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알고 있는 식민사관은 도쿠토미 소호의 책 ‘조선통치 요의’에서 출발한다. 조선 사람들을 뼛속까지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그는 1936년 이광수를 만났을 때 자기의 조선 아들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은 정일성 저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표지.
“도산을 한쪽 팔로 하고 허영숙을 다른 한쪽 팔로 한 춘원은 자기 말대로 이젠 청승스러운 중이 아니요, 바로 ‘임금의 아들’이었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무엇이나 하면 될 수 있는 상태였다. 날개가 돋아 펄펄 날 것만 같았다. 방랑은 끝난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된 것이다.
어른이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일이었다. 논설로써 민족적 경륜을 펼치는 일이었다. 이 집념과 자부심은 하도 강한 것이어서 그가 귀국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민족을 구할 자 없다’는 명제보다도 ‘나만한 민족적 경륜을 가진 자는 없다’는 명제가 춘원에겐 너무도 크고 집요하여 그 강렬도는 글로 쓰고자 하면 논설보다 소설을, 또 소설도 자전적인 것도 아닌 허구적인 것으로 하라는 지배인 허영숙의 엄명을 거역할 정도였다.”(앞의 책, 32쪽)
도쿠토미 소호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이해할 수 있는 참고자료가 있다. 의외로 많은 이가 잘 모르는 인물이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910년 8월 강제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만 남기고 나머지 조선 언론을 통폐합한 장본인이다(정일성,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지식산업사, 2005).
그는 이른바 ‘민족동화정책’을 입안해 실행했는데, 이는 잠시 후 언급할 이광수의 ‘민족개조’와 식민지 ‘민족말살’이라는 사안과 연결돼 있다. 그가 남긴 책이 모두 400권이라는데, 그중 조선을 병합한 뒤 쓴 조선 지배 지침서가 ‘조선통치 요의’다.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는 다르다는 식민사관을 편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치사를 ‘음모사’라고 불렀다(하긴 요즘도 이렇게 인식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음모엔 정쟁이 따르게 마련이고, 조선의 붕당 싸움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악정(惡政)으로 묘사된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째, 조선인에게 일본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자기에게 이익이 따른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셋째, 통치에 만족하여 기꺼이 복종하게 하고 즐겁도록 하는 데 있다.
도쿠토미는 그렇지 않아도 좌절에 빠져 있던(‘술 권하는 사회’를 보라) 조선 지식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광수는 보통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 8권을 선택하면서 필독서로 도쿠토미의 ‘소호 문선’을 포함시켰다. 이광수와 도쿠토미의 만남은 ‘매일신보’ 사장 아베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던 이광수는 연재를 마친 뒤 1917년 8월 부산항에서 도쿠토미를 만났다.
1936년 이광수를 만났을 때 도쿠토미는 이광수에게 자기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조선인 아들. 크게 되어달라고. 이후 이광수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검거됐다가 재판을 받는 도중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했다. 그리고 도쿠토미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