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노동자 대통령 룰라의 거대한 실험

  • 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입력2002-12-02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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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반공 출신의 브라질 대통령 룰라.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 납치로 얼룩진 브라질의 민주주의를 구하는 한편 외환위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민중 편에 설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굴복할 것인가. 그의 선택에 브라질의 운명이 달렸다.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박봉에다 피곤에 지친 의사는 피가 엉겨붙은 한 노동자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했다. 이 노동자는 아침에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손가락이 끼어 짓이겨져 있었다. 브라질 공단 지역이 밀집해 있는 이 곳 공공병원에는 비슷한 산재 노동자들이 거의 매일 실려 왔다. 의사는 평상시처럼 환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잘 수술하면 손가락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작업은 시간이 걸리고 힘들고 귀찮았다. 새끼손가락을 잃어버린 이 노동자가 미래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의사는 상상이나 했을까? 잘려나간 새끼손가락은 불평등과 고난의 브라질 사회를 상징했지만, 그 고난 속에서 미래의 희망 또한 자라고 있었다. 희망의 이름은 룰라였다.

    잘려나간 새끼손가락

    선반공에서 공화국 대통령에 오른 룰라의 인생은 마치 텔레노벨라(telenovela: 중남미의 연속극으로 주로 치정, 성공담 등을 다룬다)나 전기영화의 스토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가난한 북동부 오지에서 태어난 그는 상파울루 지역으로 이주, 성장했다. 가난한 브라질 어린이들이 항용 그렇듯 그도 축구에 미친 듯 집착했다. 코린티안의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거리에서 땅콩과 타피오카를 팔고 구두도 닦았다. 실업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일찌감치 질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은 ‘거리의 대학’ ‘인생의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깨 너머로 글자를 깨쳐 어머니에게 신문을 읽어주기도 했다. 정부 운영 직업학교에서 선반공 과정을 마친 소년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금속공장 노동자가 됐다. 그는 먹물에 물든 지식인 노동운동가와 달리, 거리의 언어와 특유의 친근한 미소로 동료들을 사로잡았다. 곧 노조위원장이 됐고, 군정 말기 파업에서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이를 발판 삼아 4수 끝에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그의 일생은 영화 스토리이기 이전에 브라질 근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비춰주는 생생한 그림이다. 룰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전기로 공인받고 있는 데니지 파라나의 ‘브라질의 아들’에 따르면, 룰라의 인생역정은 “빈곤한 북동부에서 부유한 동남부로 이민을 온 한 사람의 지리적 경력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름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대중 지도자로, 그것도 역사책에 영원히 이름이 기록될 대중 지도자로 부상한 또 다른 사회적 경력”을 잘 드러낸다. 룰라 가계(家系)의 역사만큼 브라질 현대 사회의 굴곡을 극명하게 반영한 것이 또 있을까?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실바는 1945년 10월27일 페르남부쿠 주의 가라눈스에서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 선거의 결선투표에서 당선이 확정된 날도 10월27일 57세 생일날이었다. 가라눈스는 북동부 오지(세르탕)가 으레 그렇듯 오랜 가뭄과 한발에 지친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도시다. 세르탕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기후 현상 때문에 생존이 무척 힘든 곳이다. 간혹 엄청난 비가 내려 급류를 이루고 짧은 기간 녹지대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르탕 사람들(sertanejos)은 이 순간을 틈타 가축을 가르고 면화나 사이잘 삼을 심어 간신히 먹고 살아야했다. 가난은 그들의 숙명이었다. 사람들은 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고물 자동차에 짐짝처럼 실려 상파울루가 있는 동남부를 향해 떠났다.

    8남매를 버린 아버지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선거에 나선 룰라가 연설을 하고 있다.

    북동부의 개인 소득은 브라질 평균의 40% 수준. 브라질에서 둘째로 못산다는 중서부도 북동부 평균의 2배 수준이다. 브라질 빈민층의 절반 이상이 북동부 사람이다. 문맹률이 20%나 되는 브라질이지만 북동부의 경우는 40%나 된다. 당연히 룰라의 부모도 문맹이었다. 룰라의 회상으로 어머니가 가끔 신문을 사보셨지만 그것은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룰라도 페르남부쿠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부모처럼 문맹자로 살아갈 확률이 무척 높았다.

