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1-09-20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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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신문기자 생활 10년째인 한림은 1929년 12월30일, 그해의 마지막 신문 기사를 마감하고 1930년대 첫날 신문의 기사취재를 위해 청계천변을 걸어간다. 1905년 을사조약의 현장을 증언해줄 노(老)정객을 찾아가는 길이다. 광교를 지나 장교동까지 1㎞를 걸어가면서 한림은 10년 세월에 녹아든 자신의 지난날과 서울의 그간 사정을 떠올린다. 15분간의 걸음 내내 150년간의 흔적들이 냇물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사대문 안 서울 도성의 한가운데를 마치 태극문양의 중심선처럼 가로지르는 개천은 시절의 영욕을 상기시키며 흘러간다. 망국의 식민지와 근대의 신세계가 뒤섞인 채로 두 번째 10년을 보냈다. 이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제2장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을사조약 체결 뒤 찍은 한일 수뇌부의 기념사진.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한림은 행랑채 지붕보다 높은 솟을대문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대문은 가마가 드나들 정도로 높고 넓다. 종2품(從二品) 이상의 벼슬아치만이 탈 수 있는 초헌(?軒)이 25년 전만 해도 매일처럼 이 문간을 조석으로 출입했을 터이다. 초헌은 한 자 지름의 외바퀴 위로 명치께 높이의 줏대가 달렸고 그 위에 의자가 놓인 수레 가마다. 앞뒤에서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끌고 미는, 일명 목마(木馬)라 불리는 탈것이다.

    이 땅에서 바퀴는 기피되었다. 수레를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었으나 잘 실행되지 않았다. 조선의 길은 수레가 구르기에는 부적합한 상태였다. 길은 좁고 울퉁불퉁했으며 끊어진 곳이 많았다. 편리한 수레를 사용하려면 길을 닦는 불편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퀴는 편리한 수단이기보다 성가신 물건이 되고 만다. 한번 크게 길을 혁신해 영구히 바퀴를 굴릴 것이냐, 큰 노고를 피하고 작은 불편을 감수하며 옛날대로 바퀴 없이 살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은 항상 미뤄져왔다.

    자발적으로 돌리지 못한 바퀴는 결국 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 타율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사람이 끄는 손수레가 3만대가 넘는다. 바퀴 달린 것들이 어디에나 즐비하다. 인력거(人力車)는 장안에 그득하고 자전거(自轉車)가 그 뒤를 쫓고 있다. 바퀴를 굴리는 원동력은 소나 말의 축력(畜力)과 사람의 인력(人力)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름도 생소한 전기(電氣)가 바퀴를 굴리는 전차(電車), 증기(蒸氣)가 바퀴를 굴리는 기차(汽車)가 출현했다. 선로도 궤도도 없이 아무데로나 제 스스로 막가는 자동차(自動車)도 이젠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늘고 있다. 모두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오는 신문물이다. 그 경유지는 일본이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 우레 같고



    1929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조선 전역에서 하루 평균 6만명이 기차를 탄다. 전국에 12개 노선이 촘촘히 깔려있다. 조선총독부 세입의 30%가량이 철도 수입에서 나온다. 전차는 하루 이용객이 10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인이 부설한 선로 위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국제 열차가 인천~노량진 33㎞ 구간을 오전 오후 한 차례씩 1시간30분에 오가기 시작한 것이 1899년 9월이었다. 열차를 이끄는 증기기관차의 차종은 모굴(Mogul) 최신형이라 했다. 영어사전을 보면 인도의 무굴제국 혹은 거물(巨物)이란 뜻이라 한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300년간의 영화를 끝으로 1857년 멸망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조선이 일본에 개항하기 20년 전의 일이다.



    경인철도회사에서 개업식을 거행하는데, 인천(仁川)서 화륜거(火輪車)가 떠나 삼개(麻浦) 건너 영등포(永登浦)로 와서 내외국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機關車)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올랐다.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머리와 꼬리가 맞붙게 쇠갈고리로 이어 붙였는데(…)

    경인선(京仁線) 개통식 광경은 독립신문에 그렇게 실렸다. 이날 이전에도 기차를 타 본 조선인은 있었다. 1876년 일본에 문호를 여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 체결되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건너간 김기수(金綺秀)다. 사절단 76명을 이끌고 동경(東京)에 간 조선국의 예조(禮曹) 참의(參議)가 이듬해 남긴 승차기는 22년 뒤 독립신문의 경인선 열차 시승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칸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火輪)이 먼저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 구르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한 시간에 3~4백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편안했다. 좌우의 차창으로 산천과 집, 사람이 보이기는 했으나 앞에서 번쩍 뒤에서 번쩍 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SEOUL ELECTRIC(서울 일렉트릭)’이라 쓰인 원형 마크 선명한 전차가 서대문~청량리 간을 시속 15㎞로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한 것도 1899년이었다. 가리개 없는 40인승 전차 8대는 한성의 동서를 물 흐르듯 달렸다. 사람들은 세기말의 괴이한 광경에 놀라 숨을 죽이고, 신기해 눈을 크게 뜨고 떠들썩하니 즐거워했다. 전차는 인파에 막혀 여러 번 멈춰서야 했다.

    거리 누비는 포드사 제작 승합차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지금은 1920년대의 마지막 해. 작년부터 경성(京城)에 버스도 생겼다. 한 노선에 10대로 시작했는데 1년 반 사이에 10개 노선에 50대가 성황리에 운행하고 있다. 미국 포드사에서 제작한 8인승 승합차가 주종이다. 서양식 제복을 입은 운전수가 가차 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장안 곳곳을 누비고, 곱지만 도도한 처녀 차장(車掌)이 찻삯을 받고 승하차를 안내한다. 전차보다 4할이나 비싼 요금을 내면서 승객들은 가끔 승무원에게 혼도 난다. 그래도 좋은지 목적지를 지나도 내리지 않고 바깥 구경에 넋이 나간 사람도 있다. 상류층을 겨냥한 택시도 300대 규모가 되었다.

