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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이 다른 ‘서울 차이니즈’는 6·25 戰友가 아닌가요?”

김육안 여한(旅韓·재한)화교참전동지회 승계회장

  •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입력2024-06-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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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은 ‘오래된 이웃’ 華僑에게도 동족상잔

    • 재한 화교, 제2의 조국 위해 목숨 바쳐

    • 국적 다르다는 이유로 유공자 예우 못 받아

    • 현충원에 작은 추모비 하나 세우고파

    2019년 개봉한 영화 ‘장사리’의 부제는 ‘잊혀진 영웅들’이다. 장사리 상륙작전에서 산화한 학도의용군을 다뤘다. 작전은 6·25전쟁 전세 역전의 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교란작전이었다.

    6·25전쟁에는 잊힌 영웅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참전용사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의 오랜 이웃인 화교(華僑) 참전용사다. 1945년 광복 직전 약 7만 명으로 추산되던 한반도 거주 화교는 이념 차이로 인한 분단을 겪었고,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인민지원군과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다. 6·25전쟁은 그들에게도 동족상잔의 비극인 셈이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외국인묘역에는 강혜림(姜惠霖), 위서방(魏緖舫) 두 위(位)의 화교 참전용사가 영면해 있다.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 참전용사들이다. 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그나마 다행. 두 용사를 제외한 화교 참전용사들은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후손들은 “화교 참전용사 추모비라도 세워달라”고 한국 사회에 호소하고 있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참전용사 김성정 씨의 장남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회(旅韓華僑參戰同志會) 승계회장. [지호영 기자]

    참전용사 김성정 씨의 장남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회(旅韓華僑參戰同志會) 승계회장. [지호영 기자]

    특수첩보부대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 지대’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회(旅韓華僑參戰同志會) 승계회장은 참전용사 김성정 씨의 장남이다. 그의 당숙 김정의 씨도 동반 참전했다. 화교 용사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오늘날 김육안 회장은 ‘이름도 명예도 없이’ 스러져 간 화교 참전용사 명예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김육안 회장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 할 만큼 했어요. 아무리 호소해도 바뀌는 게 없네요. 솔직히 지치기도 합니다. 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만….”



    기자가 ‘신동아’ 2020년 7월호에 게재한 ‘“위서방·강혜림을 아십니까?” 華僑 출신 6·25전쟁 영웅들’ 기사 이야기를 꺼내며 거듭 만남을 요청하자 “마음은 힘들지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화답했다.

    만남 장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경내 박물관이었다. 140년 한국 화교 역사의 편린(片鱗)이 전시된 ‘기억의 공간’이다. 김육안 회장을 만나 다수 한국인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화교 참전용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화교가 6·25전쟁에 참전해 국군과 함께 피 흘렸다는 사실은 다수 한국인은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육안 회장은 박물관 전시실 유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종군기장, 훈장, 포장 등 참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명확한 물증이 있는데도 왜 한국 정부·사회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화교 용사들이 6·25전쟁에 참전해 풍전등화(風前燈火) 처지의 우방(友邦) 대한민국을 도왔음에도 말이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배려할 건 배려할 텐데….”

    아버지, 당숙의 참전과 활약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1951년 1월, 대한민국 육군 제4863부대(HID) 예하에 ‘SC지대(支隊)’가 창설됐습니다. 부대명은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에서 취했습니다. ‘재한 화교’라는 뜻을 담았죠. 중화민국(대만)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가 공동 결성한 특수첩보부대입니다. 국내 거주 화교 200여 명이 지원병으로 참전했습니다. 정전 2개월 후인 1953년 9월 부대 해산까지 2년 6개월 동안 중국인민지원군을 상대로 첩보·특수 공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경내 박물관. [지호영 기자]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경내 박물관. [지호영 기자]

    외국인이 남의 나라 전쟁 참전한 까닭

    김육안 회장은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군복 차림 두 청년 사진을 가리키며 상념에 젖었다. 육군첩보부대 SC지대원으로 동반 참전한 부친 김성정, 당숙 김정의 용사다.

    병역 의무가 없는 외국인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저희 집안은 중국 산둥(山東)성 르자오(日照)가 원향(原鄕)입니다. 아버지는 1926년생인데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일가족이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아버지는 서울로 내려와 화교가 운영하던 중국음식점에서 일했습니다. 1945년 광복 후 38선이 그어지고 남북한이 분단됐죠.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산가족이 됐고요. 아버지는 가족을 찾기 위해 SC지대에 입대했습니다. 당시 서울에 같이 있던 당숙과 함께요.”

    김육안 회장은 반공(反共) 의식도 참전의 주요 이유라고 덧붙였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했잖아요. 그 결과 1949년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고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천도하고요.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 반공 사상을 갖게 됐고요.”

    부대 창설 배경은 어떠한가요.

