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골퍼와 골프볼은 운명공동체

-나바타니(Navatanee) 라운딩 4

  • 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일러스트·김영민

    입력2008-05-07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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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100타를 못 깬 골퍼는 골프에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다. 90대를 치는 골퍼는 스윙 메커니즘 이야기만 하고, 80대 골퍼는 클럽에 탐닉해 틈만 나면 골프숍을 찾거나 다른 사람의 클럽을 휘둘러보려 대든다. 그런데 70대 골퍼는 골프장에 갈 때마다 어떤 볼을 사용할 지 고민한다.
    골퍼와 골프볼은 운명공동체
    나바타니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길에 잠시 프로숍에 들렀다. 서울에서 타이틀리스트 프로V1 컴프레션90 볼 1다스를 가져왔지만, 나바타니 방문 기념품으로 타이틀리스트 NXT 투어 볼을 사기 위해서였다. 최근 들어 비거리에 대한 자심감도 떨어져 다른 볼을 사용하는 것이 게임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마침 프로숍에는 사려고 한 볼 한 상자가 남아 있었다. 나바타니 로고도 찍혀 있었다. 다만 오래된 것 같아 탄성이 줄어든 게 아닐까 염려됐다. 사용 여부는 나중에 결정키로 하고 기념품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세 알짜리 한 통을 고른 다음 프로숍을 나왔다.

    딤플의 시초

    골프 초창기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볼이 사용됐다. 그러다 18세기 초부터 페더리라는 볼이 사용됐다. ‘페더리’는 말이나 황소의 젖은 가죽을 세 조각의 특이한 형태로 재단한 뒤 조그만 구멍 하나를 남겨놓은 채 꿰매고, 그 구멍에 젖은 깃털을 가득 채운 뒤 봉합해 건조시킨 것이다. 젖은 가죽은 수축되는 반면 깃털은 마르면서 팽창해 단단한 볼이 됐다. 페더리는 돌같이 딱딱해서 잘 날아갔다. 300야드 이상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제작하기가 무척 힘들고 제작자의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더욱이 아주 숙련된 기술자도 하루에 겨우 서너 개밖에 만들지 못해 볼의 가격이 클럽보다 비싸다는 흠이 있었다. 샷을 하는 순간 실밥이 터져 주위가 온통 새 깃털로 뒤범벅이 되는 사고도 적지 않게 발생했는데, 이때에는 벌타 없이 다시 볼을 치게 했다. 페더리의 치명적인 결함은 물에 젖을 경우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볼을 땅에서 띄우기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점에도 페더리 볼은 발명된 뒤 200여 년 동안 골프볼의 주종을 이뤘다.

    그러다 1848년경 열대지방의 페르카 나무에서 추출되는 고무 성질의 구타페르카가 발견되면서 골프볼은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페더리 볼은 사라지고 ‘구티 볼’이 등장했다. 구타페르카 볼은 충치의 충전재로 사용되던 것을 어떤 골프광이 낙지를 굽는 원리를 이용해 볼로 전용한 것이다. 그런데 구티볼 또한 겨울에는 돌처럼 딱딱해졌다. 여름에는 흐물흐물해져서 라운드 도중 아이스박스에 볼을 넣어 들고 걷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일단 골프에 ‘감염’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깃털이나 충치 충전재를 끊임없이 쳐대면서 허스켈 볼이 등장하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견뎌왔다.



    최초의 구타페르카 볼은 손에 장갑을 끼고 만들거나 편평한 두 개의 판 사이에 뜨거운 재료를 굴려가면서 만들었는데 표면이 매우 매끈했다. 그런데 골퍼들은 잘못 쳐서 흠집이 생긴 볼이 새 볼보다 더 멀리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골퍼들은 새 볼에도 일부러 차가운 끌이나 망치의 노루발 끝으로 흠집을 냈다. 그것이 오늘날 골프볼에 일반화한 딤플의 시초다.

    고무줄을 감아라!

    1922년 12월14일자 미국의 ‘클리블랜드 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사망기사가 실렸다.

    ‘코번 허스켈. 향년 54세. 암으로 수개월 동안 와병 중이었다. 20년 전 한나사를 퇴사하고 조선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훌륭한 스포츠맨으로도 알려져 있고, 골프볼을 발명하기도 했다.’

