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부지런하면 망하고 새로우면 흥한다

귀농의 꿈 이룬 6인의 성공 노하우

  • 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2-11-05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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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만 이루는 사람은 적다. 꽉 막힌 출근길 정체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꾸게 되는 꿈, 귀농. 그러나 낯설고 서툰 농사일은 만만치 않다. 섣불리 귀농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도
    • 많다고 하지 않는가. 귀농에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꿈을 이뤘을까.
    창을 열면 쏟아지는 신선한 아침공기, 내 몸을 움직여 내 손으로 직접 먹을 거리를 만드는 즐거움. 팍팍한 도시생활에 지쳐 한번쯤 ‘시골에서 살면 어떨까’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략 이런 것 아닐까. 그러나 경제학 박사이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농업벤처대학을 설립한 민승규 박사는 귀농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나 감상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많은 귀농자가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도피하는 심정으로 농촌으로 내려가지만 이 경우 열이면 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신 지역 농민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것인가를 충분히 고민해야 실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게 민박사의 충고다. 기존 것과는 다른 새로운 농업환경을 만들겠다는 비전이나 각오가 없다면 일찌감치 귀농의 꿈을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 귀농의 꿈을 이룬 사람에게 그의 충고는 얼마나 유효할까. 익숙한 것들을 떠나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성공 귀농을 위한 여섯 개의 노하우’.

    노하우 ① 아이템은 가까운 곳에 있다.도시인들의 귀향본능 주목한 ‘사이버팜’의 권영미씨

    부지런하면 망하고 새로우면 흥한다

    농장주들과 함께한 ‘사이버팜’의 권영미씨(오른쪽 끝).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아이템’. 어떤 작물을 어떤 방식으로 재배해 어떻게 판매할 것이냐는 물음은 귀농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뛰어들어봐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그런 의미에서 15년간 근무하던 안정된 자리(농촌진흥청 연구원)를 버리고 ‘사이버 팜’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 권영미(40)씨의 경험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연수과에서 농민교육을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직장인보다 농민들이 돈을 많이 버는구나 싶어 그때부터 농업이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듯도 하고, 뭔가 새롭게 해보고 싶어서 농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농촌진흥청 작물보호과에서 벼와 특용작물 관련 병해충 방제 연구에 매달린 경험은 있지만 직접 농사를 지은 적은 없던 터라 선뜻 농사일에 뛰어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주말농장을 통한 간접체험이었다.

    “경제연구회 모임 회원들이 단체로 농지를 빌려 일년간 주말농장 체험을 했는데 아무래도 바쁘게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까 문제가 많았습니다. 처음 몇 번은 주말마다 농장에 내려가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한 달에 한 번 가는 식으로 게을러졌어요. 나중엔 밭에 풀 뽑으러 가자고 해도 다들 바쁘다고 피해요. 그러다 농장 관리하는 할머니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밭이 엉망이라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하다고요. 별 수 없이 나중에 인부를 사서 대신 풀을 뽑게 했습니다.”

    그 경험이 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팜 아이디어를 낳았다.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농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많은데 기존의 주말농장은 바쁜 사람들에게 부담이 됩니다. 도시와 농촌 생활을 접목시키는 좀더 편리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사이버팜을 열게 됐죠.”

    사이버팜은 쌀을 비롯한 과일, 채소 등 작물을 인터넷상으로 도시 사람들에게 분양하고 생육은 수확 때까지 각각의 농장주가 대신 관리해준다. 농장지기 권씨와 함께 사이버팜을 운영하는 농장주는 경기도 화성에 터를 잡은 쌀농장 홍승욱씨, 포도농장 이진규씨, 배농장 박주순씨, 고추농장 박종하씨. 환경농법에 의해 재배되는 각각의 농산물은 수확량 또는 나무 1주를 기준으로 분양하는데 포도나무인 경우 1주 분양가격이 6만원이다.

