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조선인에게 본래 개천 다리 밑은 일찍부터 거지들의 자리였다. 석교(石橋) 아래는 거지들의 훌륭한 주거지 구실을 했다. 그래서 천변은 치안의 사각지대가 되어갔다.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나 천변은 우범지대였다. 특히 수표교 건너 수표동과 관철동 일대에는 기생집이 밀집해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기생집을 중심으로 술과 돈, 그리고 여자와 권력이 모여드는 곳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밤의 사람들’인 깡패, 건달, 주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고아나 다름없게 된 김두한이 자란 곳이 바로 이 수표교 밑이다. 김두한은 해방공간에서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정진용(YMCA 권투부 출신)과 함께 시멘트로 만든 역기와 철봉틀로 몸을 단련했다. 이 점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많은 주먹들이 권투나 유도선수 출신인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김두한은 평소 자신 때문에 종로 주먹패의 본거지로 유명해진 종로 우미관(관철동 89번지) 뒷골목 음식점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우미관은 한국인들이 출입하는 대중영화관으로 그 뒷골목에는 부경루, 태왕루라는 큰 음식점들이 즐비했고 인사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특히 여기서 김두한은 숙식을 해결했다. 김두한은 유흥가나 상가주변을 배회하면서 ‘힘’으로 호구를 해결하는 주먹패였던 것이다. 그를 ‘협객’ 또는 ‘항일주먹’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청계천 북쪽의 북촌마을까지 세를 확장하려 한 일본 깡패들과의 ‘터 싸움’에 기인한다.
김두한말고도 해방 전에 ‘항일주먹’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주대륙의 ‘시라소니 이성순’ 씨름꾼 출신의 ‘상하이독수리 장천용’ 박차기의 명수 ‘호랑이 이상대’ 연전 출신의 유도사범 ‘김후옥’ 일본 명치대 상과 출신의 ‘박주용’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중에서 유독 김두한이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강한 ‘저항민족주의’가 담겨져 있다. 즉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민족적 상징으로 재현될 수 있는 혈통적 요소를 갖고 있다.
저항민족주의와 향수의 정치
따라서 그가 일본깡패들과 일시적이나마 적대적 대립관계를 가졌다는 점은 그러한 상징성을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저항민족주의의 재현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두한의 재현은 민족적 고난에 대한 기억과 그것의 극복을 지속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사회적 내부갈등을 봉합하려는 지배세력의 ‘기억의 정치’에 기여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 또는 나의 과거에 대해 기억해보자.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과거의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를 ‘주관적으로 재처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의 기억을 다시 프로그래밍하는 수단들, 즉 TV와 영화들은 너무나 쉽게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는 틀을 대중에게 강요한다. 이를 통해 대중은 자신들이 실제 기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억의 재현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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