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칭찬에 춤추는 고래는 과연 행복할까?

자사고 폐지 논란에서 실종된 것

  • 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taekyun.hur@gmail.com

    입력2015-05-21 0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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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청년들은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해서,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속적 성공 외엔 삶을 평가할 다른 가치를 갖지 못해서 실패자요 피해자다. 
    칭찬에 춤추는 고래는 과연 행복할까?

    지난해 5월 11일 서울 진선여고에서 열린 특목고·자사고 입시설명회

    한국 교육이 정상이 아니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학부모가 거의 없는 것 같다. 현 교육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른 교육 기회를 찾아 대안학교, 홈스쿨링, 조기 유학을 선택하는 적극적 학부모나, 한국 교육에 철저히 순종하며 입시교육에 몰입해 그 나름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또 다른 적극적 학부모, 아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거나 자포자기한 학부모 모두 현재의 교육은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입시에 함몰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언제나 정치 논쟁 및 공약의 주제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의 교육수장을 선출하는 교육감 선거 때는 현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놓고 경쟁한다. 물론 그 어떤 교육감도 공약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고, 실시했더라도 실효성이 없었기에 한국 청소년 대부분은 아직도 지옥 같은 교육체계 안에서 고통받는다. 

    교육 양극화 주범이 자사고?

    최근에는 2014년 교육감 선거에서 선출된 다수 교육감이 취임하자마자 ‘자율형사립고등학교(자사고) 폐지’를 추진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들이 내세운 자사고 폐지 근거는 지금의 자사고가 교육의 다양성과 건학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근 대학입시에서 외고와 자사고가 일반고에 비해 엄청난 성공을 이뤄내는 것이 논란의 근본 원인이라는 게 너무나 명확하다. 상대적으로 비싼 등록금을 받는 외고와 자사고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면서 성적이 우수한 중학교 졸업생이 진학하면서 사회 양극화와 교육 양극화를 심화했으며 일반고를 황폐하게 했다는 것이다. 일반고를 황폐화했다는 논리의 근거는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이 상대적 낙인효과 탓에 좌절하고 그래서 대학 진학에 더욱더 실패한다는 것이다. 

    자사고를 폐지하겠다는 이러한 논리의 대부분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사실이면서 일리가 있다. 자사고가 없었다면 일반고의 수업 분위기가 지금보다는 좋았을 것이고, 우수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에 대한 낙인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자사고에 진학했을 상위권 중학교 졸업생이 일반고로 진학했을 경우를 가정하면 당연히 나타날 결과다. 이들이 일반고에 진학하니 면학 분위기가 조성돼 하위권 중학교 졸업생 중에도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현재 일반고에서 상위권인 학생들은 자사고에 진학했을 학생들과 같은 학교에서 3년 동안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더 낮은 내신점수를 받을 가능성도 높다. 하위권 학생이 교내에서 더 하위권으로 밀리게 되는 셈이다.

    요즘 대학입시에선 수학능력시험을 중요시하는 정시보다 내신을 중요시하는 수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내신에서 불리한 자사고 학생들은 정시로 대학 진학을 하는 경우가 더 많고, 일반고 학생들은 다양한 수시 제도에서 상대적으로 혜택을 본다. 자사고에 진학했을 우수한 학생들이 일반고에 진학했을 때 현재 일반고 학생들이 대학입시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질지 불리해질지는 매우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결론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사고 폐지가 현재 한국 교육이 직면한 교육 양극화와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방법인지에 대해선 좀 더 신중한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일반고 전성시대’의 길

    앞에서 살펴본 자사고 폐지 논란이 적절하지 않은 큰 이유는, 논리의 핵심이 대학입시와 입시 성적만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양극화 주장의 기준도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며, 낙인효과의 근거도 입시성적이고, 면학 분위기도 결국 입시 공부를 얘기한다. 결론적으로 일반고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수를 늘리겠다는 게 자사고 폐지 논란의 핵심인 것이다. 모두가 창의성이니 입시교육 지양이니 교육의 다양성을 외치지만, 결국 모든 정책은 대학 진학과 입시교육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한국 학부모와 학생 대부분이 그것을 원하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교육철학의 부재를 보여주면서 결국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의 본질을 드러낸다.

    문제는 자사고를 폐지하든 안 하든 일반고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학생이 배출되며, 교육의 성공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전국 고교생의 3%에 불과한 자사고 학생보다 97%의 일반고 학생의 학력이 뒤처진다는 사실보다, 97%나 되는 일반고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칠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 대부분이 주장하듯 입시 위주 교육이 인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할 수 없다면 입시 위주로 교육받은 자사고 졸업생은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결코 그러기를 바란다는 얘기가 아니다. 논리적 모순을 얘기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97%의 일반고 학생이 현재 무슨 교육을 받는지, 다시 말해 자사고를 폐지하면 100%에 육박할 일반고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다. 일반고 학생에게 가르칠 (입시교육이 아닌) 무언가와 인성을 갖춘 진정한 인재를 키울 방법을 안다면 자사고를 폐지하건 안 하건 시간이 지나면 절로 일반고 전성시대가 올 것이다.  