    코번 허스켈은 1868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길버트&설리반 극단에 들어가 미국 각지를 여행했다. 검은 머리칼의 잘생긴 이 청년은 곳곳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극단을 그만둔 뒤 꽤 오래 사업에 흥미를 갖긴 했지만, 매번 도중에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타기나 수렵, 희귀본 수집에 몰입하곤 했다. 그는 크룩생크(고양이 종의 일종) 연구가로도 명성을 날렸는데, 이런 면모를 보면 마치 취미생활을 즐기려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1895년 결혼해서 메인 주의 블루힐에 여름용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세계적 부호 존 D. 록펠러와 알고 지낸 것이 골프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

    골퍼와 골프볼은 운명공동체

    태극기를 그려 넣은 골프볼을 사용해 화제가 된 장정이 볼을 들어 보이고 있다.(위) 골프볼은 그게 그거? 무슨 말씀!(아래)

    1971년 보스턴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미세스 브라이엄이라는 노부인이 사망했는데, 그의 유품에서 여러 권의 일기장이 나왔다. 그는 코번 허스켈의 딸로 밝혀졌다. 일기에는 그의 아버지가 고무줄 감은 골프볼을 발명한 경위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1897년 봄 허스켈은 버트램 워크라는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워크는 B. F. 굿리치 고무회사의 공원으로 출발해 사장에 오른 노력가였다. 어느 날 워크 사장이 허스켈에게 물었다.

    “골프가 그렇게 재미있나요?”

    “재미있는 것인지 아닌지, 아무튼 온종일 골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골프에 관련된 비즈니스를 생각해보시죠. 이를테면 보다 멀리 날아가는 볼을 만든다든가.”

    마침 워크 사장의 책상에는 새로 만든 고무줄이 놓여 있었다. 허스켈은 그 고무줄을 보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고급 고무로 골프볼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압축한 고무로 공을 만들면 비거리가 훨씬 늘어날 것 같은데요.”

    “저는 고무 전문가입니다. 고무와 물은 압축할 수 없습니다.”

    워크의 공장을 드나들며 고무의 특성에 대해 배우던 어느날, 허스켈은 생고무로 가늘고 곧은 고무줄 수십 피트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고무줄을 늘어뜨려서 감아봅시다. 고무가 늘어난 상태라면 꽤 단단하게 감을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공장으로 달려가 실험을 시작했다. 적당한 크기가 됐을 때 바닥에 튕기자 고무볼은 방안을 마구 튀며 돌아다녔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무엇으로 포장할 것인가. 워크 사장이 구티를 용해해 표면에 발랐지만 고무줄을 감은 쪽에 가시가 있어서 지면에 떨어뜨려보니 반동이 불규칙적이었다. 그래서 구심에 구티로 조그만 알맹이를 만들어 넣고 그 위에 고무줄을 감은 다음 구타페르카로 코팅했다. 그런 뒤 그 위에 하얀 페인트칠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볼을 완성하기까지 나흘이 흘렀다. 결과가 만족스럽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소리쳤다.

    “조 미첼을 부릅시다!”

    조 미첼은 ‘배달부’로 불리던 프로. 그는 갑자기 불려 나온 것에 의아해하면서 아크론 골프클럽 1번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 볼을 한번 쳐보지 않겠소?”

    고개를 갸우뚱하던 조가 드라이버로 볼을 쳤다. 1번티 저 멀리에는 커다란 벙커가 있었는데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곳으로 볼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조가 친 볼은 콩알만한 크기로 멀어지더니 벙커를 캐리로 50야드나 오버했다. 세 사람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침내 조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죠?”

    허스켈과 워크는 환성을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그러고는 티잉그라운드로 올라오면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1894년 4월11일, 허스켈의 발명은 특허번호 622.834번으로 등재됐다.

    구타페르카의 참패

    1914년 5월16일자 ‘데일리 메일’에는 당대 최고의 영웅들인 존 헨리 테일러, 제임스 블레이드, 해리 바든, 그리고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21세 검투사 조지 던컨의 얼굴사진이 호화롭게 실렸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돌출기사가 시선을 끌었다.

    ‘골퍼라면 반드시 관람하세요! 4대 강호가 등장, 마침내 두 개의 골프 역사가 격돌하는 장면을!’

