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2-04-20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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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 이태왕은 대한의 추위에 급서한다. 3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불타지 않은 정궁을 찾지 못해 임시 거처로 삼았던 경운궁. 러시아공사관에 피난한 고종은 달리 안심하고 잘 곳을 찾지 못해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그러기 22년. 오랜 불면의 밤을 뒤로하고 마침내 대한문을 나서게 되었다. 세계의 이목은 4년여에 걸쳐 약 1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유럽의 비극, 세계대전을 정리할 파리 강화회의에 쏠려있었다. 일본의 이목은 혼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차질을 빚게 된 양쪽 왕가의 혼인에 쏠려있었다. 조선의 이목은 대한문에 쏠려있었다.
    (제9장)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매일신보 발행인 이상협.

    조선군사령관 우도궁태랑(宇都宮太郞)은 식탁에 홀로 앉아 술잔을 들었다. 정오 무렵이다. 이른 봄의 용산(龍山) 관저는 물오르는 남산의 기슭 아래 호젓하다. 대낮의 독작(獨酌)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점심상을 앞에 두고 몰려드는 시장기보다 빠져나가는 긴장감이 그를 더 사로잡고 있다. 고단한 외출에서 막 돌아온 길이다.

    긴 오전이 끝났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일어날 7시부터 그는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나가 있었다. 이태왕(李太王)의 국장(國葬)날이었다. 1919년 3월 3일 아침. 낙산(駱山) 위로 동녘 해가 떠오를 그 무렵 대궐 안에서는 발인(發靷)을 앞둔 마지막 제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왕 전하가 경성에 머무르는 마지막 밤이 덧없이 새었다….’

    간밤을 꼬박 새운 뒤 함녕전의 마루에 비껴드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이상협(李相協)은 흩어지는 새벽노을처럼 물들어가는 눈으로 그렇게 수첩에 적어나갔다. 이곳 빈전(殯殿)에 몸을 누인 전 황제 고종 이태왕은 이제 떠날 시간을 맞이했다. 덕수궁 출입기자인 이상협의 직함은 ‘매일신보’ 편집인 겸 발행인이다. 입사 7년. 기자 드문 조선에서 베테랑으로 통한다. 특히 궁중 사정을 궁궐 밖에서 그만치 아는 이도 드물다. 고종이 승하한 다음 날부터 40일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지면을 덮은 덕수궁의 장례 기사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오늘의 국장예식은 그 절정이다. 날이 날인 만치 네댓 되는 기자 전원이 총출동해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조선어 자매지라 하지만 아직은 경성일보의 편집국장 밑에 예속된 일개 부서 수준의 조직에 불과하다. 안에서 기사를 다듬고 편집하는 민태원(閔泰瑗)까지 오늘은 특별히 나왔다.



    우보(牛步)라는 호처럼 동작이 굼뜬 민태원은 경성고보를 졸업하던 1914년에 이상협 소개로 입사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눈에 좀 띈다 싶은 기사나 제목은 주로 그가 다듬고 만들어왔다. 그러다 소설 연재까지 맡게 되었다. 번안(飜案)소설이라는 것인데, 지난달 6개월 연재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애사(哀史)’라 이름 붙은 이 작품의 연재가 시작되던 작년 1918년 7월에 매일신보는 안내 기사를 실었다.

    이 소설은 지금부터 34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불란서의 문호 빅토르 위고 선생의 저작으로, 지나간 백 년 동안에 몇 백 명의 소설가가 몇 천 질의 소설을 지었으나 이 소설 위에 올라가는 소설이 다시없다고 하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을 번역한 것이다.(…) 독자 제군이여, 그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고자 하는가. 잠깐 이삼일만 참으라.

    직접 번역은 아니고, 일본의 구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가 ‘아, 무정(噫 無情)’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낸 소설을 놓고 재번안한 것이다. 우보가 연재를 시작하기 한 해 전인 1917년의 상반기를 후끈 달구었던 이광수(李光洙)의 연재소설 ‘무정(無情)’만큼은 아니어도 첫 작품치고 인기가 좋았다. 후속 작품이 두 달 뒤에 나갈 예정이다. ‘장한몽(長恨夢)’의 조중환(趙重桓), ‘해왕성(海王星)’의 이상협을 잇는 듯이 보이는 신예 작가의 출현에 장안의 이목이 쏠려 있다. 매일신보에 차례로 입사한 이 세 기자를 일컬어 벌써부터 3대 번안 작가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너 참 불쌍타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1925년 상영된 영화 ‘장한몽’.

    ‘아, 무정’은 16년 전인 1903년, 일본 신문에 연재를 마친 작품이다. ‘만조보(萬朝報)’라고 하는 그 신문을 작가 구로이와는 1892년에 직접 만들었는데, 창간 10주년에 연재한 것이다. 빅토르 위고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10년간의 기자 경험을 살려 창간한 ‘오만 가지 아침 소식’이라는 뜻 정도가 되는 타블로이드판 일간신문은 탄탄한 영어 실력에 기초한 그의 번안소설 연재와 맞물려 한때 동경 제일의 발행부수인 30만 부에 달할 정도였다.

    ‘요미우리(讀賣)신문’에 5년 넘게 절찬리에 연재된 ‘금색야차(金色夜叉)’가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죽음으로 일단락된 것도 1903년이었다. 20여 년 되는 일본 신문소설계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면서 요미우리의 영향력을 급상승시켜놓은 이 장편소설은 10년이 지나 1913년 매일신보에 ‘장한몽’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연재되었다. 아타미(熱海)의 해변에서 사랑의 원한(怨恨)을 주고받던 일본인 남녀 주인공은 대동강변 이수일과 심순애로 탈바꿈했다. 평양의 대동강으로 할까 서울의 한강변으로 할까, 아니면 인천의 만국공원으로 할까 진주의 촉석루로 할까 망설이던 작가 조중환은 1910년부터 매일신보 기자였다. 소설 ‘자유종(自由鐘)’을 발표한 이해조(李海朝)가 그보다 조금 앞서 입사해 있었다. 조중환은 1918년에 매일신보를 퇴사했다. 조중환은 1910년을 전후한 시절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같으면 조선청년도 선배의 창작과 번역을 통하여 소설과 시 등 문예적 교양을 쉽사리 얻어 가질 수 있지마는 그때에는 한 조각의 소설, 한 편의 시가를 얻어 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겨우 간행물로는 매일신보가 있었고 잡지도 육당(六堂)의 ‘청춘’과 ‘소년’과 ‘아이들보이’들이 있었을 뿐. 선배로 맞을 사람이 오직 한 분이 있었으니 그는 ‘귀의 성’ ‘혈의 누’를 쓰던 이인직 씨일 뿐.