    “부대는 중화민국(대만) 정부와 한국이 공동 창설했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 대만에서 한국에 온 왕스유(王世有)와 류궈화(劉國華)는 육군정보본부에 정식 화교정보부대 창설을 제안했죠. 부대 창설에는 류궈화의 학연도 역할을 했습니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신징(新京) 4기 졸업생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신징 2기), 김백일 장군(신징 5기) 등 한국인 동문이 있었죠. 이들의 소개로 육군첩보부대장 박경원 대령을 만날 수 있었고, 정식 부대 창설로 이어졌습니다. 초대 지대장에는 뤄야퉁이 임명됐습니다. 부(副)대장은 한국군 이백건 대위, 정치위원은 류궈화가 맡았고요.”

    SC지대 활동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면요.

    “SC지대 창설 후 서울 종로 사직공원, 경기 파주에서 10주 기본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본부는 서울 사직공원 근처 한 주택이었다가 2개월 후 청진동 이시영 부통령 자택 자리로 옮겼고요. 창설 초기 부대원 200명 규모였습니다. 적진 침투조 70명, 후방지원부대 130명으로 역할 분담을 했죠. 침투조는 국군 군복 위에 인민군·중공군 군복을 겹쳐 입고서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으로, 중공군을 만나면 인민군 행세를 하며 적의 눈을 피했다고 합니다. 중국인민지원군 위치, 인원, 부대 편성 현황, 장비 등 첩보를 수집해 보고하는 것이 주 임무였습니다. 간부 납치, 주요 시설 파괴 공작도 하고요. 후방지원부대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심문, 선무(宣撫) 방송, 심리전 수행 등을 담당했습니다. 당숙은 1952년 낙하산으로 적진에 침투했다 실종됐습니다. 생사를 알 수 없죠.”

    산둥을 잊지 않겠다는 염원

    SC지대 적진 침투조 70명 중 생환자는 20여 명에 그치는 형편이다. 그마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김육안 회장의 직함이 여한화교참전동지회 ‘승계’ 회장인 이유다.

    뤄야퉁 지대장은 훗날 화교학교 교사로 일한 것으로 압니다만.

    “제 은사(恩師)시죠. 뤄야퉁 선생님 인생 역정은 드라마틱합니다. 중국 남부 구이저우(貴州)성이 고향인데 1949년 황푸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 포병과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6·25전쟁 발발 후 중국인민지원군 포병 장교로 참전했죠. 반공 사상이 투철한 분이셔서 탈영을 감행해 한국군으로 귀순했습니다. 정전 후에는 한성화교학교 교사로 활동하고요.”

    전우(戰友)이기도 했던 사촌 동생 김정의 용사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태우던 김육안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 용사는 정전협정 체결 후 의정부에 정착했다. 막내아들의 이름을 딴 ‘용해반점’을 개업했다. 이후 의정부시 호국로 현재 자리로 옮겼다. 오늘날 지역 유명 식당 ‘지동관(志東館)’이다. 상호명에 고향 ‘산둥(山東·산동)을 잊지 않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지동관은 의정부에서 유명 중식당이더군요.

    “중식당을 열자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너도나도 찾았습니다. 우리 ‘김상사네 집’이라면서요. 아버지는 한국 국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식 군번도 계급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그분들은 김상사라고 부르며 전우 대접을 해준 거죠. ‘내가 밥 한 그릇, 국수 한 그릇 먹으면 어디 가겠나. 김상사네에서 먹어야지’ 하면서 늘 찾아주었습니다. 행사, 연회, 피로연도 늘 우리 식당에서 했죠. 미군들도 북적였습니다. ‘자바지(炸八鷄)’라고 닭을 8조각 내서 튀겨 팔았는데 미군에게도 인기가 대단했어요. 프라이드 치킨 원조인 셈이죠.”

    김상사네집을 찾던 단골손님 중에는 6·25전쟁 4대 영웅으로 꼽히는 고(故) 김동석 대령(가수 진미령 씨 부친)도 있었다. HID부대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전역 후 공무원이 됐고 경기도북부출장소장(1976~1978년) 재임 시 옛 전우의 집을 늘 찾았다.

    정전 후 참전 보상 문제는 어떻게 처리됐나요.

    “1971년 12월, 한국 국방부는 참전 화교 47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한화교참전동지회가 결성됐습니다. 1973년 9월 아버지를 포함해 참전 화교용사 10명이 보국포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게 다입니다. 보훈 혜택은 일절 없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김성정 씨의 참전용사증서와 참전 당시 촬영한 사진. [지호영 기자]

    박물관에 전시된 김성정 씨의 참전용사증서와 참전 당시 촬영한 사진. [지호영 기자]

    참전용사 이름 새긴 추모비 하나라도…

    착잡한 어조로 설명한 김육안 회장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가 보국포장을 수여받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전용사가 노후 걱정을 하지 않도록 국가에서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말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동료 참전용사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고요. 실제로는 ‘중화민국(대만) 국적이어서 국가 유공자 등록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국가보훈처로부터 들었습니다. 보훈 혜택을 받지 못하니 참전용사들은 전쟁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자비로 치료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형편이 그나마 나았는데 다수 참전용사는 노후에 가난과 질환에 시달렸죠.”

