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원안 수정을 둘러싼 논란은 이명박 대통령 집권 중반기 정국 풍향과 국정 운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메가톤급 이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세종시 원안 수정에 총대를 메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앞장서 반대하는 것으로 대결구도가 짜이면서 세종시 논란은 여권 차기 대권주자들의 대선 전초전 성격으로 비화됐다.
힘이 실린 정권 출범 초기에 세종시 원안 수정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촛불정국’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실기(失機)했다는 설명이다. 인수위에서 세종시에 행정부처를 옮기지 않는 대신 충청권의 민심을 달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검토해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정가에 파다하다.
정권 초기에 세종시 수정을 강행했다면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임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야권이 전열을 정비한데다, 여권 내에도 ‘친박’이라는 비주류 세력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세종시 문제를 풀어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정운찬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총리에 지명한 직후, 세종시 수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자연스레 ‘포스트 MB’ 후보군으로 부상했다. 학자 출신인 그가 세종시를 타고 정치인으로 대변신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 것처럼 보인다.
세종시 총대 정운찬 총리
언뜻 보기에는 고향인 충청권의 반발로 대권 가도에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충청과 수도권에서 모두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됐다는 기대 섞인 해석도 있다. 정 총리의 한 측근은 “세종시 대안이 나오면 원안 수정에 반대하던 박 전 대표는 머쓱해지고 정 총리가 호평받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행정부처를 옮기지 않게 되면 정 총리가 수도권의 환영을 받고, 대신 충청권 주민들이 만족할 수준의 대안이 나오면 고향에서 그의 인기가 올라갈 것이란 설명을 곁들였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정 총리는 충청을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전국 10곳에 조성되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도 원안이 수정되든지, 그대로 추진되더라도 혁신·기업도시에 갈 수 있었던 수도권의 기업과 연구기관들이 세종시로 빨려들어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는 하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다만 정운찬 총리가 잠재적 대권 경쟁 상대로 부상하고, 다른 잠룡들이 세종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 경쟁 상대들이 하나 둘씩 링에 오르면서 긴장감을 갖게 되고 차별화를 시도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 그의 한 측근은 “세종시 문제를 다음 대선과 연결시키지는 않지만, 굳이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쁠 게 없는 구도”라고 말했다.
다만 박 전 대표에게는 큰 부담이 하나 있다. ‘세종시 원안+α’라는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퇴로를 봉쇄해버린 점이다. 박 전 대표는 ‘국민과의 약속’과 ‘원칙’을 강조했지만 정부의 수정안이 나오기도 전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 같은 우려는 친박 진영 안에서도 나온다. 친박 계열의 한 의원은 조심스럽게 ‘작전상 후퇴론’을 제기했다.
“세종시 원안 수정과 관련한 여론을 세밀히 살펴보면 지식층과 수도권, 30~50대에서 수정을 찬성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 ‘박 전 대표가 너무 완고한 게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친박 내부에서도) 꽤 많다. 국가 지도자로서 정책의 유연성과 적절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굳이 원안이 아니더라도 행정부처 일부가 이전한다는 조건이 붙으면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출구전략’도 검토해야 할 시점이란 고언(苦言)이다. 다른 친박 의원도 “당초 계획대로 9부2처2청을 다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세종시를 교육과학복합도시로 만들겠다면 그와 관련된 몇 개 부처가 가는 방안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TV 생방송 국민과의 대화 이후 전국을 순회하다시피 하며 세종시 원안 수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여권 주류가 총출동해 대(對)국민 설득에 나서 이미 여론전에서 밀렸다는 자체평가도 없지 않다.
