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 위의 검투사로 불리는 치치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 “이 세상엔 남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섹스요, 다른 하나는 골프다. 특히 골프는 옷을 벗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 필자는, 골프가 직업이 아니라면 스코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골프를 할 때면 이런 글귀를 떠올린다.
-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톱프로’의 3가지 샷
1998년 5월. 당시 필자에게 클럽을 제공하던 한국캘러웨이골프의 초청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칼스버드에 소재한 캘러웨이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C. H. 헴스테터라는 사람이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캘러웨이사를 설립한 엘리 캘러웨이를 만날 무렵인 1980년대 초까지 일본의 사이타마현에 거주하면서 당구 큐대를 만드는 사업을 했다. 16년을 일본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는 세계적 톱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샷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홀컵에서 130야드 떨어진 지점에서 9번 아이언을 사용해 홀을 공략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우선 백스핀을 걸어 140야드 지점에 볼을 떨어뜨린 뒤 130야드 지점에 멈추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120야드 지점에 볼을 떨어뜨린 뒤 굴려서 130야드 지점에 볼을 멈추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끝으로 130야드 지점에 사뿐히 볼을 안착시키는 샷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필자의 골프 실력으로는 그의 말이 꿈같은 얘기로 들렸지만, 근래 들어서는 그의 주장을 수긍한다. 볼과 클럽의 성능을 조합해 기량을 숙달시키면 가능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나바타니 10번 홀. 56도 웨지를 꺼내 잡고 최대한 볼을 세울 수 있도록 샷을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볼은 홀컵을 2m 남짓 지나갔다. 약간 내리막의 경사였지만 어쩌면 원퍼팅으로 홀아웃할 수도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왼쪽으로 브레이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여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볼은 그대로 쭉 흘러 지나가버렸다. 티샷이 잘 안 됐을 때 느낀 기분 그대로 어쩐지 오늘 골프가 잘 풀리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어진 11번 홀은 173야드의 파3홀이었다. 티샷이 그린을 벗어났지만 파 세이브 했다. 기분이 좀 되살아났다. 345야드 파4홀인 12번 홀에서는 겨냥한 대로 티샷이 아주 잘됐다. 그리고 세컨드 샷도 완벽하리만큼 의도한 대로 날아가 볼이 홀컵에서 1.5m 정도 지점에 멈춰 섰다. 퍼팅그린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 홀에서 버디를 잡으면 1번 홀에서의 침체된 기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상승세를 타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브레이크를 잘못 읽어 볼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말 그대로 김새는 퍼팅.
파5인 13번 홀에서는 보기, 파4홀인 14번 홀과 15번 홀에서는 무난히 파를 기록했다. 그러나 파4홀인 16번에서 세컨드 샷이 그린 왼편 앞쪽 벙커에 들어갔고, 벙커샷을 실수해 볼이 그린을 오버하는 바람에 더블보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파3홀인 16번 홀과 파5홀인 18번 홀에서는 각각 파를 기록했다.
9홀을 돌고 나니 보기 2개와 더블보기 1개를 기록하고 버디는 단 1개도 잡지 못해 결국 4오버파를 쳤다.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첫 홀에서의 불길한 예감에 비하면 선방했다는 안도감에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일생을 건 야망
골프는 웃으면서 즐겁게! 직업으로 삼지 않은 골퍼들은 스코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사진은 LPGA에서 활동하고 있는 내털리 걸비스.
구라나시 기요히사(倉重淸久)는 1899년생이다. 그가 처음으로 에이지슈터(age shooter·골프 라운드에서 자신의 나이 또는 그 이하의 타수로 치는 사람)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시기가 1976년. 묘하게도 그는 77세 생일에 77타를 기록했다. 한번 기록을 깨자 그해가 가기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에이지슈터를 기록했다.
그러자 그는 골퍼로서 아주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가장 이상적인 샷을 추구하며 78세에 ‘스윙 대개조’에 착수한 것. 그 나이가 되면 날마다 볼을 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고 한다. 그는 1978년 6월에 네 번째 에이지슈터를 달성했다. 그로부터 9년간 공식전에서만 70회나 에이지슈터를 기록했다. 이것으로 만족하나 싶더니만 또다시 스윙의 대개조에 들어갔다. 나이가 듦에 따라 힘을 덜 들이고도 볼을 치는 스윙 기법을 습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 ‘Swing The Thing’이라는 골프스쿨에 들어갔다.
