원씩 다섯 차례 또는 네 차례에 걸쳐 돈을 전달했다는데, 이익치씨가 한 일은 매번 전동수씨에게 돈을 옮겨 실을 장소와 김영완씨가 보내는 차 번호를 일러주는 것이었다.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씨의 진술에 따르면, 권노갑씨가 돈을 요구한 것은 2000년 2월 말 신라호텔에서다. 김영완씨를 포함해 네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총선자금을 요청했다는 것. 공소사실에 따르면 권씨는 ‘김영완이 해달라는 대로 도와달라’고 말했고, 김씨는 ‘200억원을 현금으로 준비해달라’고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신라호텔에서 200억 얘기 없었다”

    그런데 김영완씨는 자술서에서 정몽헌 이익치 두 사람의 진술과 상반된 주장을 폈다. 자신은 200억원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2000년 2~3월경 정몽헌 회장에게 전화가 와 다음날 사무실로 갔더니 ‘200억원이 준비되면 이익치 회장이 연락할 테니 받아서 좀 전해주라’고 말하기에 정 회장이 총선자금용으로 준비한 돈을 저를 통해 권노갑 의원(당시 권씨는 민주당 고문이었으나 김씨는 자술서에서 의원으로 호칭했다)에게 전달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김씨는 또 신라호텔에서 4인이 만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200억원에 대해서는 정 회장 사무실에서 처음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정 회장과 이익치씨의 진술을 무색하게 했다.

    신라호텔 회동에 대해서 서로 말이 다르다. 정 회장이 두 번, 이씨가 다섯 번 만났다고 진술한 데 비해 김씨는 ‘한 번 정도 갔던 것처럼 생각이 된다’고 주장했다(권씨는 이들을 신라호텔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3000만달러 부분은 더욱 기가 막히다.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그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정 회장의 진술 때문이다.

    ‘2000년 3월경 추가로 200억원을 준 적이 있는데, 그때 권노갑이 ‘저번엔 고마웠다’면서 돈이 더 필요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3000만달러와 200억원이 맞물려 있음을 짐작케 하는 진술로, 3000만달러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면 200억원에 대한 진술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의 진술에 따르면 3000만달러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이익치씨다. 1999년 12월 말 또는 2000년 1월 초 신라호텔에서 권씨의 요구가 있은 지 3, 4일 후 이씨가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와 ‘권노갑 쪽에서 3000만달러를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이어 ‘다시 며칠 뒤 이씨가 해외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들고 와 ‘이쪽으로 보내달란다’고 말하기에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을 불러 돈을 마련해 그 계좌로 송금할 것을 지시했으며 며칠 후 김충식 사장에게 송금완료를 보고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이익치씨는 정 회장이 자신을 불러 ‘민주당에 3000만달러를 주려고 하는데, 필요한 계좌를 김영완이 가지고 올 테니 받아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말했다며 상반된 진술을 했다. 반면 김영완씨는 정 회장이 ‘돈(3000만달러)을 준 다음에 김영완에게서 권노갑이 돈을 잘 받았다는 취지의 얘기를 들었다’는 진술을 했으나, 자술서에서 3000만달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권씨의 3000만달러 수수혐의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3000만달러(실제로는 2500만달러) 송금시기와 200억원 요구시기가 거의 겹쳐 있다는 점, 대북송금사건으로 출국금지된 상태에서 송금영수증을 찾아오겠다며 검찰 조사 도중 미국으로 출국한 김충식씨가 석연찮은 이유로 돌아오지 않는 점, ‘귀국보증’ 명목으로 함께 출국했던 김씨의 변호사가 검찰 간부와의 국제통화에서 영수증의 내역을 자세히 밝히겠다고 한 바로 그날 아침 정 회장이 자살한 점 등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권노갑 미스터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신동아’ 2004년 2월호, 6월호 참조).

