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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서울의 맛을 찾아서 : 2010년 3월의 일기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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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을 향한 끝없는 허기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달콤한 것이 당기는 날은 광화문까지 걸어가 일민미술관의 카페에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후식을 야금야금 입에 넣었다. 와플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일까 과일을 얹을까, 그것이 늘 문제였다. 이미 배가 부르면 혼자 해치우기 부담스러운 와플 대신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보통 시중에서 파는 애플파이는 애플보다 파이가 더 많은데, 일민카페의 그것은 파이보다 사과가 더 들어가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었다. 뜨거운 빵조각과 위에 얹힌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기막힌 조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변증법적 조화를 내 혀 밑에서 만끽하며,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포크를 휘두르던 어느 날 나는 알았다.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서울’임을…. 그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 서울의 맛을 즐기려 나는 먼 길을 왔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이순신 장군 근처를 지나면 배가 고팠다. 신발을 벗고 철퍼덕 주저앉아 밥을 먹는 시골의 밥집에는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나는 신발 벗고 들어가 앉는 식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춘천에 있으면 서울이 가고 싶고, 서울에 있으면 춘천이 그리웠다. 저녁 무렵 경춘선 열차에 올라탄 내 손엔 백화점의 식품매장에서 파는 단과자나 김밥 봉지 따위가 쥐어졌다. 달리는 기차에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간식을 먹은 뒤에는 속이 불편했다. 집에 도착해 음식물을 토해내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 서울 가면 절대로 과식하지 말아야지. 먹을거리를 아예 사지 말자고 결심하지만 일주일쯤 뒤에 서울에 다시 도착하면, 과거의 아픈 교훈을 잊고 나는 또 식욕의 포로가 되었다. 중앙을 향한 끝없는 허기, 그게 바로 지방문화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나의 뿌리인 도시로 돌아왔다.

내 발길이 뜸해진 요 몇 년 사이에 국제도시로 변모한 서울이 신기해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렸다. 유럽처럼 아기자기하며 개성적인 상점들이 늘어났고, 간판들이 작아지고, 예쁘게 단장한 거리에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여자들의 대담한 옷차림에서 세계화의 영향이 감지되었다. 웬 화장품가게가 이리 흔한지. 일본관광객들이 몰리는 명동에는 일본에서 인기라는 저렴한 한국산 비비크림을 파는 화장품 체인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내가 들어간 에튀드하우스 매장의 점원들은 젊은 남자가 대세였다.

베트남 쌀국수를 비롯해 인도 식당, 네팔 식당, 아프리카 요리 전문점…. 돈만 있으면 서울에서도 전세계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기다려라. 내가 다 먹어줄 테니. 앞으로 한 달은 글은 제쳐두고 오로지 식도락을 위해 나의 시간과 정열과 돈을 바치리라. 작정한 나는 특별한 볼 일이 없는데도 거의 매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2010년 3월과 4월에 나는 하나의 거대한 입이었다. 버스좌석에 앉아 장시간 흔들린 끝에, 귀가해 자려고 누우면 엉덩이뼈가 슬슬 아팠지만, 그래도 나는 외출을 삼가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은퇴한 지난 10여 년간 만나지 못한 지인들에게 내가 먼저 전화했다.



나는 ‘서울’을 먹었다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崔 泳 美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저서 : ‘서른 잔치는 끝났다’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 ‘흉터와 무늬’`외 다수


15년 만의 서울 ‘재입성(再入城)’을 기념하여 광화문 한복판에서 ‘브런치’를 사겠다는 후배들과 파리크로아상에서 아침 10시반에 만나 브런치를 먹은 3월6일 이후, 내 달력은 약속을 지키느라 바빴다. 3월 한 달 동안, 춘천에서의 2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여럿이 어울리다보니 문득 긴장되며 불쾌한 시간도 있었다. 삼청동의 고급 한정식당에서였던가. 강남의 어느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서였던가. 앉은 순서대로 웨이터에게 정식을 주문하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very well done(고기를 아주 잘 익혀주세요)” 을 듣고, 귀가 멍멍해졌다. 아주 섬세한 ‘very’에 찔린 나는, 문명인들 속에 섞인 야만인처럼 촌스럽게 어리둥절 비틀거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서울을 떠나 있었던 게 아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교계에서 내가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임을 깨닫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부는 밤거리를 홀로 걷는데 뺨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오랜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이었다.

신동아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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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ymchoi3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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