    ‘두 개의 골프 역사 격돌’이란 일찍이 골프계를 석권해온 구타페르카 볼과 혜성처럼 등장한 허스켈 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수한지를 가리기 위한 드림매치를 의미했다. 경기의 형식은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존 헨리 테일러와 제임스 블레이드가 A조, 해리 바든과 조지 던컨이 B조가 되어 전반 18홀에는 A조가 구타페르카 볼을, B조가 허스켈 볼을 사용하기로 했다. 후반 18홀에서는 A조가 허스켈 볼을, B조가 구타페르카 볼을 사용한 뒤 좋은 스코어를 계산하기로 했다. 대회를 주최한 신문사는 승리 팀에 30파운드, 진 팀에 20파운드를 상금으로 내놓았다.

    경기 당일 대회장인 선데이로지 골프클럽에는 3000명 이상의 갤러리가 운집했고, 가설매장까지 등장하는 등 큰 소란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데일리 메일’ 사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점심시간에 4명의 선수를 한 자리에 모아 드라이빙 콘테스트를 실시, 두 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수치로 확인하고자 한 것.

    스타트 시간이 다가오자 젊은 던컨이 해리 바든에게 물었다.

    “선배님, 저는 구타페르카 볼의 특성을 잘 모릅니다. 어떻게 치면 좋겠습니까.”

    “구타페르카는 조약돌을 헝겊으로 감싸놓은 것과 비슷하지. 손이 받을 충격도 조약돌을 칠 때와 비슷해. 그러니 우선 그립을 제대로 잡아야 해. 그립이 확고하지 않으면 손이 저리거든. 그런 뒤 단단히 마음먹고 확실하게 내리쳐야 한다. 파워가 없으면 멀리 날아가지 않아. 그런데 허스켈 볼은 그와 정반대야. 강하게 내리치면 칠수록 볼의 휘어짐이 심해져. 정확한 스윙을 몸에 익힌 다음, 완만하게 쳐내야 비거리가 늘고 방향성도 좋아져. 한마디로 ‘볼의 귀공자’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허스켈 볼의 전성시대가 오겠군요.”

    “아마도 오늘 확실하게 증명될 거야.”

    마침내 볼을 주인공으로 한 신구 대결은 A조의 티오프로 막이 올랐다. ‘데일리 메일’은 구타페르카 볼의 타구음에 대해 “근처에 포탄이 떨어진 것과 같은 굉음이 울려퍼지고, 많은 갤러리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고 썼다. 표현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세기적 명선수들의 임팩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예견된 것처럼 비거리와 방향성에서 현격한 우세를 보인 허스켈 볼을 사용한 조가 단연 유리해 오전에는 4업, 오후에는 5업으로 연승을 거뒀다. 드라이빙 콘테스트에선 젊은 던컨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쳐도 구타페르카 볼은 238야드를 날아가는 데 그쳤다. 반면 제임스 블레이드는 화려한 스윙으로 허스켈 볼을 279야드나 날려 보냈다. 두 볼의 비거리 차이 약 40야드는, 골프에선 런던과 뉴욕 간의 거리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구타페르카 참패!’

    신문의 머리기사는 구타페르카의 종말을 고했다. 한 세기를 풍미한 구타페르카는 1914년 5월16일,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투피스볼, 스리피스볼

    이런 과정을 거쳐 발전을 거듭해온 골프볼은 최근 들어 구조상 투피스볼과 스리피스볼로 구분됐다. 투피스볼은 천연고무 또는 합성고무로 만들어진 한 개의 구심에 설린 커버를 씌운 것이다. 스리피스볼은 얇은 고무로 둘러싼 액체를 영하 70℃에서 얼린 구심에 약 30m에 이르는 고무줄을 10배 정도로 당겨 구심을 감은 다음, 겉에 발라타 커버를 씌운 것이다. 스리피스볼은 구심에 들어 있는 액체의 역동에 의해 스핀이 많아져 컨트롤은 좋지만 반발력이 약해 비거리가 짧다. 또 발라타 커버의 내구성이 떨어져 쉽게 흠이 가고 제조과정이 복잡한 데다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값이 비싸다.