    한 시절의 영화를 대변하는 대저택의 적막한 문간에서 한림은 여러 상념에 잠시 아득했다. 솟을대문은 한때 최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나 차츰 2품 아래 신분으로 확산되어 내려가 양반가의 일반적인 상징물처럼 되어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4품까지 만이었다. 5품 이하 관료는 두 짝의 널판으로 된 그저 그런 평대문을 써야 했다. 갑오년의 경장(甲午更張) 전까지의 얘기다. 1894년 일본식 개혁의 회오리바람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자 중인계층에서 평대문을 헐고 솟을대문을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어떤 양반들은 줏대 없이 살기 싫다며 대대로 내려오던 솟을대문을 스스로 헐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육중한 대문 한쪽이 삐걱 소리도 없이 열렸다. 청지기의 안내를 받아 한림은 행랑마당을 들어 중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른편으로 난 또 하나의 중문 틈새로 안마당과 안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안마당가로 연못도 보인다. 중문을 통과해 사랑채 마당에 들어섰다. 아흔아홉 칸 집(九十九間家)이다. 복덕방 말로는 집터가 1000평이 넘을 것이라 했다. 조선조에 궁궐과 공공기관이 아닌 주택으로서는 최대 규모다. 이 집의 주인은 한때 임금 아래 최고위직에 있었다.

    문지방 너머 어둑한 골마루를 따라 대여섯 걸음을 옮겼다. 마루는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넓어진다. 사랑 대청이다. 40년쯤밖에 되지 않은 집이지만 한때 사랑방 손님은 말 그대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중에는 이완용(李完用)을 위시해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당시의 조정 대신(大臣)들도 있었다.

    사랑방과 마루 사이, 밝은 창호의 영창문(映窓門)이 열렸다. 방 아랫목에 병풍을 등지고 앉은 어두운 잔영(殘影) 같은 몸체가 보인다.

    동남향한 보료에 노인은 앉아 있다.

    “왜 나를 찾아왔소.”

    담뱃대를 물고 사방침(四方枕)에 기대앉았는데 얼굴의 살은 빠지고 은실 같은 백발이 성성하다.



    을사년(乙巳年· 1905년) 보호조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있으면서 그 조약 체결에 최후까지 반대하다가 결국은 죄를 입고 물러선 한규설(韓圭卨)씨라 하면 조선근세사를 읽은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그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월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아서 어제 같은 그날이 벌써 25년.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지내겠습니까. 더욱 해가 바뀌니 때를 잃은 늙은 정치가의 음울한 흉중이 한층 더 회한에 싸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써둔 것이 며칠 전이다. 신년호 특집 기사의 하나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는 내일 오후, 1930년 1월1일자 석간신문이 나온다. 신년호는 16면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평소의 배가 되는 지면에 여러 기획 기사가 며칠째 미리 준비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경술국치(庚戌國恥) 20주년을 맞아 병합(倂合)에 이르기까지 격랑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시리즈물이다. 그 첫 회를 한림이 맡았다. 새해의 첫 3일치 신문은 16면, 16면, 12면으로 증면(增面) 결정되었다. 거기 담길 기사의 절반가량을 늦어도 오늘 안으로는 만들어놓아야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기사가 있으니까.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자주독립의 의지를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독립문은 1897년 11월20일 준공됐다.



    한국민은 불쌍하다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미수호통상사절단. 통역관 로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서광범(앞줄 왼쪽부터).

    한국민은 불쌍하다. 내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보고 위 아래로 4000년의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알렌의 수술을 받고 생환하기 6개월 전에 민영익은 미국을 둘러보고 귀국해서 주한 미국공사 루셔스 푸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나서 광명계에 갔다가 또다시 암흑계로 돌아왔다. 아직 나의 갈 길이 똑똑히 보이지 아니하나 미구에 보여지기를 바란다.

    미국과의 수교로 초대 공사가 부임하자 그에 대한 답례 방문 형식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단장으로 민영익은 미국에 40일을 체류했다. 조선 건국 이래 서양에 파견된 첫 외교사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럽을 둘러보았다. 그와 사절단은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예방했다. 정부 민간 조직을 시찰하고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리고 있던 만국박람회도 관람했다. 그 엑스포(exposition)가 110년 뒤 조선 땅에서도 열리게 될지는 몰랐다.

    을사조약이 있은 후 민영익의 사촌동생인 민영환은 자결하고 민영익은 상해로 망명했다. 을사년으로 접어들기 전 11월에 민영익의 누이동생인 황태자비가 32세로 사망했다. 그녀와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이다.

    을사년은 연초부터 기상이 이상했다. 봄날 같은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었다.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음력 1월7일 지진이 있었다. 2월20일 지리산이 일주일째 울었다. 23일 또 지진이 있었다. 5월 개성부(開城府)에 큰비가 내렸다. 나비 수백만 마리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도성 안에 가득히 날아들었다. 7월22일 춘천에 큰 우박이 있었다. 8월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임명되었다. 서울과 전국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3, 4일 동안 계속되는 곳도 있었다. 나무들이 뽑히고 집이 무너지기도 했다. 강둑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넘쳤다.



    을씨년스러운 을사년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저물어갔다.

    말을 마친 노인은 담뱃대를 딱딱 털었다. 컴컴하던 방안에 십 촉광 전등이 희미하게 켜졌다. 어제 신문에는 당인리(唐人里)에 발전소가 생긴다는 소식이 있었다.

    경성전기회사는 얼마 전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에 1만 키로왓도의 발전소를 설치하려고 계획을 세워가지고 당국에 허가를 신청 중이던바 27일 허가되었다. 당인리는 홍수가 날 때에도 매우 안전한 곳이므로 금강산전기회사에서 받고 있는 7천3백 키로왓도를 합하여 쓰게 되면 현재와 같이 가끔 정전이 되는 소동은 없을 듯하고 일반에게 소요되는 전기료금도 매우 싸질 듯하다.

    1898년 황실의 주도로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1904년 한미합작회사가 되었다가 1909년 일본 회사에 매각되어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뀌었다. 동대문발전소가 궁궐과 종로 일대에 380등의 불을 밝힌 것이 1900년이었다. 전력 수요는 급증하여 1903년 마포에 제2발전소가 세워졌고 남대문에 변전소가 설치되었다. 전기와 철도 사업을 겸하는 금강산전기철도회사는 1920년에 설립되었다.