친박 일부서 고개 드는 ‘출구전략’
박 전 대표 개인의 이미지 관리 차원뿐만 아니라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퇴로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친이 내부에서도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새어나온다. 정부 수정안이 최종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친이, 친박 간 교집합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론도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입장은 단호하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그의 ‘세종시 원안 사수(死守)’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한때 친박계의 좌장으로 인정받던 김무성 의원은 2009년 5월 ‘원내대표 추대론’ 파동과 몇 가지 일로 박 전 대표와 사이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김 의원이 박 전 대표의 ‘원안+α’발언이 나올 즈음에 “세종시 법안은 잘못된 것이므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표는 그 소식을 듣고 상당히 마음이 상했다고 한다. 이후 김 의원과 절친한 친박계 의원이 박 전 대표를 만나 “여러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화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그 문제는 나에게 맡겨달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박 전 대표의 핵심 측근은 “소위 말하는 세종시 출구전략이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출구전략? 그것은 언론에서 만들어낸 말 아니냐. 한나라당이 다수 야당 시절에 법을 통과시킨 것이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추진했던 정책’이라며 바꾸려 해선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수정된 정책을 또다시 변경하려 들면 어떻게 되겠느냐. 또 이번에 정부 의지대로 세종시 원안이 수정되면, 혁신도시를 비롯한 균형발전정책 전반에 대대적인 손질이 가해질 것이 틀림없다.”
영남 출신 친박 중진 의원은 “세종시는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박 전 대표가 입장을 바꿀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박 전 대표는 미디어법 파동 때 ‘말 바꾸기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당시 일각에서 ‘박근혜식 원칙론’에 의문을 품는 여론도 형성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욱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다.
이완구 충남지사는 세종시 수정 논란 와중에 ‘지사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는 세종시와 관련, 아직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왼쪽).
원칙의 문제뿐 아니라 ‘실리’를 따지더라도 후퇴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친박 내부에서 제기된다. 출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다수 친박 의원도 지금 시점에서 출구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세종시 정국에서 박 전 대표가 이른바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친박 의원 대다수는 ‘원안 수정이 무산되면 그 공은 고스란히 박 전 대표에게 돌아간다’고 보고 있다. 이 경우 박 전 대표가 말한 ‘+α’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 ‘+α’라는 것은 9부2처2청 외에 다른 기관이 더 오거나 별도의 지원을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짓는 데 필요한 인프라 구축과 부대효과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친박 강경론자들은 만일 원안이 수정되더라도 대권의 캐스팅 보트를 쥔 충청권에서 박 전 대표의 입지가 흔들릴 부분은 없다고 파악하고 있다. 충청도민들이 만족할 만한 대안이 나오지 않아 지역민심이 들끓으면 원안 고수에 앞장섰던 박 전 대표의 주가가 올라가게 된다는 것. 이에 반해 적절한 대안이 나와 충청민이 수용하더라도 “그나마 박 전 대표가 노력했기에 가능했다”는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박 전 대표가 “내가 아닌 충청도민과 국민을 설득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충청도민을 설득시킬 만한 묘안이 나온다면 받아들일 명분도 생긴다. 결국 똑같은 결과를 가상하더라도 대권주자들 사이의 셈법은 크게 다르다.
친이, 특히 이재오계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박 전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며 세종시 논란에 한 발을 담갔다. 김 지사는 2006년 경기도지사선거에서 ‘대(大)수도론’을 공약으로 제시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수도권의 경쟁력 강화를 주창하고 있다. 그는 2009년 11월25일 연세대 리더십센터가 주최한 리더십 특강에서 “세종시는 선거 포퓰리즘에서 비롯된 잘못 박힌 말뚝”이라고 규정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 나서면서 캐스팅 보트를 쥔 충청도 표를 의식해 행정수도 이전을 약속한 것이란 주장이다.