    인터넷으로 분양신청을 받고 이메일선물권을 판매하는 사이버팜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지난 3월. 농장주는 각 회원에게 분양된 작물의 생육상황을 일주일에 한 차례씩 전자우편으로 보내준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나무에 꽃이 핀 것, 열매가 열린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분이 많습니다. 생일선물로 작물을 분양받은 어떤 이는 농장에 와서 큰 감동을 받더군요.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권씨는 사이버팜을 열자마자 포도나무 한 그루를 분양받아 대학원 시절 은사에게 선물했다. ‘너 사업 잘하겠구나’하며 권씨를 칭찬하던 은사는 포도 수확철에 다른 동료와 함께 농장에 내려와 직접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처음 농장 문을 열고 단 한 명의 회원이라도 생겼으면 하고 바랐는데 어느새 회원 600명을 훌쩍 넘겼다.

    “사이버팜에 들인 초기비용은 각각의 농장주와 제가 함께 출자한 1000만원입니다. 아직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농민과 더불어 시작한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으니까 좋고, 한편으로 이런 게 애국이 아닌가 합니다. 농민들의 가장 큰 취약점은 마케팅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농업과 관련된 일을 오래 하고 애정을 가진 저 같은 사람이 농사에 많이 뛰어들수록 하루라도 더 빨리 더불어 잘 사는 농촌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수원에 사는 권씨는 수시로 화성 농장을 찾아 농장주들과 머리를 맞댄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해 신선한 상태로 회원에게 배달할 수 있을까. 어떤 포장법을 써야 물건을 받은 회원들이 감동할까. 가정으로 배달되는 수확물 속에 농장주의 편지를 넣어 보내는 것도 권씨와 농장주의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다. 앞으로 대형 쇼핑몰과 연계해 농작물 선물권을 판매할 예정인 권씨는 농가 매출이 늘고 농장주들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노하우 ② 시작할 때는 배수진의 각오로상황버섯 재배하는 ‘선지원’의 김태구씨

    부지런하면 망하고 새로우면 흥한다

    ‘선지원’의 김태구씨는 ”미쳐야 성공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렵사리 좋은 아이템을 잡았다 해도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특히 수익이 안 나는 초반에는 ‘안되면 다시 취직하면 되겠지’ 식의 소극적인 자세가 가장 큰 장애물.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배수의 진을 치는 독한 각오가 필요하다. 1996년 상황버섯 농사에 뛰어든 김태구(42)씨가 그런 경우다.

    “어머니가 위암에 걸렸는데 돈이 있어도 상황버섯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상황버섯을 재배하는 기술이 없어 자연산만 거래됐는데 일년 생산량이 고작해야 1㎏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눈을 씻고 봐도 상황버섯을 구경할 수 없었고, 어머니가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상황버섯에 한이 맺힌 김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0년 동안의 뱃사람 생활을 청산했다. 일본 미쓰비시사 원유선에서 갑판사로 일하던 김씨에게 육지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쉽지 않은 모험이었다. 오랜 바다생활에 진저리를 치고 육지로 올라오는 선원이 많지만 이들은 대부분 육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배로 돌아가곤 한다는 것.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바다가 있으니 독한 마음을 품기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래서 땅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 김씨는 배를 떠나올 때 아예 선원증을 찢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다시 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평생 모은 돈과 부모님 재산까지 모두 1억5000만원을 초기자금으로 쏟아부은 김씨는 ‘이것 망하면 나는 죽는다’는 심정으로 하우스 1000평을 마련하고 버섯재배를 시작했다.

    “처음 일년은 학계나 버섯전문가를 쫓아다니며 재배기술을 귀동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어느 버섯농장 앞에 방을 얻고 농장으로 출퇴근하며 재배기술을 터득하려고 했지요. 그것도 기술인지라 처음엔 수도 없이 쫓겨났습니다.”

    어깨너머로 어렵사리 상황버섯 재배기술을 터득한 뒤 모자라는 지식은 당시 농촌진흥청에 근무하던 장현유 박사에게 자문했다. 자신이 붙은 김씨는 거처를 아예 하우스로 옮기고 그곳에서 일 년 동안 상황버섯과 씨름했다. 그 결과 거꾸로 자라는 상황버섯 접종기술과 재배방법을 개발했다.