    이제 한쪽은 유죄가 확정됐고 다른 한쪽은 사실상 무죄가 선고된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두 사건 모두 김영완씨가 돈을 관리했다는 점이다.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박지원씨한테 받은 CD를 현금으로 바꾼 후 박씨가 요청할 때마다 현금과 수표로 건넸다는 것이다(검찰은 수표를 추적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김씨는 권노갑씨한테도 권씨가 ‘돈상자를 갖다달라’고 할 때마다 건넸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채권이다. 김씨는 박지원씨의 돈 150억원 중 40억원을, 권노갑씨의 200억원 중 50억원을 국민주택채권으로 바꿔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이 채권들을 지난해 9월 검찰에 증거물로 제출했다. 잔금을 보관한 명목도 똑같다. 박씨와 권씨의 차기 총선자금으로 여겨 보관해왔다는 것이다.

    두 사건의 차이점은 돈을 전달한 방법이다. 김씨는 박씨의 경우에 호텔과 박씨의 집 등지에서 한 번에 1000만원에서 2억원까지 직접 건넸다고 진술했다. 권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6억, 8억, 10억원씩 가방에 담아 권씨 집에 찾아가 직접 전달했다는 것. 그런데 권씨의 경우 200억원 중 일부(100억원)는 제3자, 즉 ‘권씨가 보낸 사람’을 통해 50억원씩(상자 25개) 두 차례 전달했다. 그런데 ‘권씨가 보낸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유죄증거로는 쓸모가 없다. 박지원 사건은 돈 전달과정이 비교적 간단한 반면 권노갑 사건은 돈의 흐름을 아는 증인이 여럿이라는 것도 차이점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익치 김영완 두사람의 관계다. 김씨는 자술서에서 박지원 정몽헌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한 반면, 이씨에 대해서는 짤막하게 언급했다.

    ‘이익치 회장은 정 회장을 만날 때 가끔 만났고, 현대증권 사무실에 찾아가 가끔 만난 사실이 있긴 하지만 특별하게 친분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씨도 김씨와의 관계에 대해 ‘오너(정 회장)’와 가까운 사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자신과는 별 관계가 아니라는 투로 진술했다. 반면 김씨와 정 회장, 김씨와 박지원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진술했다.

    “그 사건에 대해선 말할 게 없다”

    하지만 ‘별 관계’가 아니라는 두 사람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은 1998년과 1999년에만 모두 여섯 차례 골프를 같이 쳤다. 또 박씨와 권씨에게 현대비자금이 ‘전달’된 지 4개월 가량 지난 2000년 8월 이씨가 회장으로 있던 현대증권과 김씨가 대표인 J&C캐피탈이 리스크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은 사실도 드러났다. 정 회장은 김씨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 이씨가 두 차례 자신의 집무실로 김씨를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다고 밝혔다.

    이씨 주변에서는 이씨가 지난해 7월 정치권 지인에게 “박지원한테 안 줬는데 검찰이 자꾸 그쪽으로 몰아 괴롭다” “정 회장이 먼저 줬다고 진술해놓아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최근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 얘기의 진위를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회장 맞느냐’는 질문에 ‘예’라며 조심스레 전화를 받던 그는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번호가 바뀌었다”며 갑자기 끊어버렸다. 그후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성메시지로 용건을 밝혔는데 응답이 없었다.

    이씨와 더불어 정 회장 자살의 비밀은 알 만한 사람으로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강명구 전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박기수 전 현대상선 미주본부장, 그리고 김영완씨가 있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언론을 피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으로 출국한 김충식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김씨 변호인측은 취재 자체를 거부했다. 강명구 박기수 두 사람은 정 회장의 마지막 술자리에 동석했을 정도로 정 회장과 절친했다. 강씨와는 전화연결이 되지 않아 부인에게 용건을 말해뒀는데 끝내 연락이 없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박기수씨의 경우 어렵게 전화가 연결됐으나 신분과 용건을 밝히자 “그 사건에 대해선 할 얘기가 없다”며 서둘러 끊었다. 박씨는 정 회장이 자살한 직후 검찰에 불려갔다 온 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쫓기듯 출국해 의혹을 낳았다.

    김영완씨의 변호인측은 “우리도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쪽에서 전화해야 연결된다. 질의서를 줘봐야 전달할 방법도 없다”며 김씨의 소재를 탐문하는 것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박지원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한 ‘오마이뉴스’는 최근 김씨의 핵심측근인 한 사업가의 제보라며, 김씨가 이익치씨와 짜고 정 회장의 비자금을 빼돌렸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정 회장의 자살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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