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서울 안의 또 다른 도시 용산을 여행하는 일곱 가지 방법

김홍렬 박사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미군기지 담벼락 따라 걸으면 보이는 것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4-07-06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한양의 중심축 종로, 서울의 중심축 한강대로

    • 일제 침략전쟁의 전진기지 용산역 일대 대개조

    • 100층 랜드마크? 천지개벽 진앙지 철도정비창

    • 모래톱에서 부촌으로 동부이촌동의 과거와 미래

    • 둔지산 정상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용산을 구상하라

    • 공원도시 용산이 품게 될 용산기지 공원화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 저자이자 자칭 ‘용산 김씨’ 김홍렬. 도시공학박사, 건축기사, 자연생태복원기사라는 다양한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그가 해온 모든 공부는 ‘용산’으로 통한다. 20세기가 ‘공장의 시대’라면 21세기는 ‘공원의 시대’라는 비전을 갖고 있다. 2016~2022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 용산공원 업무를 담당했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세계유산도시기구 아태사무처 청년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YONGSAN_ZIP 연구모임 간사로 활동하며 올해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지호영 기자]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 저자이자 자칭 ‘용산 김씨’ 김홍렬. 도시공학박사, 건축기사, 자연생태복원기사라는 다양한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그가 해온 모든 공부는 ‘용산’으로 통한다. 20세기가 ‘공장의 시대’라면 21세기는 ‘공원의 시대’라는 비전을 갖고 있다. 2016~2022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 용산공원 업무를 담당했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세계유산도시기구 아태사무처 청년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YONGSAN_ZIP 연구모임 간사로 활동하며 올해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지호영 기자]

    “와, 아파트 뒤편에 이런 산책로가 있을 줄이야.” 서울 용산구 ‘서빙고근린공원’을 처음 방문한 이들은 마치 비밀의 정원이라도 발견한 듯 탄성을 내지른다.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서빙고근린공원 진입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와 상가 사이를 지나 막다른 길 깊숙이 자리한 이 공원은 쉽게 외부인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빙고근린공원은 용산 미군기지 담장과 고층 아파트(용산시티파크와 파크타워)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요. 아파트 단지 내 조경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공원으로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이곳은 용산구에서 관리하는 근린시설입니다.”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아임스토리)을 펴낸 김홍렬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Landscape Urbanism) 이사와 함께 용산 미군기지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김홍렬 씨는 대학에서는 건축을,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조경을, 박사과정에서는 공원과 도시를 공부했다. 박사학위 논문도 ‘용산국가공원 조성 추진을 위한 네트워크 거버넌스 구축 모형 연구’(2018)다. 그는 올해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신을 ‘용산 김씨’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용산기지 공원화 사업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용산 미군기지를 반환받아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서울에 큰 공원을 하나 새로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용산기지 공원화 사업은 조경만의 영역도 아니고, 도시계획만의 영역도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와 냉전시대를 극복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협력하고 지혜를 모아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용산공원을 품은 공원도시 용산’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함께 키워나가는 여정이 대한민국의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공원도시’를 만드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장소의 기억’ ‘장소의 역사’를 찾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지난 15년간 용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적 메시지를 기록해 왔습니다.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은 그 자료를 공개하고, 용산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첫 번째 용산 입문서입니다.”

    국제업무지구 개발과 용산 게이트웨이

    용산역 앞 광장에서 바라본 용산 게이트웨이. 용산역 쪽 미디어광장에서 한강대로 건너편 버들치문화공원으로 이어진다. 2019년 10월 촬영. [김홍렬]

    용산역 앞 광장에서 바라본 용산 게이트웨이. 용산역 쪽 미디어광장에서 한강대로 건너편 버들치문화공원으로 이어진다. 2019년 10월 촬영. [김홍렬]