    유언이 되고만 마지막 인터뷰

    노인은 새해 11월에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인터뷰를 한 뒤 1년을 못 넘기고 1930년 11월8일 밤 숨졌다. 이 인터뷰는 그래서 그의 공개 유언처럼 되고 말았다. 빈혈증과 신장염으로 자택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한림과 몇 시간을 함께한 1920년대 마지막 해의 연말은 생애 마지막 연말이 되고 말았다. 한림은 해를 넘겨 다시 한 번 고인이 된 그의 장교동 집을 찾아 조문했다. 빈소를 지키던 유진태가 유난히 긴 다리를 세우며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평소에도 좌우로 실룩거리곤 하는 버릇이 있는 그 큰 눈과 입이 한층 일그러졌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그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다.

    “친한 친구라도 십 년 사귀기 어려운 일인데 내가 그이를 모시기는 근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루에 두 번 혹은 열흘에 한 번씩 그이를 만나는 동안에 언제나 한적하고 울울하였습니다. 나도 심사가 울적할 때마다 그이를 찾아간 것입니다. 최후까지 말끔한 정신으로 계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을사조약 회의에 참석했던 8명의 대신은 이제 권중현 하나만 빼고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완용이 4년 전에, 박제순은 14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 밖의 사람들도 2, 3년 전 혹은 11년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을 하직했다.

    “나는 죄인이니 죽거든 통부(通訃)도 하지 말고 번화(繁華)스럽게 대여(大輿)도 쓰지 말고 사인방상(四人方床)을 써라.”

    큰 상여 말고 네 사람이 가마처럼 울러 메는 작은 상여(喪輿)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일부는 지켜지고 일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일반에 보내는 부음도 없이 화환도 사절하고 자택에서 발인을 하였다. 다만 상여는 중간 크기로 정해졌다. 전직 고관대작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참정대신 한규설 씨의 장의(葬儀)는 30일 오전 열시에 거행했다. 장식 일체는 ‘죄인의 주검’이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철두철미 간단하게 거행하였다. 옛날 같으면 대방상(大方狀) 소방상(小方狀) 에 앞 뒷줄이 이어지고 여러 가지 의식과 번잡한 절차가 있을 것이로되 겨우 열두 방맹이, 소방상에 유해를 모시고 화환 기타의 일체 의식을 전연 폐지하였을 뿐 아니라 호상행렬까지 사절하여 한낱 무명(無名) 장의로 거행하였다. 장지는 고양군 원당면 사설묘지다. 첫 겨울 아침 처연하게 내리는 찬비는 장례행렬 연도에 뿌려져 산과 나무가 오히려 이 간단한 장식(葬式)을 슬퍼하는 듯하였다.

    신문 기사는 장례식의 발인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부음 기사는 “적극적으로 큰 공을 세운 바는 없으나 일생에 깨끗한 지조를 지키었을 뿐 아니라 생전에 아낌없이 재산을 공익사업에 던졌다”고 고인을 평했다. 세상은 위인(偉人)을 바라는가. 영웅이 없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라고 한림은 생각했다. 신문은 한규설이 청년학생들에게 남겼다는 유훈을 소개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귀하고 좋으나 이미 아는 것을 시행하는 것이 더욱 귀하고 크니라.”

    고관대작의 집이 불고기 전문 대감집으로

    비는 그쳤다. 한림은 노인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안마당에는 청동 갓과 프레임에 사방 유리를 씌운 서양식 램프에 황색 불이 깜박깜박 들어왔다. 안채 뒤 후문 옆 굴뚝 위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잇담 너머로 남녀 하인들이 안채 안마당과 뒷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기미가 느껴진다. 저녁 준비로 여인네들의 뒷대문 출입이 빈번할 시각이다. 노비는 1894년 갑오 이래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 제도가 없어진 것이지 내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름만 노비에서 평민으로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그 전이나 후나 비슷하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 저마다의 살림을 이어갈 뿐이다. 나라의 국호가 바뀌고 그들이 경성부민(京城府民)으로 불려도 역시 그러하다.

    나라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한참 뒤인 먼 훗날 소유권이 이전된 한 대감의 대저택은 뿔뿔이 해체되어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안채는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이 불고기 전문 식당에는 대감집이라는 옥호가 붙었다. 소실이 살았다는 별채는 요정으로 변신했다. 하인들이 거처하던 줄행랑은 인쇄소 집합소로 변모했다. 다시 한 번 더 세월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빈 땅에 상상조차 못한 초대형 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한길로 빠져나오며 한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옛집은 어스레한 불빛을 안고, 무겁게 내려앉는 축축한 겨울하늘 아래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다.



    ● 동아일보

    ● 독립신문

    ● 황성신문

    ● 별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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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광, 경부선, 효형출판, 2010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서울에서 식구들과 살고 있다.


    조선 반도에 부는 대공황의 태풍

    그나마 1년 전보다는 고생이 덜하다. 1월1일자의 경우 작년에 32면을 발행한 것에 비하면 지면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경기 불황으로 신문용지 경비를 아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광고가 예전만치 들어오질 않는다고 한다. 두 달 전 발생한 미국주식시장의 붕괴를 시작으로 미국 대공황의 허리케인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조선반도에 태풍으로 변하여 불어닥치는데 불과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오늘 밤은 다들 밤늦게까지 편집국 책상에 저마다 코를 박고서 가뜩이나 부족한 전기를 축내고 있을 게 불 보듯 환하다. 신문의 지면은 두 달 전 대공황 발생 직전에 8면으로 확장되었다. 4년 만의 큰 변화였다.

    이 노인이 그 한규설인가. 한눈에도 시력은 쇠약해졌고 피부는 윤택을 잃은 지 오래돼 보인다. 1856년 음력 2월생이니 만 74세를 바라본다. 어딘지 사람을 위압하는 듯한 풍모가 아직 남아 있다. 그는 1876년 일본에 개항하던 해 약관(弱冠) 20세로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이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를 비롯한 군 고위직과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비롯한 치안책임자를 30대 초반까지 역임했다. 전라좌수사는 일찍이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전해에 46세의 나이로 맡은 자리다. 한규설은 이후 형조판서(刑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 법부대신(法部大臣) 등 요직을 여러 차례씩 돌아가며 지냈다. 그가 국정 최고위직인 참정대신 자리에 오른 것은 을사조약 두 달 전, 만 50세를 앞둔 때였다.