    조중환과 이상협이 1·2면의 딱딱한 정치 외신 경제 기사와 3·4면의 부드러운 사회 문화 기사를 나란히 나누어 맡아 신문을 제작하던 1915년에 동경의 후소샤(扶桑社)가 ‘아, 무정’을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그 서문에 구로이와는 이렇게 썼다.

    ‘레미제라블’이란(…)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괴로움을 당하여 마치 상갓집 개처럼 되는 상태와 잘 들어맞는다. 일본의 문학자가 대개 ‘애사(哀史)’로 일컫는 것은 어떤 의미를 선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사회의 무정함으로부터 한 개인이 어떻게 고통을 받는지를 알리는 것이 원작자의 뜻인 줄 믿기 때문에 (…) ‘아, 무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역술(譯述)의 체계는 (…) 원작을 읽고 스스로 느낀바 그대로 나의 뜻에 따라 서술해 나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이라 하기보다는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내가 아는 이야기로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것이다. 만약 이를 읽고 원작과 대조하면서 독해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나는 사우(社友) 야마가타 이소(山縣五十雄)의 ‘영문 연구 시리즈’를 간절히 추천하는 바이다.(영미 유명작가의 시가와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이다.)

    야마가타 이소는 경성일보 매일신보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3대 기관지인 영자신문 ‘서울프레스(Seoul Press)’의 사장이다. 구로이와의 만조보에 기자로 있다가 1909년 서울프레스의 2대 사장으로 부임했는데, 셰익스피어에 정통한 저명한 영문학자이기도 하다.

    일찍이 레미제라블에 주목한 최남선(崔南善)은 일본어 번역에서 한 장을 발췌해 1910년 그의 잡지 ‘소년’에 전재했다. 또 1914년에 창간한 ‘청춘’ 첫 호의 부록에 ‘세계문학 개관’이라 하여 그 줄거리를 실었는데, 거기서 최남선은 제목을 ‘너 참 불쌍타’로 번역해 달았다.

    1895 乙未 타임머신

    민태원의 ‘애사’는 2월 8일자에 마지막 회가 나갔는데, 주인공 장발장이 코제트와 마리우스 앞에서 운명하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유학생들이 모여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 노선을 밝힌 날이었다. 종로로 돌아가느냐 황금정으로 곧장 가느냐 논란이 분분하던 고종의 장례행렬 노선이 황금정으로 결정 난 날이기도 했다.

    불이 꺼지려고 할 때에 반짝하는 모양으로, 사람이 죽으려 할 때 잠시 동안 정신이 나는 것인가. 장팔찬은 그때가 돌아온 모양이다. 별안간 벌떡 일어서며 고설도의 어깨에 의지하여(…) 홍만서를 쳐다보고(…) “빈민과 같이 장사 지내어라. 삼등 묘지 한켠에다가 비석 같은 것도 세우지 말고(…) 지금 너의 팔자가 좋은 것만큼 너의 모친은 고생을 하셨느니라. 네가 지금 호강하는 것도 너의 모친이 고생을 하신 값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공평한 것이라 고생 끝에는 낙이 돌아오나니”. (…) 장팔찬은 두 사람의 머리에다가 한 손씩을 얹고 어루만지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는 웃음이 없던 사람이지만 죽어서는 얼굴에 광채가 났다.

    우보 민태원은 문장이 유려하다. 번안소설이라면 경력이나 작품 양에서 이상협이 한참 앞서지만 소설적 필체는 우보를 따르지 못한다. 관립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이상협은 하몽(何夢)이라는 이국적 느낌의 호를 필명으로 삼아 우보 입사 한 해 전부터 내리 5년간 5편의 번안소설을 연재했다. 그 네 번째 작품이자 13개월 최장기 연재물이었던 ‘해왕성’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번안이다. 원작을 번안한 것은 아니고, 구로이와 루이코가 ‘아, 무정’보다 한 해 앞서 ‘암굴왕(巖窟王)’으로 번안해 자기 신문에 연재한 것을 저본으로 삼아 재번안한 것이다.

    ‘해왕성’에 이어 이상협의 마지막 연재소설이라 할 ‘무궁화’가 1918년 7월에 끝나자 바로 다음 날 우보의 데뷔작 연재가 시작되었다. 우보를 신문사로 데려온 것도 하몽이었고, 우보에게 소설 연재를 물려준 것도 하몽이었다. 구로이와 루이코라는 보물단지도 그가 물려주었는지 모른다. 구로이와는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 ‘달세계 여행’을 1883년에 번안한 이래 당대 유럽의 주요 작품을 100편 이상 번안해냈다. 조중환이 일본작을 번안한 ‘장한몽’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1913년에 구로이와는 H.G. 웰스의 1895년 대작 S.F. ‘타임머신’을 그만의 스타일로 번안해 만조보에 연재했다. 새 제목은 ‘80만 년 후의 사회’.

    일본 사람들이 번역을 워낙 잘해내기 때문에 일본어만 조선어로 잘 풀어내도 세계의 물정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정도다. 눈과 손이 빠른 이상협은 그와 대조적인 한 살 아래 두 해 후배 민태원을 애지중지한다. 경쟁 없는 신문이라 하지만 매일신보의 판매부수는 연재소설의 인기에 영향을 받는다. 창간 때 1만2000부로 출발해 햇수로 10년째다. 공공기관의 의무구독을 빼면 민간인의 자발적 구독은 가변적이다. 비록 독점이라고는 하나 일본어 신문을 찾아보는 조선인 독자도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연재소설은 중요하다. 오늘의 국장은 너무나 중요하다. 오늘 밤늦게 도착할 금곡(金谷)의 장지(葬地)까지 민태원과 함께 가기 위해 특별히 신문사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대한문 앞은 날이 밝아오기 전부터 이미 만원이었다.

