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호

서독 사례로 본 ‘핵 없는 핵 보유’ 가능성

한국군 미사일에 美 핵탄두 장착하는 ‘이중열쇠’ 방식 검토해야

  • 홍순명│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전문위원 sergeyevich@gmail.com│

    입력2009-07-07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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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후반, 핵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서독의 시도는 미국이 핵우산 운용에서 동맹국에 어느 선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가늠케 해준다. 워싱턴은 동맹국이 강력히 요구하는 경우에는 사전협의를 통해 핵무기의 표적 선정 등 그 사용계획에 동맹국의 뜻이 반영되도록 이미 허용한 바 있다. 한국이 미국을 향해 이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다.
    서독 사례로 본 ‘핵 없는 핵 보유’ 가능성
    핵무장 국가를 향한 북한의 의지는 하루가 다르게 명확해져가지만, 그에 마주하는 한국의 입지는 지극히 취약하다. 핵에는 핵으로 맞서는 것이 최선이라고는 해도, 엄청난 대외 경제의존도를 가진 한국이 핵개발을 강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게 현실이기 때문.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공약이 거듭 강조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핵우산은 ‘형님이 알아서 잘해줄 테니 걱정 말고 있으라’는 식의 막연한 약속에 가깝다. 그 구체적인 사용방식이나 결정과정, 작전계획 등에 한국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사 속에서 같은 딜레마를 가졌던 나라의 선례를 확인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바로 서독이다. 독일인들은 끊임없는 협상을 통해 막연한 핵우산 공약에 자신들의 견해를 반영해 구체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서독은 세계적인 과학기술과 놀라운 경제성장을 자랑했음에도 패전국이라는 굴레에 묶여 핵개발을 철저히 견제당했다. 언제나 대립관계에 놓여있던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도 동서독의 비핵화에 대해서만큼은 뜻이 일치했다. 특히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연합국들의 견제는 워낙 강해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시절 서독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핵무기의 개발, 제조, 보유, 핵물질 및 원자로 보유, 군사적 핵연구’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후에 프랑스의 비준거부로 EDC가 폐기되고 대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설립되는 와중에 서독은 이 각서의 원인무효를 주장하며 버텨 ‘서독 영토 내에서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는다’는 조건만 남긴다.

    1957년 영국이 미국과 핵무기 조약을 맺고 프랑스도 독자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자, 서독은 미국을 향해 공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게 된다. 미국은 서독을 달래기 위해, NATO 회원국 어느 나라든 원한다면 평시에 핵훈련을 받고 전시에는 미국이 보관하고 있던 핵탄두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이듬해 서독 의회는 “NATO의 틀 안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연방군을 최신 무기로 무장시킬 것”을 결의했다. 여기서 ‘최신 무기’란 물론 핵탄두였다. 이에 따라 미국과 서독은 핵협력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협정은 영국의 선례에 따라 핵무기를 취급할 요원 훈련 및 그와 관련된 기밀정보의 이전을 규정하고 있었다. 핵무기 사용을 허가하는 열쇠는 여전히 미국 손에 있었지만, 어쨌든 서독군도 자신들의 항공기나 미사일을 이용해 전시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국적핵함대(MLF)라는 당근

    하지만 서독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국 영토 내에서 핵무기의 제조’를 피할 우회로를 모색한 끝에, 서독은 막대한 핵개발 비용에 골치를 썩고 있던 숙적 프랑스와 손을 잡고 공동 핵개발에 나선다는 희대의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조건은 서독이 프랑스에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제공하고 완성된 핵무기에 대한 지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비밀조약을 맺은 서독은 1958년부터 다른 항목으로 위장된 예산을 20억마르크나 확보할 정도로 열의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 역시 독일을 경계하던 드골의 집권과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아데나워 총리가 궁리한 다음 단계의 우회로는 미국이 제공하는 핵탄두에 더 큰 통제권을 갖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방식이었다. 우선 NATO를 통해 핵통제권을 획득하고자 애썼다. NATO에 배치된 핵무기의 사용을 미국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하지 말고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결정하자는 식이었다. 이를 통해 서독도 다른 NATO 회원국들과 동등하게 핵무기에 대한 접근권이나 결정권을 갖고자 하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워싱턴이 당시 NATO사령관을 경질할 만큼 강력히 반대하자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미국은 핵실험금지조약(TBT)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통해 독일의 핵개발을 영구히 봉쇄했다. 대신 미국은 서독에 다국적핵함대(MLF)라는 당근을 제시한다. 희망하는 NATO 회원국들이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한 수상함으로 함대를 편성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서독이 40%, 미국이 35~40%,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이 20~25%를 분담하기로 합의했던 것만 봐도 이 계획이 본질적으로 서독의 핵무장 욕구를 해소해주기 위한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눈여겨볼 것은 함대의 구성방식이다. 각국이 자기 지분만큼의 군함을 파견하는 관례와 달리 한 척의 배 안에 여러 나라 해군이 뒤섞여 근무하겠다는 식이었다. 당장의 지휘통제는 쉽지 않겠지만 유사시에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1964년 미독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MLF 창설에 합의하지만, 서독이 이 합의를 단독 발표하면서 미국의 핵통제권이 다수결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식의 무리수를 두다 결국 사업 자체가 좌초하고 말았다.

    이렇듯 자국이 핵을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핵에 대한 직접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서독의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자 서독 정부는 ‘전략협의’로 방향을 바꾼다. NATO 조직을 통해 핵사용 전략에 대한 합의를 사전에 만들어냄으로써 미국의 핵우산 작전계획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에 따라 NATO 산하에는 핵계획그룹(NPG)이 만들어졌고, 서독은 영국과 함께 NPG를 위한 제안서 작업을 주도했다. 그 결과물이 1969년 만들어진 전술핵 사용을 위한 잠정지침과 1986년 완성된 모든 핵사용을 포괄하는 일반정치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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