    그는 을사년 그날 이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문기자의 면회를 허락할 리는 더욱 없을 것이라 한다. 궁리 끝에 그와 교분이 두터운 유진태(兪鎭泰)를 통하여 미리 명함을 전달해두었다가 연말연시 인사를 빙자해 오늘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유진태는 1920년 발족한 조선교육회를 10년째 운영해왔다. 한림이 기자로 재직한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이상재(李商在)를 회장으로 하여 출범할 때부터 중간에 조선교육협회로 개칭한 이후까지 줄곧 이사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교육회의 집지킴이라 부른다. 한림의 고향 마을에서 지킴이는 담벼락이나 굴뚝에 은둔해 사는 구렁이를 뜻한다. 잡귀나 잡것으로부터 집을 지켜준다고 여긴다.

    한민족의 교육은 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 민족교육운동 단체에 한규설은 고문으로 이름을 걸어두고 최소한 두 차례 크게 재산을 기부했다. 1922년 그가 사는 장교정(長橋町)에서 길 건너 수표정(水標町)에 있는 시가 3만원가량의 350평짜리 가옥 한 채를 회관 건물로 쓰라고 내놓았다. 작년 1928년에는 벼 수백 석을 거둬들이는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했다. 조선교육회가 발족할 때 그 발기인 명단 맨 처음에 한규설이 있었다.

    25년간의 칩거

    유진태는 지금 경찰에 붙들려 있다. 광주학생사건을 기화로 신간회(新幹會)가 벌이려고 한 이른바 ‘민중대회’가 발각되면서 12월13일 오전부터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검거가 이루어졌다. 이상난동으로 전국적으로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날 석간신문의 사회면 머리기사는 이러했다.

    13일 이른 아침부터 경기도경찰부와 종로경찰서는 가일층 긴장되어 경찰수뇌자의 밀의(密議)가 분분하더니 경찰부 유치장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검속(檢束)되어 있는 사람을 전부 용산경찰서 동대문경찰서 등의 유치장으로 옮긴 후 오전 11시경에 형사대가 일제히 시내 각 방면으로 출동하여 각 방면 인물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잡힌 사람을 보면 신간회 집행위원장 허헌(許憲)씨를 비롯하여 조선교육협회 유진태(兪鎭泰)씨 천도교 이종린(李鍾麟)씨 불교 한용운(韓龍雲)씨 근우회(槿友會) 정칠성(丁七星)씨 기타 30여 명에 달한다.

    11월3일에 발생한 광주학생사건의 여파가 12월 들어서면서 경성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늦가을에 열흘 간격으로 발생한 뉴욕발 대공황과 광주발 학생사건이 겨울비의 홍수 속에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12일 경기도 경찰부 수사계 미와(三輪) 주임은 오전 8시경부터 오토바이를 달려 다나카(田中) 부장 외에 몇몇 고관(高官)을 방문하고 어떤 중대사건에 대한 양해를 구한 것 같았는데 10시경 종로경찰서에 그가 나타나자 경찰 내 공기는 돌연 긴장하는 한편 전 직원에게 비상출동 준비를 지시하면서 시내 요소와 각 사상단체에 정사복경찰을 배치하고 엄중 경계하는 한편 낮 12시경에 이르자 신간회 대표 홍명희(洪命憙)씨 등을 호출하여 시국에 대한 간담(懇談)적 경고를 했다 한다.

    오토바이 옆에 달린 사이드카를 애용하는 미와 경부(警部)는 고등계(高等係)의 실무책임자다.

    “내 집 오신 손님이니 응대야 안 하겠소마는….”

    파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피어오르다 살짝 흔들리며 흐트러진다. 담배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300년쯤 된다. 임진(壬辰)년과 정유(丁酉)년의 왜란(倭亂)으로 일본군대가 7년 동안 전국을 휩쓸고 나간 다음 정묘(丁卯)년과 병자(丙子)년의 호란(胡亂)으로 전국이 다시 쑥대밭이 되기 전, 그 사이 기간에 전래된 문물이다. 담뱃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에 파이프와 궐련(卷煙)이 들어서고 있다. 궐련은 새 시대의 대중적 담배 풍속으로 자리 잡으며 담배 소비량을 한껏 올려놓았다. 특히 젊은이와 여자에게 궐련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나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라. 생명이 붙어 있으니 사람이라 할까, 두문불출하여 집 바깥사람과 상종을 끊은 지가 이미….”

    그러면서 노인은 을, 병, 정, 무, (乙 丙 丁 戊)…하며 육갑(六甲)을 꼽는다.

    “옳지, 벌써 25년이나 되었소. 죽은 사람을 지금에 찾아와서 무슨 들을 말이 있겠소. 아직 말은 하오만 ‘미랭시(未冷屍)’이지요. 식지 않은 송장과 다름이 있겠소. 을사년 이후 말도 않고 듣지도 않으려 하였더니 요새는 귀도 멀고 눈도 어둡게 되었소. 아주 송장이 되려는가 보오. 입이 아직 성해 말은 하오. 그러나 정말로 귀에 담아듣지는 마소.”

    망국 재상이 무슨 면목으로

    노인은 등받침대(案席)에 등을 젖히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허허…내 말을 그리 듣고 싶소. 글쎄 망국 재상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소.”

    망국(亡國) 두 글자는 총독부가 기피하는 용어의 하나다. 기사에서 검열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두 글자가 삭제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편집국에서는 신문 제작 단계에서 공란으로 둔다. 10년간 총독부 당국과의 밀고 당김 끝에 정착된 관습의 하나다. 망국 재상은 신문지에 OO 재상으로 표기되어 독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독립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등, 그렇게 약조된 단어가 많다.

    “그때 일을 아는 선비들은 다 알지오. 하도 소원이라면 묻는 말 몇 마디나 대답하리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 체결에 이르는 열흘간. 11월9일부터 18일까지의 긴박했던 상황의 전말을 겪은바대로 술회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황제 아래 국정 최고책임자였다고는 하지만 지금 와서 지난 일을 들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말은 꺼냈고 오기는 왔지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한림 스스로 아니 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 동아(東亞)의 풍운(風雲)이 주마등같이 변하는 듯하더니, 광무(光武) 9년이지…. 장곡천(長谷川) 대장이 오며 일본 군사가 들락거리는 게, 벌써 짐작은 차리었소.”

    장곡천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04년 9월 제2대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으로 부임해 만 4년 넘게 조선을 무력 압박하였다. 역대 최장수 조선군사령관을 거쳐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이 되어 조선을 강압 통치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총독에서 물러났다.

