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공무원? NO! ‘찬밥통’ 된 지 오래
공무원 골병들게 만드는 5가지 악성 민원 유형
‘목소리 큰 사람’이 더 우대받는 시대
민원인·고객 갑질 피해 예방 위한 ‘중대재해법’ 필요
2021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 등을 처리하고 있다. [동아DB]
‘충주맨’으로 유명한 김선태 충주시청 주무관은 5월 동아일보 기고(‘MZ세대가 공무원 지원 접는 5가지 이유’)에서 MZ세대가 공무원 지원을 접는 이유로 저임금·과중한 업무 등과 함께 악성 민원을 꼽았다.
“공무원은 민원인들에게 지팡이나 주먹으로 맞기도 하고, 신상 털기를 당할 때도 있지만 공무원을 지켜주는 법은 너무 멀리 있다”며 ‘법원권근(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이라고 했다. 많은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올해 3월 ‘김포시 공무원’ 자살 사건은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직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경기도 김포시 도로관리과 소속 A 주무관은 악성 민원인들에 의해 신상이 인터넷 카페에 노출되는 등 ‘사이버불링(온라인상의 집단 괴롭힘)’의 표적이 됐다. 그는 하루 50건이 넘는 민원 전화에 시달린 끝에 “힘들다”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악성 민원 사유는 어이없게도 ‘포트홀 보수공사를 해 교통정체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김포시가 도로공사를 한 시간은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였다. 그의 죽음 직전까지, 악성 민원인 K 씨는 약 14만 명이 이용하는 지역 부동산 카페에 담당 공무원에 대한 비방 글을 여러 차례 게시하는 한편 신상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민원 폭탄’을 부추겼다. 그는 사건 이전에도 해당 카페에서 악성 민원을 넣고 공무원을 괴롭히는 걸 자랑스러워한 인물이었다.
‘김포시 공무원’ 사건 직후 김선태 주무관은 충주시 유튜브 채널에 “악성 민원으로부터 공무원을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영상은 조회수 200만 회를 넘겼다. “우리 시청 팀장님도 악성 민원으로 돌아가셨다”거나 “같은 공무원으로서 안타깝지만 이번 일도 그냥 지나갈 것 같아서 한숨만 나온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호들갑일까. 그렇다기엔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이 너무 많다.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는 지난 7월 2일 ‘악성민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3월부터 5월까지 중앙행정기관 49개, 지방자치단체 243개, 시·도 교육청 17개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권익위에 따르면 3월 기준 악성 민원인은 2874명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파악된 게 이 정도이지 일선 현장에서 ‘좋게 좋게’ 넘어간 걸 합하면 더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공노총)이 2023년에 실시한 악성 민원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7061명 중 84%가 최근 5년 사이에 악성 민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행정안전부는 해마다 4만∼5만 건의 악성 민원이 제기되는 걸로 파악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공무원을 괴롭히는 악성 민원 유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뉴시스]
목소리 크면 이기는 나라의 공무원은 골병든다
3월 8일 경기 김포시청 본관 정문 앞에 악성민원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포시 공무원 A씨를 기리기 위한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뉴시스]
다만 이런 대책만 가지고 악성 민원을 근절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기관장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자칫 사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2022년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기관장이 악성 민원인들로부터 담당자를 보호하도록 했다. 이 법 제4조(민원 처리 담당자의 의무와 보호) 2항에 따르면, 행정기관의 장은 민원인의 폭언이나 폭행, 목적이 정당하지 않은 반복 민원 등으로부터 민원 처리 담당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이 법이 마련된 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민원 처리 담당자 보호 조례가 제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효성을 체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사후 대응에 초점이 맞춰진 게 문제다.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린 공무원에게 심리 상담과 휴가를 부여한들, 한번 상처받은 마음을 온전히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악성 민원을 차단하는 게 최선책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건 악성 민원을 차단하는 데 불가피한 논란이 따르기 때문이다. 국민의 권리를 어디까지 허용 또는 차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김포시 공무원’ 사건 이후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은 홈페이지에서 공무원들의 이름과 사진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있다.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인 듯 보이지만, 일각에선 “지금까지 진행돼 온 ‘열린 행정’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악성 민원의 대표 유형 중 하나인 ‘다량의 정보공개청구’를 제한하는 건 국민의 알권리와 충돌한다. 공직 사회의 병폐로 지적돼 온 ‘부서 간 업무 돌리기’라든지 무사안일주의가 다시 만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따라서 어느 수준의 민원이 악성이고 정당한 것인지 판단하고, 그때그때 대응 수준을 결정할 주체가 필요하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기관장의 몫이다. 하지만 기관장들은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악성 민원인을 차단하고 처벌하는 데에는 정치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국민 목소리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 “저기 구청장이 우리 동네 누구를 고소했다더라” 등등 평판이 이렇게 나오면 선거든 영전이든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 그 짐을 짊어지기 싫으니 기관장들은 악성 민원을 방관한다. 그 부담은 최종적으로 악성 민원인을 응대하는 일선 공무원들에게 전가된다. 그런 점에서 일선 공무원들은 악성 민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픈 누군가의 방파제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게 어디 공무원뿐이랴. 악성 민원인의 또 다른 이름은 블랙컨슈머다. 최근 몇 년 동안 급성장한 배달 앱은 이들이 마음 놓고 갑질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자영업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는 “갑질 고객 때문에 힘들다”라는 ‘사장님’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블랙컨슈머들은 익명성과 별점을 무기로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하는가 하면, 있지도 않은 피해를 만들어 보상을 요구한다.
