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청교육대 훈련 광경.
내가 경찰에 입문한 것은 1973년 3월16일. 부산지방경찰청에서 순경으로 임용된 후 경남 함양경찰서에서 첫 근무를 했다. 3년 후인 1976년 12월20일 경장으로 승진해 정보과에 근무했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로 전보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상황실에서 1년간 근무하다 형사계로 옮겨갔다.
형사계 직원은 50명 가까이 됐다. 나는 관리반장을 맡았다. 내근직인 관리반장은 하는 일이 많았다. 사무실 살림과 형사들의 주야간 배치, 당직 근무자 지정이 주임무였다. 또 형사들이 수사 목적으로 외지에 출장을 가면 그들 대신 각종 서류를 작성했다.
40여 명의 외근형사는 대부분 40~50대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내 지시가 잘 안 먹혔다. 원칙대로 업무를 수행하다보니 마찰이 없을 수 없었다. 힘든 나날이었다.
1980년 6월 중순. 관내 17개 동에 있는 불량배와 파렴치범, 사기범에 대한 자료를 보름 안에 수집하라는 부산지방경찰청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어 경찰서별로 삼청교육 대상자 검거 인원을 책정한 공문이 내려왔다. 그에 따르면 해운대경찰서는 해수욕장이 2개 있다는 이유로 250 ~300명을 검거해야 했다.
형사계장, 주임들과 회의한 끝에 해수욕장을 표적으로 삼았다. 여름이라 밤에도 사람들이 들끓었다. 7월 초 새벽 1시경 기동대 2개 중대를 동원해 해운대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탈의장을 포위했다. 탈의장에 있던 300여 명이 경찰서로 끌려왔다. 수용시설이 문제였다. 300여 명을 수용할 적당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부득이 형사계와 보안과 사무실 책상을 전부 치워 수용공간을 만들고 회의실 탁자와 의자도 치웠다. 끌려온 사람들은 이 세 곳에 분산 배치됐다. 전경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이들은 10여 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먼저 주민등록증 소지자를 상대로 범죄경력을 조회해 전과가 있는 사람을 골라냈다. 또 신체검사를 해 문신이 있는 사람도 가려냈다. 이들과 더불어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이 주요 조사대상이었다. 외근형사 30명이 3개조로 나누어 3교대로 조사했다.
전과나 문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따로 불러 유흥업소에서 공짜 술을 먹은 적이 있는지, 남의 돈을 뺏은 적이 없는지 다그쳤다. 부인하면 자백할 때까지 협박하고 폭행했다.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백을 받다보니 형사들도 지쳤다. 몇몇 형사는 견디다 못해 잠적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물론 보안대 수사관과 검찰 수사관도 심사에 관여했다. 그밖에 학교장과 병원장, 지역 유지 등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절차는 이랬다. 먼저 내가 해당자에 대한 자료를 취합해 관리주임을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한 부씩 나눠준다. 해당자가 심사대 앞에 서면 수사관이 질문한다. 이때 문신이 있는 자는 따로 신체검사를 실시한다. 보안대 수사관이 A, B, C, D 네 등급 중 하나에 사인을 하면 나머지 심사위원들도 같은 등급에 사인을 했다. A급은 흉악범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B급은 4주 교육 후 순화교육을 받았다. C급은 4주 교육 후 귀가조치됐고 D급은 경찰서에서 훈방됐다.
삼청교육 대상자들은 해운대구 좌동에 있는 육군 모 부대로 보내졌다. 내가 인솔해 가보니 다른 경찰서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와서 머리를 박박 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과연 무슨 잘못을 저질러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들이 없어졌다”
인원이 많다보니 부산 군부대에서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30여 명은 강원도에 있는 전방부대로 보냈다. 저녁을 먹인 후 전경버스에 태웠다. 무장한 형사 10여 명이 호송을 책임졌다. 밤새 달려 전방부대에 도착해 인계한 후 곧바로 돌아왔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 육군 헌병 15~20명이 해운대경찰서로 왔다. 헌병 2명과 정복 경찰관 1명, 형사 1명 등 4명이 한 조가 돼 근무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해운대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일대를
순찰하면서 삼청교육대로 보낼 사람들을 검거했다. 또 다른 합동근무조는 관내 반송동과 반여동, 재송동 일대를 도보로 순찰하면서 같은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