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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감옥’에 사느니 좀 불편한 게 낫죠”

정보인권운동 이끄는 ‘진보넷’ 오병일·장여경 국장

“‘디지털 감옥’에 사느니 좀 불편한 게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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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가 ‘생명줄’인 세상이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의지하는 삶, 그래서 정보통신 기술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 그 와중에 심화된 정보격차가 정보기본권을 제한하고, 한편으론 개인의 정보가 기업의 새로운 자산으로 변했다. 전자감시가 횡행하는 우울한 디스토피아에서 이를 경계하는 젊은 인권운동가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넷은 자유의 공간이라 착각하기 쉽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맘놓고 남을 욕할 수도 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상의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갖는다. 이렇게 순진한 사람들은 톡톡히 배신당하고 나서야 현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다. 그후 사이버 활동은 심각한 자기검열에 빠지고, 심한 경우 인터넷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 대학 사회학과 B교수는 ‘현대사회와 음란물’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자기 연구실에서 몇몇 포르노 사이트를 서핑한다. 다음날 학장이 B교수를 불러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봐요 B교수, 젊은 애들도 아니고 알 만한 사람이 학교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요?”

이처럼 감시는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됐다. 출근길 도로변에는 속도며 차로 위반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돼 있고, 사무실에는 도난 방지라는 미명 아래 CC카메라를 버젓이 달아놓았다. 네트워크 뒤의 감시자는 기업의 비밀보호를 명분으로 직원이 주고받는 이메일을 훔쳐본다.

퇴근 후 이따금 쇼핑하러 들르는 백화점에선 구매기록과 성향을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상품 안내장을 보내온다. 정답게 이름을 부르며 소식을 전하는 스팸메일과 스팸전화는 이젠 무덤덤할 정도. 지하철역 입구에 당당하게 서 있는 전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하며 마치 범죄자를 대하듯 쏘아본다.

신용카드사는 회원이 언제 어디서 어떤 물건을 사는지를 하나하나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인공위성과 연결된 휴대전화는 누가 어디에 있든 위치를 추적해낸다. 숨을 곳은 없다. 개인의 병력(病歷)이 담긴 유전정보까지 거래되는 세상, 굳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보사회는 이미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통제사회로 변했다.



정보인권운동의 메카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세상(www. jinbo.net 대표·강내희 중앙대 교수)’은 PC통신 시대를 겪지 않은 이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참세상’은 PC통신 시절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독립통신망.

진보넷은 고전적인 인권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운동 영역을 개척해왔다. 이른바 온라인을 통한 사회운동, 그리고 ‘정보사회 속의 인권보호’가 이들의 모토다. 그간 전기통신사업법 53조 개정, 통신물 표현의 자유 인정,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단가 인하, 지문날인 거부, 반(反)감시법 제정운동 등을 주도했다. 상근자가 13명에 불과한 작은 단체지만, 이들이 정보사회와 관련, 주도해온 문제제기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으며 성과를 축적했다.

서울역과 숙대입구역 사이 허름한 빌딩에 세든 진보넷 사무실은 여느 시민단체들과 다를 바 없이 수수하고 소박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컴퓨터가 유달리 많다는 점과 상근자 대부분이 20대와 30대 초반으로 매우 젊다는 것.

그러나 이런 외양과는 달리 이들이 품은 네트워크의 규모는 이곳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700개가 넘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홈페이지 서버가 바로 이곳에 있다. 민주노총, 녹색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진보성향 단체들의 홈페이지 서버가 4년 전부터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호스팅 서비스만으로도 이미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700여 개의 메일링 리스트(mailing list)와 3000여 명의 이메일 이용자도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이곳의 서버가 멈춘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사회단체 회원들은 소통의 기반을 잃게 된다.

이들이 테헤란밸리의 유수 호스팅 업체를 제쳐놓고 이곳에 서버를 둔 것은 왜일까. 기술이 특별하거나 속도가 빨라서가 아니다. 진보넷이 국가권력의 통제와 억압에 굴하지 않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자치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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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호재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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