플랫폼은 이들 블랙컨슈머에 미온적이다. 가뜩이나 경쟁도 치열한데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간 고객이 떨어져 나가고 시장점유율이 하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1년 6월 일어난 ‘새우튀김 갑질’ 사건은 플랫폼의 책임과 의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서울 동작구에서 분식집을 운영했던 한 점주는 갑질 고객과 통화하면서 폭언과 욕설에 시달리다가 돌연 뇌출혈로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3주 뒤 세상을 떠났다. “새우튀김 1개가 이상하니 환불해 달라”던 그 고객은 자신이 문제 제기한 ‘새우튀김 1개’ 값을 돌려받은 뒤에도 계속 플랫폼업체에 항의해 음식값 전액을 환불받았다. ‘별점 테러’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의 중재는 없었다. 오히려 점주에게 “주의해 달라”는 연락을 했다.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닭볶음탕 환불 사건’도 비슷했다. 고객이 “음식에 들어 있는 식재료가 상했다”며 환불을 요구해 들어줬는데, 확인해 보니 해당 식재료는 들어가지도 않아 점주가 울분을 토한 사건이다. 점주는 플랫폼업체에 해명했지만 “우리는 중개하는 곳이기 때문에 고객의 입장을 들어줘야 한다”라는 답변만 받았다고 했다. 이럴 거면 수수료는 왜 받나. 알고리즘·별점 등으로 사실상 가맹점을 통제하고 있는 플랫폼이 소비자 권리 명목으로 관리 책임을 방기하면서 가맹점주들은 블랙컨슈머에 더욱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플랫폼의 고객 수를 유지하기 위한 총알받이인 셈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최근 경기도 화성의 아리셀 공장 화재 사건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이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장에서 일어난 산업재해의 책임을 경영 책임자에게까지 묻는 게 온당하냐,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기준도 모호한데 다짜고짜 감옥에 보내는 건 과잉 입법 아니냐 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악성 민원, 갑질 고객 대응은 다르다. 얼마든지 사전에 매뉴얼을 마련할 수 있고,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고소·고발 등 명확한 대응이 가능하다. 기관장·플랫폼 등 윗선의 의지만 있다면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기관 차원에서 악성 민원, 갑질 등에 강력 대응을 천명한다면 단언컨대 악성 민원인이나 블랙컨슈머들의 눈꼴 사나운 요구는 지금보단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에 따르는 부담을 짊어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알아서 해결해.” 그렇게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돼버렸다. 그 피해는 모든 국민이 함께 짊어지고 있다.
악성 민원인과 블랙컨슈머의 본질은 같다. 갑질과 ‘떼법’이다. ‘충주맨’ 말마따나 법원권근의 시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매너를 지키는 사람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더 우대받는다. 애초에 안 들어주거나 무시하면 됐을 일, 윗선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일이 더 커지거나 번거로워지지는 않을까 쉬쉬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갑질과 ‘떼법’에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골병든다. ‘책임 있는 주체’들이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말단으로 떠넘긴 결과가 오늘날의 ‘갑질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악성 민원인과 블랙컨슈머들에 의한 갑질 피해야말로 의사 결정권자에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이 필요한 영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