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7월13일 서울 자양고 학생 500여 명은 전교조 관련 교사징계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1세대 교사. 전교조는 노태우 정권 때인 1989년 5월 결성돼 10년 후인 1999년 합법화됐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최초 결성 당시 조합원은 3만명. 이 중 전교조 탈퇴를 끝까지 거부한 교사 1519명은 1989년 강제 해직됐다.
이들 중 1400여 명이 1994년 김영삼 정권 당시 ‘특별신규채용’돼 다시 교단에 섰지만, 당시의 상처는 아직도 선명하다. 현재 70명의 당시 해직교사는 2007년부터 ‘교원호봉확인’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20여 년 전, 전교조 설립 당시 어떤 일이 있었을까?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발행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및 언론보도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중간평가 무마 위해 전교조 탄압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민주세력의 반발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1988년 3월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해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다. 노 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 막바지에 “5공을 청산하고 국민의 신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중간평가를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중간평가에서 승산이 없었다.
취임 2년차인 1989년, 노 대통령에게는 이 난국을 타개할 ‘한방’이 필요했다. 노 대통령이 선택한 카드는 ‘공안정국’이었다. 마침 1989년 봄 문익환 목사 등 민간인이 방북했다.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서경원의 방북으로 정부와 야당의 갈등도 깊어졌다. 안기부·검찰 등 정부 내 공안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교사 사회에서도 노동조합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1980년대 초반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흥사단 등 종교단체 중심으로 교사 소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자생적 교사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교사가 교육권을 침해받고 해임된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은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으로 이어졌다.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도 촌지, 부정입학 등 교육계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교사의 노동조합 설립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1989년 2월 임시국회에서 6급 이하 공무원의 노조 결성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조합법’이 야3당 단일안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전교조 합법 설립에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전교조 합법 설립에 제동이 걸렸다.
전교협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더라도 먼저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노조의 힘으로 노동조합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989년 2월 ‘교원노조 결성방침’을 정하고 5월 전교조가 공식 출범했다.
전교조는 출범과 동시에 탄압받았다. 충북 제원고 강성호 교사 등 상당수 전교조 교사가 수업 내용을 이유로 검찰에 구속되거나 직위해제됐다. 검찰은 전교조 결성 주동교사를 찾겠다며 상당수 교사를 소환해 조사했다. 동시에 학교와 정부는 전교조 가입 교사에게 “전교조를 탈퇴하면 모든 걸 불문(不問)하겠다”며 탈퇴를 유도했다.
경찰은 5월28일 전교조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하고 교사 1082명을 연행했다. 7월1일 문교부는 “전교조 조합원은 전원 파면하거나 해임하라”며 더욱 강경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때 상당수 교사가 교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교조를 탈퇴했다. 하지만 전교조 탈퇴를 끝까지 거부한 교사 1519명은 절차도 밟지 않은 채 무단 해고됐다.
당시 서울 강신중 송유정 교사는 전교조 분회 결성식 등 전교조 관련 행사에 두 번 참석했다는 이유로 부임 5개월 만에 해직됐다. 만삭이었던 전남 함평중 이명심 교사는 학교로부터 “출산휴가 전에 전교조를 탈퇴하라”는 종용을 받다 결국 출산을 보름 앞둔 8월16일 교사직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