    신용산역에서 이촌역 방향으로 ‘버들개문화공원’ ‘열린공원’ ‘서빙고근린공원’이 차례로 나온다. 인근 주민이 아니라면 모두 생소한 명칭이지만 서울시가 추진 중인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계획안’을 보면 이곳이 용산역과 용산공원을 동서로 잇는 중요한 보행·녹지축임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2월 용산정비창 일대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랜드마크가 들어서는 국제업무지구로 개발하고, 총 50만㎡ 수준의 녹지를 조성한다는 개발 계획안을 발표했다. 6월 5일 서울시 제8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용산국제업무지구 도시개발구역 지정 및 개발계획’을 수정·가결했다. 서울을 글로벌 톱5 도시로 만들기 위한 ‘도시공간 대개조’의 핵심 프로젝트인 용산국제업무지구는, 2025년 하반기에 기반시설 착공에 들어가 2030년 초 입주가 시작될 예정이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과 함께 한강대로에 의해 물리적으로 단절된 용산역과 용산공원을 이어줄 지상·지하 입체 보행·녹지 체계를 구축하고, 대중교통의 허브 및 융복합 공공공간을 조성하는 ‘용산 게이트웨이(관문)’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대중교통의 허브란 GTX-B, 신분당선, 수색-광명고속철도 등 각종 철도 노선이 용산역을 중심으로 연계되는 것을 말한다.

    서울시가 발표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조감도. 100층 안팎의 랜드마크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로 45층 높이의 건물을 연결하는 보행 전망교 등을 설치하는 등 세계 최대 규모의 수직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

    서울시가 발표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조감도. 100층 안팎의 랜드마크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로 45층 높이의 건물을 연결하는 보행 전망교 등을 설치하는 등 세계 최대 규모의 수직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

    서울시의 ‘용산 게이트웨이 조성 기본 구상’을 보면 한강대로를 세로축으로, 가로축에는 용산역광장(2018년 준공)-미디어광장-문화공원-용산프롬나드(2008~2009년 준공)가 배치된다. 미디어광장은 철도 연계 구간으로 지하공간을 통해 문화공원과 연결된다. 문화공원은 조성 당시 ‘용산파크웨이’ 사업이었으나 2023년 12월 부분 개방되면서 버들개문화공원으로 바뀌었다. 이어지는 용산프롬나드는 열린정원과 서빙고근린공원 산책로로, 용산 미군기지 ‘사우스포스트’의 남서쪽 담벼락을 따라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용산 미군기지 반환 부지 중 서빙고역 북쪽 장교숙소 5단지(용산가족공원 동쪽)는 2020년 8월 개방됐다. 버들개문화공원에서 용산기지 13번 게이트 앞을 지나 부분개방 부지까지 서빙고로 산책길은 4㎞에 이른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함께 용산기지 반환과 용산공원 조성이 가속화하면 용산공원 남쪽 입구는 서빙고근린공원 표지판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와 미래 탐색하는 서빙고로 산책

    아파트 단지와 미군기지 담벼락 사이에 조성된 서빙고근린공원. [지호영 기자]

    아파트 단지와 미군기지 담벼락 사이에 조성된 서빙고근린공원. [지호영 기자]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에서 김 박사는 용산의 과거를 체험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괄호 안은 용산기지를 중심으로 방위와 거리). 1코스 용산기지 내부(3㎞), 2코스 한강대로(서남측 3.5㎞), 3코스 남산자락(북동측 4.5㎞), 4코스 독립의지(서북측 3.5㎞), 5코스 시대전환(동측~북측~서측 5㎞), 6코스 마을부군(동남측 4㎞), 7코스 서빙고로(남측 4㎞). 각 코스마다 ‘산책’을 붙인 이유는 도보 여행을 염두에 두고 코스를 짰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1코스 용산기지 내부와 2코스 한강대로, 7코스 서빙고로는 현재 진행 중인 용산 대개조의 핵심 구간이다.

    “용산구에서 경의중앙선 남쪽 한강과 접한 동네가 이촌동입니다. 지금은 한강 뷰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가 됐지만 원래 이곳은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상습 범람 지역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경원선 철도와 군 훈련장이 들어섰고, 6·25전쟁 후에는 미8군 헬기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촌역 3번 출구와 용강중학교, 신용산초등학교 자리가 바로 헬기장 부지였습니다. 한강변 일대가 매년 수해 피해를 당하자 서울시는 한강개발계획(1967~1970)을 수립하고 제방을 쌓아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들었죠.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2차 한강종합개발(1982~1986)이 진행되면서 강변도로가 확장되고 한강의 남북 양안을 따라 국제도시 서울의 면모가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김 박사는 서빙고로 산책을 “50여 년 서울 역사의 시간여행”이라고 했다. 출발 지점은 버들개문화공원. 여기서 이촌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용산도시기억전시관(용산센트럴파크 헤링턴스퀘어 공공시설동 1,2층)이 나온다.