    “흙에도 세균 등 각종 이물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버섯의 토양이 되는 참나무 둥치를 공중에 띄울 수 있게 하우스 시설을 새로 했습니다. 신기술로 재배하니 땅에 묻힌 나무에서 재배할 때보다 생장 속도도 빨라졌을 뿐더러 생산량도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김씨의 농장은 상수도 보호구역인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에 자리하고 있다. 버섯농사에 필수인 물 좋고 공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상황버섯의 연간 생산량은 3000~3500㎏. 최상품 1㎏이 70만원이니 엄청난 수익이다. 여기에 공중 재배가 가능하도록 상황버섯을 접종한 참나무 목을 따로 판매하고 있다. 상황버섯은 접종 기술이 특히 까다로워 실패할 확률이 높다.

    어렵게 재배에 성공했지만 판로가 막막했다. 상황버섯은 다른 버섯과 달리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분류되어 광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중국산 상황버섯이 싼값에 거래되고 있던 터라 국내산 상황버섯이라 해도 진짜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단을 만들어 경남 일대 병원마다 뛰어다녔습니다. 암 환자나 가족을 만나면 입이 부르트도록 설명했지요.”

    반신반의하며 농장을 다녀간 사람들 입소문으로 조금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전국에 1000여 명의 회원이 생겼다. 직접 재배한 상황버섯 500g을 처음으로 150만원을 받고 판매했을 때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황홀했다는 김씨.

    그의 농장 선지원은 현재 울산 시내에 직판장을 두고 있으며 영업본부는 동래에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나 전화로 전국 어디나 배달이 가능하게 한 것도 판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좋은 물건이니까 언젠가는 팔린다는 일념으로 버텼는데 초기 투자금은 벌써 회수했습니다. 앞으로 상황버섯을 접종한 참나무 목을 농가에 널리 보급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할 계획입니다. 일반인에게 목을 분양해 가격 걱정 안하고 계속 버섯을 복용할 수 있게 말입니다. 아직까지 상황버섯은 다른 버섯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거든요. 생산량이 많아져 단가가 내려가야 필요한 사람 누구나 쉽게 사먹지 않겠습니까.”

    상황버섯 재배로 성공한 김씨는 어머니 때문에 맺힌 한을 불우노인을 통해 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이들에게 상황버섯을 무료로 전달하는 것.

    “상황버섯은 항암효능도 뛰어나지만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데 더없이 좋은 식품입니다. 면역력이 떨어진 노인들에겐 보약 같은 것입니다.”

    하우스내 환기와 차양막 시설, 물을 주는 시스템 일체가 자동화되어 있어 수확기가 아니면 아침나절 한번 정도만 하우스 안을 살피면 된다. 자동화시스템이 고장날 경우 농장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집 전화와 아내, 그의 휴대전화로 긴급연락이 되도록 감시시스템까지 도입해 농사일에 품들 일이 별로 없다는 게 김씨의 말이다.

    처음 우려와 달리 육지에 튼튼히 뿌리내린 그는 ‘미치면 성공한다’는 말을 믿는다.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그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돈도 배 탈 때보다 많이 벌고 고생도 덜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귀농 아닐까요.”

    노하우 ③ ‘도 닦는 심정’으로 연구 또 연구표고버섯 키우는 ‘김영표 버섯농장’의 김영표씨

    부지런하면 망하고 새로우면 흥한다

    그동안 키운 버섯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김영표씨 가족

    남과 다른 방식으로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을 귀농의 목표로 삼았다면, 단순히 땀만 많이 흘리는 ‘순진한 근면’으로는 이를 이루기 어렵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농업은 기본적으로 다른 어떤 일 못지않게 과학과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는 것이 성공한 귀농인들의 한결같은 지적. 다시 고3 수험생이 된 기분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분야를 공부해야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충고다.

    일단 결정하면 물불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내달려온 ‘돈키호테’ 김영표(43)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올해로 농사 경력 8년째인 그는 현재 3000평 농장에서 연간 30t(㎏당 2만원)의 표고버섯을 생산 판매하는, 지역에서는 꽤 널리 이름이 알려진 성공한 농부다.