    하세가와는 한규설보다 여섯 살 위다. 한규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공직에 임용되었고 하세가와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를 거쳐 군인의 길을 걸었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던 해부터 한규설은 관직을 시작했다. 2년 뒤 하세가와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의 내전을 끝내는 세이난(西南)전쟁에 보병 1연대장으로 종군했다. 이 길로 그는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육군대령으로 승승장구한다. 한규설이 왕의 친병(親兵)을 통솔하는 금군별장(禁軍別將)과 수도 치안을 맡은 우포도대장을 역임하는 동안 하세가와는 프랑스에 파견돼 프랑스 육군의 교리와 편제, 지휘 통솔에 관한 선진 운영기법을 실습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육군소장이 된 하세가와는 청일전쟁에 보병 12여단장으로 참전했다. 요동(遼東)반도의 여순(旅順) 공격에 공을 세워 남작(男爵)이 된다. 이로부터 10년간 한규설이 조정의 여러 요직을 거치는 동안 하세가와는 주요 사단장을 전전하며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승전과 함께 육군대장에 오른다. 그리고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일본국 주차군사령부 육군 대장 남작 장곡천호도는 우리나라에 다시 왔는데 공로가 매우 많아 친애하는 뜻을 표해야 될 것이니 특별히 이화장(李花章)을 하사하라.

    이토 히로부미의 한성 방문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05년 11월17일 오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마차에 앉은 왼쪽과 오른쪽 사람)이 경운궁 수옥헌으로 향하고 있다. 훗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뀐다.

    고종이 1904년 12월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훈장을 내리라고 분부하는 실록의 기록이다. 앞서 육군부장 권중현(權重顯)이 위문사절로 요동의 전장을 방문했고, 그 공로로 일본에서 훈장을 받았다.

    “이등 대사(伊藤 大使)가 입경(入京)하기가 양력 11월9일이지. 이 틈에 일진회(一進會)에서는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고 야단이오. 이등 대사는 10일에 폐하를 알현하였소. 시국에 관한 일진회와 백성들의 반감과 불평이 수습치 못할 사태로 발전할 형세이므로 나는 일진회 말에 현혹지 말라고 방을 붙이고 이등 대사 등의 행동을 감시하였소.”

    일진회 지도부를 구성하는 이용구(李容九)는 동학(東學) 출신,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는 독립협회(獨立協會) 출신이었다. 손탁호텔에서는 러일전쟁 승리 축하연이 일본공사관 주최로 조정 대신들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히 펼쳐졌다.

    이러한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성에 왔다. 전년도와 달리 올해에는 새해부터 개통된 경부선(京釜線)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남대문역(南大門驛)에는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이 외교의례에 따라 영접을 나왔다. 민영환은 참정대신까지 지낸 뒤 일본의 내정간섭에 비판적인 태도로 인해 한직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였다. 조선의 국운과 함께 그의 목숨도 경각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중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조약무효와 조약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민영환과 함께 관원들을 이끌고 경운궁 앞에서 항의 농성을 주도했던 조병세(趙秉世)는 11월30일 민영환이 자결하자 다음날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죽기 전까지 임금은 만나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약 8개월 전인 1905년 3월 조병세는 고종(高宗)을 집무실인 수옥헌(漱玉軒)에서 만나 이렇게 건의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크게 용단을 내리시어 특별히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도모하지 않으시고 좌우 측근자들에게 가려 국가의 정책을 날로 그르치면서 그대로 내버려둔 채 망하기만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몇 해 전 만나뵈올 때에 폐하께서 눈물을 줄줄 흘리시며 하신 말씀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셨지만 끝내 한 가지도 실천된 것이 없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법입니다. 백성은 백성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상하가 각기 따로 논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다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른바 일진회라는 것이 항간에서 판을 치고 있으니 그 사나운 기세가 틀림없이 요원의 불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되면 수령(守令)들도 감히 단속하지 못하여 호령(號令)이 민가에 행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아, 선왕(先王)들이 길러주신 은택(恩澤)이 이제 다하였고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는 백성들의 버릇도 이미 자라날 대로 자라났습니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지며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이 어찌하여 이토록 극에 달했단 말입니까.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 독일 여인 손탁이 운영하던 호텔로 외교관들이 사교모임을 자주 가졌던 곳이다.

    이어서 고종과 조병세 사이에 긴 대화가 오고간다.

    “지금 말한 조항들은 좌우명으로 삼아 밤낮으로 유념하겠다.”

    “지금 급선무는 대궐을 엄정하게 하는 데에 있는 만큼, 간사한 자들을 축출한 연후라야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중에 의정(議政)의 무용론을 제기하는 자가 있는데, 의정부(議政府)라 하면서 어찌 의정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지금 의정은 관료들이 떼 지어 나아가고 물러나며 맡고 있는 것이래야 전례(典禮)나 제사에 관한 일뿐이니, 의정의 지위에 있다고 하나 그런 의정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시대의 추세에 이끌려 그런 걸 어찌하면 좋겠는가.”

    “근신(近臣)들이 속이고 가려서 그렇습니다. (…)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안으로는 간관(諫官)의 직책을 설치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밖으로는 용맹한 군대를 두어 적을 물리치고 방어한다면, 강한 이웃나라가 엿본다 한들 무엇을 두려워하겠으며 어지럽고 전도된 나라를 바로잡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일을 하고자 않는 것은 아니나, 관찰사가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서 행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왕법이 본래 있으니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신다면 행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게 뭐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정은 더욱 한심한 점이 있다. 딴마음을 품은 수령들이 먼저 강한 외적들과 결탁을 해서 임금을 협박하다시피 하니, 이런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

    “근무실적 심사에서 하등을 맞아 관직에서 좌천되어야 할 경우가 되면 뇌물을 주기도 하고 청탁을 하기도 해서 무난히 다른 자리로 옮겨 기름진 고을의 수령 자리를 차지하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계책이 불안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전적으로 관리를 신중하게 선발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78세의 신하는 52세의 왕에게 걱정이 되어 묻는다.

    “듣기로 요즘 재신(宰臣)들이 올린 상소에 대해 답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대개는 이웃나라와 부딪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집안에서 한솥밥을 먹는 것처럼 군신 간에 일체가 되었을 때에는 아무리 비난을 하더라도 일단 물러가서는 뒷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자리 밖은 모두 남의 집인 격이어서, 일단 비답(批答)을 내리면 그것이 전해지면서 구실이 되고 외국에까지 전파되어 어김없이 말썽이 생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모호하게 대답하고 마는 것이다.”

