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빛나는 것들 중 달만큼 정감 가는 존재가 있을까. 언제나 포근하게 밤을 밝히는 달은 우리에게 위안이 돼왔다. 특히 9월에 뜨는 한가위 보름달은 1년 중 가장 밝고 정겹게 느껴지는 달이다. 높이 뜬 보름달을 보며 우리는 고향을 생각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과 연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눈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해에 비해 달은, 구름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달을 보며 세월을 느끼고 우주의 조화를 경험한다. 그래서 달은 가장 오래된 자연의 시계였다. 비록 지금은 해에게 시간의 척도 구실을 빼앗겼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달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이집트에 오래 머물지만 않았다면, 달은 시간의 척도 구실을 좀 더 오래 유지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양력은 시저가 이집트에 머물며 그 유용함을 깨닫고 전파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달을 좋아한 건 아니다. 달에 대한 감정은 나라와 문화권에 따라 크게 달랐다. 우리 민족에게 달은 토끼가 살고 있는 친숙한 밤 친구였다. 보름달이 뜨면 처녀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달빛 아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반면 우리는 그믐밤을 무척 두려워했다. 우리나라 전통 귀신들은 예외 없이 그믐밤에 등장한다. 처녀귀신, 총각귀신, 달걀귀신, 몽달귀신, 심지어 도깨비도 달이 없는 그믐밤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 보름달은 무서운 존재였다. 서양인들은 춥고 사악한 기운이 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달에 늑대인간이 산다는 오래된 믿음에서 비롯됐다. 서양에선 보름달이 뜬 밤에 혼자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자연스럽게 보름달 밤에 귀신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게 됐다. 드라큘라나 늑대인간 같은 서양 귀신들은 보통 보름날 밤, 달이 가장 높이 뜨는 자정 무렵에 등장한다.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국적이 의심스러운 귀신이 등장할 때가 있다. 보름달을 배경 삼아 나타나는 처녀귀신이라니!
서양인들이 보름달을 싫어하는 것은 ‘블루문(blue moon)’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다. 블루문이란 같은 달에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을 의미한다. 음력의 한 달은 29일이나 30일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1일에 보름달이 뜨면 마지막 날인 30일이나 31일에 보름달이 한 번 더 뜨게 된다. 기분 나쁜 보름달을 한 달에 두 번이나 봐야 하는 이들의 심정이 좋을 리 없다. 따라서 블루문은 주로 ‘우울한 달’ ‘기분 나쁜 달’이란 의미로 쓰였다. 서양 통계에 따르면 보름날 범죄율이 더 높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보름달이 잠재된 범죄 심리를 자극한다고 해석한다. 우리나라엔 보름달과 범죄율의 상관관계에 대해 특별히 조사된 게 없지만, 아마도 보름날 범죄율이 다른 날에 비해 높진 않을 것 같다.
토끼와 늑대인간 외에도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달의 모양은 다양하다. 포효하는 사자, 옆으로 기어가는 게, 악어로도 본다.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을 달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내 생각엔 알밤 까먹고 있는 다람쥐가 가장 그럴듯한 상상이 아닐까 한다.
한가위 보름달과 정월 대보름달 중에 어느 달이 더 클까. 달은 지구 둘레를 약간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따라 돌기 때문에 같은 보름달이라도 지구에서의 거리는 최고 10%까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지구에서의 거리에 따라 조금씩 크기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같은 날짜라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한가위 보름달과 정월 대보름달 중 어느 게 더 크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가위 보름달이 정월 대보름달보다 더 크다고 말하곤 하는데, 한가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좀 더 여유롭고 풍요롭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만 정월 대보름달은 겨울에 뜨기 때문에 한가위에 비해 더 높이 뜬다. 해는 여름에 가장 높이 뜨고, 해와 정반대에 있는 보름달은 겨울에 가장 높이 뜬다.
추석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20여 년 전 KBS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난 이계진 아나운서가 들려준 은하수 이야기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험 못해봤겠지만, 예전엔 보릿고개라는 게 있었다.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났는데 보리마저 여물지 않은 오뉴월 무렵, 시골 사람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야 했다. 이 무렵 저녁에는 은하수가 동쪽 하늘로 길게 뻗어 있다. 부모들은 배고픈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은하수를 곡식의 낱알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은하수가 머리 위로 올라오는 때가 되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달랬단다. 이계진 아나운서는 어릴 적, 늦은 봄부터 저녁마다 마당의 평상에 누워 은하수가 하늘 높이 올라가기를 간절히 바라곤 했다고 한다. 은하수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때가 바로 한가위 무렵이다.
보릿고개와 은하수
자, 그럼 지금부터 풍요로운 한가위를 기대하며 은하수 주변의 아름다운 별자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은하수 중심 근처에 위치한 궁수자리와 전갈자리가 9월의 주인공이다.