    “버섯농사에 뛰어들어 처음 몇 년은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지난 7월 친환경농산물인증제도에서 4단계 등급(저농약-무농약-전환기유기-유기)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전환기유기농산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전 대구에서 출판사와 서점을 14년간 경영해오던 김씨가 사업을 접고 버섯재배에 뛰어든 것은 위암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장남에 장손인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수술 후 꼬박 2년 동안 병 수발에 매달렸다.

    “암에 좋다는 표고버섯과 상황버섯을 구해서 드시게 했는데 통증이 줄고 병세가 호전되시더군요. 그때 처음 신비한 버섯의 힘을 알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해졌다. ‘농약을 안 치는 농산물이 없다는데 암 환자가 계속해서 버섯을 복용해도 괜찮을까. 내가 직접 농사를 짓는다면 무공해 버섯을 생산할 것이고, 아버지가 좀더 오래 사시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김씨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경북 경산시 하양읍 환상리에 있는 땅 하나만 믿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다.

    “농사든 버섯재배든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우선 버섯재배와 관련한 책을 사서 공부했습니다. 농업기술센터나 농촌진흥청에서 버섯재배전문교육이 있다면 빠지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요즘이야 농촌 비닐하우스만 전문으로 지어주는 기술자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김씨가 손수 버섯재배하우스를 지어야 했다. 적잖은 시간을 투자한 연구 끝에 하우스 한 동을 짓고 나자 다음은 물이 문제였다.

    “몸 70%가 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물이 중요하듯 버섯 역시 물로 자라는데 기왕이면 좋은 물을 쓰기 위해 농장 곳곳을 탐사했습니다. 마침내 지하 150m 깊이에서 질 좋은 암반수를 찾았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아버지를 보살피랴 생전 처음 해보는 버섯재배에 골몰하랴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힘든 나날을 보내는 김씨의 정성을 뒤로하고 끝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김씨는 오기가 생겼다.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내 힘으로 무공해 버섯을 생산해 사람들 건강을 돕고 암 환자가 효과를 볼 수 있다면 농사도 보람된 일 아닌가.’

    이미 사업을 정리한 돈을 초기농사에 쏟아 부었던 그는 본격적으로 버섯재배에 뛰어들기 위해 살던 아파트를 처분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졸지에 전셋집으로 옮겨 앉았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시골 농장에 틀어박힌 채 ‘도 닦는 심정’으로 2년을 보낸 김씨. 어느날 농장 일을 마치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화면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처음엔 텔레비전이 고장난 줄 알았는데 눈에 이상이 생긴 걸 깨닫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혀를 찼다. “당신 이런 식으로 계속 머리 쓰고 몸을 혹사하면 조만간 장님 될 거다. 앞으로 최소 두 달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라.” 극심한 스트레스와 난생 처음 경험하는 힘에 부친 노동으로 양쪽 망막에 물이 차 하마터면 실명할 뻔했던 것. 어쩌다 가족을 보러 집에 들르는 김씨에게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막내아들은 ‘아빠, 우리집에 놀러오세요’라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버섯재배 비닐하우스는 어느새 25동으로 늘었다. 뿐만 아니라 재배는 물론이고 가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을 거친 버섯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된다. 신선하고 품질 좋은 버섯을 전국에 공급하기 그의 농장은 공장을 방불케 한다. 열풍건조기와 분쇄기, 살균기, 슬라이스기, 포장기 등 여느 농가에서 볼 수 없는 기계들이 널려 있다.

    “가공과정에 필요한 기계가 시중에 없어 직접 제작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계 개발에만 일년이 소요되기도 했습니다.”