    문 밖 광장 중앙에 높이 친 차일(遮日) 안에 큰 상여(大輿)가 대기하고 운구(運柩) 인원 수백 명이 그를 에워쌌다. 그 너머로 예복 찬란한 칙임관(勅任官)들이 늘어서 있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 500년간 정1품에서 종2품까지로 불리던 최고위 문무백관들이다.



    죽은 나랏님이 가난을 구제한다

    칙임관석을 중심으로 왼편 장곡천정(長谷川町) 쪽에는 해군 군악대를 위시해 해군 제1대대, 제19사단 사령부, 기병 중대가 도열했다. 이어지는 각급 부대별 대오가 조선호텔 앞을 지나 조선은행까지 늘어섰다. 15년 전 조선주차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관사였던 대관정(大觀亭) 앞길에도 보병 제78연대 2, 3대대가 줄지어 들어섰다. 한편으로 태평통 2정목 쪽은 이왕직 양악대(李王職 洋樂隊)를 선두로 해 전국에서 차출된 육해군 장병이 부대별로 구역을 나눠 남대문까지 긴 행렬을 이루었다. 전군지휘관으로서 국장 의례의 호위 총책을 맡은 우도궁태랑 사령관이 선두에 자리했다. 그의 뒤로 동경에서 파견된 황실 근위보병중대가 붙어 섰다.

    덕수궁 안과 바깥 광장을 아울러 내려다보고 선 경성일보·매일신보·서울프레스 공동 신문사옥의 뒤편 공터에는 장례 행렬을 따를 관리와 각계 대표들이 단정한 예복 차림으로 대기 중이다. 그곳은 조선조에 무기와 화약을 제조하던 군기사(軍器寺) 터다. 그 앞길은 국왕의 심기를 불안 혹은 불편하게 하는 이들이 역적(逆賊)이란 이름으로 공개 처형되던 장소였다. 그 뒤편 무교정(武橋町) 길을 따라 장의행렬에 동원될 각양각색 의식장비가 순서대로 착착 늘어섰다. 14만 원의 특별예산이 국장의식에 책정되었다. 한 달 넘게 장례를 준비해온 사람들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무수한 인파가 미동도 없이 빚어내는 기묘한 정적이 덕수궁 앞 광장을 뒤덮었다. 기미년의 경칩을 목전에 둔 월요일 아침이었다.

    국장행렬이 통과할 황금정 1정목으로부터 훈련원 터 어귀에 이르는 황금정 길 2.5㎞ 연도는 이른 아침부터 학교와 단체의 인파가 늘어섰다. 그 뒤로 군중이 빈틈없이 들어섰고 그 앞으로 경관과 헌병이 20m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이틀 전 3월 1일과 같은 소요의 조짐은커녕, 들뜬 웅성거림조차 드물었다.

    군중은 캄캄한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4시부터 특별 운행에 나선 전차의 경종 소리가 떵-떵- 새벽바람을 가르고, 올라탄 사람들로 터질 듯한 전차는 해맞이 가듯 동으로, 동으로 향했다. 객지 잠에 편안히 꿈도 꾸지 못한 상경객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낯선 골목마다 서툰 몸짓으로 빠져나와 사람멀미 나는 거리로 나섰다.

    경성 내 163개소의 조선인 경영 여관과 33개소의 일본인 경영 여관은 서너 날 전부터 매일 수만 명씩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로 일찌감치 만원이었다. 여관을 잡지 못한 사람들은 하숙을 찾는 데 113개소의 조선인 하숙 역시 더 이상 들어찰 곳이 없어 방 한 칸에 열 사람이 들어앉아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사람들이 매일 1원씩을 쓴다고 하면 하루 10만 원이라는 큰돈이 경성 바닥에 떨어진다는 계산이다. 깊은 슬픔 속에 상인과 거지들은 절호의 대목을 만났다. 서울거지 떼가 시골양반들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애걸을 하면 순박한 시골사람들은 제각각 한 푼씩 쥐여주어 거지 한 사람당 일당이 평균 4~5원에 달한다 한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 하지만 죽은 나랏님은 그것도 가능하다.

    시시각각 늘어나는 군중은 6시가 넘어서면서 종로통, 황금정통, 남북 개천 길의 네 길목을 가득 채워나갔다. 거대한 흰색의 4열 평행선이 서에서 동으로 도성에 지름을 그어갔다. 한양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고 수군들 댔다. 누군가는 청계천이 흐르고 처음일 거라 했다.



    조선보병대의 나팔소리

    7시 반. 아침 내내 요란하던 전차 운행은 일제히 중지되었다. 부산하던 행인의 거동도 잦아들었다.

    덕수궁 안 빈전을 나선 임금의 관(梓宮)이 작은 상여(小輿)에 실렸다. 함녕전의 광명문(光明門)을 넘어선 소여는 주인의 오랜 거처를 뒤로하고 왼쪽으로 머리를 틀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대한문을 향했다. 고종은 왕의 자리에 44년을 있었고 여기 덕수궁에서 22년을 살았다. 발자국 소리 한 점 낼세라 경내를 서서히 이동해 구름처럼 대한문을 나선 소여는 황색 백색 만장을 앞세우고 광장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한겨울에 쓰러져 빈소에 한 달 열흘 누운 동안 봄은 소리 없이 다가서 있다. 저만치 남산에는 겨우내 보았던 회갈색 사이로 은은한 연둣빛이 보일 듯 말 듯 배어들고 있다. 청명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소여는 만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여로 옮겨 태워졌다. 8시였다.

    해시계로는 아침이지만 왕조의 시간으로 본다면 황혼이었다. 장구한 시기를 지속한 구세계가 마지막 흔적의 꼬리를 끌며 시대의 저편 언덕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섯 세기를 넘치도록 꽉 채운 이씨 왕조의 운명(殞命)이었다.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고종황제 장례식 때 사람들이 모형말인 죽안거마가 지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장곡천정 입구의 해군군악대에서 이름 모를 처량한 조곡(弔曲)이 울려 퍼졌다. 아마도 서양 곡조인 듯했다. 일본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쩌다 조선 사람이 포함돼 있었지만 악기도 복장도 연주도 모두 서양식이다. 이를 신호로 삼아 군복 차림의 다섯 기마경찰이 에스코트 하는 군악대를 선두로 의장 행렬의 첫머리가 황금정 들머리로 천천히 꺾이면서 접어들기 시작했다.

