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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은 ‘가슴높이 교육’이었다

비결은 ‘가슴높이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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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어린 딸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우리 부녀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아빠가 자전거로 자기를 학교에 데려다준다고 좋아했고,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예전의 나처럼 학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학교에 가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첫째는 학교에 가자마자 공부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몸은 마른 편이었지만 눈은 빛났고 학교 생활을 즐거워했다. 쪽지 시험을 볼 때마다 100점을 맞았다고 좋아했다.

우리 아이는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 언니들과 같이 하던 ‘학교 놀이’의 연장쯤으로 생각하고 즐기는 모양이었다.

1년쯤 지나자 큰아이는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림 그리기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둘째가 학교에 들어가 나는 자전거의 뒷좌석을 조금 넓혀 두 아이의 등교를 도와 주었다.

첫째와 둘째의 성격은 대조적이다. 첫째는 내성적인데 둘째는 외향적이다. 그런데 학교 생활은 너무나 닮았다. 무엇하나 열심히 하지 않은 게 없었다. 둘 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 그림은 언제나 교실 뒤에 붙어 있었다. 국어 받아쓰기 하며 산수까지 모두 재미있어 했다.

미술대회마다 두 아이가 상을 독차지하였다. 교내에서 매달 주는 학력상과 군 교육청에서 수여하는 상과 청년단체 주관 행사에서 주는 상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선생님과 학부형 치고 우리 아이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만나면 “그 집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나?” “아빠가 매일 붙들고 공부를 시키는 모양이지?” 하고 묻곤 했다.

셋째가 태어나고 두 해 후에 넷째가 태어났다. 딸 부자가 된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우리 집 대가 끊기게 되었다며 노골적으로 손주며느리를 구박하시기 시작했다.

이 셋째가 다섯살이 되었다.

“이제 셋째도 얼마 안 있어 학교에 보내야 할 터인데 어쩌지?”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그렇게 해 봐야지!”

나는 생각했다. 첫째와 둘째가 저렇게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다 그 ‘인형 놀이’때문인지 모른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그 생각이 굳어졌다. 셋째는 오늘도 언니들과 ‘인형놀이’를 하고 놀았다. 주로 ‘인형놀이’의 공주 아기가 되는 입장이었지만 셋째 넷째 모두 재미있어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하던 대로 셋째에게도 종이 인형을 사다 주었다. 그리고 도화지와 색연필 크레파스를 구해다 주었다. 이웃집의 지난 해 달력은 모두 아이들의 도화지로 사용되었다.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셋째도 재미있어 하며 즐겁게 놀았다. 자연스럽게 언니들을 따라 ‘글자 놀이’를 하고 ‘1, 2, 3, 4 놀이’ ‘구구단 놀이’도 하였다.

셋째 넷째도 학교에 갔다. 셋째가 조금 처지는 듯하더니 곧 따라붙였다. 나는 이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공부였다”고.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막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위로 딸만 넷이었기 때문인지 모두 다 우리 집에 경사났다고 축하해 주었다.

얼마 후 첫째와 둘째는 중학교에 들어갔고 셋째와 넷째도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썩 공부를 잘 하였다. 막내인 아들도 이제껏 누나들에게 해주던 방법대로 하면 틀림없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셋째와 넷째에게 인형 놀이를 할 때 막내와 같이 놀아 주라고 일러 두었다.

로봇에 푹 빠진 아들

막내가 서너 살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누나들과 어울려 인형놀이도 소꿉장난도 했다. 그런데 다섯 살쯤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점점 누나들과 하는 인형놀이나 소꿉장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방안에서 놀려 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때로는 막대기를 집어들고 칼이라고 후려치며 야단을 피우기도 했다. 잠시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지를 못했다. 막내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을 때는 오로지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뿐이었다. 그것도 로봇이나 만화영화가 방영될 때에만.

막대기를 휘두르는 데도 누나들이 관심을 주지 않자 이제는 “야! 야!” 하고 고함까지 지르면서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이었다. 누나와 집안에서 소꿉장난을 하기보다는 아빠와 밭에 가서 놀기를 더 좋아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딸 자식 많은 집안에 하나 아들 버린다’는 옛 말이 꼭 맞구나.

