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이하 의문사위)는 18년 전 중대장의 이상성격을 비관, 스스로 총을 쏴 자살한 것으로 군이 발표했던 허원근 일병이 사실은 전방 부대 내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뒤 자살로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군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특별조사단을 구성, 진상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하는 등 허일병 사건에 대한 의문사위의 발표는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린 군 의문사 유가족들에게 뒤늦게나마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진리를 보여준 의문사위는 그러나 9월16일로 조사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기간연장과 조사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의문사특별법 개정안과 특별검사제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의원발의로 국회에 제출됐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사안에 집중할 가능성이 큰 정치권의 현실을 볼 때 시한 내 개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 현행 특별법상 9월16일 조사활동 종료가 확실해 보인다.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죽음들의 진실을 밝히며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아온 의문사위. 그러나 곁에서 지켜본 의문사위의 22개월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었다. ‘비밀은 알려지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성경구절을 모토로 삼았던 위원회는, 이 기간동안 비단 억울한 죽음에 얽힌 비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들도 함께 드러내주었다.
사상 초유의 실험 ‘반관반민’
의문사 유가족들은 ‘위원회는 유가족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이의를 달기는 쉽지 않다. 의문사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기까지 유가족들은 꼬박 422일 동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노숙투쟁을 벌였다. 정치권으로 하여금 비록 미흡한 점은 많지만 귀중한 특별법을 제정하게 하고, 그 결과 2000년 10월17일 의문사위가 정식으로 닻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다름아닌 유가족들의 힘이었다.
의문사위가 사상 초유의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구성된 것은 위원회 탄생의 주체가 유가족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유가족들은 수십년 동안 죽은 아들딸의 선후배들과 함께 핏줄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왔다. 그 과정에서 이 선후배들은 전문가가 되었다. 그들만큼 의문사가 안고 있는 의혹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 없었다. 이들이 위원회에 ‘조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당초의 판단이었다. 수십년 전의 수사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보관돼 있는지, 당시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기술적인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 전문인력들은 피진정 기관을 포함한 국가기관에서 파견돼 민간 조사관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참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