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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①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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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역시 송진우 선생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때 우리가 3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쉽게 통일정부가 섰으리라곤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3상회의 자체를 결사반대한 것은 잘못이었어요. 미소공동위원회에 들어가 당당히 우리 입장을 내세우다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몰라도 미리부터 반대한 건 옳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누군가가 좌익이냐 우익이냐, 정통이냐 비정통이냐를 평가하는 데 있어 신탁통치에 반대했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요. 이건 옳지 못해요. 물론 제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박 : 이승만 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 이박사가 종교를 이용했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까. 시간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장면 박사도 그렇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 않나요.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말입니다.

강 : 장면 박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저와 기독교 모임에서 종종 만났어요. 그런데 제가 평가하건대 그분은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인데, 이박사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끌어들이려 했어요. 개신교에서는 이윤영 목사를 끌어넣었어요. 이윤영 목사는 1948년 첫 국회가 열릴 때 개회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간파와 백범을 지지하니까 장면씨를 끌어간 겁니다. 이박사는 장면 박사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시 국회는 제헌국회였습니다. 제헌국회 의장은 이박사 본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박사가 사회를 보다 말고 단하로 내려와서는 장면 박사 곁에 가서 귀에 대고 무슨 얘긴가를 속삭이는 척하는 거예요. 장박사를 키우기 위해 ‘나와 이렇게 하는 사이다’는 걸 보여준 거죠.

하지만 한마디로 장면 박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조병옥 같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분을 해방 후의 여느 정치가들과는 다르게 봅니다. 대단히 선량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이박사, 자유당과 갈라지게 됐죠.



친일에도 級이 있다

박 : 장덕수 선생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기에 화제를 좀 바꿔볼까 싶은데요. 장덕수 선생은 친일 경력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 처리를 놓고서도 많은 비난을 샀습니다. 목사님 저서에는 ‘푸른하늘 은하수’를 쓴 동요작가 윤극영 선생의 친일행각에 대한 얘기도 있더군요. 그런가 하면 김활란 박사에 대해서도 친일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분들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강 : 저는 일제 때 해외에 나가지 않고 이 나라에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상황을 경험했어요. 저 자신 일본 경찰에 잡혀가 있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강목사는 1944년 겨울 일경에 체포되어 해방 직전까지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살려면 이들이 강요하는 걸 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다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며 다시 이를 악물곤 했습니다.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일주일간 단식하다 병보석으로 나왔죠. 그런 제가 보기에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버텨낸 분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이지 않게, 하는 수 없이 소극적으로 친일한 이들은 친일파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해요.

친일한 사람들을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끝내 친일하지 않은, 정말 위대한 이들입니다. 안재홍 선생은 감옥에 아홉 번인가 드나들며 고초를 겪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끝내 달관했어요. 여운형 선생도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살면서 그렇게 한 사람들은 그저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살기 위해서, 혹은 가령 김활란 박사처럼 이화대학을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친일을 한 유형이죠. 이렇게 한 사람들을 지나친 흑백논리로 친일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칭찬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든 집단이든 한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은 다른 시각으로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능동적으로 친일을 한 부류입니다. 예를 들어 윤극영만 해도 그래요. 제가 간도 용정에 있을 때 그가 소위 ‘협화회’를 한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걸 안 하면 잡혀갈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본인이 능동적으로 한 거예요. 제게도 협조해달라고 하면서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했거든요.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에 비행기를 바친 박흥식(화신 사장)도 이러한 부류라고 할 수 있죠. 노덕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총독부 아래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던 책임자였죠.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의 기밀을 들춰내고 잡아가고 죽인 일본의 앞잡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면 안 되죠. 그런데 노덕술은 미군정하에서 다시 정보과장을 했거든요.

하지만 이들과 김활란 같은 사람들을 같게 볼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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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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