    깨어진 군신일체

    “10일에 폐하를 알현한 이등 대사는 그 이튿날에 다시 올 예정이었으나 폐하께서는 편찮으시다고 보시지를 않아 15일에 다시 입궐하였소. 이날의 배알(拜謁)은 저녁때가 훨씬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우리 대신들은 반드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국가의 중대사라 이등 대사가 퇴출할 때까지 수옥헌(漱玉軒)에 앉아 기다렸소.”

    한규설 대감은 이렇게 회고한다. 수옥헌은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양식 2층 건물이다. 1904년의 경운궁(慶運宮) 대화재 이후 고종의 집무실 겸 알현실로 사용되어왔다. 나중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게 된다.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해 말한다면, 일본대사 이등박문이 서울에 올 때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반드시 중대한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에 맡기셨습니다.”

    을사조약이 있고 한 달 후,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지칭되는 5인의 대신은 조약에 조인한 전후 사정을 고종황제에게 상소(上疏)의 형식으로 이같이 보고하고 있다. 그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 1905년 12월16일자 기사(記事)에 실려 있다. 당시 사초(史草)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은 조선 500년 사상 최대의 조약이라 할 제2차 한일협약과 관련해 협정에 조인한 5인의 진술을 정리하고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29년 12월 민간 신문사의 기자 한림은 협정 조인을 거부한 참정대신의 입을 통하여 당시의 일에 대해 듣고 있다.

    한림은 한문으로 된 조선왕조실록 중 을사년의 기사(記事) 일부를 얼마 전에 읽어보았다. 우리말 구어체로 오고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문어체인 한문으로 옮겨 기록하고, 그 한문기록을 다시 한글로 옮겨 뜻을 풀이할 때 애초의 이야기는 얼마만큼 온전히 전달되는 것일까. 오늘 한림이 듣는 내용은 오늘 밤 한림이 쓰게 될 한글 위주의 기사(記事)가 되어 내일 3만부가량의 신문지에 인쇄되어 배포될 것이다. 한규설 대감은 기자 한림에게 말한다.

    “그동안에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은 임(林)공사의 초청을 받아 일본공사관에 다녀왔는데, 갔다 와서 펄펄 뛰며 하는 말이, 보호조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정한 사실을 당한 것이고, 또 일치하여 불가하다고 거절하기로 결심한 터이므로 별로 놀라지도 않았소.”

    잦은 인사이동

    임권조(林權助)는 1년 전 한일협약을 외부대신서리 윤치호(尹致昊)와 맺었다. 외부대신은 이하영이었다. 이제 2차 한일협약의 파트너가 될 외부대신은 박제순이다. 작년에 1차 협약을 체결하기 6개월 전에 한일의정서를 맺을 때는 외부대신이 이지용이었다. 한국 측 파트너는 쉴 새 없이 바뀐다. 외부대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관리의 인사이동이 매우 잦아서 1년에 두세 차례 자리를 옮기는 것은 보통이다. 이러다보니 같은 직책을 두세 번씩 거듭 역임하는 것은 예사다. 박제순은 6년 전에도 외부대신이었다. 한 부에서만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여러 부서를 넘나든다. 임기가 짧고 이력이 다양한 것은 아마도 조선 관료의 특징인가 싶다. 일정 기간 연륜을 쌓은 관헌들의 이력을 보면 하나같이 그 역임한 직책의 목록이 훈장처럼 길고 다양하다.

    임권조, 즉 하야시 곤스케가 주한공사로 부임한 것이 1900년이었으니 햇수로 6년째 한자리에서 근무 중이다. 1887년 동경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재능을 인정받아 동경대 총장 추천으로 외무성에 들어가 바로 외교관에 입문해 1889년 인천 주재 부영사, 다음해 영사로 진급한 뒤 본부 통상국장이 되어 귀국했다가 다시 한국에 부임한 것이다. 지금 그의 나이 45세. 한규설보다 네 살 아래, 이완용보다 두 살 아래다. 더 오를 직책이 없이 사양길에 접어든 민영환보다는 한 살이 많다.

    “그 이튿날 16일 이등 대사(大使)가 여관에서 원로 민영환(閔泳煥)과 심상훈(沈相薰)과 우리 대신(大臣) 일동을 부르고 박(朴) 외부대신만은 임(林)공사가 따로 공사관으로 불러갔소.”

    여관은 손탁호텔을 말한다.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처형 손탁이 운영한 정동 외교가의 호텔이다. 친밀한 관계였던 민비가 시해된 1895년에 정동(貞洞)의 가옥을 하사받아 외국인의 모임장소로 사용해왔다. 이 가옥을 헐고 러시아풍의 2층짜리 서양식호텔로 재개관한 것이 1902년 10월, 고종 즉위 40주년 축하연이 있은 다음 달이었다. 지금 이토 히로부미는 이 호텔에 일주일째 머물고 있다.

    “민영환은 시골로 내려갔을 때라 출석지 못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였는데, 하는 말은 동양의 대세가 그렇게 되었으니 보호조약에 동의하는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었소. 물론 찬성할 리가 있겠소. 가당치 않은 말이라고 거절하였으나, 중대한 문제이므로 궁중으로 들어갔더니 박 외부대신도 공사관으로부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임 공사가 보호조약의 조문을 보여주며 동의하라고 하였다 하오.”

    한 참정 박 외부, 좀 이리 와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당시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사진)은 을사조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했다.

    지금 한규설이 말하는 부분을, 이완용 등 대신 5명의 상소는 다음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이지용(李址鎔), 권중현(權重顯), 이완용(李完用), 이근택(李根澤)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함에 따라 여관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 임권조(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공사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내일 또 일본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버리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수옥헌에서 밤중까지 여러 가지로 회의를 하였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하다고 거절하기로 가결하고 헤어지려 할 때에 폐하께서 ‘한 참정, 박 외부, 좀 이리 와’ 하시길래 우리들은 어전에 나아갔더니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문하시기로 나와 박 대신은 한목소리로, 군신이 같이 순직할 결심을 가져야 된다고 아뢰었소. 그랬더니 ‘잘 알아서 그릇됨이 없이 하라’고 분부하십디다.”

    고종은 시종일관 구체적인 지침은 주지 않았다. 의견을 말해보라고 요청받으면 대신들은 하나같이 모범답안을 이야기했다.