    브라질에서 실바란 성은 우리나라 김, 이, 박만큼 흔하다. 아버지 아리스티데스 이나시우 다 실바는 룰라 말대로 “일자무식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 브라질 빈민가의 아버지들이 대개 그렇듯, 술 주정꾼에다 아이들에겐 애정이 전혀 없는 마초였기 때문이다. 쓰라린 첫 기억은 이렇다.

    “아버지는 우리가 먹는 빵을 먹지 않았다. 모두 다 자고 있는 새벽 일찍 일어나 커피와 함께 자기만 좋은 빵을 먹었다. 남은 것은 챙겨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찬장에다 숨겨두었다.”

    둘째 기억은 1952년 일곱 살 때 일이다. “세 살배기 여동생이 빵을 먹고 있는 아버지에게 조금만 떼어 달라고 칭얼댔다. 아버지는 먹던 빵 조각을 데리고 놀던 강아지에게는 주면서 여동생에겐 주지 않았다. 그에겐 강아지 새끼들이 자녀들보다 훨씬 소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지긋지긋한 세르탕을 떠나 일자리를 찾으러 상파울루로 갔다. 1950년대 상파울루는 거대한 산업화의 열기가 꿈틀거리는 공단지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만큼 기회도 많았다. 북동부의 이주 행렬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머니 에우리디시 페레이라 데 멜루는 자녀 8명을 데리고 뒤늦게 남편을 찾아 떠났다. 1952년 일곱 살이던 룰라와 가족들은 ‘파우-데-아라라’(사람들을 짐짝처럼 태워 먼길 여행을 하던 고물 자동차)를 타고 장장 15일에 걸친 장정에 올랐다. 고물 자동차 여행은 괴로웠지만, 당시 세르탕을 탈출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통스런 통과의례였다. 밤에는 자동차 밑에서 새우잠을 자고, 밀가루 전병과 사탕수수 그리고 치즈로 허기를 달랬다.

    연락이 끊긴 남편을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에우리디시는 마침내 상파울루 근교 도시인 상투스에서 남편을 만났지만, 이미 그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뒤였다. 일자무식꾼이던 그가 편지를 쓰지 않은 것은 당연했겠지만 8명의 자녀도 깨끗이 버릴 정도로 가정에 전혀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즈음 룰라도 한번쯤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룰라는 아마도, 자신이 가정을 꾸리면 충실한 가장과 남편이 되겠다는 꿈을 다지지 않았을까. 그의 언행에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집착이 자주 드러나는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큰 원인이 됐을 것이다.

    상투스로 이사를 온 뒤 3년 동안 룰라는 빈민가 소년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일을 죄다 경험한다. 우선 축구에 몰입했다. 축구는 당시나 지금이나 가난한 소년들이 꿈꾸는 유일한 탈출구다. 둥근 공 하나면 가난이나 궁핍으로 인한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만약 눈에 띄어 프로팀에 진출이라도 할 수 있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마법의 공이기도 했다. 상파울루 시민의 영원한 고향 코린티안 팀 선수가 되는 것, 또래 아이들 모두가 그런 꿈을 꾸었다. 룰라도 성모 마리아와 오리샤(아프리카 정령신앙의 신들로 가톨릭의 성인 숭배와 결합되어 있다)에게 열심히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땅콩과 타피오카, 오렌지를 팔러 시내와 해변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룰라는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깨쳤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거리의 학교’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1956년 가족들은 상파울루 시의 이피랑가 빈민가로 이사를 했다.

    룰라는 어느새 의젓한 11세 소년이 돼 있었다. 염색공장과 전화회사의 급사로 취직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구두닦이도 했다. 14세가 된 룰라가 일궈낸 최초의 작은 승리는 콜룸비아 백화점의 일자리였다. 난생 처음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얻은 직장인 파라푸주스 마르치 공장은 미래에 대통령이 될 소년에게 또 한번 도약할 기회를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국가가 기능공을 신속하게 양성하기 위해 만든 전국직업학교(Senai)의 선반기계공 양성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 연구로 명성이 높은 정치학자 마가렛 켁 교수(존스홉킨스 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룰라에게 거대한 ABC(상투 안드레, 상투 베르나르두, 상 카에타누의 약자로 상파울루 근교 공단 지역을 말한다) 공장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의미했다. 그곳에는 노동자 계급의 엘리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쿠비세키 정권이 다양한 산업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964년에 성립된 군정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ABC공단도 그만큼 바빠졌다. 룰라는 어떤 의미에서 군정이 만든 상황 속에서 기회를 찾은 역설의 인물이기도 하다. 켁 교수의 말은 이어진다.