    97%에게 필요한 것

    누구나 국어·수학·영어 점수로 당락을 결정하는 대학입시가 문제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맞다. 70%가 넘는 대학 진학률, 자녀의 학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된 한국의 부모를 보면 문제의 근원에 지나친 교육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는 전쟁의 폐허에서 자원도 없이 어찌 보면 인적 자원만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제 발전을 이뤄낸 역사를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지식권력’을 선점하는 사실, 즉 교육받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실을 목격한 학부모의 교육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나무랄 수만도 없다. 문제는 ‘교육학벌’의 힘이 약해지고 있으며 미래에는 지식권력의 내용과 형태가 바뀐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대부분의 국민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고를 들어도 100% 이해하거나 과거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폐기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다. 따라서 교육의 변화는 평범한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육과정의 변화를 통해 국민의 인식을 바꾸고 미래 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배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교육의 사명이고 기능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앞서 설명한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에는 전문가 대부분이 동의한다. 국어·영어·수학 중심의 교육이 문제라는 것은 다 알고 수능의 난이도와 내신의 국영수 비중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그 대신 무엇을 가르칠지 현실적 대안은 나오지 않는다. 현재와 미래에도 국어·영어·수학 같은 전통적 측면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인재는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에 적합한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청소년의 70%는 절대 못되고 아마 5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지적 측면의 자질을 갖지 못한 50% 넘는 청소년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이들에게 국영수를 전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처럼 모두에게 거의 같은 교육을 제공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똑같은 것을 가르쳐 놓고 자질에 따라 점수 차이가 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다. 또한 그런 차이가 있더라도 상처 받지 말라는 것은 변태에 가깝다. 

    국영수 같은 학업 분야에서 하위 50%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잘할 수 있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다른 기회를 주고 있는가. 모든 학생에게 국영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를 준다는 것이 과연 사회정의의 실현일까. 그렇게 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일뿐더러 궁극적으로 다수가 실패할 확률이 높다. 국영수가 아닌, 그들이 진짜 잘할 수 있는 영역이 교육에 포함돼야 한다. 그게 바로 교육의 다양성이다.

    교육의 다양성 문제는 학업 상위권학생이 몰려 있는 3%의 자사고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상대적으로 학업에 자질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은 97%의 일반고 문제다. 사실 전통적 지적 영역에서 우수한 인재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생, 각종 고시 합격생의 삶이 예전처럼 확고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 그리고 창의성이나 인성,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다. 국영수 공부를 쉽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교육체계 안에 국영수를 대신하는 뭔가를 넣어줘야 한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방법

    캔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때 화제가 됐다. 칭찬보다는 처벌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 긍정적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신선한 내용으로 소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의 내용에 반대할 생각도 없고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다고 믿지만, 이 책의 제목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한계를 보여준다.

    이 책은 칭찬 때문에 춤추는 고래는 원래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것, 어떻게든 이 고래를 춤추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원래 춤추고 싶어하는 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 없다. 춤추고 싶지 않거나 춤출 이유가 없는 고래를 춤추게 할 때만 칭찬과 같은 외재적 동기(외부에서 주어진 보상이나 처벌)가 필요하다. 조련사가 원하는 시점, 원하는 장소에서 춤을 춰야 하는 동물원 돌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하지만 넓은 바다에서 혼자 헤엄치는 자유로운 고래가 춤추고 물위로 뛰어오르는 것은 누군가 옆에서 칭찬해서가 아니다. 바다의 고래는 춤추고 싶을 때 춤춘다. 바다의 고래에겐 칭찬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교육은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칭찬과 보상을 늘리려고 한다. 여전히 상점보다는 벌점이 흔하고, 많은 선생님이 공포, 불안, 처벌로 학생을 다루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한다. 문제는 여전히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 한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춤추고 싶은 고래와 춤추기 싫어하는 고래가 있는데,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고 칭찬하거나 채찍질한다. 학생들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서 너무나 다양한데, 교육은 모두 비슷한 것을 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강한 칭찬과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 춤을 좋아하는 고래라도 아무 때나 춤추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체계엔 ‘음악’이 있을까. 국영수 같은 전통적 학업을 좋아하는 학생에겐 필요한 ‘음악’을 틀어준다. 하지만 다른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겐 과연 무엇을 주고 있을까.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춤추고 싶은 고래가 춤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음악’이지만, 춤추는 이유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은 그저 환경적 요인이지 근본적 이유는 아니다. 춤추는 이유는 ‘재미’라는 내재적 동기다. 다른 이유는 없다. 교육체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재미다. 학생 대부분에게 학교 자체는 재미있을 것이다. 교육이나 학업 때문이 아니라 친구 덕분이다. 친구와 수다 떨고, 함께 간식 먹고, 축구하고, 음악 듣고, 게임하는 건 너무나 재미있다. 하지만 공부를 재미있어하는 학생은 소수다. 독려해주면 그나마 공부에 재미를 붙여볼 학생도 절대 다수는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양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는 세계 최하라는 건 여러 조사에서 확인된 바다.