    2019년 용산참사를 성찰하고 용산의 도시 변천사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산도시기억전시관. 2019년 10월 촬영. [김홍렬]

    2019년 용산참사를 성찰하고 용산의 도시 변천사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산도시기억전시관. 2019년 10월 촬영. [김홍렬]

    시간을 거슬러 2001년 5월 4일 용산4구역을 포함한 국제빌딩 주변구역과 용산역 전면구역, 용산기지 남서측과 접한 일대가 도심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 개발 호재는 토지 소유주나 건설사엔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주거와 생계 대책 없이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들에게는 악몽이었다. 2009년 1월 20일, 철거민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을 시도했다. 저항하던 철거민들이 인화성 물질을 쌓아놓은 옥상 망루에 불이 붙었고, 화재 진압 과정에서 망루가 무너지면서 철거민 5명과 특공대원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로 기억되는 이 사건은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개발사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됐다. 2021년 개관한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은 용산참사를 성찰하는 공간이자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용산의 도시 변천사를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김 박사는 개관 당시 서울시청 도시계획국 주무관으로 용산공원 조성과 시설물 조사 외에 용산 아카이브 조성과 전시 기획·운영 실무를 담당했다.

    서울 속 미국, 부분개방부지가 ‘핫플’ 된 이유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을 나와 용산 미군기지 13번 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면서 서빙고로 건너편 동부이촌동을 바라본다. 홍수 뒤 쌓인 모래 위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사촌(沙村)’이라 했고, 홍수를 피해 안쪽으로 옮긴 터전이라 해서 이촌(移村)이 됐다가 일제강점기 이촌(二村)동이 된 곳.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황무지로 변해버려 총독부가 ‘폐동’을 결정할 만큼 과거 이 땅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7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진행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강폭을 줄이고 땅을 메워 택지를 개발하면서 부촌 동부이촌동이 탄생했다.

    동부이촌동을 지나 이촌역 부근 용산기지 13번 게이트 앞을 지나간다. 이곳은 1919년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세운 경성무선전신국 용산송신소가 있던 자리다. 이어지는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연병장을 미군이 골프장으로 이용하다 반환한 첫 부지라는 데 의미가 있다. 1989년 고건 서울시장이 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해 1992년 개원했고, 2005년 공원 북측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축됐다. 현재는 용산공원 조성지구로 편입된 상태다. 김 박사는 12만 평(약 39만6694㎡)에 달하는 용산가족공원 어디에서도 미군기지로 활용됐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점을 아쉬워했다.

    서빙고로 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서빙고역 건너편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다. 흔히 ‘용산 미군 장교숙소 5단지’로 불리는데 지상 2~3층 규모의 붉은색 벽돌로 마감된 주택 16동과 관리소, 탁아소까지 18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특히 장교숙소 중 일부는 미군기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해 2020년 8월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플’로 소문난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 중앙마당. 2020년 8월 촬영. [김홍렬]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플’로 소문난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 중앙마당. 2020년 8월 촬영. [김홍렬]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개방돼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는 분이 많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서울 속 미국’을 체험할 수 있는 ‘핫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플루언서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면 기존 미군 시설물, 즉 거리 표지판이나 각종 사인보드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심지어 담장과 철조망까지 인증 숏을 찍으면서 이 공간을 말 그대로 즐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존 시설물을 전부 헐어버리고 녹지공간을 만드는 것만이 정답은 아님을 알 수 있죠.”

    김 박사는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가 남산~용산공원~한강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할 뿐 아니라, 바로 옆에 6·25전쟁 때 미군이 군수품 운반을 위해 설치했던 폐철도가 남아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 또한 무궁한 활용 가치가 있습니다.”

    철도와 군용지의 탄생 한강대로 산책

    한강대로는 서울역 앞에서 시작해 용산역 앞을 지나 한강대교 북단까지 이어지는 길로 왕복 10차선의 넓은 도로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강통’으로 불리며 전차가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김 박사는 “한양도성 안의 가장 상징적인 도로가 종로였다면 20세기 이후 서울의 중심축은 한강대로”라며 “과거에는 서울역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용산역이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고 했다.

    용산 대변혁의 진앙지인 옛 철도정비창 부지로 가보자. 현재는 용산역 뒤편 넓은 공터일 뿐이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기차를 수리하거나 차량을 만드는 공장들이 있었다. 당시 철도국은 총독부 직속으로 운영될 만큼 철도는 중요 시설이었고, 특히 용산은 경인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에 이르는 한국 간선철도의 중심이자 시·종점으로 군사전략상 중요 거점이었다. 이곳을 국제업무지구로 개발하려는 야심 찬 계획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중단과 무산 위기를 겪다 10여 년 만에 재개됐다.

