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형(왼쪽), 조카(가운데)와 기념사진을 찍은 최재형 선생.
눈 덮인 슬레이트 지붕 아래 러시아식 벽돌집은 소박하고 다부진 모양이 주인을 닮았다. 창밖 희뿌연 마당 너머로 하나둘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 마을 어귀의 기억도 희미한 장승 한 쌍이 언뜻 떠오른다.
추수해야 할 가을에 흉년 기근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넘어온 것이 반세기 전이다. 강을 건너가면 비옥한 땅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경도 경원 땅을 떠나올 때 그는 아홉 살이었다. 그날 동구 밖 언덕 위에 올라 향촌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할아버지, 머슴살이 하던 양반 집 곡식창고를 털고 도주한 아버지는 월북한 후로도 한참 동안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동포의 시체를 넘고 넘어 북으로 동으로 이주를 거듭하며 정착해갔다. 그리고 이곳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 땅에 뼈를 묻었다.
최재형은 여기서 사업가로 성장했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 4남 7녀를 두었다. 그는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최고의 유지로 통한다. 몇 달 뒤면 환갑을 맞는다.
중앙의 현관문과 같은 높이로 좌우에 대칭으로 달린 6개의 큰 창이 바람에 운다. 저 멀리 북쪽 항카 호수의 얼음 냉기를 담고 내려와 넓고 완만한 구릉과 자작나무 숲을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다. 4월에 들어선 지 닷새가 되지만 연해주에 봄기운은 아직 미약하다. 얼음이 떠다니는 북쪽 오호츠크 바다가 뿜어내는 한랭 다습한 기운은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을 통로로 삼아 역류하듯 남하를 거듭해 극동 최대의 항카 호수를 거대한 얼음 항아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4월이 가면 항카 호의 얼음도 풀릴 것이다. 물 항아리 이듯 호수를 떠받들고 선 형상의 이곳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도 그와 더불어 봄이 찾아들 것이다. 남쪽 해안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영하권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러 달 쌓였던 눈도 거기서부터 녹아 올라 여기에 이를 것이다. 1000년 전 발해인들이 여기 살았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눈 쌓인 평원에는 200년 이상 존속했던 발해국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수풀 더미를 헤치다 보면 돌확이 툭툭 튀어나오고 땅을 조금 파면 그때의 지층이 쑥 드러난다. 긴 것 같지만 천 년도 금방이다. 개울 건너듯 두만강 저쪽에서 이쪽으로 철벅철벅 넘어와 산 지가 50년인데 그것 스무 번 하면 1000년이다.
이곳 극동지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은 최재형이 태어난 1860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국경 개념이 모호한 이곳에 한인들은 수시로 출입하며 농사를 지었다. 두만강변 주민들은 아침에 강을 건너 농사일 하다 저녁에 돌아가곤 했다. 아예 봄에 와서 모 심고 가을걷이까지 머물다 돌아가는 계절 이민자도 있었다. 러시아 관할로 병합된 뒤에도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토지를 감당할 노동력이 없어 버려지다시피 한 이 땅에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을 대신해 개간을 맡았고 그 인구는 차츰 늘어났다.
그러던 중 1869년 이주가 폭증하는 사태를 맞았다. 그해 가을 조선 북부 지역에 큰 홍수가 지고 이어 서리가 내리는 기상재해로 수확이 불가능해지자 수천 명이 국경을 넘는 이변이 일어났다. 러시아 정부와 조선 정부 모두 당혹스러운 처지였지만 마땅히 통제할 방안이 없었다. 두만강 접경에서부터 항카 호수 이남까지 해안과 내륙을 따라 이주민이 급증하고 한인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최재형 가족도 그 월경 유민(越境 流民)의 틈에 끼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전쟁

다섯째 딸 올가는 창문 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창가에 선 아버지의 어두운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밤새 뜬눈으로 보냈나 보다. 열다섯 살 올가와 자매들은 밤새 울다 잠이 들었다. 최재형은 일찍 사별한 첫 부인 소생을 포함해 1893년생부터 1914년생까지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을사년에 태어난 최올가 페트로브나 혹은 최송학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1박2일이 지나고 있었다. 1920년 4월 5일의 새벽이었다.
어제 이미 가족들은 가장과 작별을 고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침에 최재형은 아들 파벨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 일본 군대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접근해온다는 급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곳 니콜리스크만이 아니었다. 남쪽 해안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북쪽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의 합수점인 하바로프스크에 이르기까지 연해주 곳곳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일제히 전개되었다고 했다. 세계대전은 끝났는데 시베리아에서는 1년 반 넘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전쟁의 불똥 하나가 유라시아의 극동에서 새로운 전쟁으로 번지고 있었다.
유럽 전쟁의 와중에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중심의 적위파(赤衛派)에 대항해 왕정복고를 꾀하는 구체제 지도그룹 중심의 백위파(白衛派)가 내전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시베리아에 공동 출병해 반혁명파 백군(白軍)을 지원해왔다. 올해 초 마침내 백위파 정권이 붕괴하자 미국을 위시한 국제간섭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홀로 남아 적위파 붉은 군대 소탕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제2의 러일전쟁과도 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일본의 저의가 러시아의 불안정한 정세를 이용한 시베리아 영토 점령에 있는 것 아니냐는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 대규모 공세가 4월 4일을 기해 벌어진 것이다. 내전과 외전이 뒤엉켜 전장과 마을이 구분이 안 되는 이 기괴한 난장판에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은 민간인이었다. 붉은 군대 빨치산과 붉은 깃발의 일본군 그 사이에 조선인 이주민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