    참전 기록 인정, 보상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압니다만.

    “국무총리 산하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다른 참전 화교 용사들을 모시고 찾아갔었죠. 또 한 번 놀랍고 서운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외국인이라 참전 기록을 공개할 수도, 보상해 줄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 김성정 용사는 세상을 떠났다. 3년 전인 1998년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다.

    “국립묘지에 안장되려면 귀화해야만 했습니다. 한국 국적을 얻은 지 1년 만에 참전용사증이 나왔는데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셨죠. 국가보훈처에서 영구용 태극기를 보내줬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고인의 공훈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죠. 국립서울현충원은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권했습니다. 거리가 멀면 자주 가기 어려울 것 같아서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파주 광탄면 용미리 화교 묘지에 모셨습니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서방·강혜림 두 분의 묘가 있잖아요. 묘역 사이 공간에 작은 추모비라고 세우고 싶어요. 참전용사 한분 한분 이름을 새긴 비석 하나 세우고 싶은데 현충원 측에서는 규정, 관례 등을 들어 들어주고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대한민국이 위급했을 때 제2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기록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6·25전쟁과 華僑 참전용사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6·25전쟁 발발 후 반공(反共)의식이 투철한 화교들은 자발적으로 참전해 국군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피를 흘렸다.

    1949년 평양에서 북한인 520명, 화교 50명 등 총 570명으로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이 결성됐다. 단장에 화교 위서방, 부단장에는 북한인 김명국, 화교 강혜림이 취임했다. 위서방, 강혜림은 국민혁명군으로서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의 평양 점령 후 위서방 단장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만나 한국군 작전에 참여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백선엽은 수락했고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재편해 작전에 투입됐다. 이후 보위단은 ‘중국수색대’로 재편됐다. 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계급·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다.

    1950년 12월 24일, 경기 연천 고랑포리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해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첫 증거를 확보했다. 1951년 1월, 국군 제1사단 정보참모 김안일 중령이 대령으로 승진해 제1사단 제15연대장이 됐다. 중국수색대도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뀌었다. 2월 2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과천전투에 투입됐다. 수색대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 진지 8곳을 격파하는 활약을 펼쳤다. 부(副)대장 강혜림은 실탄이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다 총탄에 사망했다.

    중국인 수색대는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인근 야산에 중국인민지원군·북한군 혼성 1개 대대 병력이 저항하고 있었다. 4월 28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5개 분조(分組)로 나뉘어 적진에 침투했다. 폭격 표시용 신호기 게양이 주 임무였다. 신호기 게양 후 적에게 노출됐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부대장 위서방과 대원 6명은 중상을 입었다. 위서방은 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살아났다. 녹번리전투는 중국인수색대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다. 정전 후 위서방은 한의사로 활동하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한국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서방의 유해를 안장했다. 2012년 5월 15일, 현충원 내 강혜림 묘소를 위서방 묘소 옆으로 이장했다.

    SC지대는 한국·중화민국(대만) 정부 차원에서 결성한 특수전 부대다. 초대 지대장으로 대만군 현역 장교 뤄야퉁, 부(副)대장으로 한국군 이백건, 정치위원에는 류궈화가 임명됐다. 지대의 활약상에 대해서 진유광(秦裕光) 전 한성화교협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SC지대원은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전방에 분산 배치됐다. 주 임무는 적 후방 침투·첩보 수집이었다. 육·해·공 루트를 이용해 침투했다. 황해도 연백·해주, 강원도 철원·김화, 평안남도 성천·순천, 함경남도 함흥 등 적 후방에 침투해 종횡무진 활약했다.”

    SC지대의 최후·최대 작전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직전 시행된 ‘퇴조해상(退潮海上)’ 침투작전이다. SC지대 2개 분대(分隊)를 동원해 함경남도 갑산 등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첩보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화교 대원 30명, 한국군 통신기술자 10명 등 총 40명이 작전에 참가했다. 뤄야퉁이 인솔한 부대는 7월 18일, 공작선으로 함경남도 함흥 부근 퇴조 포구에 상륙했다. 목적지는 함경남도 갑산이었다. 7월 23일, 백두산에 이르렀을 무렵 공작대는 북한군에 발각됐다. 적과 교전이 벌어졌고 중과부적이었다. 대원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생포됐다. 생존자는 뤄야퉁 외 5명에 불과했다.

    정전협정 체결 2개월 후인 1953년 9월, SC지대가 해체됐다. SC지대 설립 초기 무장공작대원 70여 명 중 생존자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다수가 전사, 행방불명 처리됐다.

    신동아 7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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