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킬레우스가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의 목에 창을 겨누고 있다.
신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서막이 펼쳐졌다. 때와 장소는 달라도 문명은 신화에서 출발한다. 신화는 신과 영웅의 이야기다. 범죄는 신화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신과 영웅이 숭배의 대상이 되려면 사악한 존재가 필요하다. 신화가 악의 존재와 이를 처단하는 신과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한 데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신화의 시대, 지배세력은 항상 불안했다. 법(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력은 한계가 있었다. 지배자는 신의 섭리를 내세워 사람을 처벌했다.
“범죄가 많은 것은 신화가 없는 탓”
신화는 정의가 악을 물리치고, 나쁜 짓 하면 반드시 죗값을 치른다는 주제로 일관된다. 하늘의 심판에서 도망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강조하면서 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능을 보여준다.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해 몸조심, 입조심 하게 하는 것이 신화의 사회적 역할이었다. 실존 분석의 거장 롤로 메이(Rollo May)는 “현대사회에 범죄가 많은 것은 위대한 신화가 없는 탓”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창조신화는 태초 이전 암흑과 혼돈 상태에서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아나면서 광명과 질서가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적는다.
미국 애리조나 주 피마 인디언의 전설인 ‘세상의 노래’의 서술은 창세기의 그것과 비슷하다. “태초에는 도처에 흑암, 그러니까 흑암과 물뿐이었더라. 그러다 한 곳에서 흑암이 덩어리지니, 덩어리졌다가 갈라지고, 덩어리졌다가 갈라지고 하니….” 그리스 신화도 세계가 처음 생겨날 때를 설명하면서 다른 신화들과 유사한 광경을 묘사한다. 우주에서 먼저 혼돈의 연못 카오스(Chaos)가 탄생하고 그 다음으로 가이아(Gaea·대지)와 탄탈로스(Tantalos·암흑세계), 에로스(Eros·사랑)가 생겨났다고 그리스 신화는 서술한다. 게르만 신화 역시 태초 이전에는 하늘도 없고 땅도 없으며 바다도 없고 거대한 허무의 심연 긴능가가프(Ginnungagap)만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중국 창조 신화 역시 태초를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혼돈 상태로 묘사한다.
신화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설픈 것을 싫어한다. 신이건 사람이건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분이 확연하다. 선한 것은 칭송해야 하며 악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거의 모든 신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모든 신화에서 잘못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티탄 신족을 굴복시킨 뒤 그들을 암흑세계의 탄탈로스에게 보내 유폐시킨다. 그곳은 제우스에게 반역한 신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제우스는 괴물들로 하여금 이 감옥을 감시하게 했다. 티탄신족 중에서도 괴력의 소유자인 아틀라스(Atlas)에게는 세상의 서쪽 끝에 가서 양팔로 하늘을 들게 하는 벌을 내렸다.

신화의 시대 때 정의는 신들의 전유물이었다. 인간은 신이 만든 정의를 따라야만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법률의 여신 테미스와 결혼해 정의의 여신 디케를 낳는다. 제우스는 디케를 특히 사랑했다. 디케가 인간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면 제우스는 죄지은 인간을 벌했다. 인도의 베다 신화에는 바루나라고 불리는 사법(司法)의 신이 있다. 바루나의 율법은 준엄했다. 신이나 인간 모두 무조건 따라야 했다.
악(惡)이 존재하지 않는 신화는 없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탄(satan)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적으로 대적하다’라는 뜻이다. 사탄은 무너뜨리고 제압해야 하는 악인 것이다. 악은 신에 의한 정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존재한다. 악은 신과 영웅에 의해 처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