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정권이 악질적으로 나오거나 지지부레한 것들은 다 차내깔려도…
- 날개탁에 앉은 기업가들을 보니 모두 소도적놈들처럼 생겼다
- 정몽구는 쓸 것 같지 못하다
- 남조선 기업가들이 엉거주춤할 때 우리가 현정은 회장을 자꾸 내세워주어야…
못 이룬 꿈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개성시장을 해보는 것입니다.”
2003년 8월 영면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타계 두 달 전 방북했을 때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북사업에 대한 열정을 개성시장을 맡아 불태워보겠다는 심경도 밝혔다고 한다.(‘동아일보’ 2003년 9월16일자 “故 정몽헌 회장 개성시장 꿈꿨다” 제하 기사 참조).
정 회장에게 대북사업은 처음엔 비즈니스였으나 말년엔 통일사업이었다. 현대아산을 퇴직한 한 인사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는 회사다. 민족적 사명이 없으면 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정은 회장은 2008년 정 전 회장을 기념하는 작곡발표회에 참석해 사부곡(思夫曲)을 연상케 하는 말을 했다.
“그토록 남북을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어하던 회장님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습니다. 살아 계실 적 못다 이룬 꿈을 꼭 이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대아산의 처지는 1999년 창사 이래 최악이다. 2008년 7월 이후 회사를 떠난 직원이 700명에 달한다. 현 회장은 2009년 8월 금강산에서 리종혁 부위원장, 원동연 실장을 만났을 때 “인원의 70%를 줄였습니다. 계속 적자를 보고 있어서요. 연말까지나 버티지 연말이 지나면 버틸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남북경협은 정주영 전 회장, 정몽헌 전 회장의 유업. 정주영 전 회장은 방북할 때 훗날 적통 기업을 물려준 정몽헌 회장과 동행했다. 현 회장이 김 위원장을 만날 때는 딸인 정지이 전무가 동석한다.
현대그룹-북한 커넥션은 두꺼운 것 같으면서도 얇고, 얕은 것 같으면서도 깊다. 그렇다면 현대그룹에 대한 북한의 시각은 어떨까?
이와 관련해 ‘신동아’는 현대그룹, 남북경협을 바라보는 북한 당국의 생각이 담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비공개 연설문을 단독입수했다.
‘신동아’가 입수한 연설문에서 김 위원장은 “북남경제협력 사업에서 남조선 기업가들이 엉거주춤할 때 현정은 회장을 자꾸 내세워주어야 한다”면서 “지지부레한 것들은 다 차내깔려도 우리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꽉 쥐고 있으면 한나라당 것들에게 압을 넣고 고립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비공개 연설 내용이 한국 언론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월간조선’이 1997년 7월호에서 1996년 12월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50돌 기념식(1996년 12월) 때 김 위원장이 발언한 내용을 입수해 공개한 적이 있다.(‘월간조선’ 1997년 7월호, “우리는 지금 식량 때문에 무정부 상태가 되고 있다” 제하 기사 참조)
북한 식량난을 다룬 국내외 학술 논문의 상당수가 김일성대 연설 내용을 인용한다. 김 위원장은 당시 “현재 농부와 광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식량을 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대에 쌀을 공급할 수 없습니다. 하루 450g만 먹으면 나머지를 군에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 인민들이 동의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관광 사업에서 선코를 떼라”
우선 ‘신동아’가 입수한 연설문의 전문을 읽어보자. 연설문은 북한에서 ‘말씀’이라고 부르는 형식으로 작성돼 있다. ‘말씀’은 실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게 아니라 북한 특유의 형식으로 발언을 각색해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오라고 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라고 하여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현정은 회장이 오면 현대그룹이 백두산관광 사업에서 먼저 선코를 떼라고 하여야 합니다.
개성공업지구는 남조선 정부 차원에서 토지공사가 하든 누가 하든지 간에 거기에 현대그룹이 참가하는 것은 관계하지 말고 우리는 개성 박연폭포 관광사업을 현정은 회장이 맡아보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현대그룹이 백두산 관광, 금강산 관광, 개성 박연폭포 관광을 다 맡아 하는 것으로 됩니다.
우리가 백두산 관광 건을 지지부레한 일반 재벌들에게 주는 것보다 현대그룹에서 백두산 관광을 하라고 하여도 현정은이한테는 많은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과 정몽헌은 우리와 북남협력사업을 제일 먼저 시작하였고 앞장에 섰댔으니 우리가 지금은 그 모법을 현정은 회장이 계속 이어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대북관광은 비즈니스지만 ‘현금 원조’를 하는 측면도 있다.