    8시 10분. 군악대를 따라 해군 1대대가 총을 거꾸로 메고 가만가만 나아갔다. 19사단 사령부 장교들이 이어 진행한다. 홍백(紅白)의 창기(槍旗)를 비껴든 기병 27연대 제3중대가 말굽소리도 조용조용 나아가며 행렬에 위엄을 더했다. 평양 주둔 보병 77연대 본부가 총검 멘 다섯 호위병으로 둘러싼 연대 깃발을 앞세우고 구슬픈 나팔소리에 맞춰 진행하고, 용산 주둔 78연대가 3개 대대별로 나뉘어 나아간다.

    태왕의 궁궐을 수호해온 마지막 한국군,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비창한 나팔 곡조에 맞추어 가지런히 그 뒤를 이었다. 12년 전 정미년에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마지막 흔적이자 그와 함께 유폐된 황실의 상징적 수호자다. 그때 함께 문을 닫은 한국군대의 요람, 훈련원(訓練院)의 빈 터를 향해 이들은 가고 있다. 그때 폐위되었던 황제는 이제 그 옛터에 들러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이런 장례식은 조선 예법에는 없는 것이다. 발인 때 제사를 지냈으면 장지로 가는 도중에 노제(路祭) 한 번 지내는 것이지 다중이 별도의 넓은 장소에 모여 장시간 영결식을 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더구나 악대(樂隊)는 소리 없이 따르기만 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이 곡조 저 곡조 나발을 불어대는 법은 없었다. 3년상을 치를 동안 궁중에서는 종묘사직의 제사 외에는 음악 연주가 없었다.

    일본식 혹은 서양식이 뒤섞인 잡종 예식을 치르기 위해 대한문을 나온 행렬이 황금정을 따라 훈련원 터로 움직이는 동안, 다른 또 하나의 행렬은 덕수궁의 북쪽 영성문(永成門)을 나서 야주현(夜珠峴)에서 우회전해 황토현(黃土峴)을 지나 종로로 진입해 동대문을 향하고 있다. 이 조선의 전통적 장의행렬은 훈련원 터에서 장례식을 마치는 대로 영구를 넘겨받아 동대문을 넘어 청량리에 멈춰 노제를 지낸 뒤 금곡을 향해 밤늦도록 먼 길을 갈 것이다.

    하느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긴 의장대의 선두가 황금정 2정목을 지나고, 큰 상여에 누운 전날의 황제 이태왕은 향년 67세에 광장으로 나와 곧 있을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22년 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던 10월의 그날, 고종은 가마에 앉아 대한문을 나서 이곳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행선지는 광장 건너 마주 보이는 지척의 환구단이었다. 그날도 월요일이었다. 독립신문은 그 광경을 이렇게 보도했다.

    11일 오후 2시 반에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정렬하여 섰으며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가지런히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내며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의 왕래를 금하고,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들을 고쳐 누른빛으로 새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으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여 지나는데 위엄이 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

    나라의 이름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니고 대한제국이다. 임금의 명칭도 왕이 아니라 황제다. 황제의 제국, 즉 황국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래서 환구단을 새로 지었다. 황실에서 사용하는 의식장비들은 황국의 색, 황색을 쓴다. 조선은 제26대 왕 고종에 이르러 제2의 건국을 한 셈이 되었다. 창간 1년 6개월로 접어든 독립신문은 의기양양한 필체의 기사를 한 면 가득하고도 넘치게 실었다. 서재필의 의욕이 정점에서 타오르던 시절이다.

    육군 장관들은 금수 놓은 모자들과 복장들을 입고 은빛 같은 군도들을 금줄로 허리에 찼으며 그중에 옛적 풍속으로 조선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더러 있으며 금관 조복한 관원들도 많이 있더라. 어가 앞에는 태극 국기가 먼저 가고, 태황제 폐하께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타시고, 그 뒤에 황태자 전하께서도 홍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시며 붉은 연을 타시고 지나시더라.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러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친히 살핀 후에 도로 오후 4시쯤 환어하셨다가 12일 오전 2시에 다시 위의를 베푸시고 황단에 임하셔 하느님께 제사하시고 황제위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오전 4시 반에 환어하셨으며 동일 정오 12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기꺼워들 하더라.

    한자가 거의 없이 순 한글로 써내려간 독립신문의 기사대로 서양식 금박 입힌 제복에 칼을 찬 장군들 사이로 재래식 조선군복, 그리고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 예법에 준한 문무백관의 공식 예복(金冠朝服) 차림이 혼재했다.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 지내기 12시간 전에 현장을 둘러보고 준비상황을 점검한 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행차였다. 중국의 천단(天壇)보다 규모는 다소 작지만 비슷한 3층 구조의 환구단에서 이렇게 번듯하게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조선왕조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조선 개국 초 강력한 통치력를 구사했던 태종(太宗)이 하늘에 제사를 올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신하의 거듭된 건의에 한 말이 있다. “내 일찍이 듣기로,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경내(境內) 산천(山川)에 제사한다 했다. 난 이 예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늘 제사는 감히 바라지 못한다.”

    제사를 올리는 도중 새벽비가 내렸다. 의복이 젖고 추위를 느꼈으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커서 다들 맡은 바 직무를 착실히 수행했다고 독립신문은 썼다. 그리고 힘주어 이날의 의미를 되새긴다.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역사에 몇 만 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느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사 12일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대황제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만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 11일과 12일에 행한 예식이 조선 역사에 처음으로 빛나는 일인즉 우리 신문에 기재하여 몇 만 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읽게 하노라.

    신도(神道)

    의장대 행렬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 장의행렬 본대가 그 선두를 나타내었다. 회색의 일본식 제복(祭服)을 입은 장의(葬儀) 담당 판임관(判任官) 두 명이 앞서고 황색 백색 비단 깃발 네 쌍이 아침 공기를 가르고 펄럭인다. 판임관은 25년 전까지 7~9품으로 불리던 직급이다. 역시 일본 상복 차림의 총독부 소속 판임관 둘이 앞장서고 험상궂은 탈바가지를 쓴 방상시(方相氏) 네 쌍이 검은 방패를 들고 나아갔다. 이승을 떠나는 길에 악귀를 쫓아낸다는 조선 전래의 장의 풍속이다.