    1914년 경원선(용산-원산) 개통 이후 용산역은 철도 요충지라는 위상을 차지했지만 수탈의 현장이라는 오욕도 감수해야 했다. 일제는 용산역을 통해 군수물자와 노동자, 병사를 전국으로 수송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청년들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한 곳도 용산역이고, 일본·사할린·남양군도·쿠릴열도로 강제징용을 떠난 곳도 용산역이다. 용산역 광장 한가운데 한 손에 곡괭이를 든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아픈 역사를 대변한다.

    한강대로21나길 철도회관 앞에는 낯선 비석이 있다. 고려 수도 개경에 있던 ‘연복사탑 중창비’다. 연복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공민왕 재위 시 중창 공사가 진행된 적이 있고, 태조 이성계 때 연복사를 재건하면서 5층 목탑이 세워졌다. 연복사탑 중창비는 이 목탑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개성에 있어야 할 비석이 왜 용산에 와 있는지 경위를 알 수는 없지만 경의선 철도 부설 과정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한다. 연복사탑 중창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철길 차단기가 내려올 때마다 울리는 ‘땡땡’ 소리가 정겨운 백빈건널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 촬영지로 평일에도 추억을 소환하려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김홍렬]

    철길 차단기가 내려올 때마다 울리는 ‘땡땡’ 소리가 정겨운 백빈건널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 촬영지로 평일에도 추억을 소환하려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김홍렬]

    이제 ‘백빈건널목’에 이른다. 2018년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한 장소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용산 이촌동 일대에 철길 건널목이 많은 이유는 철도 경춘선과 지하철 경의중앙선이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를 지나가고 도로인 이촌로와 서빙고로와도 연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백씨 성을 가진 빈(嬪·후궁에게 내려진 정1품 품계)이 살았다 해서 ‘백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차단기가 내려올 때마다 울리는 소리에서 따온 ‘땡땡거리’가 더 친근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백빈건널목 주변은 추억을 소환하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일제강점기 용산역 주변으로 철도국, 철도관사, 철도병원, 철도공장, 철도구락부, 철도운동장 등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사람들도 용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철도 종사원들에겐 관사와 각종 의료 혜택이 제공됐다. 한강대로7길 14일대 옛 철도관사 단지가 그 흔적이다.

    부영주택이 개발 예정인 아세아아파트 부지는 원래 용산철도운동장으로 1925년 경성운동장이 건립되기 전까지 경성에 몇 안 되는 야구장이 있던 곳이다. 운동장 옆 용산철도공원에는 1915년 일제가 만든 최초의 공원으로 철도 순직자들을 기리는 조혼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용산세무서가 자리하고 있다.

    용산철도고등학교와 용산시티파크 사이 보도에 ‘와서(瓦署)터’라는 표석이 있다. 조선시대 국가기관에 필요한 기와나 벽돌을 굽던 관아 터를 가리키는데, 최근 아세아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기와를 굽던 가마터 15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가마터 일부를 이전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현재 용산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옛 용산철도병원은 일제강점기 철도기지로 개발된 용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로, 철도 사업 중 부상당한 노동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철도정비창~강제징용 노동자상~연복사탑중창비~백빈건널목~옛철도관사단지~옛 용산철도공원~용산역사박물관까지 들르면 한강대로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용리단길’에 접어든다. 용리단길은 미군기지 14번 게이트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한강대로40가길로 신용산 지역의 중심지다. 김 박사는 용산역에서 삼각지역 사이에 있는 각 지점을 연결하고, 10차로의 한강대로를 어떻게 보행자 친화적인 길로 만드느냐가 향후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의 열쇠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군 병영에서 미군기지까지 용산기지 산책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용산 미군기지 전경. 오른쪽에 남산이 성큼 다가와 있고 중앙 미8군도로 북쪽 끝으로 북악산(백악산)이 보인다. [지호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용산 미군기지 전경. 오른쪽에 남산이 성큼 다가와 있고 중앙 미8군도로 북쪽 끝으로 북악산(백악산)이 보인다. [지호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으로 올라가기 직전 몸을 남쪽으로 돌리면 용산 미군기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서면 용산 미군기지 부지가 여의도 크기와 맞먹을 만큼 엄청난 규모임을 느낄 수 있어요. 북쪽 메인포스트와 남쪽 사우스포스트를 남북으로 잇는 미8군도로 끝에 남산도서관이 보이고 멀리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또 길 오른쪽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빨간 벽돌의 드래곤힐호텔이 쑥 올라와 있는데 호텔 너머로 보이는 남산이 이렇게 가까웠나 싶어 놀랄 정도입니다. 미8군도로가 개방되면 시민들은 이 길을 걸으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서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미8군도로는 본래 후암동에서 신촌을 거쳐 동작진으로 이어지던 조선시대 옛길 위에 조성된 도로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23년 6월호 ‘이몽룡은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 어느 길로 갔을까-용산 옛길 사라진 역사를 찾아서’ 기사 참조). 일제가 둔지산 일대에 병영을 건설하고 조선신궁, 후암동과 연결되면서 용산 병영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군용도로가 됐고, 6·25전쟁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8군도로가 됐다.