    무공해 재배에 특수 건조공법으로 방부제 없이 포장된 김씨의 표고버섯은 맛과 향이 뛰어나다. 최근엔 홈페이지를 통한 거래로 전국에서 구매요청이 들어오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

    “표고버섯을 이용한 기능성건강식품의 가공과 제품개발을 목표로 최근 대구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입주를 허가받았습니다. 앞으로 초콜릿과 사탕을 밀어낼 만큼 젊은 층 입맛에 맞는 버섯 과자류를 개발하고 건강캡슐, 다이어트영양제 등 기능성건강식품을 다양하게 개발 생산할 계획입니다.”

    남들은 성공한 농사꾼으로 바라보지만 그는 히딩크 감독의 말처럼 아직도 배가 고프다. 해가 지면 농장에 있는 세 평 남짓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상표디자인과 포장방법 연구에 골몰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다.

    노하우 ④ 농업에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도라지 재배 기업화한 ‘장생 도라지’의 이영춘씨.

    부지런하면 망하고 새로우면 흥한다

    장생도라지’ 이영춘씨는 농업도 비즈니스라고 말한다.

    농업이 기업화할수록 농사에도 인사, 재무, 마케팅 같은 경영기법이 필요하다. 똑같은 노력과 자본을 투자하고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경영감각’이 절대적인 것. 기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해본 귀농인의 경우 그동안 몸으로 익힌 직장에서의 경험과 관리방식을 쓸모있게 활용한다면, 주먹구구로 농사를 짓는 이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다.

    고졸 출신으로 대기업 계열사에서 인사과 과장으로 재직중이던 이영춘(45)씨가 돌연 사표를 내고 도라지 농사에 뛰어든 것은 도라지 재배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 때문이다.

    “21년근 도라지를 생산해 시장에 내다 팔던 아버지를 대학교수며 연구원들이 꼬드겼습니다. 대학에서 다년근 도라지 약리성분 분석 결과가 발표되고 다년근 도라지 재배법이 세계 최초로 특허를 취득하자 아버지가 가공공장을 짓겠다며 저보고 내려오라는 겁니다. 수십 년간 직장생활을 한 나도 기업을 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말렸죠. 더군다나 21년근 도라지만 팔아도 한해 수억원 수입은 됐으니까요.”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씨 부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2년여에 걸쳐 공장을 지으면서 들인 돈은 정부지원금과 개인 빚을 합쳐 20여 억원, 이듬해는 28억원으로 늘어났다.

    “아버지가 힘드신 건 알지만 어렵게 쌓아올린 직장생활을 하루아침에 팽개치고 시골로 내려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오래 갈등한 끝에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간 자식 대대로 빚에 치여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다같이 죽는 길이라며 한사코 시골행을 반대했고 주변에서도 동반자살이라며 극구 말렸다. 결국 회사생활을 접고 경남 진주시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씨는 금곡면 정자리에 위치한 (주)장생도라지 가공공장 경영에 뛰어들었다.

    “내려와서 공장을 둘러보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은 모두 아버지 앞으로 되어 있었고, 짓다만 공장은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는 등 부실투성이였습니다. 공장 기계도 엉망이었어요. 채 완공되기도 전에 돈을 다 건네준 건설업체는 부도상태여서 되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영농조합법인으로 출발한 당시 공장에는 직원 9명이 근무했지만 도시 샐러리맨과 달리 출퇴근 개념이 없었고 회사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안된 상태였다. 이씨는 우선 아버지가 벌여놓은 사업부터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했다. 21년근 도라지 위탁재배농가를 지정하고 농가를 관리 감독하며 농사에 관여하는 영농조합법인은 아버지에게 일임했다. 대신 이씨는 (주)장생도라지를 맡아 경영과 영업을 전담했다.

    “회사와 법인 체계가 잡힐 때까지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분이라 저하고 생각이 딴판이었거든요. 일가친척이 500명쯤 되는데 제가 온 뒤로 누구 하나 그냥 취직시키지 않았어요. 입사하고 싶으면 무조건 시험 통과하라고 했죠. 아버지는 직원들을 너무 정 없이 대하면 못쓴다, 오순도순 함께 살아야지 하시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인정상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많이 나무라셨죠.”