    네 명씩 조를 지어 한 길 두 길 높이의 나무들을 울러메고 지난다. 조선 총독과 일본 궁내대신, 일본 총리가 조의를 담아 보내온 신목나무 세 쌍이다. 일본식 풍습이다. 황색과 백색의 구름무늬가 새겨진 특이한 비단 깃발 한 쌍이 뒤따르는데 일본에서도 드물게 보는 귀한 의장(儀裝)이라 한다. 일본식 회색 예복을 입은 제관장(祭官長) 이등박방(伊藤博邦) 공작이 홀(笏)을 잡고 엄숙히 걸어가고, 같은 차림의 제관부장(副長) 조동윤(趙東潤) 남작이 검은 부채를 잡고 뒤따른다. 이등박방이 하얼빈에서 숨진 아버지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유해를 대련(大連)에서 인수해간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뒤 이등박문은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서되고 아들 이등박방도 아버지와 함께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등박방 제관장의 뒤를 따라 일본 황실의 13개 궁가(宮家)에서 보낸 신목 나무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 장례식이 만약 없었다면 지금쯤 이태왕과 사돈을 맺었을 이본궁(梨本宮)에서도 신목을 보내왔다. 그와 더불어 천황과 그 황후와 황태자가 보낸 신목이 나아간다. 이왕직의 민병석(閔丙奭) 장관과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 차관이 뒤따른다. 병합 이후 초대 이왕직 장관으로 9년째 이태왕을 보필해온 민병석 장관은 국분 차관과 꼭 같이 정통 일본 제관(祭官)의 복장을 갖추었다. 청회색 넓은 바지 모양의 하의에 검은 윗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흰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검은 사모(紗帽) 같은 것을 썼는데, 조선에서 처음 보는 일본의 전통 제례의복이었다. 말로만 듣던 신도(神道)식이 그것인가 보았다. 민병석은 10년 전에는 대한제국의 궁내부 대신으로 이등박문 장례식에 특사로 파견되었었다. 그때 유족에게 10만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 그로부터 12년 전인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에 뒤늦게 거행된 명성황후의 장례비용이 10만 원이었다.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영친왕과 일본 관료들이 덕수궁 석조전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에 걸린 조기

    고인이 생전에 받은 찬란한 훈장들을 두 손으로 함에 받쳐 든 육군 장교들이 화려한 대례복(大禮服) 차림으로 진행한다. 국가의 중요한 의식 때 입는 예복인 대례복은 갑오경장 때 조선식을 탈피해 크게 바뀌고 1900년 봄부터 완전 서양식으로 탈바꿈했다.

    8시 반. 대여를 둘러싸고 있던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며 줄줄이 차일 밖을 나선다. 경성과 인천 수원 기타 지방의 상인들로 구성된 봉도단(奉導團)의 하얀 행렬이 상여를 메고 끌며 긴 꼬리를 이어 나아간다. 경성포목상조합장으로서 상민(商民)봉도단장을 맡은 55세의 박승직(朴承稷)이 흰 패랭이 아래 이마에 때 이른 땀을 쏟으며 거대한 줄다리기 떼모양 양갈래로 펼쳐 나아가는 운구행렬을 독려하고 있다. 사농공상.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상민(商民)은 아직 상민(常民)이다.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지만 유습은 아직 상여 자락처럼 꼬리를 드리우고 있다.

    2년 전까지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추산호고(秋山好古) 대장이 막 환갑을 지난 노구를 이끌고서 상여 좌우에서 수행 호송하는 일본인 조선인 고위 장성들을 선도했다. 이 상여가 움직이는 시각에 맞춰 인천 앞바다에는 정박한 파견 군함 두 척에서 발사하는 조포 21발이 짙은 아침 안개를 뚫고 20분에 걸쳐 울리기 시작했다.

    대한문을 나선 쌍두마차 석 대가 대여를 뒤따른다. 이왕(李王), 영친왕(英親王), 이강공(李堈公)이 탄 마차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서로 다른 세 사람. 이왕은 초췌한 안색에 아직도 방한용 두건을 쓰고 그 위에 굴건(屈巾)을 덧쓰고 있다. 겨우내 함녕전 빈소 앞마당에 초가 여막(廬幕)을 짓고 한 달 넘도록 겨울을 난 여파가 역력하다. 오간수 다리 아래 가마니 치고 겨울 나는 청계천의 걸인 못지않게 겨울의 초상은 상주에게 유독 혹독하다. 왕손이 아니었다면 고통의 기간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유교 사회의 장자(長子)는 영(榮) 욕(辱) 모두에서 상속 1순위다. 장자사회, 가부장제도하에 숱한 영혼이 망가져왔다.

    왕세자 영친왕은 애통한 마음을 간신히 참으려는 기색이 연도의 백성들 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를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던 어머니 엄귀비는 왕세자 지위가 국왕 자리로 연결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병합 다음해 숨졌다. 왕세자가 잠시 떠나온 동경의 왕세자저에서는 직원들이 대여 발인 시각에 맞춰 모여 경성 방면을 향해 절을 올렸다. 동경 시내에는 주요 건물과 전차마다 조기를 게양했다. 일본 바깥의 일로 동경에 조기가 걸린 것은 1910년 5월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 때 이후 처음이다. 당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인 70명의 각국 왕실 조문객 틈에는 일본 천황의 동생도 있었다. 러시아를 물리치고 동양의 챔피언으로 오르기까지 영일 동맹이라는 파트너십을 유지해온 양국관계를 고려한 조처였다.

    3·1만세 전야에 마주 앉은 민족대표와 일본 군사령관

    고종의 다섯 번째 왕자로 왕족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의화군 이강(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3월 3일 일본은 전통 축제인 히나 마쓰리(雛祭) 날이었으나 예년과 달리 고요했다. 서열에 따라 왕세자 뒤에서 마차를 타고 가는 이강공은 비교적 감정이 덜 드러나는 표정이다. 순종 이왕보다 세 살 아래. 의친왕(義親王) 이강은 스무 살 어린 영친왕 이은의 왕세자 책봉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는 엄귀비의 사주로 1905년까지 5년간을 미국에 유학 명목으로 격리되어 지냈다. 그는 가까스로 귀국했고, 그 2년 뒤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 명목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12년을 격리되어 지내고 있다.

