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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의 세계|희귀 비디오 수집

‘나홀로 영화관’에서 즐기는 五感만족

  • 장인석

‘나홀로 영화관’에서 즐기는 五感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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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다. 매년 수백 편의 비디오테이프가 쏟아져 나오지만 데이터베이스는커녕 소장가치가 있는 비디오들을 제대로 비치해놓은 곳도 없다. 따라서 어떤 영화가 비디오테이프로 나왔는지조차 모호하고, 극장용 제목과 비디오 제목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찾고 있던 영화 비디오가 나와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누벨바그의 여성 기수 아네스 바르다의 유일한 출시작 ‘아무도 모르게’는 원제가 ‘쿵후 마스터’다. 자기 여자 친구의 엄마인 40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14세 소년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아케이드 게임 이름을 제목으로 단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도 모르게’란 얼토당토 않은 제목으로 둔갑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걸작 ‘브라질’은 ‘여인의 음모’로, 미국 리얼리즘의 기수 폴 브릭맨의 ‘리스크 비즈니스’는 ‘위험한 청춘’으로, 이탈리아의 페미니즘 여성 감독 리나 베르트뮬러의 ‘8월의 푸른 바다에서 예기치 않은 운명으로 떠내려간…’이란 다소 시적인 제목은 ‘귀부인과 승무원’으로 출시돼 실소를 자아낸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비디오 업계가 영세성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서 배급하는 회사나 그 테이프를 받아 대여점을 운영하는 업자 모두 장삿속에 급급하다 보니 흥행 위주의 프로를 보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이니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는 영화는 야한 제목이나 선정적인 사진을 내세워 하나라도 더 팔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요즘은 비디오업계가 불황이어서 전국의 비디오대여점이 1만5000개에 불과하지만 전성기인 3∼4년 전만 해도 3만5000개에 달했다. ‘아마겟돈’이나 ‘쉬리’ 등 소위 ‘대박’ 영화는 10만여 장을 찍어 배급하지만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문제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같은 아트영화는 2000장을 찍는다. 비디오 가게 17군데 중 한 곳만이 이런 영화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10년 후를 상상해보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분실되거나 파손돼 잘해야 100장 내외만 남게 될 것이고, 그 가치는 빛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청계천 도매상가에는 소장가치가 높은 희귀 비디오가 꽤 많이 진열돼 있다. 나중에 오를 것을 대비해 업자들이 미리 사재기를 하거나 하나둘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이 진열된 비디오들은 비디오 대여점주나 소장가들에게 판매된다. 하지만 청계천은 유통업자를 통해 구입했기 때문에 가격이 꽤 비싸게 형성돼 있어 비디오 수집가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곳은 아니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명작비디오판매 홈페이지를 개설해놓은 곳도 있지만 그곳 역시 ‘빠꼼이’(희귀 비디오를 잘 아는 업주들을 가리키는 속어)들이 많아 턱없이 비싸다. 가끔 유니텔이나 하이텔 등 통신사의 장터 사이트에 ‘희귀명작비디오 싸게 팝니다’란 글이 뜨기는 하지만 사기를 당할 수 있으므로 가격과 상관없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따라서 비디오 대여점이나 ‘헌터’라는 유통업자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 비교적 바람직하다.

비디오는 ‘구관이 명관’