    “사회적 이동이 잦은 시기였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 하층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드디어 룰라는 선반공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직장을 얻는다. 구두닦이 소년이 일군 결코 작지 않은 성과였다. 그는 예쁜 아가씨를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룰라가 엿본 브라질의 꿈은 그리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에겐 시련이 가로놓인 앞날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18세가 된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작업을 하다 왼손이 기계에 끼어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린 손가락은 그에게 닥칠 시련의 세월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형의 투옥으로 세계관이 변하다

    1964년 브라질 군정이 들어서기 전 몇 년간은 혼란의 시기였다. 정치세력은 좌우로 나뉘었고, 시가지는 연일 데모대로 들끓었다. 마리겔라를 위시한 과격화된 학생운동 세력 일부는 도시 게릴라가 되기도 했다. 민족해방연합(ALN)은 미국 대사를 납치하고 기업인을 인질로 잡기도 했다. 브라질 사회는 끓어 넘쳤다. 군부 엘리트들은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탱크를 몰고 시가지로 나왔다. 그들은 질서당의 최후 보루였다. 브라질 국기에 그려져 있는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를 확고하게 믿는 실증주의적 진보 관념을 20세기까지 밀어붙여 온 콩트의 진정한 제자들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대서양 너머 브라질에서 배신을 모르는 충성스런 신도들을 얻었던 것이다.

    군정은 노동자들에겐 악몽의 시대였다. 이 시절 룰라는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 1966년 군정이 확고하게 질서를 잡았을 때, 그는 금속산업 공단지역이던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에 있던 인두스트리아스 빌라리스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절 우연히 만난 마리아 데 루르디스와 연애를 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1969년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이 이제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행운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오리샤의 장난이었을까? 루르디스는 1년 뒤 임신을 했지만 몸이 자주 아파 입원을 했다. 헤파티티스를 앓고 있었지만 공공병원의 어느 의사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룰라는 의사의 실수로 손가락에 이어 부인과 첫아이를 잃게 된다. 룰라에게 닥친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

    이어 간호사와 잠깐 동거하면서 딸 루리안을 낳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노동자 세계에선 빈번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리사 레티시아 다 실바를 만났다. 아들이 하나 딸린 이혼녀인 그녀와 룰라는 마침내 결혼을 하고 아이도 셋을 더 낳았다. 가정은 이제 안정을 찾는 듯했다.

    인두스트리아스 빌라리스 시절 룰라는 형 프레이 쉬쿠의 권유로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의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상베르나르두는 룰라의 제2고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노조와 정치의 세계에 입문했고 후일 브라질 정치를 바꾸는 노동자당과 제2노총인 CUT를 창설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범 노동자 룰라였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동료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았다. 1950~60년대 산업화로 탄생한 이 노동자들은 공산당이나 신좌파 세력들이 치고 받고 싸우는 이념투쟁에 탐닉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였다. 1969년 그는 금속노조의 지도부에 참여했다. 룰라는 타고난 언변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경영주 앞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렇지만 아직 이념이나 신념에 뿌리를 둔 행동가는 아니었다.

