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과 바흐 가운데 누구의 음악이 더 낫다 할 수 있을까. ‘파우스트’와 ‘전쟁과 평화’ 중에 어느 소설이 더 위대하다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공략 루트로 골퍼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골프코스, 그리고 시원시원하고 빠른 진행으로 스피디한 경기의 즐거움을 주는 코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 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골프코스를 묻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골프코스 설계 철학.
필자가 골프를 시작하고 난 이후 사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매일 아침 골프 연습장에 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 골프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일이다. 그렇게 골프잡지를 정기구독하다보니 이내 ‘세계 100대 골프장’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러다 국내에서 발행되는 골프잡지가 ‘국내 10대 골프장’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패널로 활동해본 적도 있다. 그러면서 10대 골프장 선정의 의미에 대해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골프를 알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로 기억한다. 골프 이력 가운데 이뤄야 할 목표의 하나로 세계 100대 골프장을 순례해보자고 정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필자가 가본 최초의 외국 골프장은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반도에 있는 페블비치 골프장이다. 그런 목표를 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마도 미국에서 발행되는 양대 골프잡지라 할 ‘골프매거진’과 ‘골프다이제스트’였을 것이다.
‘베스트 10’을 꼽는 이유
그런데 그 후 골프장의 순위가 바뀌는 것을 알게 됐다. 또 두 잡지사에서 선발하는 골프장이 각각 다른 것도 알게 됐다. 더욱이 코스 설계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좋은 골프장이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흔히 훌륭한 골프장이란 즐겁고 안락하며 샷을 구사하는 능력을 공정하게 시험할 수 있게 설계된 코스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골퍼의 기량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거기에 골프장 사업자의 최대 관심사라 할 유지관리 비용이나 골퍼의 이동성까지 감안하자면, 좋은 골프장을 선정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자 갑자기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파우스트’와 ‘전쟁과 평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소설일까. 바로크 시대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과 같은 시대 바흐의 작품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곡일까. 아니,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바흐의 작품과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베토벤의 작품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음악일까. 나아가 시대와 작곡가도 다르고 장르마저 다르면 우열을 가르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 아닌가. 또한 로마네스크 예술과 고딕 예술,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등, 각 시대 각 작가의 작품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만일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거나 불완전하다면, 골프장 가운데 100대 골프장을 선정하는 일이란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객관적이고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순위를 매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굳이 어느 골프장을 세계 100대 골프장으로 선정하는 일에는, 혹시 장사꾼의 얄팍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국의 10대 골프장을 선발하는 행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골프장 사업자들로 하여금 더 좋은 골프장을 가꾸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할 것이고, 그 결과 한국의 골프문화는 향상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문학작품에 대한 공모제도, 미술작품에 대한 평가전, 음악 콩쿠르 등이 그 공정성이나 상업성에 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각 해당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음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이다.
나인브리지 골프장이 세계 100대 골프장에 선정됐다는 것도 당사자들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는 지난번 골프다이제스트사의 ‘미국을 제외한 세계 100대 골프장’에 핑크스 골프장이 선정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있는 골프장이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일이란 우리나라의 남녀 골프선수들이 미국의 PGA투어와 LPGA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 못지않게 한국 골프계가 세계 골프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글의 맨 앞에서 본 대로 골프전문 잡지사가 필자에게 전화를 건 것 역시, 필경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개 기준과 3개의 원리
25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골프를 하다보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골프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가장 흔하게 받는 질문이 핸디나 베스트 스코어, 드라이버 비거리, 홀인원 경험 여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코스’에 관한 것이다.
골프 매체들이 자주 베스트 10을 선정하는 것 역시 무엇보다도 골퍼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골프장은 설계자의 독특한 심미관을 토대로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다 설계자는 발주자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특수한 목적도 설계에 고려하게 마련이다.
