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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면 죽는다’는 불안 사회를 ‘잘하면 더 받는다’는 보상 사회로

‘안 하면 죽는다’는 불안 사회를 ‘잘하면 더 받는다’는 보상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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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회는 그동안 잘한 것에 대해 보상하는 포지티브 시스템보다 잘못했을 때 처벌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이 더 많이 작동해왔다.
  • 세계 1등 상품만 살아남고, 천재 1명이 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창조가 필요한 시대에 처벌에 민감한 사회 시스템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필자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유학하던 시절 미국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미국에서 5년 가까이 살았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이후엔 무식하고 용감한(?) 부모의 신념에 따라 영어유치원도 영어학원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 약 6년 전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큰아이는 연구년을 맞은 필자를 따라 다시 미국에서 살게 됐다. 1000명이 넘는 학생 중에 영어를 못하는 학생이라곤 자기 동생밖에 없던 미국 초등학교에서 큰아이는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선생님 수업 내용도 못 알아듣고, 숙제가 뭔지도 알 수 없어 몇 개월간 엄청난 고생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큰아이는 그때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큰아이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다시 미국에서 산 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독서왕’에 뽑혀 ‘1일 교장선생님’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모든 도서에 대한 퀴즈 문제를 만들어 학교 도서관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그 책을 읽은 학생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문제를 맞히면 점수(AR point)를 주는 시스템을 운영했다. 처음에는 유치원생이 읽을 만한 영어책을 읽던 큰아이가 수준을 높여가며 꾸준히 책을 읽어나갔고, 한 권을 다 읽을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점수를 얻은 끝에 자기 학년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획득해 독서왕이 된 것이다.

새로운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도서관에 달려가서 관련 문제를 풀면 책의 난이도와 정답 비율에 따라 점수를 주고, 그 점수에 따라 단계별로 다양한 상품과 권한을 주는 인센티브 시스템은 원래 책을 좋아하던 큰아이에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독서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1일 교장선생님’ 노릇을 하면서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각 교실을 돌면서 인사를 받는 큰아이의 모습은 가문의 영광이자 감동의 도가니였다.

‘안 하면 죽는다’는 불안 사회를 ‘잘하면 더 받는다’는 보상 사회로
보상과 처벌



그랬던 큰아이가 한국에 돌아와서는 책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기 시작했다. 이유는 독서를 권장하는 시스템 차이에 있었다. 미국 초등학교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리스트도 없고 독서 숙제도 없다. 다만 한 권이라도 더 읽으면 그에 대한 인센티브를 확실히 준다. 한국의 독서시스템은 정반대다. 학기 초에 읽어야 할 독서 리스트를 나눠주고, 리스트에 있는 책을 모두 읽거나 더 읽었다고 해도 포상은 없다. 다만 리스트에 오른 책을 모두 읽지 않으면 때때로 평가점수를 깎는 처벌을 한다. 한국과 미국의 독서 권장 시스템의 차이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원하는 행동을 하게 하거나 원하지 않는 행동을 막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보상과 처벌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쾌락주의(hedonism)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 본성을 이용해 원하는 행동에 즐거움을 가져다줄 보상을 주고, 원하지 않는 행동에 대해 고통스러운 처벌을 주는 방법은 동서고금을 초월한 사회적 체계의 근본이다.

심리학의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에 따르면, 긍정적 경험이 뒤따르는 행동은 증가하고 부정적 경험이 뒤따르는 행동은 감소하는 보편적 원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는 이 법칙에 근거한 크고 작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칭찬, 꾸지람, 사랑, 용돈, 교육시스템에서의 평가, 상장, 처벌, 진학, 그리고 직장에서의 봉급, 승진, 해고, 좌천과 사회에서의 법률적 제재, 고립, 인지도, 지지 등이 모두 사람의 행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행동은 결정되고, 변화되며, 교정돼간다.

다만 이런 인간 행동의 통제 원리는 모든 사회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는 시대에 따라 보상을 더 중요시할 수도 있고, 때로는 처벌을 더 중요시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한국 사회는 완전히 처벌에 꽂힌 것처럼 보인다. 교육시스템에서 특히 그렇다.

한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시행하는 상벌점 제도는 학생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장치다. 말 그대로 어떤 행동에 상점을 받고 벌점을 받는지를 규정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용어만 놓고 보면 ‘상’이 먼저 나오고 ‘벌’이 나중에 나오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입학식 때나 매년 초에 학생에게 배부되는 상벌점 제도 가이드라인을 보면, 벌점을 받는 경우는 교복불량, 교복개조, 넥타이·실내화·두발 상태 불량, 실내 소란, 액세서리 착용, 종이비행기 날리기, 지시 불이행, 이성 간 풍기문란, 휴대전화 소지, 카드놀이, 청소년 유해품 소지(만화, 술, 담배 등), 교실 컴퓨터 사용, 지각, 결과, 불량서클, 따돌림, 침 뱉기, 껌 씹기, 기물파손, 수업태도 불량 등 무수히 많다. 반대로 상점을 받는 경우는 물건 찾아주기, 학교 명예 높임, 청소, 왕따 친구 도와주기, 수업 태도 성실, 쓰레기 분리수거, 학습 적극 참여 등 그리 많지 않다. 가짓수가 많고 적은 것뿐 아니라, 상점은 보통 1점에서 시작해 3점을 넘는 것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벌점은 제일 낮은 것이 2점이고 보통 4~5점, 심지어 7~8점이 넘는 것도 있다.

학생들은 많은 선생님이 상점 카드는 아예 들고 다니지도 않고, 벌점 카드만 들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 선생님들은 아마 중고생들이 원래 상점을 받을 일보다 벌점 받을 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국 학생에 비해 한국 학생만 그렇게 유독 벌점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굳이 상벌점 제도가 아니라도, 왜 책을 읽을 때마다 칭찬과 보상을 주지 않고, 읽어야 할 책을 정해주고 안 읽으면 처벌하는 방식을 우리의 학교는 선택했을까. 우리 사회와 우리 교육체계,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이 보상보다는 처벌을 선호한다는 주장을 부인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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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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