    그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온 것은 형인 프레이 쉬쿠가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다. 쉬쿠는 공산당에 연계된 노동운동가였다. 그 이유로 군정은 그를 고문했고 감옥에 넣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군정을 증오하게 되고 차차 정치화했다. 전기는 이 시기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노조를 장악하려는 엄청난 내부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룰라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이룬다. 급진파나 온건파 모두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1975년에 첫 번째 당선에 이어 1978년 두 번째 금속노련 의장에 98%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군정이 주도한 중화학 공업화는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을 낳았지만 후반에 들어서는 점차 균열 조짐을 보였다. 경제관리에 어려움이 가중되자 피게이레두 정부는 스스로 정치 일선에서 퇴각하는 ‘통제된 재민주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런 와중에 1978년 정부가 물가지수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이에 상파울루 지역의 금속노동자들이 주도한 파업이 발생했다. 당시 임금은 물가지수에 연동되어 산출되고 있었기에 노동자들은 지수 조작을 간과할 수 없었다. 파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거리에 나섰다. 룰라는 당연히 파업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그 후 2년 간 공단은 파업으로 술렁댔다. 파업 참여자도 1978년 55만명, 1979년에는 200만~300만명에 달했다. 파업운동의 슬로건도 애초 사안이던 임금인상 투쟁에서 점차 고용안정, 파업권, 노조의 자율성, 국가개입 거부, 민주화 등으로 옮겨가며 정치화했다. 브라질 노동자들은 2년간의 파업운동을 통해 변하고 있었다. 공장의 독재가 정치의 독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그들은 거리에서 체험했다. 정당한 임금을 받기 위한 투쟁이 민주화 투쟁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실감했다. 자연히 ABC공단 노동자들은 군정이 추구하고 있는 간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거나 정부 주도 정당구조 개편 프로그램에 반발하고 나섰다. 드디어 새로운 세대의 ‘신노조 운동’이 탄생한 것이다.

    1980년 4월 룰라는 41일간 상파울루 전역을 마비시킨 대규모 파업을 조직했다. 27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룰라는 빌라 에우클리데스 운동장에 모인 노동자들을 다독거리며 경영진과 힘들게 협상을 하고 있었다. 군정은 파업의 정치적 효과를 두려워했다. 결국 강경 진압에 나선 정부는 그와 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로 했다. 군경의 탄압을 피해 노동자들은 ABC공단의 주교 돈 클라우디우 우미스의 도움으로 성당에서 계속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사목위원회가 파업기금을 모아주었고, 전국에서 답지한 물품을 날라다 주었다. 브라질 교회의 해방신학이 노동운동과 결합된 것이다. 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 경배하는 것이 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을 돕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룰라와 노조 지도부는 31일간 수감됐다. 처음 연행당하던 자동차 속에서 룰라는 혹시 ‘죽음의 부대’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한다. 군사법정은 룰라에게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그 선고는 다행히도 상급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룰라는 노동자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에 의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고 또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룰라는 이 시절 자존심을 가지며 살라고 강조하던 모친을 잃게 된다. 룰라의 모친 ‘도나 린두’(에우리디시의 애칭)는 여느 빈민가정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많은 아이를 키웠다. 아버지에 대한 쓰라린 기억과 달리 어머니는 그에게 작은 영웅이었다. 그런 모친이 룰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세상을 뜬 것이다.

    “어머니는 파출부였어요. 돌아가시던 날이 기억나는군요. 군사독재 정권이 날 감옥에 가두었지요. 어머니는 그것도 모른 채 돌아가셨답니다. 간수가 측은했던지 상급자들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몰래 30분간 장례식장에 다녀올 여유를 주었어요. 그러나 하관 때에는 가지 못했죠. 가족들과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이념 투쟁을 딛고 선 ‘세끼 밥’의 꿈

    같은 해 지식인들과 ABC공단 노동자들의 지지를 한데 묶은 새로운 정당 ‘노동자당(PT)’이 창당됐다. 노동자당 창당은 엘리트 중심의 협상으로 지탱되어온 공화국 정치 100년사에 큰 충격을 던졌다. 신당 창당을 주도한 세력들은 군정과 보수 엘리트 사이의 타협으로 흘러가는 재민주화 계획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렇지만 민주화 세력 대동단결(민주전선론)을 부르짖는 온건야당 세력부터 엘리트 세력 일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움직임을 비난했다. 특히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룰라가 당 대표인 점이 문제가 됐다. 정치학자 켁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모두 급진적인 것으로 보았다. 정치는 여전히 부자들과 식자층 엘리트들의 게임이었던 것이다.”