    “대신들이 회의할 때는 모두 강경하였소. 비분강개하여 물불도 안 가릴 자세를 보였으므로 나는 매우 맘이 튼튼하였소. 더욱 박 외부대신은 여러 번 나를 찾아오기도 하여 서로 숨김없이 의사를 상통하였는데, 하루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는 슬하에 혈육이라고는 세 살인가 네 살인가 되는 자식 하나밖에 없으니 죽은 뒤가 염려가 된다고 하면서 큰 결심을 보이고, 내가 장성한 자식 둔 것을 치하해줍디다. 나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로하고 국사를 의논했소. 나는 그에게 ‘대감이 말 아니해도 잘 아시어 실수 없이 할 듯하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고 더욱 불행히 대감의 이름을 빌려가지고 외부대신 도장을 훔쳐낼 간흉(奸凶)이 없다고도 장담할 수 없으니 실수가 없도록 함이 어떻겠소’ 하였소. 그랬더니 그는 ‘지당한 말이외다. 그것을 빼앗겨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터이니 외부 청사 뒤에 있는 연못 속에다 집어넣어 두는 것이 제일 안전하지 않으냐’고까지 합디다. 나는 생각한 대로 잘만 하라고 재삼 부탁하였소. 여러 대신 중에 외부대신을 제일 믿었고 그 외의 몇몇은 믿기는 믿으면서도 의심이 없지 않았소.”

    이곳 장교동 한규설 대감의 사랑방에서는 박제순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이 모여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고 한다. 박제순은 1893년 호조참판(戶曹參判) 재직 때 동학도(東學徒)가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자며 보은(報恩)에서 척왜양(斥倭洋) 집회를 열자 청나라 군사를 파병하는 문제를 원세개(袁世凱)와 협의했다. 1894년 충청도 관찰사 때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군대, 한성에서 내려온 군대와 연합해 공주(公州)의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17일에는 다시 공사관에 불리어 가서 회의를 하였으나 역시 우리 대답은 마찬가지로 ‘불가(不可)’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소. 회의를 계속하는 사이에 어느 대신은 처음 태도보다 연화(軟化)하고 어떤 사람은 표변(豹變)까지 하였다는 것이 간파되었소. 조문을 수정하여 승낙함이 어떠한가 하는 의견을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나 나는 역시 불가하다 하였소. 나는 이때에 간간이 사직할 생각이 나기도 하였소만, 만일 사직하여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임명되면 모르되 못한 사람이 임명되면 내가 죄인이 되리라는 가책을 받아 사직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하였소.”

    한규설은 학부대신 이완용의 태도가 급변하면서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해갔음을 말하고 있다. 이완용이 대표 집필한 상소문은 이 상황을 보다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臣) 등 8인이 함께 일본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이리저리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운궁에 마련된 미국 에릭슨 사의 전화기 시설을 통해 왕을 보필하는 궁내부와 각 정부 부서가 전화통화를 시작한 지도 7년이 되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공사관 회동은 점심식사를 곁들여 3시 가까이까지 계속되었다. 공사관은 남산 기슭 왜성대(倭城臺)에 있었다. 훗날 통감부(統監府)가 되고 총독부(總督府)가 되는 자리다. 다시 수옥헌(漱玉軒)으로 돌아와 회의가 시작되었다.

    “공사관을 작별하고 우리는 궁중으로 들어가서 어전회의를 열고 폐하께 일본 대사 공사와 접촉한 자초지종을 아뢰고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아뢰었으며, 박 외부대신은 도장을 생명과 교환할 결심을 하였노라고 언명하였소. 이 사이에 이등 대사와 임 공사와 장곡천 대장을 비롯하여 외교관 군인 등이 무수하게 내전 가까이 들어와서 형세가 심히 절박하였소.”

    노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어이없는 웃음을 연발하는데, 혀끝에는 노기가 등등하다. 다시 담배 한 대를 뻑뻑 빨면서 하던 말을 계속한다.

    “각 대신이 차례로 의견을 말할 때 학부대신 이완용은 ‘거절만 한다고 일이 무사할 형세가 아닌즉 차라리 조문수정을 요구함이 득책(得策)인 듯이 생각된다’고 하고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도 그럴 듯이 의견을 말하여 회의가 혼란하게 되었소. 나는 그것은 절대 부당하니 만일 칙명(勅命)이 그렇다 하더라도 복종할 수가 없다고 하였소. 이와 같이 회의가 점점 혼란하여지매 폐하께서는 지밀(至密)로 들어가시고 이등 대사가 들어와서 동의함이 옳다고 설명하였소. 장내는 얼음 같은 찬바람이 도는 듯하였소.”

    이등박문의 본명은 임이조(林利助)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고 개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였다. 임권조(林權助)와 이름이 닮았다. 이름만 보아서는 둘 다 중국인인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혼란스러운 회의

    수옥헌에 불이 들어왔다. 샹델리아 아래 러시아산 카펫은 특유의 화사한 색채와 문양을 드러낸다. 중앙 복도의 바닥에는 러시아의 전통 8각문양이 처연한 푸른빛을 비치고 있다. 일본 헌병들은 회의실 바깥 발코니에 도열해 있다. 후문에도 경비가 삼엄하다. 일본 보병과 기병은 해가 져도 거리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

    날은 맑고 달은 높다. 보름을 지나 엿새째 이지러진 달은 하현(下弦)으로 바짝 기울었다. 왼편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미국영사관은 깊은 어둠에 잠겨 고요하고 등 뒤로 언덕 위에 올라앉은 러시아영사관 역시 추수 끝난 늦가을 달밤의 허수아비처럼 회반죽을 덮어쓴 허연 3층 망루를 삐죽 내밀고 우두망찰 서 있을 뿐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 깊어가고 있다. 정문 앞 길 건너 감리교회는 선교사도 보이지 않고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등박문과 대신들의 긴 문답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이완용의 보고서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대사는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왕에게 전달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대신뿐입니다. 주무대신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하기 바랍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이어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洞燭)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누가 옳은가

    한규설이 회의장 밖으로 나간 부분에 대해서는 이완용 등 5인의 보고서와 한규설의 진술이 크게 다르다. 보는 관점과 기억은 다를 수가 있고 내용 일부가 생략되어 기술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기술되는 사실 자체가 다르다. 한규설은 기자에게 말한다.