    골프볼은 임팩트 때 볼이 변형되는 데 얼마만큼의 힘이 드는지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경도가 가장 강한 것을 컴프레션 100, 그보다 작은 것을 컴프레션 90으로 표시한다. 통상 컴프레션 100 볼은 글씨나 마크가 검정색으로 표기돼 있고, 컴프레션 90 볼은 붉은색으로 씌어 있다. 컴프레션 100 볼은 헤드 스피드가 초당 42~43m를 넘는 골퍼들에게 적합하고, 컴프레션 90 볼은 헤드 스피드가 37~41m 되는 골퍼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중에서 가장 흔한 볼은 컴프레션 90 투피스볼이다. 투피스볼은 스리피스볼보다 비거리가 많이 날 뿐 아니라 내구성이 강해 볼 한 개로 몇 번을 사용해도 탄력이 쉽게 줄지 않는다. 그럼에도 투피스볼을 사용하는 골퍼들이 라운드마다 새 볼을 사용하는 것은 그저 기분에서 비롯된 비경제적인 태도이거나, 볼메이커들의 선전에 사로잡힌 탓으로 보인다.

    골프 규칙에 따르면 골프볼의 무게는 45.93g을 넘어서는 안 되고, 직경은 42.67mm 이상이라야 한다. 허용 오차가 있기는 하지만 볼의 비행속도는 23±1℃ 조건에서 초속 76.2m가 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비행거리와 굴러간 거리를 합한 평균거리가 256m(280야드)를 넘어서는 안 된다. 골프볼 광고에서 엄청난 비거리를 자랑한다면 그 볼은 공인구가 아닐 것이다.

    최근 골프 규칙에는 골프공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 플레이어가 한 라운드에서 투피스볼과 스리피스볼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원볼’ 규정도 추가됐다. 골프 경기가 골프용품 테스트장이 아니라 골퍼의 기량을 재는 마당이 되게 하고자 하는 취지인 듯하다. 잭 니클라우스 등 몇몇 유명 골퍼는 골프 시합에서 선수들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볼을 사용하게 할 게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볼로 경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여 년간 골프를 하면서 골퍼들 가운데 골프공의 특성을 알고 자기 수준에 맞는 특성을 가진 볼을 선택해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종종 한다.

    “골프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100타를 못 깬 골퍼는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식으로, 골프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골프를 하는 사람이다. 90대를 치는 골퍼는 앉으나 서나 오로지 골프 스윙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80대 골퍼는 클럽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틈만 나면 골프숍을 찾아다니거나 다른 사람의 클럽을 휘둘러보려고 대든다. 70대 골퍼는 골프장에 갈 때마다 어떤 볼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70대를 친다고 소개하는 사람이 컨트롤이 어려운 볼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가 크게 내기를 걸어와도 못 이기는 척하면서 승낙을 한다.”

    “최대한 멀리 날아가주세요”

    필자는 나바타니의 10번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서기 전, 서울에서 가져온 타이틀리스트 프로V1을 쓸 것인지, 아니면 나바타니 프로숍에서 구입한 타이틀리스트 NXT 투어를 사용할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날 레귤러티에서 플레이하기로 아내와 합의했기에 비거리보다는 컨트롤을 우선하는 뜻에서 프로V1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전 9시가 다됐지만 잔디는 마치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이슬에 젖어 있었다.

    나바타니에서 필자가 첫 티샷한 볼은 약간 훅이 나서 페어웨이 왼쪽 카트 도로 근처로 휘어져 날아가다가 조그만 언덕을 이루는 러프 지역에 떨어졌다. 반면 아내가 티샷한 볼은 멋지게 날아가 페어웨이 한가운데 떨어졌다. 세컨드샷을 하기 위해 티잉그라운드를 벗어나면서 ‘오늘 내기는 이기기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골프볼과 골퍼의 관계에 얽힌 몇 가지 일화를 떠올렸다.

    모제스 리치는 공무원이었지만, 15년 이상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시합 전날 밤이면 늘 이튿날 사용할 볼을 발밑에 쭉 늘어세웠다. 그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 여러분! 내일부터 드디어 전영 아마추어 대회가 시작됩니다. 최근 2년간 아쉽게도 우승을 못 했는데, 그 책임은 여러분과 제게 반반씩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주 신중하게 샷을 했는데도 여러분 중에는 놀러 나온 듯한 기분을 가진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검지를 세워 볼 하나하나에 주의를 상기시켰다.