    3~4년 동안 엉망으로 흐트러진 사업을 정비하는 일에 매달린 끝에 지금의 (주)장생도라지는 도라지 위탁농가 250여 군데를 거느리고 16만평에 이르는 땅에서 도라지를 생산하고 있다. 21년근 도라지를 키우려면 3년마다 재배지를 옮겨 주고, 한번 도라지를 재배한 땅은 지력 회복을 위해 10년의 시차를 둬야 하기 때문에 연간 수확은 약 4만평에서 이루어진다. 위탁농가에 지불되는 용역비만 한해 16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원래 오래 묵은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21년근 도라지는 일반 도라지에 비해 그 효능이 무려 30~40배에 달합니다. 해소 천식과 진정 진통에 효능이 있고 면역력 증강과 항당뇨 효과가 뛰어난 것은 이미 연구결과로 드러났습니다.”

    1999년부터 일본 홍콩 하와이 현지 총판과 일본지사를 차례로 설립하고 다년근 도라지 수출에 나선 (주)장생도라지에서 생산되는 가공식품은 액상, 분말, 농축, 환 가공품에서 한방차, 생식식품, 캔디, 한방미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나름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그는 은행과 관공서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이미 경상남도에서 수십억원을 빚진 부실 기업으로 소문이 파다한 곳에 선뜻 돈을 대줄 은행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세월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할 때 중소기업 사장이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미친 놈이라고 욕했는데 이젠 그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힘에 부칠 땐 바닷가에 가서 실컷 울다 오기도 했습니다.”

    수출유망중소기업, 유망선진기술기업, 우수벤처기업, 한국전통식품 지정, INNO-BIZ기업인증 등 그동안 (주)장생도라지가 일군 성과는 눈부시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매출액의 20%인 5억~6억원을 연구에 투자하고, 월말이면 위탁농가에 지불할 용역비를 자체 조달할 정도로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씨는 “전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차별화된 농업을 하지 못하면 고사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노하우 ⑤ 어떻게 팔 것인가 고민하라직판장 전략으로 판로 개척한 ‘나포리농원’의 길덕환씨

    갖은 노력 끝에 좋은 상품을 만들었다 해도 제 값을 받지 못한다면 모두 헛고생일 뿐. 복잡한 유통경로와 중간 상인들을 뚫고 판로를 개척해내는 것은 생산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다. 어떤 의미에서는 판매에 들이는 노력이 생산에 들이는 노력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쌈밥집을 운영하던 길덕환(42)씨는 맨손으로 3000평의 참다래(키위) 농장을 일군 경력 6년의 전문 농사꾼이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농산물로 인증받은 참다래 농장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굼벵이와 지렁이, 장수하늘소가 마치 제 집처럼 지천으로 모여 살고 있다.

    “쌈밥집은 신선하고 오염 안된 채소 공급이 성공의 관건인데 채소구매가 쉽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변동하는 채소 가격도 문제였어요.”

    식당 옆에 미니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직접 특수채소 재배에 나선 길씨. 그러나 전문기술이 전혀 없는 완전 초보였으니 실패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첫 실패를 계기로 농민후계자 교육과 시설원예교육을 받고 본격 특수채소 재배에 나선 길씨는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식당사업도 번창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농사에 재미가 붙어 버린 길씨는 마침 식당 자리가 공단지역으로 편입되자 전업을 결심했다. 농사에 적당한 땅을 살피기 위해 남쪽 지방 답사에 나선 그의 발길을 잡은 곳이 바로 지금 나포리농원이 들어선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미륵산 중턱이다.

    농사지을 땅이 결정되자 바로 통영 시내에 들어가 살집을 구했고 땅과 집의 중도금을 치르며 계약을 했다. 계약금 대신 중도금을 덜컥 건네준 그의 속내는 다름아닌 아내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끌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자는 제안에 선뜻 따라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가 살기 좋은 곳이 있다는데 구경이나 가보자”며 아내를 꼬드겼다. 산속 농장을 보여줘도 아내 임영순(40)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궁리 끝에 길씨는 아내에게 한 달간 돈 벌러 간다고 둘러대고 친구 두 명과 함께 통영에 내려와 집을 수리하고 산을 개간했다.