    “그때 광경이 반대파가 불리하게 될 염려가 보이는데 찰라 간에 어떤 실패가 있을지 모르게 된 형세이므로 나는 ‘이 일은 군주와 신하들끼리만으로도 해결치 못할 중대한 일이라 만민공론에 부치어 천천히 해결함이 옳으니 얼마동안 연기를 하게 합소서’하는 의견을 폐하께 올려 기한을 연기해놓고 다시 힘을 다해보아 일을 틀어놓을 생각을 하고 회의에서 빠져나와 폐하 알현을 예식과장(禮式課長) 고희경(高羲敬)에게 부탁하였소. 얼마쯤 있다가 고희경이가 나오기에 나는 부르심인가 하였더니 뜻밖에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아주 딴소리, ‘이등 대사가 좀 뵈옵겠다고 합니다’ 하지 않겠소. 너무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호령을 하고 내가 이등 대사를 볼 이유가 무어냐고 하였더니 고희경이는 간데없고 공사관 통역관 염천(鹽川)이라는 자가 와서 내 옷자락을 잡으면서 이등 대사가 보자고 한다고 수옥헌 마루방으로 가더니, 이등 대사가 들어오는데 말인즉 역시 도장을 찍도록 하라는 것이오. 내야 그럴 도리가 있느냐고 다시 반대하였더니 대사는 슬그머니 나가버리고, 일본 사관(士官)들이 문을 지키고 내어보내지를 않습디다. 속아서 갇힌 것이오. 허허…갇히었지요.”

    고희경은 아버지 고영희(高永喜)의 뒤를 이어 외교업무로 관직을 시작해 황실업무를 담당했다. 일본통으로 외부협판(外部協辦)을 지낸 고영희는 이완용과 함께 1896년 7월 창립한 독립협회의 발기인이었다. 고희경은 나중 영친왕(英親王)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그를 수행하게 된다. 을사조약 당시 고희경의 사촌동생 고희동(高羲東)도 궁내부에서 예식관(禮式官)으로 근무 중이었다. 손탁 호텔 바로 위에 있는 한성법어(法語)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에 궁내부 주사로 취직해 프랑스 통역과 문서번역 일을 했다. 그는 을사조약 직후 관직을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하여 1909년 동경미술학교 양화(洋畵)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다.

    총리대신이 조인치 않은 조약은 무효

    황성신문(皇城新聞)도 11월20일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함께 실은 ‘5개조약체결청구의 전말’이라는 기사에서 한규설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하야시 공사의 회고록은 매우 다르다. 이완용의 상소와 비슷한 맥락에서 술회하고 있다.

    한규설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돌연 회의석을 박차고 일어나 발걸음도 처연하게 황제의 처소로 향하였다. 어떻게 하든 이 회의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기백이 엿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내전 쪽에서 궁녀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대신들은 몸둘 바를 모르고 허둥대었다. 그 진상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려고 뛰어나간 한규설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전의 엄비(嚴妃) 처소에 잘못 들어간 것이었다. 황급히 내전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에게 갈 기력을 상실해버리고 거의 실신상태로 모두가 모여 있는 회의실 앞에서 그만 졸도하고 만다. 그리하여 총리대신 부재하에 담합을 진행시켜 마침내 어느 정도까지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사안에 대한 진술조차 이완용과 임권조가 한편이고, 한규설과 황성신문이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밤새도록 승강하는 동안에 수옥헌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겠소마는 오전 한시반쯤 되어 사관이 물러갔길래 나가보니 조약서에 외부대신의 도장을 찍어주었다 하오. 청천에 벽력이오. 나는 제정신을 잃고 앙천통곡을 하였소. 운들 소용이 있겠소. 그렇게 믿었던 박 대신이 무안한 얼굴로 나오기에 ‘이사람, 연못에 집어넣는다든 도장을 어찌했느냐’고 호령을 했지만 쓸데없었지요. 그러나 그때 나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조약이 발생하는 것은 소관 대신이 심의하고 총리대신의 동의를 얻어 연서(連書)로 상주하여 재가를 얻어야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총리대신이 조인치 않은 그 조약은 무효라고 성명하고 즉시 법부대신과 탁지부대신을 제하고는 전부 면관(免官)시킬 수속을 하였소. 그렇게 했지마는 그 이튿날부터는 벌써 딴 세상이지요.”

    면관은 대신들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했다. 어전에서의 소행이 합당함을 잃었다는 죄목으로 한규설은 즉시 파직되고 유형 3년에 처한다는 칙명이 내렸다. 다른 대신들은 그대로 직책을 유지했다.

    총칼 위협 아래 체결된 조약은 무효

    한규설에 대한 처벌은 곧 취소된다. 그리고 조약 조인 닷새 뒤 고종은 비밀리에 미국에 호소문을 보낸다. 정부가 운영하는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였다. 워싱턴에 도착한 헐버트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왔다며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를 면회한 자리에서 “일본정부의 한국에 대한 강압정책을 견제해달라”고 호소했다. 루트 국무장관은 거절했다. “한미 양국 간에는 정당한 대표자를 교환하고 있으므로 이처럼 정당한 방법에 의거하지 않은 요구에 대해서는 조치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주미 일본공사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이런 요구에 요주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밀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이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

    고종의 이 같은 노력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을 비롯한 3명의 밀사를 보낼 때까지 이어진다. 그 종착점은 왕위에서 밀려나는 것이었다. 루트 국무장관은 다카히라 공사와 1908년 미일협정을 체결한다. 태평양에서 미국과 일본 양국은 서로의 영토를 존중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일본은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필리핀에 야심이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며, 미국은 일본이 관리 중인 조선에 간섭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루트는 191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수상 이래 6년 만의 미국인 수상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6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러일전쟁 종전협상을 중재했다는 것이 수상의 주된 이유였다. 태평양의 좌우에 포진한 두 신흥 강국은 제국으로 향한 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앞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1년 반 전인 1904년 4월 미 국무성 앞으로 서신을 보냈다. 한국의 사태에 미국의 간섭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때 루트 장관은 대답 대신 알렌 공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웨슬리언 대학 신학과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양에서의 전도를 희망하여 주한 미국공사관 의사로 입국한 것이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로부터 온몸을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閔泳翊)을 살려냈다. 1887년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고문을 지내다 1890년에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공사에까지 올랐다. 십년지기(十年知己)라 할 한국을 떠나는 자리에서 알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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