    “각자의 임무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드라이버로 칠 경우 최대한 멀리 날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습니까? 인생에선 때때로 죽을 힘을 다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토라져 심술부리지 말고 최대한 멀리 똑바로 날아가주세요. 다음은 아이언으로 칠 경우입니다. 제가 맞춘 클럽페이스의 방향과 목표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자기가 어디에 착지해야 할 것인지를 명심하기 바랍니다. 저로서는 가능한 한 핀 가까이에 붙이고 싶습니다. 만일 그린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면 핸들을 조작해 사이드스핀을 걸거나 상공의 바람을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퍼팅그린 위에 착지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주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노력해주신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를 것입니다. 또 제가 퍼팅을 할 때에는 끝까지 굴러가서 원 퍼팅으로 홀컵 안에 쑤욱 들어가서 쉬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임무는 무사히 마치게 됩니다. 제가 살그머니 여러분을 꺼내 캐디백에서 충분히 주무시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러면 여러분 편히 쉬십시오.”

    모제스 리치는 체크 무늬 사냥모자를 눌러쓰고 여유 있는 리듬으로 점잖게 게임에 임했지만, 어드레스할 때마다 볼을 보며 뭔가 중얼거렸다.

    “자아, 드라이버로 칩니다요….”

    골프볼에도 생명이?

    리치에 따르면 어떤 클럽으로 언제 칠 것인지도 알리지 않은 채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갑자기 볼을 내리치기 때문에 골프볼이 기절해서 ‘쪼로’가 나거나, 너무나 아픈 나머지 숲으로 도망가서 빈사상태로 드러눕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볼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으면 쇼크를 받은 골프볼이 겁을 집어먹게 된다. 그런 뒤에는 아무리 잘 친다고 해도 위축되어 제대로 날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볼을 향해 사용하고자 하는 클럽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5번 아이언으로 치니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스윙을 한다. 그런 뒤엔 모든 것을 볼에 맡기면 된다.”

    이런 말도 했다.

    “볼에게 폭력을 쓰지 마세요. 그들은 너무나 델리키트한 생물입니다.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고, 부드럽게 클럽페이스로 보낸다고 생각하세요. 생각해봅시다. 해마다 세계 인구의 몇 배나 되는 골프볼이 생산되고 있는데, 우리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은 그중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와 만난 것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골퍼와 골프볼은 운명공동체인 셈이지요. 의지를 불어넣어 아주 조심스럽게 치는 것이 매너입니다. 볼을 단순히 소모품으로 거칠게 대하는 것은 골프를 모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남녀관계와 같습니다. 내가 냉정하게 대하면 상대의 반응도 당연히 싸늘하지요.”

    한편 자크 엘리스는 볼이 가장 멀리 날아가는 온도는 사람의 체온과 같은 36℃라고 믿었다. 그는 자기 방에 보육기를 마련해놓고 적절한 습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면서 36℃에서 볼을 보관했다.

    “볼이 감기에 걸리면 비거리가 최악으로 떨어진다. 10℃ 이하가 되면 골프볼은 움츠러들면서 날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겨울에 골프를 할 때는 보육기에서 꺼낸 볼을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등쪽 피부에 직접 닿을 수 있도록 넣고 걸었다.”

    엘리스의 이 주장은 사실인 듯하다. 5℃의 겨울과 30℃의 여름에는 캐리로 5~6야드 이상 차이가 난다. 여름에 더 멀리 날아가는 것. 골프볼의 내부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반발력도 커짐은 실험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40℃를 넘어가면 고무줄이 급속도로 노화되어 잘 날아가지 않게 된다. 한여름에 자동차 트렁크의 내부온도는 60℃ 이상으로 올라가는데, 이런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볼을 방치하면 컴프레션 100이 95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 신기하게도 엘리스의 ‘체온설’처럼 36℃가 가장 이상적인 볼 보관 온도다.

    아일랜드의 프로 크리스티 오코너도 볼 하나하나에서 생명을 느꼈다. 그는 사용하기 전의 볼은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몇 차례 충격을 줘 내부의 분자들을 잠에서 깨운 다음, 그것들에게 활동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주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크리스티는 “경기에 사용할 볼은 확실하게 단련시켜둔 것이라야 한다”면서 적어도 20회 이상 두들겨준 다음 경기에 임했다. 그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냉소를 보냈다. 그렇지만 최근 실험에서 그의 주장은 딱 들어맞는 것으로 입증됐다. 조금 두들겨준 볼이 비거리가 훨씬 늘어나고 내부의 미세한 일그러짐도 교정돼 비틀림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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