    김 박사는 2011년 용산 미군기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강렬한 인상을 잊지 못한다. 미국 교외의 소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용산기지의 이국적인 분위기만큼이나 용산기지 안에서 바라본 서울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한 세기 넘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풍경이었다.

    그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 근무하며 국토교통부와 함께 용산기지 버스투어를 기획·운영했다. 당시 투어를 신청한 시민들은 남영역 근처에 위치한 용산공원갤러리(캠프킴 부지)에서 사전 설명을 들은 뒤 용산기지 14번 게이트에서 버스를 타고 기지 내부로 이동했다. 둔지산 정상, 위수감옥(일본군감옥), 한미합동군사업무(전 일본군 장교숙소) 등 주요 장소에서는 하차 후 촬영도 허용됐다. 2018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이 버스투어는 일반 시민들이 금단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입소문이 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용산의 배꼽 둔지산과 드래곤힐호텔

    용산 미군기지 내 둔지산 느티나무 군락지에서 바라본 남산. 2019년 11월 촬영. [김홍렬]

    용산 미군기지 내 둔지산 느티나무 군락지에서 바라본 남산. 2019년 11월 촬영. [김홍렬]

    대통령실이 용산 국방부 부지로 이전하고 2023년 5월 ‘용산 어린이정원’이 개원하면서 14번 게이트가 다시 열렸지만 여전히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곳은 제한적이다. 공원 조성이 본격화하면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이곳의 많은 시설물이 사라질 것이다. 그 공간에 담겨 있는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다.

    14번 게이트를 통과하면 오른쪽에 특이한 외관의 건물이 나온다. 한미연합군사령부 군사시설로 사용되던 ‘사우스포스트 벙커’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사령부 작전센터로 미군 공습에 대비해 만든 지하 벙커 시설로 추정한다. 총독관저, 일본군사령부 청사와는 방공호로 연결돼 있어 일본군사령부 제2청사로 불렸다고 한다. 6·25전쟁 직전에는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작전실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 박사는 사우스포스트 벙커에 대해 “입구와 내부가 잘 보존돼 있어 존치 가능성이 높고, 향후 용산 게이트웨이 사업 부지와 연결된다면 활용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벙커 남동쪽 일본군사령부 터 뒤로 미8군에서 운영한 121병원이 있다. 용산총독관저(총독관저는 용산, 남산 왜성대, 경무대 3곳 있었다) 터에 지어진 이 병원은 2019년 평택 험프리스로 이전한 뒤 방치된 상태다. 용산공원 조성 계획에 따르면 병원 건물은 해체하고 총독관저 유구 터와 그 앞의 정원을 복원한 뒤 추가 시설을 배치할 예정이다. 드래곤힐호텔은 둔지산 구릉 일대에 있다. 미8군도로와 접한 데다 용산공원이 완공되면 배꼽에 해당하는 명당이다.

    드래곤힐호텔 착공식 기념 삽. [김홍렬]

    드래곤힐호텔 착공식 기념 삽. [김홍렬]

    “둔지산은 해발고도가 70m가 채 되지 않은 낮은 언덕이지만 정상에 서면 눈높이에서 남산을 마주 보게 됩니다. 남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자락이 둔지산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뒤쪽 한강으로 이어지죠. 드래곤힐호텔은 미군 편의시설로 지어졌지만 조성 과정에서 우리나라 건설사들과 전문기술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직접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건물을 헐어버린다면 역사는 사라지고 소중한 경관도 잃게 됩니다.”

