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12월 주부클럽연합회가 광화문지하도에서 ‘74년은 임신 안하는 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복지 씨앗을 뿌리다
사회보장심의위원회가 출범한 1962년은 군사정권 집권기였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 동시에, ‘민정이양’과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국민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회복지제도를 활용하고자 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하다보니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은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하지만 군사정부는 국민에게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을 홍보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급격히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진은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하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설계하는 등 입법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다.
1963년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법은 사회보장을 ‘사회보장에 의한 제급여와 무상으로 행하는 공적부조’라고 모호하게 규정했다. 동법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운영에 관한 사항을 각령에 위임했다. 위임에 의해 제정된 각령은 사회보장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할 사안으로 △의료급여 △휴업급여 △실업급여 △노령급여 △산업재해보상 △가족급여 △출산급여 △폐질급여 △유족급여 △장제급여 △공적부조 등 총 11개를 규정했다.
이를 영역별로 분류하면 △의료보장(의료급여) △재해보장(산업재해보상) △소득보장(노령급여, 폐질급여, 유족급여, 공적부조) △고용보장(휴업급여, 실업급여) △서비스보장(가족급여, 출산급여, 장제급여)이다.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진은 이 중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 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제도 등의 설계와 제도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민복지연금법 석유파동으로 시행 이틀 전 연기
군사정부는 집권 초기, 근로자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험제도로서 산재보험제도와 의료보험제도 도입도 계획했다.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진은 산재보험제도 연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1963년 12월, 입법안을 군사정부 최고회의에 상정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제정됐다.
또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의료보험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의료보험제도의 기본 틀을 설계했다. 동시에 국민의료비 부담능력과 의료수요, 건강실태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제1차 국민건강조사를 실시했다. 연구 착수 3개월 만인 1962년 6월30일 의료보험요강을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안건으로 제출했고, 다시 6개월 뒤인 1962년 12월16일 ‘의료보험법안’이 최고회의를 통과해 법제화됐다. 연구진이 최고회의에 제출한 의료보험법안은 고용인 500명 이상 사업장을 당연적용대상으로 규정했지만, 최종 결정된 의료보험법은 적용 여부를 기업의 선택에 맡기는 임의적용으로 규정했다.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연구진은 위원회 출범 초기부터 연금제도 연구의 필요성을 실감했으나 연구인력이 제한되는 등 한계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를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1968년부터 사회개발 연구가 시작되면서 근로자 연금제도를 연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부각됐다. 1969년 양로보험기초조사 결과에 근거해 적립방식의 연금제도 도입안이 구상됐으나 입법에는 이르지 못했다. 1971년부터 연금제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2년간 자료수집, 조사연구를 거쳐 국민복지연금 모형 구축과 법률안 작성이 완료됐다. 1973년 12월24일 마침내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정됐지만 제1차 석유파동으로 세계경제가 난관에 직면하자 정부는 시행을 이틀 앞둔 1973년 12월30일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그 시행을 연기했다.
요동치는 인구를 잡아라
1955년부터 시작돼 1960년대까지 이어진 베이비붐 때문에 한국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정부는 인구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가족계획연구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1963년 보건사회부는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작성됐던 ‘가족계획사업계획(안)’을 검토한 후 이를 수정·보완하여 ‘가족계획사업 10개년계획(안)’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