    신노조운동에 기초한 노동자당의 출현은 브라질 정치사에 몇 가지 새로운 면모를 더했다. 첫째, 엘리트주의와 지역주의의 특성이 매우 강한 전통적 정당들과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동원에 의해 창당되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노동자 계급이나 기초공동체운동(CEB) 같은 기층 민중의 참여와 개입이 중요시됐을 뿐 아니라, ‘활동가의 정당’으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둘째, 당내 민주주의와 토론이 다른 엘리트 정당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당은 다른 정당보다 더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당내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 이데올로기가 다른 분파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이들은 강령을 명확한 언어로 고정시키지 않았다. 이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 규정도 분파들마다 다양하게 해석했다. 잠재적인 당의 지지세력 가운데는 우파 사회민주주의 세력, 가톨릭 교회의 진보세력, 교원노조, 자유전문 직업인, 다양한 좌파 그룹, 중간 소득층 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중요했다. 켁의 말이다.

    “가톨릭 교회가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가톨릭은 어려웠던 권위주의 시절에 활동과 조직의 공간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망과 인권을 옹호하는 공간을 보장해주었다.”

    노동자당은 비교적 수월하게 브라질 정치권 내로 진입했다. 룰라는 타고난 리더십과 언변으로 당의 분열을 막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비판보다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을 믿었다. 그에겐 ‘착취’보다는 ‘정의’란 말이 훨씬 선동적으로 보였다. 룰라는 당이 이념논쟁에 힘을 빼지 않게 활동가들이 움직여주길 원했다. 그래서 노동자당이 대중정당으로 공고해질 수 있었다. 당은 시민사회의 조직들인 제2노총인 노동자단일연합(CUT), 민중노동단체전국연합(Anampos), 카자마르연구소(민중운동 지도자 양성과정), 시민연구소(IC, 공공정책연구소) 등으로부터 수혈을 받았다. 살아 움직이는 사회운동 단체들과의 결합, 이것은 룰라의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평자의 말대로 룰라는 ‘노동자당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룰라가 운집한 지지군중 앞에서 두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노동자당은 노동자들만의 정당은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이래 브라질 사회가 아래로부터 응축시켜온 민중운동의 총화였다. 또 노동자당은 사회학자 로드리게스 마르틴스의 주장대로 “스스로를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 과시하기보다 엄격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지니지 않은 임금소득층의 정당으로 자리잡아 동원의 기초를 확장시킬 수 있었고 브라질 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

    정국의 태풍으로 부상한 룰라는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 1986년에는 헌법제정회의 연방의원에 피선되기도 했다. 1989년 대통령 선거는 그에게 좋은 기회였다. 당시 알라고아스 주지사를 지낸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가 부패 청산을 슬로건으로 기득권층의 대변자로 나섰다. 신문과 TV를 비롯한 여론매체들은 대대적으로 콜로르를 지지하고 나섰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룰라는 결국 언론의 조직적인 공격으로 44%를 얻는 데 그쳐 50%를 간신히 얻은 콜로르에게 패배하고 만다. 부패 청산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콜로르는 결국 1992년 부패 혐의로 탄핵위협을 받고 중도에 사임하고 만다.

    1994년 선거에서는 이타마르 프랑쿠 정부의 재무장관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헤알계획 입안자인 페르난두 엔리키 카르도주와 맞붙었다. 룰라는 선거 초기 몇 달 동안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룰라 팀은 1993~94년 10개월 동안 브라질 전역 9만km를 버스로 누비며 유세를 했다. ‘시민 캐러밴’과 함께 한 선거 캠페인을 통해 그는 나라의 실상을 생생하게 체험했고 브라질이 요구하는 개혁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지만 미디어와 기득권층은 카르도주의 경제적 치적을 홍보하며 그의 인기도를 쉽게 끌어 올렸다. 덕분에 카르도주는 1차 투표에서 쉽게 승리를 낚아챘다.

    비록 대선에서는 실패했지만 노동자당은 점차 주 정부, 시 정부를 장악하며 국정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의회에서도 그 비중을 높여갔다. 그로부터 4년 뒤 다시 한번 두 사람은 대권을 놓고 격돌했지만 이번에도 결선투표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노동자당은 총인구에 거의 3분의 1인 5000만명을 관할하는 지방행정 경험을 쌓게 되었다.