저명한 코스설계가인 마이클 허잔은 코스를 설계할 때의 기준으로 다음의 11가지 항목을 들고 있다. 안전성(Safety), 거리의 다양성(Flexibility), 필요한 샷의 종류, 길이, 타깃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샷밸류(Shot Value), 위험과 보상을 주기 위한 해저드의 위험 정도와 배치를 나타내는 공정성(Fairness), 홀의 전개순서와 홀 관련 샷밸류를 의미하는 점진성(Progression), 골퍼들의 이동성(Flow), 균형성(Balance), 유지관리 비용(Maintenance Cost), 건설계획(Construction Planning), 미적 요소(Aesthetics), 끝으로 대회 개최 능력(Tournament Qualities)이 그것이다.
또한 골프 설계의 명장으로 꼽히는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는 ‘GOLF by DESIGN’이라는 저서에서 골프코스 설계원리의 변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를 곰곰이 되씹어보면 골프장 설계가들이 코스를 설계하는 데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전략적인 골프코스
거의 모든 홀에 어려움의 정도가 다른 해저드를 배치함으로써, 골퍼들이 의식적으로 자기 능력에 맞는 공략법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전략적 골프코스’의 기본원리. 해저드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낙구(落球) 지점을 선택하는 플레이어가 해저드의 위험을 선택하지 않는 플레이어보다 다음 스트로크에서 더 쉬운 샷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저드를 배치하는 식으로, 공략 각도에 편차를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홀의 그린이 페어웨이의 왼쪽에서 어프로치하기 가장 편하게 되어 있다면 페어웨이 해저드를 왼쪽에 만들어 위험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플레이하는 골퍼들은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위험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는 샷을 구사해 같은 방식으로 플레이하는 상대방과 경기를 벌인다. 세인트앤드루스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매치플레이코스다. 이 코스는 지고 있는 경기자가 큰 성과를 거둬 게임을 역전시키려면 상대방보다 위험도가 높은 공략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해저드가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전략적 골프의 전형이다.
이를 구현하려면 골퍼는 홀까지 공략선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각각의 공략선은 모두 그 나름의 위험과 보상이 따라야 한다.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의 14번 홀은 서로 다른 기량을 가진 네 명의 골퍼가 각자의 능력에 가장 알맞은 전략으로 어떻게 플레이할 수 있는지 그 예를 보여주는 데 자주 이용된다.
▼ 영웅적인 골프코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앞서 살펴본 전략적 해저드 원리의 옹호자들에 의해 엄격한 형벌적 설계원리와 다소 벌이 덜한 설계원리의 중간에 해당하는 절충안이 개발됐다. 이 절충안을 ‘영웅적 골프코스’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는 형벌적 해저드를 하나 설치하지만, 페블비치의 18번 홀처럼 골퍼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해저드를 선택할 기회도 제공한다.
제대로 꾸민 영웅적 설계의 홀에서는 위험을 감수할수록 보상이 더 커진다. 조심성이 많은 선수는 해저드를 완전히 피할 수 있지만 그린에 도달하려면 더 많은 샷을 해야 한다. 반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선수는 해저드를 향해 바로 공을 날릴 수 있으며, 성공하면 단순하고 안전한 두 번째 샷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영웅적 설계의 홀은 단조로울 뿐 아니라 가장 강한 플레이어에게 지나친 이득을 주어 공정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세인트앤드루스 같은 옛 코스의 도전정신, 만족감, 오묘함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 프리웨이 골프코스
제2차 세계대전 후 몇 년이 지나서 많은 사람이 골프를 취미로 삼기 시작하자, 더 많은 대중이 더 재미있게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코스설계 접근방법이 개발됐다. 프리웨이 골프코스는 밋밋하고 평탄한 포장도로를 연상케 한다. 능률적으로 고속 이동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주된 공략선의 양쪽으로 배치하여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까지 직선으로 평행하게 거칠 것 없이 뻗은 테두리 안을 만드는 것이다.