그런데 막내 율이는 누나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누나들이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는 로봇 전쟁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연필로 자주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을 혼자 그려보곤 하였다. “옳다. 이것으로 시도해 보리라”고 생각한 나는 읍내에 내려가서 서점이며 문방구에서 로봇만 잔뜩 나오는 그림책을 사다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림책을 보자 아이는 바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틈틈이 많이 연습한 솜씨였다. 우리 식구는 모두 둘러 앉아 막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우리 식구의 즐거움이 또 하나 늘어났다. 막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재미였다. 누나들이 먼저 “아빠 율이 그림 봐라”하면서 좋아했고, 우리 부부 중 누구라도 먼저 보면 누나 넷은 물론이고 큰할머니(아이들 증조 할머니) 작은 할머니(아이들 할머니)까지 불러모아 그림을 보여주며 좋아했다.

우리의 격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잘 된 그림은 따로 벽에 붙이기도 하고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것은 아이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처음 그림을 코팅해 주었을 때 율이는 그림을 앞뒤로 살펴보면서 신기해했다. 누나들의 “코팅 해보자”는 제안은 율이를 한껏 고무시켰다.

한번은 넷째가 학교에 가지고 간 책받침이 친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넷째는 “내가 우리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서로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뺏겼다”고 했다. 막내는 처음에는 좀 아쉬워했지만 별로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또 그리면 되지 뭐”하면서 우쭐해했다. 한장 더 그려달라는 넷째의 제안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내는 또 그리기 시작했다.

로봇그림에 코팅해주며 격려

그리고 또 그리고, 막내의 로봇 그림은 그야말로 일취월장 발전해 갔다. 처음엔 그림책을 보고 그리더니 이제는 볼 것도 없었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림책보다도 더 멋진 로봇을 그려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해 쯤으로 기억된다. 구룡포읍 청년 향우회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그림 대회가 열렸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림 대회에 나갔다. 유치부도 있었는데 주제는 자유였다.

막내는 로봇 그림을 그렸다. 다른 아이들도 처음에는 좋아하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곧 지루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본부석에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아직 그림을 다 그리지 못한 막내는 종료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꼬마의 손끝에서 어떻게 그렇게 온갖 모양의 로봇이 나오는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결과는 유치부 최우수상이었다. 유치원, 미술학원 한번 다니지 못한 산골마을 촌뜨기가 쟁쟁한 읍내 아이들을 물리치고 최우수상을 받다니! 막내는 신이 났다.

이제 막내도 그림을 즐기게 되었으니 시작은 잘 되었다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기가 그린 그림에 이름을 붙이는 놀이를 하면서 글자 공부도 저절로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이리저리 로봇에 ‘이름짓기 놀이’를 유도해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로봇 그리기를 통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블록 놀이도 좋아해서 한번 블록을 손에 잡았다 하면 몇 시간씩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이 놀이를 통하여 문자를 깨우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첫째, 위로 네 아이는 여자아이고 막내는 사내아이여서 사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나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형 놀이를 로봇 놀이로 바꾸었고, 살림 놀이를 로봇 만들기와 블록 쌓기 놀이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글자 익히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는가.

둘째, 환경이 달랐다. 우선 로봇은 종이 인형에 비해 가지 수가 얼마 되지 않아 그 이름이 다양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담’ 시리즈 외에는 ‘아이자크’ ‘제타 플러스’ ‘윙윙’ ‘더블제트’ 정도였다. 그러니 로봇 이름을 활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또 누나들과는 달리 로봇을 가지고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었다.

율이가 글자를 쉽게 익히지 못한 것은 환경적 요인이 크리라는 결론은 이미 내린 바이나 큰 아이들과 다른 환경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니 그때는 과자가게를 하고 있었고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 엄청난 차이를 뒤늦게서야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막내아들의 공부를 위하여 다시 ‘과자집’을 차릴 수는 없었다. 결국 ‘꿩 대신 닭’이라고 아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나 과자가 잔뜩 그려져 있는 그림책으로 ‘글자놀이’를 시작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다시 학교 앞 문방구를 찾아갔다.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책이 있었다. 도화지보다 좀 두꺼운 종이에 온갖 과일이 그려져 있기에 이것이면 되겠구나 싶어 얼른 사왔다. 그러나 이것도 허사였다.