    ‘매번 이륙은 했지만 한번도 착륙하지 못한’ 비행기 룰라는 2002년 선거에서 드디어 착륙에 성공했다. 10월27일 결선투표에서 61%의 지지를 얻어 여당후보 세하를 가볍게 제압한 것이다. 10월6일의 1차 투표에서도 세하 후보가 얻은 지지율의 2배 수준인 46.44%를 획득했다. 마지막까지 세하 후보는 그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비유했고, 집권하면 브라질 경제가 아르헨티나처럼 엉망이 될 것이란 흑색선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그를 승리로 이끌었을까? 무엇보다 ‘붉은 좌파’에서 ‘부드러운 PT’(PT light)로 탈바꿈한 당 노선의 변화가 주효했다. 리우 지구당 창당멤버인 아르투르 오비누는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말부터 당내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강력한 흐름이 생겼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권력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곧 권력 교체를 뜻했다.”

    2001년 12월에 헤시피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룰라를 위시한 중앙파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강령과 유사한 문건을 제출했다. 격론 끝에 중앙파 ‘아르티쿨라시옹’은 차기선거 프로그램을 80% 이상의 지지로 통과시켰다. 당 문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사라졌다. 1989년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계속 세를 잃어온 급진파 세력(‘시아파’라 불린다)은 이제 소수파로 전락했다. 룰라는 ‘사회주의적 미래’란 유토피아를 버리고, ‘연대’와 ‘성장’, ‘약자보호’와 ‘대외개방’과 같은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선거전이 한창이던 지난 9월, 카르도주 정부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맞았다. 카르도주의 8년 임기는 외채 1000억달러 증가와 금융위기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실업률도 지난 20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집권여당에 거부표를 행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금융시장과 기업인들의 반응이었다. 지난 선거에서 재계 영향력이 큰 상파울루 기업인연맹의 한 거물은 이렇게 말했다. “룰라가 당선되면 80만 명의 기업인이 나라를 떠날 것”이라고. 핫머니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도 “룰라는 곧 디폴트”라며 흔들리는 금융시장을 더욱 흔들었다. 달러화는 연초 2.3 헤알에서 시작했으나 결선투표 직전에는 4헤알에 이를 정도로 환투기도 심각했다. 정부의 공채 보유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투기꾼들의 작전이었다.

    룰라는 선거 직전에 부통령 후보로 섬유재벌이자 우익인 자유당 정치인 알렝카르를 과감히 영입했다. 그가 유니버설 처치에 속하는 신교도였기에, 당장 브라질 주교단회의(CNBB)에서 반발했다. 주교단회의는 진보파에서도 영향력이 큰 조직이었다. 당내 비판세력들도 집권을 노려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반발했다. 그렇지만 룰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白?)’론을 내세워 이견들을 점잖게 눌렀다.

    “고양이만 잡으면 되지, 색깔이 무슨 소용이냐”고.

    그는 알렝카르와의 결합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에 비유했고, 나아가 노동자당은 “선반공과 기업인이 함께 나라를 꾸려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구의 10%인 신교도의 표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시장과 재계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던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노동자당이 두다 멘돈사란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를 영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브라질 정가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로 이름이 높은 거물 파울루 말루피를 상파울루 시장에 당선시키며 정치광고업계의 총아가 된 인물이다. 또 노동자당 당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노동자당이 멘돈사를 영입하자 당지도부는 마치 “호나우딩유가 축구 클럽을 바꾸고 욕을 얻어먹는 것처럼”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영입은 대성공이었다. 멘돈사는 룰라의 턱수염을 가지런히 깎게 하고 아르마니 양복을 입게 했다. 이전에는 주로 청바지에 셔츠차림으로 대중연설을 하던 룰라였다. 나아가 노동자당 간부 모두 정장 차림으로 공식석상에 나가게 했다. 티셔츠에 귀고리를 단 자신만 유일한 예외였다. 그가 만든 슬로건 ‘귀여운 룰라, 평화와 사랑’(L! ulinaha, paz e amor)도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이 룰라를 친근한 친구로, 애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노동자당은 슬로건 정치에서도 ‘부르주아’ 정치 마케팅의 진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비교컨대 1980년대 노동자당의 슬로건은 이랬다. “3번을 찍으세요. 나머지는 모두 부르주아랍니다.” 그 얼마나 큰 변화인가.