    “정말 그대로 맞아죽는 줄 알았습니다. 길길이 뛰는 아내와 부부싸움 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사과 농사를 지으시던 장모님이 귀농은 아무나 하고 농민후계자라고 아무나 농사짓느냐며 저보고 미쳤다더군요”.

    생전 처음 보는 연탄 아궁이에 불을 갈며 눈물을 짜내는 아내를 애써 외면한 채 길씨는 자신의 꿈을 믿고 묵묵히 버텼다.

    “1990년대 중반까지 키위는 술집 안주로나 나갈 정도로 비싼 과일이었습니다. 또 수입과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알고 경남 일대 키위 농장주가 모여 참다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품종개량을 통해 국내 환경에 잘 적응하게 고안된 신품종이죠.”

    막상 참다래를 생산했지만 중간 상인들은 네 배에 이르는 폭리를 취하는 반면 농민은 원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을 받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다름아닌 판로였다.

    처음 백화점을 돌며 식품 담당자들을 만났을 때는 납품은커녕 사람 취급도 못받고 쫓겨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전자상거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 친구들은 누가 농산물을 인터넷으로 사 먹겠느냐고 황당해 했다.

    “인터넷으로 첫 주문을 받고 참다래를 정성스레 포장한 다음 그간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적은 편지를 넣었습니다. 고객이 감동했다며 농장 구경을 오고 싶다고 하더군요. 정성을 들이면 안될 게 없다는 걸 이때 깨달았습니다.”

    주말이면 도시 사람들로 붐비는 충무 마리나리조트는 아내와 아이들이 틈나는 대로 참다래 홍보용 전단을 뿌리러 찾는 곳이다. ‘뚝심’ 하나로 밀어붙인 결과 현재 나포리농원 회원이 수만 명에 달하고 봄철 수정 시기와 가을 수확기 때면 회원들이 농장으로 모여들어 농촌체험을 즐긴다. 길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 사람을 상대로 투자금을 모으겠다고 나섰다.

    “전자상거래를 통해 택배로 과일을 배달하다 보니 지연이나 사고로 물건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도 욕은 생산자만 먹죠. 안되겠다 싶어 전국 시도마다 직판장 한 곳씩을 열기로 마음먹었는데 농민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주위에선 “난다긴다하는 벤처기업도 투자받기 힘든 판에 단돈 100만원만 모아도 기적”이라며 기막혀 했다. 하지만 길씨가 끌어 모은 투자금액은 무려 5억원. 이때 모은 투자금으로 지난 9월 경기도 일산에 첫 직판장 ‘농부가’를 연 길씨는 신선한 무공해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에게 공급한다는 목표로 전국 500여 농가와 손을 잡았다. 꾸준히 직판장을 늘려갈 꿈에 부푼 길씨는 새벽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농장을 찾는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할 뿐만 아니라 내 손으로 농사지어 생활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당당합니다.”

    귀농생활 4년 만인 지난해 길씨가 거둔 수확은 6000만원이다.

    노하우 ⑥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노려라매실로 다양한 수익모델 창출한 ‘송광설중매’의 서명선씨

    흔히들 단순히 작물을 키워 판매하는 것이 농사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농업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수익모델이 존재하는 것. 남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농사를 바라보면 뜻밖의 분야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대구에서 모 일간지 국장을 지내던 서명선(46)씨는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농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자연 과목을 좋아했어요. 농사에 ‘끼’가 많았던 셈이지요. 나이 들면 농촌에 가서 농사짓고 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이 다 어렵던 형편이라 엄두가 안 났습니다. 언론사에 몸담고 있을 때 시험 삼아 감 농사를 지어봤습니다만 결과는 출하 시 종이박스 값도 안 나올 만큼 실패였어요. 이때 농사가 정말 어렵구나 절감했습니다.”

