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의 수는 13개다. 그중 9개가 한국에서 출토돼 현재 8개가 한국에 있다. 한국에서 출토된 9개 중 신라 것이 6개, 가야 것이 3개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 꾸미개는 나왔어도 완전한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의 무덤은 ‘처절할 정도’로 도굴을 당했기에, 꾸미개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
이러한 한국이 금관 수를 하나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전 세계에 14개가 있는데, 10개가 한국에서 나와 9개를 보유하게 됐다”라고. 추가된 것이 보통 금관이 아니다. 소장자가 고구려 금관으로 주장하는 데다, 이 금관을 최초로 조사한 상명대 사학과의 박선희 교수도 고구려 금관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최근 경인문화사에서 출간한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란 저서에서 이 금관을 고구려 것이라고 판정했다.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겠지만 이들의 주장과 판단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우리는 최초로 고구려 금관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현대 기술로 정교히 제작된 ‘가짜’라면 정반대의 결과를 맞는다. 제3의 결과도 나올 수 있다. 더 많은 전문가가 고구려가 아닌 다른 왕조의 금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른 왕조란 백제를 지칭하는데, 이러한 결론이 나오면 우리는 최초로 백제 금관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최초로 공개된 ‘고구려 금관’. 유물수집가이자 문화재 전문가인 김모 씨가 공개했다. 평남 강서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일항쟁기 소금판매업을 한 김 씨 조부가 구입해 집안에서 보관해온 것이라고 한다. 신라나 가야 금관과는 세움장식의 모양이 다른 게 눈에 띈다. 오른쪽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불꽃 무늬 모양의 금제(金製) 관(冠) 꾸미개.
이번에 공개된 금관의 세움장식이 불꽃 무늬에 가깝다. 그러니 ‘최초로 나온 완전한 백제 금관이 아니냐’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장자와 최초 판단자가 고구려 금관이라고 주장하니 이를 수용하기로 한다. 사상 최초로 나온 고구려 금관의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금관에 대한 정리를 한다.
통일 이후 금관을 만들지 않아
우리나라 금관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다. 통일신라부터는 금관을 만들지 않았다. 삼국 통일 직전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동맹을 맺은 후 중국식 제도와 복식을 도입하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는 중국식 관복과 관모가 정착됐으니 금관과 금동관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국에는 가야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4국시대로 불러야 하는데 관례에 따라 그냥 삼국시대로 부른다.
신라의 금관 6개는 대일항쟁기 일제가 발굴한 금관총·금령총·서봉총 금관, 광복 후 우리가 발굴한 천마총·황남대총 금관 그리고 ‘교동 금관’이다. 이 가운데 가장 고졸(古拙)한 것이 1960년대 경주 교동에서 도굴돼 밀거래 직전 관계당국에 압수된 ‘교동 금관’이다.

신라의 여섯 금관. 왼쪽부터 다섯 개는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금관이다. 모두 나뭇가지 모양을 단순화한 ‘날 출(出)’자형 세움장식을 우뚝 달고있다. 오른쪽은 나뭇가지 모양을 ‘뫼 산(山)’자 형으로 단순화한 세움장식이 달려 있는 교동 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