헨리 니콜슨이라는 외과의사는 보비 존스의 홈구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애틀랜타 인근 이스트레이크클럽의 회원이었다. 이스트레이크골프클럽은 보비 존스의 홈코스이자 오는 9월 치러질 예정인 PGA 투어 페덱스컵의 최종 대회 ‘The Tour Championship’의 코스다. 이 골프장은 2번 214야드, 6번 168야드, 11번 197야드, 18번 235야드 등 4개 홀이 파3홀이다. 그중에 11번 홀은 티잉그라운드에서 그린 뒷부분이 보이지 않는 포대 그린이 있는 홀로, 퍼팅그린의 길이가 40여 야드나 된다. 이 홀에서 투어 프로들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4번 아이언에서 6번 아이언을 잡고 티샷을 한다. 그린 오른쪽에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고, 그린 앞쪽에는 좌우에 깊은 벙커가 있다. 태생적으로 약골인 니콜슨이 드라이버로 쳐도 온그린이 되지 않는 홀이었다.
어느 해 여름날의 일이었다. 아침 일찍 코스에 나와 4라운드를 했는데, 이 홀에서는 매번 티샷이 벙커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느껴졌다. 사나흘 뒤 그는 드라이버와 2다스의 볼을 가지고 캐디 1명을 동반해 이 홀을 찾았다. 그리고 3시간가량 계속 티샷을 날렸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온그린시키지 못했다. 그는 이후 거의 매일같이 이 홀을 찾아 같은 방법으로 온그린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광기를 부리기 시작한 지 달포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태양이 눈부시도록 빛나고 초가을의 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가운데 그가 티샷한 볼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더니 멋지게 벙커를 넘어 그린 바로 앞 에지에 올라갔다. 볼은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며 잘 손질된 퍼팅그린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니콜슨은 한동안 그 볼을 바라보고 서 있더니 드라이버를 캐디에게 건네고 클럽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이것으로 내 일생을 건 야망이 실현됐다. 이제 더 이상 골프에 미련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잠시 뒤 클럽하우스의 문을 나선 이후로 그는 두 번 다시 클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최악의 스코어
나바타니 아웃코스 1번 홀에서 무난히 파를 잡았다. 그러자 10번 홀에서의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험은 방심에서부터 온다던가. 389야드 파4인 2번 홀에서 티샷은 멋지게 페어웨이를 양쪽으로 가르며 똑바로 날아가 페어웨이의 한가운데에 안착했다. 세컨드 샷을 하러 가보니 볼 근처의 스프링클러 위에 ‘159야드’라 적혀 있었다. 6번 아이언을 꺼내 잡고 회심의 샷을 했다. 볼이 날아가는 모양을 뒤편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볼이 핀에 붙어 깔끔하게 버디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볼은 홀컵 바로 옆 그린 왼쪽의 벙커 턱에 맞으며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1m만 더 갔어도 틀림없이 버디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직접 홀컵을 향해 샷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뒤쪽으로 쳐내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트리플보기를 기록했다.
지난 6월2일 한국선수 가운데 올 들어 처음으로 LPGA 투어에서 우승한 이선화가 전담 캐디로부터 샴페인 축하 세례를 받고 있다.
6타 만에 겨우 온그린 했는데, 뜻밖에도 스리퍼팅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홀아웃할 수 있었다. 9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몇 차례 라운딩을 해봤을 뿐 아니라 이곳에 오기 전에 연습도 많이 했기에 70대 후반의 스코어는 무난하게 나오리라 생각했다. 더욱이 챔피언 티가 아닌 화이트 티에서 플레이했기 때문에 내심 파 플레이도 가능하리라 예상했는데, 한 홀에서 무려 4타나 오버해 버렸다.
이후 파3 4번 홀에서 보기, 290야드 파4 5번 홀에서는 세컨드 샷이 퍼팅그린 왼쪽에 있는 연못으로 굴러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더블보기, 핸디캡 1번 홀로 419야드의 파4 6번 홀에서도 보기, 187야드의 파3 7번 홀에서도 보기, 파4인 8번 홀에서 파, 파5 9번 홀에서는 2m 정도의 버디퍼팅이 홀컵을 돌아 나와버려 다시 파! 그래서 후반 9홀에서 도합 48타를 기록했다.