    서씨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국내 농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나라 농업이 이대로 갈 수 있을까, 비전이 없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농업이 확실한 미래산업이라는 것. 귀농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 동안의 고민과 갈등을 접고 마침내 재작년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결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방지 기자가 회사에서 밀려나면 달리 할 일이 없어 고등 룸펜이 되기 십상입니다. 남은 인생을 퇴물로 살 바에야 스스로 그만두고 스페셜리스트가 되자고 작심했습니다.”

    수많은 작목 중에 매실 농사를 짓게 된 것은 영남대에 재직중이던 두 교수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6년생 매화나무 분재를 그에게 주었고, 매실 연구에 조예가 깊은 다른 교수는 ‘젊은이가 매실에 대해 많이 안다’며 제자가 되라고 했다. 그 전에 서씨는 틈나는 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매실 공부를 하던 터였다.

    “매화나무 분재를 보며 토종매실의 우수성을 깨달았고, 후계자가 되라던 교수님은 자신의 농장 7000평을 매화농장으로 선뜻 내주었습니다.”

    7000평을 밑천 삼아 현재 총 3만평 땅에 친환경농법으로 매실농사를 짓는 서씨는 1차 산업인 매실 생산에서 2차 산업인 가공식품, 나아가 그린투어리즘 개념을 도입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확산시킬 구상을 세웠다. 대구시 동구 덕곡동에 위치한 제1농장에서 해마다 ‘매화맞이 작은음악회’를 여는 것도 그린투어리즘 확산 계획의 일환이다.

    “농업도 1, 2, 3차 산업을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가 커집니다. 예를 들어 일본 매실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오야마마치사와 기술제휴를 해 매실과 관련한 정보를 나누기로 하고 수출계약도 맺었습니다. 우리 농장에서 생산한 매실로 담근 홍장아찌와 고추장은 일본뿐만 아니라 뉴욕의 대형 슈퍼체인에 납품하기로 최근 결정났습니다.”

    서씨 농장의 매실은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재배법으로 생산되는 토종매실이다. 특수 대목을 원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토종매실의 눈접을 붙여 기른다.

    “원래 매화나무는 높게 자랍니다. 그래서 열매를 딸 때 장대 등을 이용하지요. 그 과정에서 열매에 상처가 많이 나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반면 우리가 개발한 매화나무는 사람 키보다 조금 높아 열매를 손으로 딸 수 있습니다.”

    일반 매화나무는 4~5년 동안 자라야 꽃을 피우지만 서씨 농장에서 자라는 매화나무는 일년 만에 개화하기 때문에 열매 수확이 그만큼 빠르다. 10년생 매화나무 한 그루 당 매실 수확량이 통상 20~30㎏인데 비해 서씨는 80~90㎏을 목표로 잡고 있다. 실제로 한 그루에서 최대 120㎏을 수확한 적도 있다. 열매를 빨리 맺고 수확량을 늘릴 수 있어 다량생산이 가능한 매화나무는 그만큼 농가소득을 올려준다. 더구나 친환경농법으로 생산된 매실은 일반 매실에 비해 시중 가격이 2.5배 높다.

    매실농사에 뛰어든 서씨의 꿈은 농장주에 머물지 않는다.

    “최근 제3농장이 위치한 칠곡군 평복리 인근에 구상 시인의 문학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농장도 스폰서로 참여했는데 조만간 문학관 마당에 매화나무를 심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농장 일대 쌀농가를 중심으로 올겨울부터 친환경 농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마을 연못은 유료 낚시터로 단장해 농민 수입원으로 할 예정입니다.”

    친환경 농가 결성에 적극적인 그의 궁극 목표는 평복리 일대를 매화와 문학의 마을로 조성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칠곡군 죽전리 일대 낙동강을 낀 제2농장은 유기농산물 식당, 농산물특산코너와 더불어 농촌체험 마을로 꾸밀 예정이다. 지금은 농장과 근처 하상공원을 포함해 일대 15만평을 친환경매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칠곡군과 협의중이다.

    “계획을 크게, 그리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아야 농업도 국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지성과 감성의 세기라고 하잖아요. 이를 접목시켜야 미래 농업도 발전이 가능합니다.”

    오래 전부터 품었던 귀농의 꿈은 이뤘지만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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