    착잡한 감정을 애써 감춘 채 서로 떨어져 진행하는 세 상주 전하의 마차와 대여를 우러러보는 길가의 백성들은 눈물을 감추지 않고 감정을 분출했다. 세 상주의 마차를 따라 종친 귀족들이 제복 차림으로 걸었고 그 뒤로 대례복을 입은 산현(山縣) 정무총감과 총독부 간부들, 그리고 고인의 최후를 지켜보았던 주치의 세 명이 따랐다. 그 뒤로 문무백관과 각계의 대표자들이 예복 차림으로 따르는데 그 수가 400~500명에 달했다.

    이왕직 양악대의 비창한 장례곡에 맞춰 다시 한 무리의 의장병이 다가왔다. 그 선두에 육해군 총지휘관인 우도궁 군사령관이 지휘 검을 빼어 메고 진행했다. 아침 햇살에 번뜩이는 칼날의 은빛을 받으며 대야(大野豊四) 군참모장 이하 참모들이 뒤따랐다. 이어 동경에서 특별 파견된 근위보병 제2연대의 제12중대가 행진하고 용산의 보병 40여단 사령부와 제79연대, 대구 주둔 제80연대 본부, 그리고 해군 제2대대, 기마경관 순으로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의 선두가 훈련원에 마련된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한참 뒤 긴 행렬이 황금정에서 비로소 꼬리를 감춘 것은 10시가 되어서였다. 임시 가설된 선로 레일을 타고 상여가 식장으로 들어왔다. 완전 일본식 장례가 훈련원 터에서 진행되었다.

    긴 장례가 끝난 것이 11시 50분이었다. 장의행렬은 다시 금곡의 장지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우도궁 사령관은 그 길로 용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뭔가 터질지도

    관저로 들어오는 길로 우쓰노미야 사령관은 예복을 벗고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군사령부는 비상 경계 중이다. 3월 1일 토요일의 한바탕 소요가 있고 나서 어제 일요일을 지나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다. 오늘 밤까지 국장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내일 4일부터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시 한 잔을 더 비웠다. 긴장의 덩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며 가라앉기 시작한다. 위장의 건강을 조심하고 정기적으로 체크하라는 의료진의 지적이 있었다. 이곳 관사에서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 회식이 벌어지지만 술은 소량으로 자제해왔다. 언젠가는 금주를 실행할 작정이다. 정오의 햇살이 실내를 다사롭게 채우고 있다. 한 잔을 더 채웠다.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에 중대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요사이 험악하게 돌아가는 조선의 민심이나 1일의 소요 사태에 비추어 오늘은 뭔가 크게 터질지도 모른다는 각오였다. 권동진(權東鎭)이 며칠 전에 들려준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아무 일 없이 장례식이 끝나고 이렇게 차질 없이 관저로 돌아오게 되고 보니 실로 유쾌하고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관례를 깨고 점심상에 술을 시켜서 요 며칠 짓눌려온 마음고생을 흘려내보는 것이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센바 다로(仙波太郞)에 이어 ‘일본 육군의 3대 다로’라 불리며 30년 넘게 동서양의 산전수전을 넘나든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이지만 이날 오전 경성 한복판 길바닥에서 10만 군중에 둘러싸여 5시간 동안 느낀 긴장감은 유별났다. 흰 구름에 둘러싸인 거대한 회랑과도 같은 2.5㎞ 구간을 앞만 보고 걷는 내내 권동진의 한마디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틀 전인 3월 1일 오후 3시. 형세가 심상치 않으므로 병력 투입 바란다는 아도(兒島)경무총장의 전화를 받고 우도궁 사령관은 즉각 보병 1개 중대를 출동시켰다. 경성의 각 방면으로 행진하는 군중이 수천 명이라 순사와 헌병으로는 힘들다고 했다. 조선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막 관사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평소 습관대로 주말 오후의 산보 정도를 예상했던 우도궁은 아차, 했다. 잠시 후, 1만 명도 넘는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으며 일부는 창덕궁 덕수궁 문 안에까지 함부로 들어가 조선보병대와 헌병대가 간신히 몰아냈다는 보고가 왔다. 병력은 계속 추가돼 마침내 보병 7개 중대에 기병 1개 소대로 증원됐다. 며칠 내내 분위기가 험상궂다는 낌새는 채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알았더라면 조선호텔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우도궁 사령관은 1일 오전부터 분주했다. 조선호텔로 가 추산(秋山) 대장을 예방했다. 국장 참석차 어젯밤 서울에 도착한 그를 남대문역에서 영접하고 오늘 다시 숙소로 문안 인사를 드린 것이다. 추산 대장―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우도궁 사령관의 전전임자다. 1916년부터 1년간 조선군사령관을 지낸 뒤로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의 직책을 받아 일본 군부 최고 원로의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아키야마는 일찍이 기병대 소장이던 1901년에 청국 주둔군사령관이 되어 2년 후 센바 다로 육군 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어 기병 제1여단장으로서 러일전쟁에 참가해 만주벌판에서 세계 최강의 코사크 기병을 격파했다. 일본 기병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러일전쟁 때 제 1함대 작전참모로 동해에서 세계 최강 발틱 함대를 격멸한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의 형이기도 하다.

    우도궁은 역시 조문객으로 조선호텔에 투숙 중인 체신성(遞信省) 대신 야전(野田卯太郞)에게도 인사하고 이어 척식국(拓植局) 장관 고하(古賀廉造)를 만나 오찬을 함께 했다. 국장이 일어나니 동경에 들러도 만나보기 쉽지 않은 중요 인맥들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고향 사람인 고하는 부인과 사별한 그에게 재혼을 중매한 인연이 있다. 주말이자 월말인 어젯밤 2월 28일에도 그를 용산 관저로 초대해 만찬을 함께했다.

    국상 때 조심하라

    그 전날 2월 27일 밤에는 권동진을 만났다. 만찬을 함께한 것은 아니고, 우도궁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용산 관저에 있는데 권동진이 찾아왔다.

    권동진은 천도교(天道敎) 내에서 도집(都執)·도사(道師)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핵심인물이다. 대도주(大道主)라 칭하는 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를 보좌하는 최측근이다. 동갑인 우도궁과 권동진은 이십년지기(二十年知己)다. 30대 시절 일본에서부터 서로 알고 지내왔다. 권동진은 손병희를 1901년 동경에서 처음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우도궁과 아는 사이였다.

