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신보 발행인 이상협.
긴 오전이 끝났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일어날 7시부터 그는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나가 있었다. 이태왕(李太王)의 국장(國葬)날이었다. 1919년 3월 3일 아침. 낙산(駱山) 위로 동녘 해가 떠오를 그 무렵 대궐 안에서는 발인(發靷)을 앞둔 마지막 제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왕 전하가 경성에 머무르는 마지막 밤이 덧없이 새었다….’
간밤을 꼬박 새운 뒤 함녕전의 마루에 비껴드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이상협(李相協)은 흩어지는 새벽노을처럼 물들어가는 눈으로 그렇게 수첩에 적어나갔다. 이곳 빈전(殯殿)에 몸을 누인 전 황제 고종 이태왕은 이제 떠날 시간을 맞이했다. 덕수궁 출입기자인 이상협의 직함은 ‘매일신보’ 편집인 겸 발행인이다. 입사 7년. 기자 드문 조선에서 베테랑으로 통한다. 특히 궁중 사정을 궁궐 밖에서 그만치 아는 이도 드물다. 고종이 승하한 다음 날부터 40일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지면을 덮은 덕수궁의 장례 기사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오늘의 국장예식은 그 절정이다. 날이 날인 만치 네댓 되는 기자 전원이 총출동해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조선어 자매지라 하지만 아직은 경성일보의 편집국장 밑에 예속된 일개 부서 수준의 조직에 불과하다. 안에서 기사를 다듬고 편집하는 민태원(閔泰瑗)까지 오늘은 특별히 나왔다.
우보(牛步)라는 호처럼 동작이 굼뜬 민태원은 경성고보를 졸업하던 1914년에 이상협 소개로 입사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눈에 좀 띈다 싶은 기사나 제목은 주로 그가 다듬고 만들어왔다. 그러다 소설 연재까지 맡게 되었다. 번안(飜案)소설이라는 것인데, 지난달 6개월 연재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애사(哀史)’라 이름 붙은 이 작품의 연재가 시작되던 작년 1918년 7월에 매일신보는 안내 기사를 실었다.
이 소설은 지금부터 34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불란서의 문호 빅토르 위고 선생의 저작으로, 지나간 백 년 동안에 몇 백 명의 소설가가 몇 천 질의 소설을 지었으나 이 소설 위에 올라가는 소설이 다시없다고 하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을 번역한 것이다.(…) 독자 제군이여, 그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고자 하는가. 잠깐 이삼일만 참으라.
직접 번역은 아니고, 일본의 구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가 ‘아, 무정(噫 無情)’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낸 소설을 놓고 재번안한 것이다. 우보가 연재를 시작하기 한 해 전인 1917년의 상반기를 후끈 달구었던 이광수(李光洙)의 연재소설 ‘무정(無情)’만큼은 아니어도 첫 작품치고 인기가 좋았다. 후속 작품이 두 달 뒤에 나갈 예정이다. ‘장한몽(長恨夢)’의 조중환(趙重桓), ‘해왕성(海王星)’의 이상협을 잇는 듯이 보이는 신예 작가의 출현에 장안의 이목이 쏠려 있다. 매일신보에 차례로 입사한 이 세 기자를 일컬어 벌써부터 3대 번안 작가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너 참 불쌍타

1925년 상영된 영화 ‘장한몽’.
‘요미우리(讀賣)신문’에 5년 넘게 절찬리에 연재된 ‘금색야차(金色夜叉)’가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죽음으로 일단락된 것도 1903년이었다. 20여 년 되는 일본 신문소설계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면서 요미우리의 영향력을 급상승시켜놓은 이 장편소설은 10년이 지나 1913년 매일신보에 ‘장한몽’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연재되었다. 아타미(熱海)의 해변에서 사랑의 원한(怨恨)을 주고받던 일본인 남녀 주인공은 대동강변 이수일과 심순애로 탈바꿈했다. 평양의 대동강으로 할까 서울의 한강변으로 할까, 아니면 인천의 만국공원으로 할까 진주의 촉석루로 할까 망설이던 작가 조중환은 1910년부터 매일신보 기자였다. 소설 ‘자유종(自由鐘)’을 발표한 이해조(李海朝)가 그보다 조금 앞서 입사해 있었다. 조중환은 1918년에 매일신보를 퇴사했다. 조중환은 1910년을 전후한 시절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