    노동자당의 변신도, 멘돈사의 미디어 캠페인도 적절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룰라 자신이었다. 그의 카리스마가 없었더라면 선거 캠프의 단합도 기동성도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당은 30만명의 활동가가 있는, 기동력 있는 조직이지만 크게 보면 노조, 가톨릭 교회, 좌파 조직, 이렇게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질적인 조직들이 지난 22년 간 단합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룰라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룰라만이 이 모든 조직 위에 군림할 수 있지요. 그는 당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접착제 구실을 했답니다.”

    주제 그라치아누의 말이다. 좌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히길 원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아니면 사민주의자냐?” 그때마다 룰라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나는 금속노동자일 뿐입니다.”

    그는 1980년에도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란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우리 현실에 적합한 브라질 모델만 원할 뿐이지요. 선거 캠페인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지요.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당에 대한 다년간의 연구 끝에 ‘노동계급 정당이 아닌 중간계급의 정당’이라는 평가를 내린 사회학자 레온시우 마르틴스 로드리게스는 “노동자당보다 더 위대한 룰라”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모든 것의 원인도 룰라였고, 결과도 룰라였다.

    생일 선물로 얻은 빈민 국가

    10월27일은 역사적인 결선 투표일이었다. 내외 언론이나 심지어 IMF와 미국 대사관까지 룰라의 낙승을 점치고 있었기에, 과연 몇 퍼센트의 지지를 얻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그날 아침 룰라는 부인 마리사와 투표를 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친구 몇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TV 뉴스를 보았지만 너무 피곤했다. 정오쯤 두 시간 가량 눈을 붙였다. 멘돈사가 와서 룰라의 정치 역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리곤 누군가가 모든 불을 껐다. 57개의 촛불이 켜졌다. 룰라는 훅 불어서 촛불을 껐다. 그 다음 케이크를 잘랐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곤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그 날은 룰라의 57세 생일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이란 타이틀이 생일 선물로 오고 있었다.

    마리사와 아이들, 그리고 친구들은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읊었다. 그리고 룰라에게 시편 제72편을 낭송해 주었다.

    “하느님이시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제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과연 차기 대통령 룰라에게 어울리는 성경구절이었다.

    생일날 함께한 신부 프레이 베투는 룰라의 친구다.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에서 노동자 사목을 하던 베투는 레오나르두 보프 신부와 더불어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 운동으로 세계적 명성을 날리고 있는 신학자이자 운동가다. 노동자 사목활동 덕분에 룰라는 자연스레 가톨릭 교회와 친해졌다. 그는 때때로 예수와 프란시스코 성인에게 기도를 한다. 식사 전에는 항상 성호를 긋고 기도한 다음 빵을 먹는다. 메이데이에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에서 집전하는 노동자 미사에도 항상 참여한다. 특히 이번 선거 기간에는 제발 언론이 자신과 가족들을 비열하게 공격하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베투는 ‘친구 룰라’란 글에서 밝혔다.

    당선이 확실해진 다음 룰라는 파울리스타 대로에 운집한 환영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끼니를 거르는 브라질 사람은 이제 없어져야 합니다.”

    브라질은 빈민이 5300만명이나 되는 나라다. 일인당 GDP는 최빈층의 8배, 빈곤층의 4배 수준에 달한다. 이 수치는 브라질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부족한 자원이 아니라, 크게 왜곡되어 있는 분배구조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리카르두 파에스 데 바리오스에 의하면 1993년에는 5940만명의 빈민이 있었지만, 카르도주 정부 8년 간 640만명이 줄어 그나마 이 정도 수준이라고 했다. 소득 불평등 외에도 브라질은 지역(남과 북) 간 불평등, 일인당 교육예산, 전염병 빈발, 어린이 유기, 도시 폭력 등에서도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룰라는 이제 비판하는 야당이 아니라 난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해결사 위치에 섰다. 하나 하나의 도전은 쉽지 않은 것들이다.

    불평등과 빈곤은 곧바로 폭력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제 조직폭력의 힘은 리우 데 자네이루 시가지를 마비시키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지난 10월1일 리우 시가지는 텅 비었다. 아이들은 등교하지 않았고, 슈퍼마켓은 문을 열지 않았다. 조직폭력의 위협 때문에 누구도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조직폭력을 소탕하겠다는 노동자당 리우 시장 후보에게 경고를 발했고, 실제로 자신들의 힘을 보여줬던 것이다.

