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감을 내가 데리고 가겠소.”
김창룡 소령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을 지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 곤란하던 차에 김임전 주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대답을 해놓고 나서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룡이 누군가. 성깔 고약한 영감 훈계나 하고 있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김창룡이 잠깐 자리를 뜨자 김임전 주임은 얼른 영감을 옆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급히 홍민표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임전 주임은 황급히 달려온 홍민표를 이끌고 옆방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 남로당 서울지부 책임자로 있다가 전향한 홍민표는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김임전 주임은 영감이 김삼룡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남로당 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홍민표를 찾았던 것이다.
“김창룡이 웬 영감을 찍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홍 선생이 한번 확인해주시오.”
“그러지요.”
김창룡이 찍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서던 홍민표가 영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 놀라며 뒷걸음쳤다. 뒤따르던 김임전 주임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주임님,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의문스러운 김삼룡 검거
김임전 주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주하라니? 상스럽게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이나 퍼붓던 저 노인이 거물 이주하란 말인가. 당시 이주하의 나이는 56세. 그 시절에는 그런대로 영감 소리를 들을 만한 나이였다. 토종 공산주의자로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이주하는 김일성과 불화를 겪다 남쪽으로 쫓겨 내려와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얼떨결에 거물을 체포한 김임전 주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이주하는 신분을 숨기고 예지동에서 젊은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김삼룡으로 인해 일제단속이 실시되면서 얼떨결에 시경에 끌려왔지만 이주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수사관들이 자기가 이주하라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렴 경찰서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이럴 때는 적당히 소란을 피워 수사관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 중 하나다 하는 생각으로 일부러 침을 뱉으며 소동을 부린 것인데, 하필 그 자리에 육본 정보국 방첩대의 김창룡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당 잡는데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김창룡에게 그런 식의 어설픈 행동이 통할 리 없었다. 이주하는 꼼수를 쓰다 제손으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불운이 또 겹쳤다. 이주하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홍민표가 직전에 전향을 해서 시경 사찰과를 돕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창룡은 펄쩍 뛰었지만 시경 사찰과가 이주하를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다. 시경 사찰과는 뜻밖의 개가에 환호성을 질렀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김삼룡은 어디로 갔을까? 시경 사찰과 수사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김삼룡의 뒤를 쫓았지만 김상룡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사도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김삼룡을 검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치안국 중앙분실은 시경 사찰과의 상급기관이면서 라이벌이기도 하다. 김삼룡과 관련된 정보는 일선에서 수사를 하는 시경 사찰과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시경 사찰과에서 놓친 김삼룡을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무슨 재주로 검거했단 말인가? 사찰과 과장 최운하와 주임 김임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인 1950년 3월은 남로당이 최후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시기였다. 폭동과 반란, 파업과 선동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조직은 전부 노출돼 괴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 받은 대한민국은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까?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폭풍 전야의 고요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다.
위기의 조짐은 연초부터 감지됐다. 1950년 1월12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발언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나중에 애치슨 장관 발언의 진의는 ‘향후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발언 당시에는 미국이 여차하면 대한민국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무력남침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에 고무적으로 작용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