    이들을 춤추게 하려면 학업과는 다른 ‘음악’을 틀어줘서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한국의 교육체계는 재미를 전염병이나 되는 듯 치부하는 것 같다. 똑같은 교육이라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지, 새로운 재미있는 교육을 추가할지를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매일 국영수를 얼마나 쉽게 할 것인지만 고민한다. 국영수만 쉬워지면 가만히 있어도 청소년들이 즐거워서 춤을 출까. 재미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춤추는 고래는 미친 고래다.  

    최근 여러 보도에 따르면 한국 청년들이 과거와 달리 악착같지 않다고 한다. 취업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이 시기에, 좋은 직장에 취업해도 금방 그만두는 청년이 늘고 있다고 한다. 취업할 노력을 하지 않고 의지도 없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증가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있다. 근무 강도가 높은 정규직보다 조건이 나쁘더라도 출퇴근 시간이 정확한 직장을 선호하고,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청년이 늘어간다는 자료가 쏟아진다.

    청년의 포기는 나쁜 걸까? 

    많은 기성세대는 이러한 현상을 걱정한다.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풍요롭게 자랐으며 입시 공부에만 매달린 청년들이 취업난에 직면해 너무 쉽게 포기하고, 무의미하고 소소한 재미만을 찾아 이기적 삶을 산다고 비난한다. 극심한 경제적 불황으로 지난 20년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일본에서 일어난 현상과 비슷하다면서 이런 청년들 때문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진다는 듯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청년들의 포기(실제로 뭘 포기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가 과연 나쁜 것일까.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면 사회가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취업, 돈, 명예 등 세속적 성공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가 발전해 선순환에 들어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

    저성장 경제구조에 들어가 있어 실제로 많은 청년이 세속적 성공에 상대적으로 덜 매달리고 살아가는 선진국은 잘못되고 있는 걸까.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선진국 대부분은 저성장 문제를 일찌감치 경험했다. 이런 나라의 청년들이 개인 시간을 중요시하는 현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세속적 성공을 포기한 삶을 선택한 청년들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은 얼마나 많은 일본 젊은이가 포기하면서 사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포기한 젊은이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속적 성공을 포기한 청년 비율로만 보면 선진국들이 한국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차이는 그들은 아주 체계적으로 세속적 성공을 포기할 기회를 제공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포자기로 살지 않는다. 세속적 성공을 대체할 만한 수많은 다른 가치를 사회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교든 문화든 예술이든 봉사든 어떤 것이든 어려서부터 세속적 성공이 아닌 다른 가치를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이들은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행복한 소시민의 삶을 영위한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한국은 청년 대부분에게 세속적이면서 똑같은 성공의 삶을 권하고 강요한다. 교육의 거의 유일한 가치는 세속적 성공과 그것을 위한 학업이다. 그래서 한국 청년들은 다른 가치를 모른다. 한국 청년들의 포기는 진짜 포기다. 아무런 대안 없이 그냥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여전히 포기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영원히 실패하는 것이라고 주입한다. 마치 그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어려운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실패자면서 피해자다. 취업을 못해서, 성공을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평가할 다른 가치를 갖지 못했기에 실패자요, 피해자다. 

    ‘재미’를 가르치자  

    한국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재미다. 청소년, 젊은이가 재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니 매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쾌락만 추구한다. 대학 축제에 가보면 학생들이 대개 ‘술장사’를 한다. 학과별로 가장 중요한 축제 활동이 주점 운영이다. 자신들의 축제인데도 놀지 않고 돈벌이에 전념한다. 대학 축제뿐 아니라 한국 축제 대부분이 이렇다. 전국에 700개가 넘는 축제가 있는데, 성공적인 것은 손꼽을 정도다. 왜? 주민은 아무도 안 즐기고 돈벌이만 하기 때문이다. 주민은 장사만 하고 관광객이 뭔가를 한다. 축제의 가장 큰 목적 또한 지역경제 활성화다.

    외국의 많은 성공적 축제는 주민들이 실제로 참여하는 형태다. 관광객 유무에 상관없이 매년 또는 매달 대대로 내려온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행사를 치른다. 상인이나 운영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직접 주인공이 되고, 관광객은 그것을 구경하거나 가끔 운이 좋아 그들 사이에 끼어 뭔가를 해보면서 즐거워한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은 재미를 너무나도 모른다.

    칭찬에 춤추는 고래는 과연 행복할까?
    허태균

    1968년 출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교육의 다양성은 자사고 폐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재능과 관심을 가진 청소년에게 각자의 재능과 관심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할 때 이뤄낼 수 있다. 입시 성공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수많은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라는 춤을 추려는 청소년에겐 그에 맞는 ‘음악’을 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칭찬할 일이 생긴다. 하지만 다른 춤을 추려는 청소년에게 칭찬을 통해 억지로 공부 춤을 추게 하지 말자. 그들은 공부를 포기할 권리, 다른 춤을 출 권리를 가졌다. 각자 원하는 춤을 출 때 가장 재미있어할 것이고 사회는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 교육의 의무는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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