    영화 ‘신의 도시’는 리우의 파벨라(빈민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현한 영화다. 폭력조직에 속한 젊은이들은 마약 판매를 독점하려고 상대방 갱스터들과 전쟁을 벌인다. 냉혹하게 서로 살해하지만 추호의 가책도 없다. 칸을 위시한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메이렐리 감독은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회적 통합, 좋은 교육시설, 그리고 노동 기회 제공이 폭력을 줄이는 길”이라고 말한다.

    메이렐리 감독 말대로 라틴아메리카의 폭력은 경제가 호황에 접어들면 줄어들다가, 침체 사이클에 들어서면 다시 증가한다. 그러니까 고용기회를 빼앗긴 청년들이 최후로 택하는 출구가 폭력 산업인 것이다. 연간 4만명의 경제활동인구가 조기에 죽어나가는 나라가 브라질이다. 20년 전보다 4배나 늘어난 수치다. 40년 이상을 더 일할 수 있는 이들이 20대에 죽는다는 사실은 GDP의 약 10%가 유실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미주개발은행은 분석했다.

    부자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납치 산업이 극성을 부린다. 지난해 30건이던 상파울루 시 발생 유괴사건은 올해 9월까지 251건으로 증가했다. 최근에는 광고업계의 거부 와싱톤 올리베투가 유괴되어 화제가 됐다. 고급주택가에는 24시간 경비가 삼엄하게 펼쳐지고 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부자들이나 고위 경영자들은 헬리콥터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고 도심을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경호원이 붙은 방탄자동차만 탄다. 기업주가 매달 지출하는 일인당 경호 경비는 평균 4000달러 정도. 헬리콥터 한 대 값은 50만달러부터 200만달러에 이르지만 상파울루 상공은 헬리콥터 운항이 가장 빈번한 5대 도시에 속한다. 방탄조끼도, 방어용 무기도 불티나게 팔린다. 덕분에 민간보안업체들은 연 20억달러의 매출액을 올린다.

    “시간이 없다”

    ‘끼니를 거르지 않는 브라질’이란 구호를 단순히 포퓰리즘적 슬로건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브라질에서 불평등과 빈곤은 사회폭력의 악순환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룰라도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상파울루 거리를 가난과 싸우면서 배회했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빈민들이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통화증발을 통한 재정팽창은 해답이 아니다. 룰라는 민중주의를 거부하고 보호주의도 거부하는 개방론자다. 외국자본도 브라질 성장에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브라질의 총외채는 이미 2500억달러나 된다. 지난 9월의 금융위기로 IMF로부터 300억달러의 긴급 융자를 받는 조건으로 GDP의 3.75%에 해당하는 재정부문 1차 잉여를 약속했다. 현재 공적 채무가 GDP의 62%나 되기 때문에 이자만 해도 부담이 크다. 그러니 차기 정부는 긴축기조의 재정 운용으로 버텨내야만 한다.

    내년부터 외채 원리금 상환에도 약 300억 내지 350억달러의 재원이 요구된다. 물론 헤알화의 평가절하로 수출부문의 선전이 예상되지만(현재 추세라면 약 150억달러), 그것도 미국경제의 위축으로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 결국 룰라는 외국 채권단을 만나 단기 채무를 중장기로 이연시키는 재협상 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러야만 한다.

    채무 재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뤄낸다면, 그는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내수산업 확장과 수출산업 강화를 통한 새로운 노사정 사회협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민중의 불만이 차오르기 전에 시장과 국제 채권단을 안정시켜야 한다. 만약 외국자본이 떠나기 시작하면 룰라가 움직일 공간은 더욱 협소해진다.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무토지노동자운동(MST) 같은 급진적 사회단체들도 내년 4월까지 미개간지 점유와 공동체 건설 운동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한 점이다. 룰라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사인이다. 당분간 노동계, 가톨릭 교회, 내수산업계 등이 그를 지지할 것이다.

    룰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세력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금융위기를 해결하고 성장의 잠재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두 가지 제약 속에서 힘겹게 움직여야 한다. 그는 과연 트로피칼풍의 ‘제3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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