“이것은 사과, 이거은 수박”하면서 글자를 깨우치려고 했지만 막내는 이내 시큰둥하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맛있는 것들이 잔뜩 그려진 그림책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굴러 다니면서 모서리가 다 낡고 닳았을 무렵이다. 이것도 안 되니 직접 투자를 해보는 수밖에,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둘은 실제로 과자를 보기도 하고 먹어 보기도 해서 관심이 생생한데, 그저 그림책만으로 막내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실제 먹을 것을 사다 주면서 바로 글자를 가르쳐보리라 생각했다.

이것도 최대한 재미있게 해보리라. 궁리에 궁리를 했다. 아내와 의논한 끝에 엄마와 ‘편지 놀이’를 시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이제부터 엄마와 재미있는 ‘편지 놀이’를 해보자고 제안하였다. 막내는 좀 의아해 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엄마와 하는 편지놀이는 재미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 때 아내는 일년 내내 집에서 가꾼 농산물들을 리어카에 싣고 읍내에 내다 파는 일을 주로 했다. 말하자면 나와 어머니, 할머니는 집에서 농사짓는 일을 전담하고 아내는 판매를 전담하는 방식으로 ‘분업화’했던 것이다. 아내는 매일 시장에 나가 집에서 가꾼 채소나 과일, 토마토, 수박 등을 팔아 가계를 꾸려 나갔다.

‘편지놀이’로 한글 익히기

나는 막내에게 ‘편지 놀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편지 놀이는 이런 것이었다. 매일 엄마가 시장에 갈 때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다 써서 엄마에게 주는 놀이었다.

처음에 아들은 조금 걱정하는 눈치였다. 자기는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편지 놀이’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림책 있지? 그것을 보고 네가 먹고 싶은 것을 쓰는 놀이란 말이다. 그래 너는 그림도 잘 그리는데 그까짓것 쉬운 글자를 못 쓸까봐? 오늘부터 당장 해보자”

첫날 편지 놀이의 편지내용은 단 두 글자, ‘사과’였다. 그림책을 보고 사과 밑에 ‘사과’라고 씌어 있는 것을 다시 그린(?) 글씨였으리라. 아내는 막내가 접어준 대로 그 편지를 지갑에 곱게 넣고는 시장에 갔다. 그리고 가져간 물건을 다 팔고 집에 올 때 그 편지에 써있는 대로 사과를 사가지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이건 웬 요술인가? 아이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전에도 물론 사과를 사다 준 적이 있지만 이 사과는 아이에게는 ‘의미 있는’ 다른 사과였다. 막내는 누나들을 부르며 엄마가 사과를 사왔다고 고함을 쳤다. 누나들은 “이 아이가 사과 처음 봤나?” 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엄마가 내 편지 보고 사과 사 왔다”면서 무척이나 좋아했다.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막내는 아마 자기가 글자라고 쓴 것이 맞게 씌어졌는지 엄마가 올 때까지 궁금했으리라. 또 자기가 쓴 암호 같은 이것이 제 구실을 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문이 일시에 다 풀렸던 것이다. 과연 글자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날부터 아들과 엄마의 편지 놀이는 재미있게 계속되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편지 놀이를 계속하는 것이 다소 무리였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훗날 과외비를 대는 셈치고 매일 이 과일 저 과일을 사다 날랐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막내는 글자에 남다른 흥미를 보이며 글자 공부 놀이를 즐겼다. 조금 지나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그림들이 있고 글자가 많지 않고 쉬운 동화책을 사다 읽어 주면서 아이의 흥미를 돋워주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글자를 익힌 것은 그들이나 나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전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독서하는 습관만은 꼭 붙여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독서하는 습관이 붙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취학 전 교육에 조금 자신을 얻은 후부터 나는 독서습관을 붙여주기 위한 계획을 하나 둘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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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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