프리웨이 코스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의 티와 멋없게 생긴 달걀형 벙커를 양쪽에 대칭으로 거느린 원형 그린을 특징으로 한다. 프리웨이 코스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페어웨이의 잔디를 직선형으로 깎고 나무들은 가드레일이나 안내 말뚝이 되는 것처럼 페어웨이를 따라 직선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거리표시 말뚝 대신 덤불, 나무, 바위, 표석 등을 군데군데 배치해 목표지점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식이다.
프리웨이 코스 설계의 목적은 골퍼들이 되도록 가장 빠른 방법으로 이 직선의 미로를 빠져나가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홀에 나선 골퍼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자유도 없고, 페어웨이 양쪽으로 벗어난 골퍼들에게 심한 페널티를 주지도 않도록 되어 있다. 코스의 플레이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므로 골퍼들의 기량을 차별화하는 수단은 샷의 비거리와 교묘하게 만든 퍼팅면에 대한 적응능력밖에 없다.
골프코스 설계에 숨어 있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어도 어떤 사람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좋은 코스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다. 그 왕성한 호기심을 위해 기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일본 요코하마 근처에 호도가야CC라는 골프장이 있다. 이 골프장은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해 만든 골프장으로 1913년 처음 생긴 도쿄골프클럽에 이어 두 번째였다. 골프장 개장 당시인 1922년에는 9홀이었는데 그 후 18홀로 확장됐다가 1934년 대대적인 보수가 이뤄졌다. 그 무렵의 일이다.
호도가야CC의 오하나하다케
설계자인 아카보시의 발안으로 인코스 10번 185야드의 숏홀 앞에 있는 계곡에 오하나하다케라는 아주 멋진 꽃밭이 조성됐다. 이 홀은 커다란 계곡을 건너 언덕 위에 그린이 있고 그린 앞의 경사면에는 4개의 긴 벙커가 이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다 그린 뒤편의 급경사면에도 벙커가 있어 초보자는 티잉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을 만큼 심술궂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설계자인 아카보시는 티잉그라운드에 선 플레이어에게 눈으로나마 위안을 주려고 일부러 아름다운 꽃밭을 조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꽃밭에 대해 1930년 당시 일본의 여론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유일한 골프 월간지였던 ‘일본골프돔’의 이토 나카무사 사장은 “이런 것을 골프코스 내에 조성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라는 취지의 평론을 자사 지면에 발표했다.
이토 사장은 1925년 오타니 고우메이와 함께 영국의 저명한 골프장을 순회견학하고, 1930년경에는 영국의 유명한 설계가인 찰스 앨리슨이 아사가스미 코스를 건설할 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감독 과정을 견학해 안목이 높았다. 특히 자연을 존중하는 영국적인 코스 설계에 매우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오하나하다케 꽃밭을 골프코스의 본질에 반하는 것으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던 듯하다.
한편 아카보시도 동생인 로쿠로우와 함께 일본 내 코스 설계의 일인자를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이토의 지적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골프돔’의 다음달 호에는 “코스에 미관을 살리고 골퍼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코스 내에 꽃밭을 조성한 것이 왜 나쁜가”라는 내용의 반론이 실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토가 골프코스의 기원으로부터 설명을 시작해 세인트앤드루스를 비롯한 역사적인 코스 실례나 영국 명설계가들의 말을 인용해 재반박하는 글을 썼다. “코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소박한 자연 그 자체에 있는데, 여기에 꽃밭과 같은 소승적인 작위를 가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궁합이 외모보다 중요하다
호도가야CC의 오하나하다케에 대한 이토와 아카보시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를까. “세계에서 가장 좋은 코스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두 사람의 견해 차이에서 옳고 그름을 찾아내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인정할 수 있으나 둘 사이에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골프코스에 대한 평가는 미인에 대한 평가와 흡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골프코스를 평가하는 데는 용모와 자태 못지않게 궁합도 중요한 주제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코스’를 묻는 대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를 묻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결국 필자는 골프장 베스트 10을 선정하겠다는 그 잡지사에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