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석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성경, 24:9-12)
이 같은 말씀의 전통을 따를 때 인간세상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란 도리어 쉽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석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주었으니, 그 계명이 갈등과 싸움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십계명에 따라 살고, 그것을 어기면 처벌받는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하느님의 전통이 없다. 자연과 인간 바깥에서 따로 생명을 창조하는 야훼(조물주)가 없다. 천도교의 교리로 잘 알려진 ‘인내천(人乃天)’ 속에 동아시아의 신관(神觀)이 잘 들어 있다. 인내천, 곧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풀어보면, “모든 사람의 본성 속에 하느님이 깃들었다”는 뜻이다.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라니 듣기에는 좋은데,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는 오히려 힘들다. 누가 옳은지를 판정할 권위를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하는데, 누구나 제 주장이 옳다고 내세울 테니 말이다.
폭력을 제외하면, 인간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근거는 두 군데밖에 없다. 저 위에 있는 하느님(상제)이거나 아니면 저 먼 데 있는 전통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추상적인 절대적 권위가 부정되므로 전통 즉 ‘역사’에서 권위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나이 먹음, 오래된 것, 신화나 설화 같은 해묵은 것들이 힘을 갖는다. 공자가 제 학문방법론을 “옛것을 서술할 뿐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또 좋아한다”(‘논어’)라고 설명한 것도 역사와 전통에서 학문적 정당성을 찾으려 한 노력의 일환이다.
요순설화의 핵심은 순(舜)
동양 고전에 요(堯)와 순(舜)이라는 이름이 자주 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와 순, 곧 요임금과 순임금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만든 신화적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요와 순은 서양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행했던 역할처럼, 당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가공된 권위적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가 쓴 방법은 역사를 이용하는 교묘한 방법이었다. 다른 문명에서 신의 계시가 맡았던 역할을 중국에서는 역사가 행했다”(모우트, ‘중국문명의 철학적 기초’, 인간사랑, 71쪽)는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서양에서 신의 계시(logos)가 시비(是非)의 기준이라면, 중국에선 역사(history)가 시비를 가리는 정당성의 기초였다. 요와 순은 바로 그 역사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가 제 주장의 궁극적 근거로 요와 순을 드는 것은, 마치 서양에서 야훼를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자에게 요임금은 최초로 ‘인간사회의 원형’을 만든 존재로 그려진다.
공자, 말씀하시다. “위대하구나! 요(堯)의 임금 노릇하심이여. 높고 높도다! 오로지 하늘이 큰데, 오직 ‘요’가 이를 법으로 삼았으니.
넓고 넓도다! 백성들이 뭐라 이름조차 짓지 못하는구나. 높고 높도다! 그가 이룬 공(功)이여. 눈부시도다! 그가 이룬 문명이여.”(‘논어’, 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