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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남북첩보전쟁 반세기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 이정훈 hoon@donga.com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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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청년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80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 강변도로를 달린 후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로 갔다. 그곳에는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민간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단한 환영식을 거친 후 80명은 머리를 박박 깎고 군복과 총을 지급받았다. 총은 은박지에 싸여 있는 신품이었다. 동북산업사에서 제식훈련과 기초사격 훈련을 받은 이들은 4주 후 수료식을 하고 다시 짐을 싸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들이 간 곳은 지금 경부고속도로 판교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청계산이었다. 청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한축산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출신을 ‘돼지’라고 하는 것은, 이들을 훈련시킨 청계산에 대한축산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이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6명씩 한 조가 돼 산 속에 흩어져 있는 안전가옥에 수용되었다. 이 날 이후 6명은 독도법·산악행군·돌연사격·지향사격·생식법(生食法)·비트 구축술 등 공작원으로 갖춰야 할 기술을 익혀갔다.

그런데 훈련을 맡은 교관이나 조교는 전혀 강요를 하지 않았다. 교관이 이렇게 해봐라 하고 동기를 부여하면 6명이 스스로 강도 높은 목표를 정해 이를 달성하는 식이었다. 김씨는 “적지에 들어갔을 때 6명이 투지를 일으켜 사선을 돌파하려면 자율적으로 목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훈련 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선정하고 목표를 이루게 한 것 같다. 우리는 목표를 차츰 상향 조정하고 이를 달성해 나갔다”고 말했다.

자율적인 훈련이지만 너무 강도가 세다 보니 탈영자가 속출했다. 김씨도 탈영을 시도했으나 청계산 외곽을 경비하는 첩보부대원들에 붙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조원이 발등을 크게 다쳤다. 한국전력에서 일하다 온, 김씨보다 6살이 많은 조원이었다. 이 상처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산악행군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아 청계산을 빠져나갔다. 김씨는 그가 특수부대를 빠져나가기 위해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은 것으로 추정했다.

1960년대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전 휴전선에서 남북한 군의 충돌이 적지 않았다. 남북한은 특수부대를 상대 측에 투입해 내무반을 파괴하거나 병사를 암살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이 나무꾼 복장을 하고 미 2사단이 지키는 문산 북방의 휴전선을 넘어와 문산 읍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갔다” “인민군이 잠자던 국군 막사를 폭파하고 죽은 국군 병사들의 귀를 잘라갔다”는 소문이 떠돌던 시절이다.



이런 소문은 국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북한은 이를 노리고 거듭해서 특수공작대를 파견한 것이다. 이러한 공작의 클라이맥스가 강추위가 몰아치던 1968년 1월21일 터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이때 청계산 ‘대한축산연구소’에서 훈련을 받던 김씨 조는 급작스레 출동해, 북한산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김씨 조는 강원도 춘성군 ○면 ○○리 산속에 있는 안전가옥으로 이동했다.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실전배치된 것이다.

김씨 조에는 조원 전체가 북한 지역에 들어가 북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특수 공작 임무가 부여되었다. 반면 다른 곳으로 흩어져간 조는 단독으로 북한에 들어가 첩보를 수집해오는 단독 수집 임무가 부여됐다고 한다. 김씨 조는 대한축산연구소 출신으로는 특수 공작을 처음 감행했기 때문에 ‘목장 1기’로 불리고 그 다음조는 ‘목장 2기’로 불렸다. 김씨와 함께 휴전 이후 최대 교전을 벌이게 한 이철수씨가 바로 목장 2기였다.

모래장애물 통과법

이씨는 김씨 조원 중 한 명이 체력이 약해 고민하다 면담을 거쳐 단독 수집조로 빠져 나간 후 결원을 메우려고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전쟁기념관을 찾은 김씨는, 단독 수집조로 빠져나간 동기가 71년 전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춘천대는 자율적으로 훈련하다 이따금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잠복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러다 68년 6월 드디어 김씨 조에 북한 지역으로 침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처음 북한 땅에 들어간 김씨 조는 사진 촬영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침투에서는 인민군 탄약고와 유류탱크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약이 터져 탄약고와 유류탱크가 폭발하는 장면을 찍고 돌아왔다. 세 번째 침투에서는 옥수수 수거 작업을 하는 인민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옥수수단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빠져나왔다. 인민군이 이 옥수숫단을 트럭에 실으려고 들어올렸을 때 부비트랩이 터졌음은 물론이다. 네 번째 때는 시끄럽게 대남방송을 쏟아내는 인민군 스피커를 향해 유탄발사기를 쏘고 돌아왔다.