    권동진은 조선군사령관 관저에서 이루어진 한밤의 대좌에서 우도궁에게 조선인의 인심의 괴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실상을 말하면서, 이번 국장 때에 아무런 사건도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국장 당일은 아무 불상사 없이 지나갔으니 권동진의 경고는 빗나갔다 할 수도 있겠지만 국장에 임박해 독립만세시위가 터졌으니 그의 경고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세운동은 3월 1일 아닌 3월 3일에 벌어질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토요일보다는 월요일이 대중 시위 벌이기에 적당한 날일 것이다. 다만 국왕의 장례에 대한 배려로서 3일은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어서 우도궁은 막연한 불안감 속에 빈객들을 맞느라 경황없는 와중에 3월 1일 오후 일격을 맞아 당황했고, 3월 3일 오전 내내 더없는 긴장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동진이 우도궁을 찾아온 27일 밤은 독립선언문이 야밤 인쇄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조판작업을 완료한 상태에서 천도교 직영 보성사 인쇄소에 대기하고 있었고, 독립선언 대표 33인의 연대 서명 날인이 계파별로 최종 마감되고 있던 때였다. 그 다음 날에 인쇄된 선언서와 연명부를 놓고 권동진을 비롯한 33인이 가회동 손병희 집에 모여 다음 날의 거사를 위한 최종 정리를 할 계획이었다.

    권동진의 조언이 조언 이상의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우도궁은 일말의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군사령관의 본분에 보이지 않는 오점을 찍은 것일 수 있다.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적인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 한마디 나온 것뿐이라 하더라도 그의 직업적 자존심은 용납하려들지 않는다.



    러시아혁명과 신해혁명 지원한 일본군

    우쓰노미야는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군복무의 거의 대부분을 바쳐온 정보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청년장교 시절 주로 육군참모본부에서 정보업무를 맡았고 청일전쟁 중에는 대본영 육군참모로서 정보 수집 분석을 담당한 그다. 전쟁 이전에 청국-일본-영국의 군사외교관계에 대한 장문의 정세분석보고서를 참모차장에게 제출하고 영국령 인도에 1년간 파견되었으며, 전후에는 점령지 대만과 청국 전역을 드나들며 현지 요인들을 접촉하고 정세분석 보고서를 집필했다. 20세기에 들어서 근 5년간 영국주재 공사관에 무관으로 있으면서 러일전쟁을 맞아 스웨덴 주재 무관 아카시 모도시로(明石元二郞)를 도와 러시아 공작에 참여했다.

    우도궁태랑이 정보 군인이라면 명석원이랑은 첩보 모략 군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렸다. 우도궁이 런던에 부임하던 1901년 파리에 배치된 명석은 다음해 러시아 주재 무관이 되었는데 2년 뒤 러일전쟁이 터지자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옮겼다. 여기를 근거로 해 유럽 전역에 산재한 러시아 혁명당원들과 접촉하며 자금을 제공하고 단결시켜 러시아 국내의 반란 파괴 공작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세계 최강이라는 러시아 육군은 그 주력이 내란에 발이 묶여 극동지역으로 파병될 여력을 잃었다.

    만주 전선에서의 일본군 승리는 총 100만 엔의 경비가 들었다는 이 ‘명석공작(明石工作)’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명석 대좌(대령) 혼자서 10개 사단의 일을 해냈다”고 이등박문은 알기 쉽게 평가를 내려주었다. 건국 이래 처음 서양인과 싸워 이겼다고 흥분하면서도 왜 이겼는지를 잘 모르겠다고 어리둥절해하던 일본인들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아카시는 이후 이등박문의 발탁으로 통감부 시절 헌병대사령관으로 부임해 병합공작을 담당했다.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 초대 경무총장을 3년 6개월 지내면서 무단통치의 기반 조성에 주력했다. 지금은 대만 총독 겸 군사령관으로 나가 있다.

    러시아 공작의 경험을 살려 우도궁은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때에 혁명주도세력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청제국 타도와 중화민국 건국을 측면 지원했다. 이번에는 미쓰비시(三菱) 재벌의 돈을 끌어들였다. 홍콩과 영국 하와이와 일본을 떠돌던 손문(孫文)은 일찍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혁명이 발발하는 것을 보고 1905년 8월 동경에서 유학생 등을 규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 무장봉기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곳의 지성들로부터 정신적으로 큰 지원을 받았다.

    권동진이 우도궁 사령관을 용산의 관저로 방문한 것은 올해 들어 세 번째다.

    한 달 보름 전인 1월 12일에는 오찬에 초대를 받고 왔다. 일요일이었다.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보니 오후 3시가 넘도록 이야기가 이어졌다. 주로 천도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우도궁은 비망록에 그렇게 적어두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핵심 내용은 기록해둔다. 1900년부터의 습관이다.

    대화 도중 어담(魚潭)이 방문했다. 조선보병대 대좌(大佐)인 그는 사령관저 출입이 잦은 조선인 중 하나다. 1895년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한국 군대 해산 이후에도 줄곧 왕실 호위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 우도궁은 그를 권동진과 마주치지 않게 별실로 안내해 잠시 면회하고 돌려보냈다. 이왕직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면 하는 눈치였는데 다음에 보기로 했다.



    동아시아를 위해 크게 뜻을 모으자

    이날로부터 8일 후인 1월 20일은 권동진이 천도교 동지인 오세창 최린과 더불어 교주 손병희를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천도교 차원에서 결의한 날로 알려져 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는 날이다.

    권동진이 우도궁의 용산 관저를 처음 찾은 것은 1월 5일이었다. 우도궁은 그의 일기에 10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권동진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권형진(權瀅鎭)의 동생. 망명 중에 자주 놀러와 어울렸던 사람 중 하나. 지금은 천도교의 간부이다. 앞으로 내가 얘기를 나누고 이용해야 할 사람의 하나다. 동아시아를 위해 크게 뜻을 모을 것을 약속하였다.”

    1919년 새해의 첫 일요일이었다.

    그로부터 햇수로 10년 전이 되는 1910년의 5월 24일.