현정은 회장이 올리는 편지 보고와 대책적 의견에 대한 문건을 인차 비준해주지 않고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현정은 회장이 나에게 보내온 편지를 보면 내가 4·25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자기를 따뜻이 손잡아주고 오찬 석상에서 세심한 배려를 해준 데 대하여 마음속 깊이 느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한 자리에서 감히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아는 척 안 했다고 하였습니다.
현정은 회장이 비록 녀성이기는 하지만 우리와 협력을 하면 잘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그룹이 적자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남조선에서 백두산 관광 바람까지 불어 관광이 활성화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현정은 회장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남조선기업가들이 우리와 무엇을 하다가 구멍이 막히게 되면 현정은 회장을 찾아가 청탁을 하게 되고 또 무슨 일이 생겨도 다 현정은 회장만 쳐다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남조선에서 새 정권이 들어앉아 악질적으로 나오거나 지지부레한 것들은 다 차내깔려도 우리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꽉 쥐고 있으면 한나라당 것들에게 압을 넣고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현정은 회장 밑에 아첨꾼들이 돈을 떼먹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로무현 일행을 위한 오찬회를 하면서 날개탁에 앉은 특별수행원이라고 하는 기업가들을 보니 모두 소도적놈들처럼 생겼습니다. 정몽구는 쓸 것 같지 못합니다.
사실 현대아산 회장이었던 정몽헌이는 남조선에서 한나라당 것들이 대북송금이요, 뭐요 하면서 특검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그가 고민을 하다가 죽었는데 우리가 정몽헌을 생각해서라도 현정은 회장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수령은 오류가 없다”
북한에선 김 위원장의 말을 ‘말씀’ 형식으로 전한다. 김일성 전 주석의 말은 ‘교시’.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 말씀’은 초법적이다. 북한은 “수령은 오류가 없다”고 가르친다. ‘교시’ ‘말씀’은 관료 인민이 관철할 목표다. 북한 주민들은 생활총화 때 ‘교시’ ‘말씀’을 근거로 자아비판, 상호비판을 한다.
10년 넘게 북한과 무역 일을 해온 한 조선족 사업가는 ‘말씀’ ‘교시’를 익혀두면 협상할 때 유리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상이 뒤틀릴 때 쓰는 ‘칼’이 하나 있다. 당신이 지금 말하는 건 김일성 교시와 다르다고 짚어주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다.”
북한에서 발행하는 잡지 중 ‘경제연구’라는 게 있다. 경제학 석학들의 논문을 싣는 학술저널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제학을 배운 사람이 읽기에는 버겁다. ‘말씀’ ‘교시’를 인용하면서 경제이론을 풀어가기 때문이다. 경제학 석학이 비전문가인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언설을 빌려오는 셈이다.
그만큼 북한에서 ‘교시’ ‘말씀’은 권위를 갖는다. 대남사업을 하는 북한 일꾼들이 ‘말씀’을 어떻게 여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북한의 군·당·정에서 “현정은 회장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란 내용의 ‘말씀’이 담긴 문서가 회람된 때는 2008~09년으로 전해진다. ‘말씀’의 작성 시기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것으로 보인다.
다섯 번의 위기
지금부터, 김 위원장의 말을 쪼개서 들여다보자.
“우리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오라고 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라고 하여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의 ‘말씀’대로 현 회장을 ‘오라고 했다’. 2009년 봄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을 비롯한 구(舊)여권 인사들을 통해 현 회장을 초청한 것. 당시 북한은 현 회장과 정지이 전무 두 사람만 불렀다. 5월25일 2차 핵실험으로 이 초청은 무산됐고, 연장선상에서 8월4일 현정은-리종혁·원동연 면담이 이뤄졌다. 이 면담에서도 북측은 “빠른 시일에 평양에 오라”고 말했다.(‘신동아’ 2009년 12월호 ‘현정은-리종혁·원동연 면담록으로 본 남북관계 막전막후’ 제하 기사 참조)
“우리는 현정은 회장을 쥐고 관광창구의 일원화를 하여야 합니다. 북남경제협력사업에서 남조선기업가들이 엉거주춤할 때 우리가 현정은 회장을 자꾸 내세워주어야 현대그룹을 추겨세울 수 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앉아 악질적으로 나오거나 지지부레한 것들은 다 차내깔려도 우리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꽉 쥐고 있으면 한나라당 것들에게 압을 넣고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현대그룹을 지렛대로 남북경협을 늘려가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경협에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한나라당에 대한 감정도 드러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현대그룹과 일하겠다는 북한의 의지엔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그간 네 차례의 고비를 넘었다. 1999년 발발한 1차 서해교전(연평해전)이 첫 번째 위기. 남북관계는 얼어붙었으나 평양과 현대그룹의 핫라인은 남북 간 정규전 뒤에도 유지됐으며,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타격받지 않았다. 현대그룹과 평양의 신뢰 덕분이었다.