한국군이 남쪽 비무장지대에 북한 공작원 침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듯이 북한도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이러한 장애물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지뢰지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주의가 필요하다. 북한 침투시 처음으로 만나는 장애물은 철조망이다. 철조망은 넘어서기 좋은 곳을 골라 간단히 우회 통과하면 된다.

두 번째는 마른 나뭇가지를 쌓아 올린 녹색 장애물인데, 이 장애물을 잘못 건드리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녹색 장애물 부근에는 반드시 인민군 매복조가 있으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녹색 장애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하면 세 번째로 15m 폭으로 고운 모래를 깔아놓은 모래 장애물이 나온다. 이 모래 장애물은 절벽이나 강을 제외한 전구간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우회할 방법이 없다. 김씨는 모래 장애물 통과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고운 모래라도 비를 맞으면 조금씩 단단해진다. 주의깊게 손바닥으로 두드려보면 모래가 단단하게 굳은 곳을 찾아낼 수가 있다. 이러한 곳을 골라 1m 앞쯤에 배낭을 멜빵이 하늘로 향한 자세가 되도록 올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동료의 배낭을 받아 다시 1m 앞에 같은 방법으로 놓는다. 이런 식으로 배낭을 징검다리처럼 깔아 놓고 건너가고, 마지막에 오는 사람은 배낭을 걷어 하나씩 앞으로 전해준다. 이런 방법을 쓰면 자국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모래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실 장애물이다. 실 장애물이란 국방색의 가느다란 끈을 사람 발목 높이쯤 되는 나무 사이에 묶어 놓은 것이다. 한밤중에 이 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예민한 공작원조차 실을 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에는 이 실을 끊을 수 있는 멧돼지도 있고 고라니도 있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이 끊은 양 위장한다. 두 발 짐승(사람)은 보폭과 보조가 일정한 편이지만, 네 발 짐승은 뛰었다 걸었다 보폭과 보조가 일정치 않은데다 가는 방향도 마구 바꾼다. 실을 끊었을 때는 네 발 짐승의 소행으로 보이게끔 불규칙하게 이곳 저곳에 있는 실을 함께 끊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고압선이 나오는데, 고압선을 통과할 때는 1m쯤 되는 호스 두 개를 사용한다. 호스를 갈라 아래 위쪽의 고압선에 덮어 씌운 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이 통과할 만큼 들어올리면 감전되지 않고 고압선을 통과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장애물을 통과가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목적지까지 접근해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68년 10월, 휴전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을 일으키며 살아 돌아온 김씨와 이씨는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병장으로 전역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온갖 작전을 수행하던 이들은 작전에서 해방되는 날 처음으로 군인이 되고 그 날로 전역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신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北, 울진·삼척 사태로 보복

꽤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두 사람의 무공은 약 보름 후 터진 울진·삼척사태에 덮여 잊혀져버렸다. 울진·삼척사태는 중대 규모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와 울진과 삼척 일대의 화전민촌을 습격하며 분탕질을 친 대형 유격전이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특전대와 해병대를 동원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공비를 소탕하는 데는 거의 두 달이 소요되었다.

당시 병상에 있었던 김씨는 육군 첩보부대 장교로부터 “너희가 북한에서 한 공작에 대한 보복인 모양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씨는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침투하고, 북한은 김씨 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울진·삼척 사태를 일으키고…. 6·25전쟁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긴장됐던 1968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납치된 것은 1·21사태 다음날이었고, 69년 4월15일에는 미군 첩보기 EC-121이 북한 청진 앞바다에서 북한의 미그-21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권투에서 홀딩을 한 채 주먹으로 상대의 뒷머리를 때리는 것은 반칙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로 무장한 병력을 집어넣거나 상대 쪽으로 무장 병력을 집어넣는 것은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다. 남북한은 휴전선에서 서로를 ‘홀딩’한 채 끊임없이 상대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일반인들은 1·21사태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사태, EC-121 격추사건 등에 시선을 뺏겨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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