비디오 대여점 중에서는 오래 됐지만 장사가 안 돼 ‘맛이 간’ 곳이 주된 공략 대상이다. 게다가 대여점주가 영화에 문외한이면 금상첨화. 비디오대여점을 오랫동안 운영했다고 해도 호구지책으로 이 업종을 선택한 사람은 영화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똑바로 살아라’ 있어요?” 하고 물어보면 된다. 문외한 주인은 십중팔구 박중훈 주연의 국내영화를 내놓을 것이다. 영화를 좀 안다면 “박중훈이 주연한 겁니까? 아니면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입니까?” 하고 되물을 것이다. “‘돈을 갖고 튀어라’ 있어요?” 하고 물어도 마찬가지. 이것도 박중훈 주연의 영화를 내놓으면 문제가 있다. 미국의 천재 감독 우디 앨런의 대표작이 출시돼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관계’ 있어요?” 하고 물으면 더 간단하다. 영국의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명작 ‘위험한 관계’(원제는 위험한 레슨)는 어지간한 비디오가게에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아는 비디오가게 주인조차 사실 많지 않다. 아마도 대부분의 비디오대여점 주인은 구석에 처박아 놓은 같은 제목의 성인용 외국영화(‘위험한 관계’란 노골적인 애정영화가 서너 편 출시돼 있다)를 찾아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보물이라도 못 알아보면 쓰레기가 되는 법. 영화에 문외한인 비디오 대여점주는 대여도 거의 안 되는 영화를 고객이 사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고 생각한다. 좀 비싸게 받으려고 좋아하는 표정을 짐짓 감출 뿐이지 속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가 손님에게 5000원에 판 비디오 중에 금싸라기 같은 진주가 있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나도 알지 못한다.

필자가 잘 아는 영화 관계자는 2년 전 동네 가게서 ‘아주 우연히’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이란 비디오를 구했다며 조촐한 소주파티를 연 적이 있다. 그는 이 비디오를 지금도 애지중지 아끼고 있는데, 그 후 비디오가게를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다시는 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헌터’라고 불리는 유통업자들의 집중 공략 대상도 역시 주인이 영화에 문외한인 대여점이다. 헌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법은 소위 ‘신프로로 눈탱이치기’. 오래된 희귀 비디오들을 출시된 지 한두 달 정도 지난 신프로와 교환하는 것이다.

비디오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프로가 오래된 구프로보다 더 값이 나갈 것이라 생각하지만 비디오의 세계에서는 철저히 ‘구관이 명관’이다. 아무리 유명한 대작이라도 출시된 지 두 달 정도 지나면 소위 ‘똥프로’라 해서 거저 줘도 안 가져가는 애물단지가 된다. 두 달 동안 테이프 구입가인 2만7500원의 몇 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마감하고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출시됐을 때는 인기가 없어 비디오대여점주의 애를 태우는 아트, 명작 등 소위 ‘구색프로’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 빛을 발휘한다. 대개 가격이 2만2000원인 아트 명작비디오는 1년이 지나도 대여해가는 고객이 적어 본전을 뽑기 힘들 지경이지만 팔아버리려고 마음먹으면 제값 이상을 받을 수 있다. 헌터들은 이런 비디오들을 헐값에 사들여 몇 배를 붙여 비싼 값에 팔아넘긴다. 팔아넘기고 남은 물건들은 청계천의 비디오테이프 도매상가나 통신 등에 올려 싼값에 처분한다.

헌터생활 8년째인 J씨는 “4, 5년 전만 해도 희귀비디오를 찾는 수요자도 많았고, 구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수가 짭짤해 수십 명의 헌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른 직종으로 전직해서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J씨에 따르면 3, 4년 전 헌터들에 의해 서울의 어지간한 비디오가게에서 희귀 비디오가 바닥을 보이자 지방의 대도시를 비롯해 산간 벽지까지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2, 3년 전부터 비디오가게가 사양길에 들면서 희귀 비디오를 구입하는 업주가 현저히 줄어 애써 희귀비디오를 모아봤자 기름값도 나오지 않게 됐다는 것.

사정이 이러하자 여유가 있는 헌터들 중엔 이른바 ‘찍기’라는 것을 통해 중고 테이프를 팔기 시작했다. ‘찍기’란 폐업을 하는 비디오가게의 테이프를 한 장당 얼마에 사들인 뒤 한 달 내지 두 달간 월세를 대신 내주고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2년 전만 해도 한 장당 1000원이던 ‘찍기’ 값은 요즘은 200∼300원까지 떨어졌다. ‘찍기’ 하려는 사람에 비해 폐업 가게가 턱없이 많아진 결과다. ‘찍기’ 업자들은 일괄 구매한 비디오 중 쓸 만한 것들은 소매로 팔고, 팔고 남은 것들은 떨이로 청계천 등지에 넘긴다. 청계천 등지의 비디오 도매상가에서 바닥에 쌓아 놓고 파는 비디오는 이렇게 구입한 것들로 원가로 치면 100원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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