두 번째 위기는 2003년 8월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언론들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이 선장을 잃고 표류하리라고 전망했으나 현 회장은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된 두 번째 위기를 넘어섰다. 현 회장은 결국 정주영가(家) 며느리에서 현대그룹 회장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세 번째 위기는 2005년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부회장의 거취 문제로 북한이 현 회장을 압박하면서 닥쳤다. 현 회장은 역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네 번째 위기는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 2008년 7월 북한군 초병이 관광객 박왕자씨를 살해하면서 다섯 번째 위기가 시작됐는데, 이 위기는 지금껏 해소되지 않고 있다.
현 회장은 2009년 8월10~17일 평양방문 때 김 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 및 비로봉 관광 개시, 금강산 관광 편의와 안전보장 ▲육로통행 및 체류 관련 제한 해제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단 활성화 ▲백두산 관광 개시 ▲추석 때 남북이산가족 상봉 등 5개항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현대아산은 정부가 금강산·개성관광 재개를 용인하지 않아 숙원인 대북(對北)관광을 재개하지 못했다.
“가족하고 통로를…”
“현정은 회장이 올리는 편지 보고와 대책적 의견에 대한 문건을 인차 비준해주지 않고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편지 보고’는 일반적 서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종의 관례다. 현 회장은 8월4일 금강산 접촉 때도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달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 위원장을 만난 인사는 북한식 표현으로 ‘감사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여긴다. 북한은 2002년 5월 박근혜-김정일 면담 뒤에도 박근혜 전 대표의 서신을 바랐다고 한다.
“날개탁에 앉은 특별수행원이라고 하는 기업가들을 보니 모두 소도적놈들처럼 생겼습니다. 정몽구는 쓸 것 같지 못합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수행원으로 방북한 재계 인사는 정몽구 현대자동자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다. 한국의 기업인을 바라보는 김 위원장의 시각이 엿보인다. 정몽구 회장을 따로 비판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전 회장과의 관계가 고려된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정몽헌을 생각해서라도 현정은 회장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정 전 회장에 대한 평양의 신뢰는 상당한 것 같다. 그럼에도 한국의 정권교체기 때 북한의 대남 라인이 물갈이되면서 현대아산은 한동안 평양의 고위층과 연결되지 못했다. 현대아산 임원들이 만나는 북한 인사의 격도 떨어졌다. 한 예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조사 명목으로 방북한 윤만준 당시 현대아산 사장은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인사 3명을 만나는 데 그쳤다. 현대그룹은 현대아산 직원이 억류됐을 때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지도위원회 류미영(월북한 최덕신 전 천도교 교령의 부인) 위원장 쪽으로까지 접촉을 시도하는 등 채널을 구축하고자 다각도로 노력한 것으로 알려진다. 리종혁 부위원장이 현 회장을 만났을 때 “가족하고 통로를 하나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대남라인이 물갈이된 뒤 현대그룹-아태평화위원회 간 직통로가 부재했음을 암시한다.
북한은 2009년 11월30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1990년대 기근 이후 북한에선 ‘계획’과 ‘시장’이 공존했다. ‘계획’이 ‘시장’에 기대어 버티는 형국이었다.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시장에 방임하고, 계획부문의 국영기업 군수공업을 유지했다. 계획부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국가능력이 강화됨에 따라”(12월4일자 ‘조선신보’)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을 옥죈 것이다.
경제실리
평양은 남북경협도 ‘개혁·개방’이 아닌 ‘경제실리’로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의 관광사업은 민간 비즈니스지만 북한에 ‘현금 원조’를 하는 측면이 있다. 경제학의 다수설은 독재국가에 대한 현금 원조의 효용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개발지원과 달리 현금 원조는 수혜국의 거버넌스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고, 경제발전이나 제도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엘리트 집단의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것. 물론 대북(對北)관광의 의미, 상징성을 효용 여부만으로 재단하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