장갑을 벗어 캐디에게 건네면서 내일도 이곳에서 플레이할 것이니 캐디백을 라커룸에 보관해달라고 하고는 식당으로 들어왔다. 얼음물 한 잔을 시켜놓고 유리창 너머로 9번 홀을 감싼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플레이를 반성했다.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해도 70대 후반 스코어는 무난히 기록하리라 예상했는데 결국 88타를 쳤다. 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고 있으려니, 호수 저쪽으로부터 마이크 브라티라는 사람이 걸어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마이크 브라티 현상
아무리 노력해도 대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출중한 기량을 갖추고도 20년 넘게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승은 고사하고 준우승조차 못하는 아주 희귀한 사람들이 있다. 아주 분발했지만 우승하지 못하는 골퍼를 가리켜 미국의 프로들은 ‘마이크 브라티 현상’이라 일컫는다. 우승하지 못하는 원인을 마이크의 인생에서 배우라는 취지인 것 같다.
본명이 마이크 J. 브라티인 그는 1887년 매사추세츠 주 브라이튼에서 태어나 1972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초창기 프로들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골프사상 승리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을 남긴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1900년대 초엽, 미국의 골프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대회 수도 적었고 프로들은 시범대회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영국이나 미국이나 다 같이 프로테스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스스로 “오늘부터 나는 프로다!”라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브라티는 18세 되던 해에 프로 전향을 선언하고 매치플레이에 얼굴을 내밀었다. 비거리도 좋고 아이언샷도 일품이었으며 퍼팅 감각도 뛰어나 부족함이 없는 골퍼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승을 거머쥐지는 못했다. 1909년에는 17차례 출전해서 모두 6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6위는 수상 대상이 아니기에 무의미한 순위였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11년 시카고CC에서 열린 US 오픈. 브라티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6개의 클럽만 갖고 출전했다. 최종일에 존 맥더모트와 나란히 307타로 홀아웃해 이튿날 플레이오프를 했다.
“경기 전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밤을 지새웠어요. 그렇다고 술을 마시면 다음날 경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초조하게 날이 새기만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 자신도 신경이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브라티는 언젠가 해리 바든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바든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리해서 잠을 잘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상대방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피장파장이지요. 그저 옆으로 누워 몸을 편안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드디어 플레이오프. 브라티의 플레이는 처음부터 부드럽지 않았다.
“내게는 끝내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볼을 치기 전에 미스 샷을 염려하는 것이다. 아직 실수하지 않았는데 미리 실수할까 두려워한다. 바든은 ‘실수한다면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면 되는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소심한 나는 손이 움츠러들고 만다.”
섹스와 골프의 공통점
결국 그는 82타나 쳐서 자멸했다. 목전에 둔 메이저타이틀에서 멀어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고난의 시발에 불과했다. 이듬해 US 오픈에서는 2위로 선두에 4타차로 따라붙었지만 최종일에 80타를 쳐 3위로 추락했다. 1915년 US 오픈에서는 제러미 트래버스와 맹렬한 경합을 벌인 끝에 1타로 앞서며 최종일을 맞았다. 그런데 이날에도 80타를 쳐서 어이없게 8위로 추락했다. 최종일에 80타를 치는 것은 어느덧 브라티의 상징이 돼버렸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19년 브레이번CC에서 치러진 US 오픈에서 벌어졌다. 3라운드가 끝났을 때만 해도 브라티가 5타나 앞서고 있었다. 이때만은 모든 신문이 그가 우승 못한 설움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최종일 또다시 80타를 쳐서 75타를 친 월터 하겐과 동타를 기록, 연장전을 치르게 됐다. 다음날 치러진 연장전에서는 1타차로 하겐에게 우승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마이크 브라티는 평생 단 한 차례의 우승도 일궈내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접었고, 미국 골프계에 ‘마이크 브라티 현상’이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비록 브라티는 대회에서 우승은 못했지만 골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고 인생을 배웠다. 그는 80세가 넘도록 항상 플레이를 즐겼다.
그린 위의 검투사로 불리는 치치 로드리게스는 우리들이 사랑하는 골프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 세상엔 남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섹스요, 다른 하나는 골프다. 특히 골프란 옷을 벗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필자는 골프가 직업이 아니라면 스코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골프를 할 때면, 특히 오늘처럼 스코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더욱 더 이런 글귀를 떠올린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그럼에도 사람이란 묘해서, 골프에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말하는 골퍼보다는 골프장에 다녀와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하는 골퍼를 더 많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