    드래곤힐호텔에서 오른쪽에 1909년 일제가 지은 용산 위수감옥(일본군 감옥)이 있다. 이곳은 광복 후 1945년 미7보병단 구금소, 1948년 대한민국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주인을 바꿔가며 이용됐고. 이 시설을 거쳐 간 인물로는 의병장 강기동,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장군의 아들 김두한, 시인 김수영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2017년 평택기지로 이전하기까지 미8군 65의무여단이 사용했다.

    21개 출입문과 담장, 어디를 열고 어디를 닫을까

    용산기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이태원로를 사이에 두고 1번과 2번 게이트가 마주하고 있다. 원래 용산기지 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 지역을 연결하는 문이었으나 고가가 설치되면서 연결 통로의 기능은 상실했다. 김 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21개 출입문이 있습니다. 주요 사령부는 평택으로 이전을 완료하고 대부분의 시설이 폐쇄되면서 미군기지 출입문도 일부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용산공원을 조성하면 이 게이트는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요? 그대로 운영할까요? 게이트를 연결하던 담장은 허물어야 할까요? 아니면 유지한 채 활용해야 할까요?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용산공원 경계부는 물론 공원 주변 도시 지역과의 소통과 활력에 엄청난 차이가 생길 겁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결정을 누구의 판단에 맡겨야 할까요?”

    이태원로 위쪽 메인포스트 동쪽에는 주한미군의 상징 공간인 미8군사령부 청사가 있다. 1978년 맞은편에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가 함께 있었던 역사적 상징성이 큰 장소다. 미8군사령부 청사 앞에는 6·25전쟁참전장병추모탑이 있었는데, 1935년 일본군이 만주사변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충혼비를 미군이 재활용해 이용해 왔고, 평택기지로 이전하면서 이제는 그 자리에 잔디밭만 남아 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청사와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청사의 활용 방안도 숙제다. 특히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관사로 사용됐고, 광복 직후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 대표단 숙소로 사용됐던 곳이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이런 건물들의 활용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일제의 상흔과 독립의 염원을 찾아서

    길을 나선 김에 ‘용산 미군기지와 도시산책’ 3코스 남산자락까지 둘러보기로 하자. 국군재정관리단에서 시작되는 경리단길을 오르다 회나무로13길로 들어서면 직사각형 부지의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이곳은 과거 일본군 사격장이었다. 일제는 1906년 용산에 병영을 건설하면서 남산의 경사로를 활용해 사격장을 만들고, 이 일대 주민들을 국군재정관리단 남동쪽 산기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전후 용산은 국군의 중심지가 됐다. 1953년 국방부가 용산구 후암동으로, 1955년 해병대사령부가 용산가동으로, 같은 해 육군본부가 오늘날 전쟁기념관 자리로 이전해 오면서 늘어나는 군인을 위한 거주 공간이 필요했고 사격장 부지에 최초의 군인아파트(일명 맘모스아파트)가 세워졌다. 군인아파트 부지는 1989년 육군본부가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민간에 매각됐다.

    일제강점기 후암동 일대는 병영뿐만 아니라 조선신궁, 경성역(서울역), 용산역, 명동과 가깝고 무엇보다 옛 삼판소학교(오늘날 삼광초등학교),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 용산중학교 등 학교가 많아서 일본인 사이에서 거주지로 인기가 많았다. 옛 조선은행 사택지, 옛 가마쿠라 보육원, 옛 신세이다이 주택지가 이를 증명한다.

    삼각지 욱천고가차도 아래에 복개되지 않은 만초천 구간이 남아 있다. 2017년 3월 촬영. [김홍렬]

    삼각지 욱천고가차도 아래에 복개되지 않은 만초천 구간이 남아 있다. 2017년 3월 촬영. [김홍렬]

    이제 진짜 ‘용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독립의지’ 산책으로 명명한 4코스는 원효로와 효창동 일대다. 조선시대 용산은 인왕산에서 시작돼 남쪽으로 뻗어내려오는 능선을 따라오면 찾을 수 있다. 능선을 따라 ‘만초천’도 흐른다. 만초천은 인왕산 무악재 부근에서 시작돼 종로, 중구, 서대문구를 거쳐 용산 청파로, 원효로를 따라 약 8㎞를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하천을 따라 덩굴이 무성하다 해서 만초천(蔓草川)이라 했고, 덩굴내·만천·무악천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1960년대 만초천을 덮어 도로(청파로)를 만들면서 하천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남영역에서 용산역 사이 욱천고가차도 아래와 용산 미군기지 메인포스트에 만초천 지류의 일부가 남아 있다. 원효대교 북단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만초천교는 영화 ‘괴물’의 촬영지로 쓰일 만큼 으스스하다.