김 지사는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면 충청도보다 낙후된 강원도 등 다른 지역에 행정중심도시를 세워야 했다. 당시 세종시 구상은 나눠 먹기의 대표적 사례며 국가경쟁력을 가로막는 말뚝”이라고 했다. 김 지사는 2009년 9월에도 세종시 문제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은 말뚝 중 가장 잘못된 말뚝으로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가 이완구 당시 충남지사로부터 “대권 도전을 위한 사전 작업 같은데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지 말라”는 핀잔을 공개적으로 듣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김 지사와 호흡을 맞춰 수도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세종시 원안 추진은 물론 과도한 지원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오 시장은 12월7일 ‘수도권 광역경제권, 미래 국가 경쟁력’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지역균형발전에만 초점을 맞추는 정국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또 “세종시 문제를 더 이상 지역 이해 차원에서 다루지 말고, 진정으로 대국적인 백년대계를 위한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 남면 일대의 공사현장
세종시 논란과 관련, 이완구 충남지사는 최근 승부수를 던졌다. 2009년 12월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도지사직 전격 사퇴 및 6·2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것. 11월27일 이명박 대통령이 TV 생방송 국민과의 대화에 나와 세종시 원안 수정에 대해 사과하고 향후 추진 방향을 밝힌 직후다. 이 지사는 자신의 사퇴가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 백지화에 반대하는 충청 여론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한 최후통첩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이 지사가 당장 눈앞에 닥친 6·2 지방선거 포기를 선언한 것은 요동치는 충청 민심을 발판으로 차기 대권창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뒤 차차기를 노리겠다는 포석을 깐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와 맞설 수 있는 한나라당의 충청권 맹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는 분석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는 세종시 원안 추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박 전 대표와의 연결고리 강화 차원에서 초강수를 뒀다는 관측이다. 이 지사가 이 대통령의 세종시 원안 수정에 강력히 반발하면서도 “한나라당 탈당까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것을 두고 여권의 충청권 지분을 본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세종시 수정 논란으로 들끓는 충청 민심의 정치적 수혜자는 결과적으로 이 지사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충청 지역 정가의 공통된 반응이다. 충청권에서 이 지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는 강력한 추진력과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지난 3년6개월 동안 도정(道政)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충청지역의 한 언론인은 “이 지사가 평소 도민들에게 약속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 도지사직을 사퇴했지만 이는 정치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 지사의 사퇴를 ‘진정성이 결여된 정치적 제스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여당 소속 단체장으로서 현직에서 얽힌 문제를 풀어가야지 정부 수정안이 나오기도 전에 덜컥 지사직 사퇴를 선언한 것은 향후 입지를 고려한 무책임한 처신이란 지적이다.
이 전 지사에 비판적인 한 언론인은 “도지사직을 내놓으면서 한나라당 당적을 유지한 것은 다양한 노림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충청 민심을 대변해 이 대통령을 압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박 전 대표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해석했다. 그는 또 “이 전 지사가 실제로 지방선거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재선 의원을 지낸 그가 차기 대선을 앞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충청권에 출마해 정치 일선에 복귀한 뒤 본격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고, 이후 차차기 대선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이 전 지사는 오래전부터 정·부통령선거로 치러지는 미국식 대선 방식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고 한다. 지역별 유권자 분포로 볼 때 충청권 후보가 독자출마해서는 당선이 어려운 만큼 영남 출신과 연계한 대권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의 행보도 관심사다. ‘관리형’에 가까운 정 대표는 현재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소신을 밝히지 않고 있다. 여당 대표 지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청와대의 뜻을 존중하는 모습이다.
그는 친이 내부에서 출구전략론이 한창 나오던 2008년 12월11일, TV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출구전략은 잘못된 보도라고 이해한다”며 진화를 시도했다. 또 세종시 문제에 대한 당론 결정을 위해 표결을 실시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표결도 하나의 방법”이라면서도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이기를 기대한다”고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MB 진영의 ‘군기반장’으로 통하면서 본인 스스로 대권에 뜻을 두고 있는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은 정치현안으로 부상한 세종시 문제에 대해 되도록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12월7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세종시나 4대강 사업에 대한 민원은 어떤 원칙을 갖고 접근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4대강이든 세종시든 정부 정책에 의해 개인의 생활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다. 아울러 “정부기관은 정부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고 그 문제는 (권익위가) 소관 부서도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한나라당 조기 전대 가능성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여권 잠룡들의 이해관계가 이처럼 복잡하지만 어차피 세종시 대안이 나온 직후 한나라당에서는 차기 대권 전초전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바로 2, 3월 조기 전당대회 개최 가능성 때문이다. 지금은 세종시와 4대강 사업 등 복잡한 현안들이 맞물려 당내 각 계파에서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조기 전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지만 새해를 맞으면서 핵심 현안으로 불거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계파를 초월해 당 쇄신에 앞장서고 있는 초선의원 모임인 ‘민본21’이 국회의 예산안 처리 등 연말 일정이 마무리되고 새해에 접어들면 조기 전대 개최를 포함한 쇄신론을 다시 점화시킬 태세다. 조기 전대 실시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친이 핵심에서 조기 전대에 부정적인 게 가장 큰 이유다. 현재 친이 진영에선 조기 전대가 열리더라도 마땅히 내세울 인물이 없다.
