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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

“‘아침이슬’은 김민기나 내게 애증의 대상”

30년 한결같은 포크계의 ‘상록수’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아침이슬’은 김민기나 내게 애증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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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은 김민기나 내게 애증의 대상”

1970년대 초반 김민기(왼쪽)와 함께 활동하던 시절의 양희은

-‘아침이슬’을 녹음하던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김민기씨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서 대중들과는 달리 그 곡에 그다지 애정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 바 있습니다. 그 곡에 대한 당시 두 사람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김민기씨는 처음부터 ‘아침이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연습이 끝나고 악보를 버렸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가 처음 부르던 순간 그 노래에 끌리듯 빠져버렸어요. 그가 버린 악보 종이를 주워 연습했고 언젠가 꼭 녹음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작자보다 먼저 ‘아침이슬’을 취입하게 된 거죠. 4개 방송사 PD들이 뜻을 모아 당시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어렵사리 레코딩이 이뤄졌습니다.”

-김민기씨와는 1971년 첫 앨범과 이듬해 앨범, 1978년의 앨범까지 모두 세 차례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씨 노래인생 전체를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나로 묶인 ‘역사적 동체(同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양희은씨는 김민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김민기씨는 양희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민기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의 작업은 제 음악인생의 처음인 동시에 절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감수성은 당시 기준에서 볼 때 너무도 맑았으니까요. 다른 음악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서정성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지요.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곡들이 시대상황 덕분에 이름을 얻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노래가 오래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손을 보면서) 노래도 사람의 손금처럼 생명선이 있다고 전 믿어요. 1년짜리가 있는가 하면, 10년짜리 노래도 있고 50년 가는 노래가 있는 법이죠. 오래 가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저에 대해 ‘희은이는 노래를 못해. 그게 노래냐?’ 하고 말하곤 하죠. 그 사람 맘에 드는 게 세상에 뭐 있나요?”

-사실 양희은씨는 그의 음악을 충실히 전달한 이른바 ‘김민기의 페르소나’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침이슬’이 그런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겠지요. 하나의 인상이 강렬하면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건 저나 김민기씨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민기는 사석에서 좋게는 ‘양희은이란 큰 우산이 있어서 나는 뒤에 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아침이슬이 양희은의 첫 곡이 된 건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발 ‘아침이슬’말고 ‘상록수’를 부르라고 주문하기도 하지요.

저에게도 ‘아침이슬’이 주는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어요. 그건 벌써 그 곡이 맘에 드느냐 안 드느냐를 떠난 문제지요. 한 곡의 노래로 캐릭터가 규정되는 것을 좋아할 음악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나

양희은은 대통령선거로 뜨겁던 1971년 ‘아침이슬’이 수록된 첫 앨범과 함께 홀연히 등장했다.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지배하던, 포크음악도 ‘낭만’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포크 본연의 ‘비판성’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노래가 순식간에 시대와 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 살 여대생의 꾸밈없이 낭랑한 보이스 톤은 여가수를 낮추어보던 일반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리며 시대를 흔들었다.

1974년 김민기에서 이주원으로 음악 파트너를 바꿨지만, 그래도 그의 위풍당당하고 결연함을 잃지 않은 노래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 시절 그가 발표한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한 사람’ 등의 노래가 김민기 시절의 ‘아침이슬’ ‘금관의 예수’ ‘백구’에 비해 로맨틱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강한 소구력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가수와 달리 양희은은 좀처럼 사랑과 이별타령의 늪에 젖어들지 않았다. 설령 가사에 사랑을 표현하더라도 통속적 허위가 아닌 단호함의 요소가 배어 있었다. 맹렬히 활동하던 시기에 사랑노래를 의도적으로 꺼린 것은 ‘도대체 노래로 사랑밖에 할 얘기가 없냐’는 확고한 자의식 때문이었다는 회고다. 달콤한 사랑노래를 불러달라는 주위의 요청이 계속됐지만 그는 대중가요의 일반 틀에 동승하기를 거부했다.

양희은의 음악이 후배가수나 팬들의 생각과 삶에 깊은 자국을 남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로 포크음악에 족쇄가 채워지면서 그의 활동에도 제약이 가해졌지만, ‘고립된 섬’ 같은 그의 존재는 음악대중들의 지원사격을 통해 도리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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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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