    만초천 서쪽에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이 있다. 효창동에 살며 용산역에 근무했던 그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울분을 느꼈고 훗날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가 살았던 집터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기념관은 그 옆에 세워졌다. 이봉창 의사의 동상과 묘역은 효창공원에 있다. 효창원은 조선시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로 조성된 뒤 왕실묘역으로 사용됐으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불법 주둔했고 골프장과 유원지로 만들어 훼손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이 이곳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했고, 그도 이곳에 잠들었다.

    효창동 일대 ‘독립의지 산책’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효창공원~숙명여대~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거쳐 청파로 신광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끝난다. 이곳에는 태평양전쟁 연합군 포로들을 수용했던 경성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경성 한복판에 포로수용소를 만든 이유는 연합군 포로들을 ‘전시’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시대전환의 길목에서 마을의 안녕을 빌며

    이제 5코스 ‘시대전환’과 6코스 ‘마을부군’ 산책만 남았다. 용산기지 동측~서측으로 이동하는 ‘시대전환’ 산책은 녹사평역~용산기지 21번 게이트~해방촌~해병대사령부 부지~스테이크골목~캠프킴 부지~전쟁기념관~삼각지 화랑거리까지 5㎞ 구간이다.

    2020년 12월 국토교통부는 용산공원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고시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용산 미군기지 북측 옛 해병대사령부 부지(현재 군인아파트와 방위사업청 부지)와 그 일대가 모두 용산공원 조성 구역이 됐다. 남영삼거리에서 삼각지로 향하는 길에 있던 ‘캠프킴’은 반환되기 전 미군기지 밖 시설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용산역을 통해 각종 군수품을 실어 나르기 위한 창고와 사무실 건물이 지어졌고,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여받은 미군은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특히 부지 내 1224 건물(옛 조선육군창고)은 미군들의 사기 충전을 돕는 위문공연이 열리던 장소였다. 미군위문협회(USO)를 비롯한 미8군쇼는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이끈 김시스터즈, 패티김, 조용필, 현미, 한명숙, 장미화 등이 활동한 무대였다.

    마지막으로 삼각지라는 명칭을 정리해 보자. 한강, 서울역, 이태원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이어서 ‘삼각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효창동까지 네 갈래 길이다. 삼각지라는 명칭은 서울역 방면에서 내려오는 철도와 한강대로가 용산역 전에 크게 꺾어지면서 생긴 세모꼴 지형에서 나왔다고 보는 게 맞다. 삼각지 화랑거리는 6·25전쟁 후 가난한 화가들이 미군을 대상으로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여들면서 탄생했다.

    6코스를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용산이 서울에서 부군당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부군은 ‘높으신 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관아에서 신당을 두고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이태원 부군당 옆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보고 의아해하는 이도 많다. 1919년 3·1운동으로 체포돼 고문 끝에 숨진 유관순 열사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30년대 무연고 묘지를 망우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해가 유실됐다. 추모비는 2015년 용산구에서 세운 것이다. 김 박사는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은 남산과 한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일제의 병영 건설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이태원~유엔사 부지~수송부 부지~둔지미 부군당~동빙고 부군당~서비고 부군당~서빙고 터를 둘러보는 것으로 용산기지 동남쪽 4㎞의 산책이 마무리된다. 이렇게 7개의 코스, 총 27.5㎞를 둘러보고 나면, 지금 조성되는 용산공원을 단순히 100만 평의 거대한 녹지숲으로 만들 게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프리즘이자 미래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용산 미군기지 내 드래곤힐호텔 일대 부지 반환, 용산공원과 대통령실의 관계 설정, 미 대사관 이전과 대사관 직원 숙소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 마련, 반환 부지의 환경조사와 정화사업 등 외교적·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침탈의 심장부였던 부지 위에 한미동맹의 상징 공간이던 용산 미군기지 시설을 어떻게 기록하고 활용할 것인지도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김홍렬)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