이재오 권익위원장이 지도부 재입성을 검토하고 있지만 상황이 꼬여 있다. 7월에 실시될 서울 은평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선 비슷한 시기에 예정돼 있는 정기 전당대회를 피해 2월 조기 전대에서 당권을 잡아야 하는 속사정이 있다. 하지만 지난 9월에 취임한 현직을 5개월 만에 사퇴하고 당권에 도전하기에는 명분이 너무 약하다. 당권을 잡더라도 6·2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해야 하는데 여기서 한나라당이 패할 경우 책임론에 휘말려 순식간에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방선거까지는 정몽준 대표 체제로 가자는 의견이 친이 내부에서 많다.
다만 ‘박근혜 변수’가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친박 진영에서는 “박 전 대표가 6·2 지방선거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 친박계 한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는 차기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선거”라며 “박 전 대표가 어떤 식으로든 선거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친박 의원 모임인 ‘여의포럼’의 정기회동에서도 박 전 대표의 지방선거 역할론이 꾸준히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에서 역할을 하려면 하나의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당 지도부 재입성이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당 지도부로부터 지원유세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거는 당의 책임 있는 분들이 맡아서 치러야 한다”는 논리로 거부해왔다. 특정한 당직을 맡고 있지 않은 자신이 나서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박 전 대표가 명분을 갖고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려면 조기 전대를 통해 당권을 잡아야 한다. 지방선거 역할론을 주장하는 친박 의원들이 조기 전대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출마했을 경우의 당선 가능성이다. 현재 여권에는 현역 국회의원 기준으로 100여 명의 친이계와 60여 명의 친박계, 그 사이에 위치한 중립계가 공존한다. 대의원들을 움직이는 현역 국회의원 분포로만 보면 이재오 위원장이 출마하지 않고 다른 친이계 후보가 나오거나 친이의 지원을 받는 정 대표가 재출마해도 박 전 대표의 승산이 낮아 보인다.
월박, 주이야박, 그리고 복박
그러나 이는 오류가 많은 계산법이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는 전당대회 현장 대의원 투표와 여론조사 결과를 합산해 당선자를 뽑는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박 전 대표가 출마를 강행하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몰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다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표가 당권에 다시 도전하면 이른바 ‘월박’(越朴·친박으로 전향), ‘주이야박’(晝李夜朴·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 ‘복박’(復朴·친이로 넘어갔다가 다시 친박으로 전향) 의원들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 전 대표는 조기 전대와 지방선거 역할론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공식석상에서는 물론이고 친박 의원들의 모임에 참석해서도 일부 의원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 전 대표의 평소 스타일을 감안해도 조기 전대 같은 정치모험에 앞장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세종시 변수’는 그런 박 전 대표의 원칙론을 허물 수 있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에 따른 민심의 흐름, 그리고 이와 연결돼 수많은 지방선거 출마자의 요구가 물밀 듯이 몰려올 경우 박 전 대표는 선택을 해야 한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 때처럼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결과에 불만을 표시하며 친박 무소속과 친박연대 후보들의 출마를 묵인하는 일은 반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한꺼번에 돌파하려면 본인이 직접 당권을 잡고 지방선거의 모든 책임을 지는 방법밖에 없다.
이회창, 충청 대변자 자임
여권 잠룡들이 세종시를 발판으로 대권고지를 탐색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야권에선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을 각각 이끌고 있는 정세균 대표와 이회창 총재 외엔 세종시 문제에 본격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있다. 10·28 재·보선 승리로 탄력을 받은 정세균 대표는 ‘생활정치 속으로’를 표방하면서 세종시 여론을 듣기 위해 연일 현장을 찾고 있다. 이회창 총재는 이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직후 자유선진당 의원들의 일괄 사퇴를 결의하는 등 충청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시는 이미 여권 잠룡들의 무대가 돼 있어 야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