가을 저녁, 남쪽 지평선이 터진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은하수가 뭉쳐 환하게 구름처럼 보이는 장면에 놀라게 된다. 구름처럼 뭉쳐 있는 은하수 중심의 동쪽(왼쪽)을 자세히 보면 여섯 개의 별이 마치 북두칠성처럼 국자 모양으로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남두육성’인데, 근처에 있는 다른 별들과 함께 주전자 모양의 궁수자리를 형성한다.
이 별자리는 은하수 중심에 자리해 ‘별들의 늪’이라 느낄 정도로 많은 별이 모여 있다. 사수자리라고 하기도 하지만, 궁수자리가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은하수와 어우러져 마치 주전자 주둥이에서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수자리를 가리켜 ‘이열치열의 별자리’라고도 한다.
백조자리의 알파(α)별 데네브(Deneb)와 독수리자리의 견우(Altair)를 이어 같은 거리만큼 연장한 곳에서 주전자 손잡이를 찾으면 궁수자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만약 충분히 어두운 시골이라면 남쪽의 낮은 하늘에서 은하수가 구름처럼 뭉쳐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 더 낫다.
옛사람들은 이 별자리를 두고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켄타우르(Centaur)가 활을 쏘는 모습을 상상했다. 왜 하필 켄타우르일까. 그 답은 신화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은 반인반마의 키론(Chiron)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의 아들로 태어난 키론은 포악한 성격을 가진 보통의 켄타우르 족들과 달리 총명하고 우아했으며 학술과 예술, 무술까지 능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웬만한 영웅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였다.
어느 날, 키론의 제자인 테살리아의 영웅 이아손이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등을 이끌고 아르고호를 타고 코르키스로 황금 양피를 찾아 떠날 때, 키론은 제자들을 걱정해 황도 위에 활을 잡은 자신의 모습을 별자리로 만들어 길을 안내했다고 한다. 이 별자리가 바로 궁수자리다.
半人半馬의 스승
키론의 총명함은 모든 인간을 초월하고 대부분의 신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로 명성을 얻었고, 부모 잃은 고아들을 돌봐 영웅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또 하늘에는 별자리를 만들어 영구히 인간들을 위한 지표가 되게 했다. 그런데 그가 해놓은 별자리 정리가 얼마나 훌륭했던지, 그가 죽은 뒤 제우스가 키론을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려고 했을 때 남은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제우스는 잘 보이지 않는 남쪽 하늘에 그를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켄타우루스자리(Centaurus)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지방에서 그 일부만을 볼 수 있다.
9월 저녁에 남쪽의 낮은 하늘을 보면 밝게 빛나는 붉은색의 1등성 하나가 눈에 띈다. 이 별은 전갈자리의 으뜸별로 ‘화성의 라이벌’이란 뜻을 가진 안타레스(Antares)다. 이 별 옆에는 2개의 별이 마치 호위병처럼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 세 별은 여름철의 삼태성이라 불린다. 여름철의 삼태성 주위에 여러 개의 별이 S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져 마치 하늘의 바다에 낚싯바늘을 던져 넣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낚싯바늘처럼 보이는 이 별무리가 바로 여름철 남쪽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전갈자리다.
이렇게 아름다운 별자리가 사막의 무서운 독충 전갈로 불린다는 것은 약간 못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은 죄로 집게발이 잘려나간 불쌍한 전갈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비극적인 사랑일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대부분 슬픈 결말을 맞이하는데, 과연 신과 인간은 결혼할 수 있을까? 전갈자리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사랑한 사냥꾼 오리온을 죽이기 위해 태양의 신 아폴론이 풀어놓은 거대한 전갈로 전해진다.
하늘까지 쫓아간 오빠의 질투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열렬한 사랑을 한 아르테미스와 오리온은 결혼을 결심하고 아르테미스의 오빠인 아폴론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나 아폴론은 여동생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전갈을 풀어 오리온을 죽게 했다. 제우스가 아르테미스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오리온을 별자리로 만들어주자, 아폴론은 전갈 역시 별자리로 만들어 하늘에서도 오리온을 쫓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여, 올여름 전갈의 독침을 조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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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전갈을 풀어놓은 신이 헤라라고 한다. 오리온이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며 거만하게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란다. 어느 이야기가 맞든 전갈은 오리온을 죽이기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오리온을 쫓고 있다. 전갈자리가 뜰 때 서쪽 하늘로 오리온자리가 지는 모습이 마치 서로 쫓고 쫓기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전갈자리는 현재의 천칭자리까지 포함한 굉장히 큰 별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황도 위 별자리를 12개로 만들기 위해 전갈의 집게발을 떼어내 천칭자리로 만들었고, 지금의 전갈자리는 집게발이 잘린 밋밋한 전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