    동경에서 육군소장으로서 특명검열의 중책을 수행 중인 우도궁태랑을 권동진이 내방했다. 두 사람 모두 49세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우도궁은 일기에서 권동진의 이름 앞에 오랜 친구(舊友)라고 썼다. 관민 의사소통 기관의 문제, 한국의 장래, 합방의 가부 등이 이날 화제에 올랐음을 기록해두었다. 권동진의 현재 직함은 천도교 고문, 그리고 대한협회 실업부장이라고 기재했다. 대한협회는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내세우며 1907년에 발족한 사회단체인데 병합을 촉구해온 일진회와 제휴해보기도 하고 우여곡절을 겪다가 나라 형편상 곧 문을 닫게 생겼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새 한국통감으로 임명되기 나흘 전, 병합 3개월 전이었다.

    그러고 보면 권동진이 10년을 간격으로 우도궁을 찾았던 두 번의 시기는 다 국가의 중대사를 앞둔 때였다. 나라의 운명이 완전히 거꾸러지기 직전, 그리고 거꾸러진 판세를 처음으로 한번 뒤집어보려고 하기 직전이었다.



    일본 망명객의 삼파전

    그로부터 다시 한 번 1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도궁의 일기에 권동진의 이름이 또 나타난다. 이번에는 그의 형 권형진과 함께 등장한다.

    1900년 5월 25일. 금요일 저녁에 권동진이 전보 한 장을 들고 급히 달려왔다. 서울의 형이 위험하다고 한다. 구해줄 방도가 없을까를 서로 궁리했으나 뾰쪽한 대책이 없었다. 다음 날 토요일에 권동진이 사무실로 다시 찾아와 형을 구할 방법을 도모해보았다. 소령 우도궁의 머릿속은 그 당시 청나라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유럽국들이 청국에서 난립하는 상황에서 작년에는 현지 출장을 다녀와 장문의 보고서 ‘청국에 관한 해답’을 집필했다. 두 달 후에는 참모본부 차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수행해 다시 청국에 들어가야 한다. 나라로부터 버림받아 6년째 외국에 나와 떠돌며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권동진이나 나라의 부름에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우도궁이나 벌써 나이 39세다.

    권동진도 조선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하던 1895년까지 그는 15년간 외길을 걸어온 정통 군인이었다. 을미사변 때 훈련대 소속이던 그는 네 살 위 형인 경무사(警務使) 권형진을 따라 경복궁 점령에 가담한 한국 군인 중의 하나였다. 그 일로 그해 말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행 8명 중에는 우범선(禹範善), 오세창(吳世昌), 이두황(李斗璜)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경의 근위사단에서 군사 학습과 실습을 하고 육군성에서 경리일도 보면서 박영효 유길준 같은 망명객들과도 교유했다.

    같이 일본에 있던 형이 지난달 4월에 귀국했다. 앞서 1월에 귀국한 안경수(安·#53566;壽)를 따라나선 길이었다. 을미사변에 참여할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안경수는 일본의 후원을 믿고 자수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감옥에 갇혀서도 한참 동안 별 탈이 없는 것을 보고 권형진도 따라 들어간 것이었다. 안경수는 을미사변 이후 한동안 서울에 남아 독립협회 초대 회장직도 하며 지내오다 1898년 황제 폐위 음모가 발각되면서 일본으로 도주했다.

    국내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친러 정권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망명객들이 동경에 그득했다. 정권을 전복하고 그 자리로 복귀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끈질기게 반복되었다. 다양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 일본에 나와 있는 이른바 친일개화파를 뿌리로 하는 그들 사이에는 크게 세 파벌이 있었다. 이준용(李埈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의 3파전인데 안경수와 권형진 같은 사람은 그 잔가지에 불과했다. 당파 싸움으로 인해 나라 밖에 나와 거기서 다시 파벌이 뚜렷하게 갈리며 대립 견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일본군 수비대·조선군 훈련대

    권동진과 우도궁이 걱정하는 동안 안경수와 권형진은 처형당했다. 법에 의해 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밤중에 경무사가 감옥에 들어가 목을 졸라 죽인 것이다. 임금이 일본을 두려워해 이런 방식을 쓴 것이라 술렁거렸다. 경무사는 이러한 방을 내걸었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오마는 을미사변은 천지개벽 이래 만고 세월 동안 듣도 보도 못한 음험 흉악 참혹한 일이었다. 통발에서 도망친 물고기 같은 저들이 일본에 들어갔다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귀국하였다. 법에 의거하여 일을 따라야 했지만(…) 울분의 혈기가 끓어올라 내 마음대로(…)

    두 사람이 죽자 일본공사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사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자국의 모욕이고 직무의 태만이라는 이유였다. 각국 공사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자 임금은 경무사에게 그 책임을 물어 해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그러자 그를 구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이상한 정치였다. 오랫동안 뒤틀려온 조선 정치 판도의 단면이었다. 조선의 기괴한 1900년대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그렇게 죽고 머지않아 1898년 대원군도 세상을 떴다. 꼬이고 뒤틀려 서로를 옥죄던 악연의 고리도 더불어 사라졌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저 없어졌을 뿐이다. 자기가 죽기 3년 전인 1895년의 시월에 며느리가 죽던 그날, 75세의 대원군을 실은 가마는 일본인 조선인 혼성 대열에 둘러싸인 채 서대문 밖을 출발해 정동을 거쳐 광화문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 오기 전이었다.

    대원군이 탄 가마를 한가운데 두고 낭인 50여 명이 일본경찰 10여 명과 함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일본군 수비대가 이었다. 수비대 뒤를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가 따르고, 대원군 가마 좌우는 낭인 별동대가 호위했다. 대원군 가마 바로 뒤에는 다시 일본군 수비대 1개 대대가 뒤따랐다. 맨 뒤에 이두황이 인솔하는 훈련대 제1대대가 배치되었다.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권문경 엮음, 민태원 선집, ‘현대문학’, 2010/ 박진영 편, ‘장한몽’, 현실문화연구, 2007/ 박진영 편, ‘애사’, 현실문화연구, 2008/ 신동준, ‘개화파 열전’, 푸른역사, 2009/ 이종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동아일보사, 2009/ ‘한국사 47’, 국사편찬위원회, 2001/ 황현, ‘매천야록’, 중, 명문당, 2008/ ‘宇都宮太郞日記3’, 岩波書店, 2007/ ‘日本外交史辭典’,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 山川出版社, 1992/ ‘독립신문’/ ‘매일신보’/ ‘태종실록’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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